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가진 존재를 만든 후 생명을 앗아가는 것보다 아예 생명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286p,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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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타
이 부분을 보며 채식주의를 주장하는 몇몇 운동가들에 대한 영상을 봤던 기억이 생각났다.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나고 작은 우리안에 갇혀 살아가는 동물들의 인생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이 문장을 보며 생각지 못했던 고민을 하게 됐다. 끝이 정해진 삶이라도, 죽을 운명이라해도 살아가는 것과 태어나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실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내가 정한 답이 이치에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은 0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보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도 의미가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면 한 숫자로 정의될 수가 없다. 앞으로의 생이 처참할 수도 있고 밝을 수도 있는 삶, 적어도 내 존재가치가 있는 삶이 더 나을 것 같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살리기 위해 죽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건강하게 살기 위해 어느정도의 육식을 필요한데 인위적인 걸 금지하는 순간, 야생의 동물들이 위협당하고 이 변화에 생태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
채식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우리는 동물이 더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시설과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왜사랑하면안되요
이 답글에 공감한다. 위의 문장 수집을 보고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또는 알을 낳기 위해 작은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떠오르며 생명을 가진 존재를 만든 후 생명을 앗아가는 것보다 아예 생명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는 말이 옳은 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답글을 읽어보고 생각이 180도 변하게 되었다. 이 답글처럼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은 0이지만 끝이 정해진 삶이라도,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도 살아가는 것은 정말 의미있는 것 같다. 1분 1초 뒤마저 아무도 모르는, 내일 죽을 수도 있지만 지금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각자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또한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고 모두가 다른 경험을 하며 각자의 목표가 생겼다. 삶을 산다는 것, 이 자체가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인 것 같다. 이 답글이 무척 인상깊었고 기억에 남는다.
아몽드
"미국은 인류가 만들어 낸 이 경이로운 발명이 죽음만이 아니라 삶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헌신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328P,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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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몽드
옛날에는 오직 부와 명예만을 위해서 희생이 너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것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른 약자들과 기본적인 삶들은 지켜야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고 나 또한 그런 것들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몽드
살아가면서 지구가 많이 상해간다는 것도, 다른 생명들은 우리가 내다 버린 흔적들로 죽어가고 아파하는데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집이 날라가는 모습만 보고 좌절한다는 것이 뭔가 모순적인것 같았다. 작지만 조금이라도 같이 살아가는 생명들을 배려해주고 공존할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몽드
석탄 화력 발전소가 일으키는 대기오염은 수백만명의 건강을 해치고 수명을 단축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를 지었더라면 아예 발생할 일이 없었던 손실이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341페이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