에바와 술라의 차이점. 에바나 술라나 자기 주관이 강한 여성인데 왜 에바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술라는 배척당할까?
[힐링북클럽]강신주의감정수업4.경쟁심:술라(토니모리슨)
D-29
담영
담영
에바는 에고가 강한 사람(사회적 자아), 술라는 셀프가 강한 사람(내적 자아)
배윤성
(예바)
에바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지만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다. 손녀와 딸, 아들은 그녀의 사랑을 의심한다. 자신의 내적 행복(self), 사회적 자아(ego)중에서 후자를 추구하다 보니 가까운 관계가 깨지게 됨. 의무와 책임의 삻을 살았기에 공허하지 않았을까. 비참한 노후와 자식들의 비극 때문에 불행했을 것이다. 해나가 죽을 때 술라는 지켜보기만 한 것에서 손녀를 미워하게 됨.
담영
술라는 남의 추악한 면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여자가 아닌가
배윤성
술라는 타인이 스스로 정의하게 해 주는 거울같은 존재인데 추한 면을 비춰주는 거울이라 환영받지 못함.
하지만 문제를 인식해야 개선의 여지가 있음. 술라 안에 작가가 들어가 있는 듯.
담영
술라를 마녀로 낙인찍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남자들입니다. 물론 여자들도 술라를 용납할 수 없어요. 자신들의 남편들을 한 번씩 건드리고 팽개치는 그녀의 행동은 그들의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히지요.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는 것은 남자들이에요.
자신의 감정에 따라 남자들을 취하고 버리는 술라의 태도는 수동적인 여성, 능동적인 남성이라는 기존의 성 질서를 교란시키고 남자들의 자존감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악의에 차서 술라에 대해 치명적인 소문을 퍼뜨립니다. 술라가 백인 남자와 잤다는 것이지요. 많이 듣던 소리입니다. 순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순결에 부정적인 소문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돌이킬 수 없지요. 술라에 관한 이런 소문이 결정적인 것이 되는 배경에는 물론 인종 간의 뿌리 깊은 갈등과 차별이 있습니다.
담영
무엇보다 흑백 통합에 대한 흑인들의 혐오와 증오는 백인들 못지않게 절대적이에요. 흑인 가정에 엄연히 혼혈이 존재해도, 흑인 남자들이 백인 여자와 자고 싶어하면서도, 이 소문만큼 술라에 대한 마을의 혐오감과 증오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없어요. 흑인 남성들의 가부장적 잔인성은 백인 남성과 다를 바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남자들은 스스로 제도를 만들면서 동시에 그 제도에 희생되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를 신랄하게 지적해요. 미국의 흑백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걸어 다니는 폭탄인 듯해요.
Andiamo
정여울 작가가 북토크할 때마다 이야기하시는 용어가 ego와 self 개념인데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참고https://naver.me/5dP6i8qN
에바를 보며 마음이 짠했어요. 남편은 떠나고 동네에서 구걸하다시피 도움받아 애들 겨울 먹이다가 막내 플럼의 똥을 변소에서 겨우 파내고 결심을 하죠. 이 마을을 떠나서 살아야겠다. 동네사람에게 맡기고 1년반 뒤 다리 하나를 잃은 채 돌아와 그 맡긴 동네사람에게 후한 보상을 하고 집을 크게 짓고 하숙 비슷한 것을 하며 아이 셋을 길러내죠. 동네에서 명망도 있는 걸로 나와요. 경우가 바른 에바였으니까요.
그런 에바가 전쟁에서 돌아와 폐인이 된 플럼을 자신의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불태워 죽이는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내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랑!으로 플럼을 생을 그렇게 마감해야 했던 에바의 참담한 심정을 술라는 비꼽니다. 에바와 술라의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지요.
첫째 해나(한나)의 딸인 술라. 해나가 사고로 불이 붙었을 때 에바는 위층에서 몸을 던져 딸을 구하려했는데 그때 술라는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에바는 술라가 놀라서가 아니라 구경했다고 말하죠.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했던 첫째 해나는 에바에게왜 우리랑 놀아주지 않았냐 우리를 사랑하냐. 이런 속뒤집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에바는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냐고 답합니다.
저는 에바를 '책임감의 화신'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자신의 그 책임감이 곧 '사랑'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구요. 비극은 자식도 손녀도 그 책임감을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책임지고 희생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남편은 전혀 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그 모진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비굴해지거나 나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에바의 매력이지요. 사회적 자아인 ego는 단단하고 견고합니다.
의무와 책임감으로 "해야 하는 것"만 하고 살아 온 에바에게 제도나 책임(결혼 출산 육아)에 전혀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아가는 술라가 곱게 보일 리 없지요. 피터팬에서 후크선장과 피터팬이 대립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ego와 self의 대립이라고 평하는 정여울 작가의 말이 다시 떠오르는 대목이었어요.
가엾게도 에바는 철저하게 ego만 추구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self는 추구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겉아요. 그것이 차별과 혐오의 시기를 살아온 1세대들의 숙명인 것 같아요. 1세대의 희생 덕에(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자신의 다리를 기차 밑으러 넣었지요.) 2세대인 해나는 해맑게 자라 자유분방하게 남자들과 어울리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에게 자신를 사랑했냐고 묻습니다) 3세대인 술라는 더욱 자유분방하지요. 이런 구성은 미국에 이민 간 중국인 가족의 일대기를 그린 <황금성>과도 유사한 구조를 가집니다. https://www.gmeum.com/meet/764
복수는 나의 힘. 책임지지 않고 자유만 추구한 남편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연료로 삼아 '폭주기관차'처럼 열심히 살아 온 에바 옆에 남편도 자식도 손자도 없는 쓸쓸한 말로가 너무 가엾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정작 가까운 사람은 알아주지 않는데, 9를 주었는데도 1을 안 주었다고 왜 1을 안 주었냐고 그 1이 내겐 9였다는 식으로 말하는 자식을 보며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내 다리를 팔아 플럼과 다른 아이를 키웠고 위기 상황에 내 몸을 던져 해나를 구하려고 한 그 큰 사랑을 주었는데도 자식은 왜 놀아주지 않았냐고 따집니다.
내 목숨이라도 바쳐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두 아이를 잃은 에바에게 술라는 악마처럼 아픈 부분을 후벼팝니다. 그래서 해나의 죽음을 술라가 웃으며 구경했다고 곡해하지요. 남편에게 그러했듯 술라를 미워해야 자신이 살 수 있으니까요.
복수는 나의 힘. 분노와 증오로 자식보다 손녀보다 생을 더 살았지만 과연 에바의 인생이 더 행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내면의 빛과 그림자를 탐구해온 정여울의 마음치유 에세이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평범한 우리가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으로, 여러 매체에 기고하여 사랑받은 글을 추렸고, 따로 아껴두었던 산문 을 골라 함께 실었다. 한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자책하고, 취업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며 불안을 안고 살았고, 유명 작가로 알려진 후에도 마음앓이를 하다가 심리학 공부를 통해 자신을 다독이고 스스로
피터팬최대한 살려냈다. 3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상세한 작가 소개와 작품 해설, 사진과 그림 등 다양한 볼거리는 독자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도와준다. 디즈니 만화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더욱더 큰 인기를 누린 <피터팬>은 매혹적이고 신비한 소년 피터가 웬디의 보모 개인 나나에게 빼앗긴 그림자를 찾아러 왔다가 달링 부부의 세 아이들인 웬디, 마이클, 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늘을 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환성의 섬 네버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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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성
술라가 죽고나서 동네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어떤 점이 왜 변한 걸까요?
담영
술라가 공공의 적이었던 셈인데, 모두의 적이 사라지고 나니 탓할 대상이 사라져버린 거죠. 누군가를 대놓고 미워함으로써 공감대가 형성되고 평화가 유지됐던 건데 그 술라가 사라져버리니... 이제 쓰레받기 역할이 없어진 셈.
담영
지난번에 얘기한 서숙 교수의 술라에서 악의 적법성이란 말이 나와요. 악에도 역할이 있다고...
배윤성
“ 배반,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술라가 죽고 도무 안 도하기가 무섭세, 안절부절 못하고 자꾸만 벌컥 짜증을 내는 습관들이 퍼졌다. 술라의 적의로부터 자기 자식을 지켜왔던 다른 어머니들도 이제는 맞붙을 상대가 없었다. 술라의 조롱이 없어지자 타인에 대한 애정은 축 늘어져 황폐해졌다. 아내들은 남편들을 아껴주지 않았다. 더는 남편들의 자만심을 부추길 필요가 없어 보였다. 마치 계절이 기력을 다한 것 같았다. p.220 ”
『술라』 토니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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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성
이 소설에서 새드랙의 존재를 설정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맨 앞장과 끝장의 그가 나오는 장면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요.
배윤성
예를 들어 p.226에 그는 가고 싶지 않았다. ..식으로 목적어가 바로 바로 나오지 않는 문장들이 많아 헷갈려요. 동네 사람들이 동참해 웃고 춤추고 서로를 부르며 피리 부는 사나이 뒤를 따라가는 이들처럼 섀드랙 뒤에서 무리를 이룹니다. 베일의 틈새를 벌려 불안으로부터, 품위로부터, 인력으로부터, 과거의 긴 세월 동안 그들을 단단히 묶어 놓았던 어른의 고통의 무게로부터 휴식을 즐기도록 도와달라고 외쳤다. 이 분위기를 상상해 보세요. 이해는 어렵지만 작가의 글재주에 감탄하게 되어요
담영
신경림의 농무가 떠오릅니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 내팽개치고 꽹과리를 치고 징을 울리며 신묭을 내는 농민들...
신경림 시보다는 좀 더 따스하고 밝은 느낌이지만요 아름답네요ㅠ 눈물이 핑 도는 처연한 활기의 아름다움.
배윤성
p. 232. 완공되지 않은 터널에서 사람들이 죽는 장면은 상징같은 건가요?
담영
대놓고 상징이다 라고 알리는 장치긴 한데 막상 의미를 읽으려니 마음이 무겁네요.
담영
소설의 종반부에 죽음을 배치했고... 터널을 전부 다 죽여야만 한다, 끔찍하지만 죽음으로써 터널을 진정 죽였다, 같아요.
담영
베일의 틈새를 더 벌려 불안으로부터, 품위로부터, 인력으로부터, 과거의 긴 세월 동안 그들을 단단히 묶어놓았던 어른의 고통의 무게로부터 휴식을 즐기도록 도와달라고 외쳤다.
『술라』 p.228, 토니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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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성
1965(p.233)에서는 세월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넬은 왜 에바가 보고 싶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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