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원 평론가님이 이야기한 "넷플릭스적인 면모"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것 같은 느낌이 에요. 별로 상관 없는 얘기이긴 한데, <블랙미러> 시즌 6이 나와서 우선 1,2,3화를 봤거든요. 근데 '블랙미러 소설'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형화된 방식으로 전개되는 걸 보면서 정말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래서 빈틈없이 썼구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ㅎㅎ 다시 스미스로 돌아와 보면, 모종의 아쉬움이라 생각하는 것을 독창적이고 개별적인 전략으로도 생각해 보게 하는 것 자체가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문학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근육에 대한 태도를 문학에 대한 비유로 이야기해 주신 부분은 저도 너무 공감!
6인의 평론가들이 선정하는 [이 계절의 소설] #2
D-29
박혜진
박혜진
그리고 저도 주말 활용해서 <취미는 사생활> 일독을 완료했어요. 내레이션이라고 해야 할까, 화자의 목소리가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았고 후반부 '반전'은 진짜 재밌더라고요. 그런데 시점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 읽을 때까지 충분히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전지적 기능을 하는 3인칭 시점이 진행되다가 갑자기 1인칭으로 바뀐 뒤에도 서사적 전략이라는 충분한 힌트 없이 계속 3인칭을 포함한 1인칭 방식(사실 이런 시점은 완전한 착각 속에 있는 1인칭 화자가 아닌 이상 불가능할 것 같은데...)이 계속되는 것 같아요. 은협을 비롯한 타인의 심리와 상황에 대해 전지적일 수 있는 상황과 정황이 있기는 하지만(스포가 될까 더 구체적으로는 말을 못 하겠는..) 그렇다면 그만한 형식이 추가로 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전기화
저도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 시점 문제로 ‘엥?’ 싶어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살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몰입해서 읽다가(저는 초반부, 특히 20-22 페이지 문장들이 좋았거든요. 고단하고 피로한 은협의 귓속으로 주변의 소리들이 침입하는 느낌이 그냥 문장으로 느껴져서 좋았어요.) 24페이지에 ‘나’가 등장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의아했고, 이어서 1장을 다 읽을 즈음에는 음 여기서 멈출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른 독자들 반응이 궁금해서 당시에 검색도 해보았는데, 그런 불만(?)은 찾기 어려워 신기했던 기억이 있네요ㅎㅎ 어쩌면 나의 독법에서나 거슬리는 것이지, 다른 독자들은 크게 의아하지 않은 것일까하는 생각도 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스포 방지를 위해 많은 리뷰들이 자세히 서술하지 않은 까닭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전기화
그러나 여러 사람의 관점을 드나들면서 그들의 인지 방식을 모두 안다는듯 서술하다가도, 다시 시치미 떼며 ‘나’의 위치에서 서술하는 방식이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효과가 있는 것 같거든요. 독자들이 이 소설에서 흥미를 느낀다면 그런 부분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고요. 여하간 저는 읽다보니 어느새 적응을 했더라고요ㅎㅎ ‘이 소설 특유의 서술방식이려니(다른 말로는 그러려니..?)’하고 적응했다는 게 사실 가장 정확할 거 같아요, 그러니 아래에 적는 것은 남겨진 질문에 기대어 사후적으로 저의 독서 경험을 재구성하는 문장들에 가깝겠습니다.
전기화
우선 이 소설의 화자가 남의 마음을 굉장히 잘 파악하는 사람이고, 그것을 조종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부릴 줄도 아는 사람(중연과 대연 일을 수습하려 학교에 간 장면이 그걸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이라는 점은 중요한 특징일 거 같아요. 그러니 화자는 여러 가지 경로로 수합한 정보를 참고하여 정말 있었던 일처럼 치밀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해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딱히 이 소설이 그런 서술방식을 의도한다고 보기도 어렵고, 그러한 장치가 서사내적으로 마련되어 있지도 않다는 점에서 그다지 유효한 가설은 아닐 것 같습니다.
박혜진
저도 이 부분에 무척 동의합니다!! ^^
전기화
다음은 이런 서술방식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정확하게 이 화자의 특징을 드러내주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사실은 추론이나 상상에 불과한 것을) 마치 사실처럼 서술하는 사람, 자신에게 남겨진 정보 몇 가지를 추론하고 조합하여 마치 당사자가 정말 느낀 것인 양, 어떠한 매개적 서술도 거치지 않고 - 매끈하게 ‘신처럼’ - 서술하는 사람. 그러나 화자는 신이 아니니, 신인 양 서술하는 것에서부터 어쩌면 이 화자는 (뒤의 반전에 이르지 않더라도) 이미 처음부터 그 믿을 수 없음을 감히(?) 숨기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이렇게 다른 인물들에 관한 서술이 ‘나’의 관점에서 상상한 것이라고 본다면(다른 말로는, 독자가 이 소설의 서술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사실 이 텍스트 전체의 서술이 흔들리게 되는데요. 한발 더 나아가 이야기 해본다면, 이렇게 이상한 서술이 이루어지는데도 이러한 서술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의심하지 않나요, 라고 아련하게(?) 되묻는거 같기도 하고요. (“사기는 걸리면 친 사람 잘못 안 걸리면 당한 사람 잘못이었다”....)
전기화
마지막으로는 (일단 스포 위험 알람을 울립니다..) 소설 마지막 장면(202-203페이지)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확률’이라는 단어를 자주 생각했는데요, 마지막 장면에서는 우주가 갈라져 나가는 것에 관한 서술이 이루어지는데... 말하자면 이 소설은 ‘나’가 죽지 않은 우주에서 서술하는 이야기, 라고 읽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양자역학과 평행우주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도 같지만 잘 모르는 고로 여기까지…)
소유정
이 해석도 재미있네요 *.* 전능한 서술 방식도 그렇게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고요...
범한소
잠깐 현생에 정신이 팔려 책을 못 읽고 있는 사이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진전이 되었군요! 혼자 읽을 때는 의뭉스럽게 남아있던 궁금증들이 선생님들이 나눠주신 이야기 덕분에 조금 해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ㅎㅎ
저는 일단 <나의 친구,스미스>를 먼저 읽었는데요.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들었던 느낌은 헬스 블로그의 포스트를 읽는 것 같단 거였어요. 왜 블로그 글처럼 읽힐까? 라고 하면, 일단 블로그 글은 그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궁금해할 것 같은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해주는 데 그 목적이 있잖아요. <나의 친구, 스미스>도 이를테면 <헬스장 처음 가보는 초보들 필독해야 할 기구 이용법>, <나의 첫 보디빌딩 대회 도전기> 같은 제목을 달고있는 포스트 같았달까요. 그리고 보통 그런 포스트들의 특징은 매우 구체적인 정보에 더해 작성자의 적절한 감상과 비평이 중간중간 섞여 있는데, <나의 친구, 스미스> 역시 그런 맥락에서 비슷하게 읽혔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책의 재미와는 별개로 제가 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바를 <나의 친구, 스미스>에서 찾기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범한소
그런데 박혜진쌤 말씀처럼 이게 “소설 전체의 문체이면서 나아가서는 소설의 소재와 주제 모두에 부합하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면, 블로그 포스트처럼 읽히는 게 결코 단점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오히려 이런 문체가 이런 주제에 더 어울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해요. 보원쌤의 “가벼운 소설에는 가벼운 소설에 투여될 수 있는, 그것에 적합한 진정성”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고요.
범한소
그렇다면 만약 이 소설이 같은 소재를 가지고 다른 문체, 다른 방식으로 쓰인다면 어떻게 쓰일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데, 저는 권여름 작가의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란 소설이 떠오르더라고요. 단식원을 배경으로 어떻게든 살을 빼고 싶어하는 절박한 심정의 사람들과, 그들을 성공적 다이어트로 이끄는 코치들이 등장하는데요. 이 단식원이 건강 유튜브 채널과 협업해서 기획 중이던 ‘Y의 마지막 다이어트’라는 영상에 등장할 예정이었던 주인공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벌어지는 얘기예요. ‘몸’에 대한 솔직한 욕망과 고민들이 교차하면서 뭔가 씁쓸한 맛을 남기는 작품인데요. 여기에 실종된 인물을 찾아가는 여정이 약간 미스터리-추리 소설처럼 펼쳐지면서 ‘소설적 재미’를 충족시켜주기도 했어요.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중에서 이토록 서늘한 절정을 본 적이 없다. 신선한 감수성과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심사위원 전원의 추천을 받은 권여름의 첫 장편소설!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의 첫 대상 수상작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가 출간되었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는 유리 단식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살을 빼야 하는 절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요즘 시대 ‘몸’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시의성 있는 주제로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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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정
최근 권여름 작가님의 <삽목>을 읽고 다른 소설을 궁금해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이 책이 <나의 친구, 스미스>와 연결되네요! 소범 기자님 말씀을 들으니 더 읽고 싶어졌어요. 장바구니에 담아 봅니다.
범한소
권여름 작가님은 “언제나 몸에서 자유롭고 싶었지만 나는 늘 실패했다. ‘과연 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왜 이렇게도 힘들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확실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남는 무엇’, 어떤 ‘교훈’을 찾고자 하는 것도 독자로서의 강박이 아닌가 싶고, 오히려 <나의 친구, 스미스>는 이 교훈에 대한 강박을 떨치는 데 목적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한데, 또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게, 어쨌든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 역시 어떤 자기만의 교훈을 발견하기는 하잖아요? 저는 그래서 오히려 뒷부분 주인공의 각성이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소유정
제가 독서를 마친 사이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쭉- 읽어 오면서 많이 고개를 끄덕였네요. 저도 소범 기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보디빌딩 대회 도전기> 포스트를 연달아 다섯 편 정도 읽은 느낌이었어요. 저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작은 성장 스토리를 좋아하는 편인데요. (물론 이 책의 U노는 제 살을 깎아..근육을 조각한 몸일지라 작은 성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래서인지 가끔 그런 포스트 읽는 걸 좋아하거든요. 운전면허 취득 기록이랄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취득 후기랄지... 다수의 사람들이 도전하는 목표들에서 공감대나 차이를 발견하는 게 재밌어요. 그리고 사실 그런 글들은 본격적인 키워드를 넣지 않아도 자주 걸려 나오는지라 저도 모르게 읽고 있을 때도 있고요. 이 책도 그랬던 것 같아요. 쌤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빠른 장면 전환과 가벼운 문체 같은 것들에 처음에는 저도 당황스러웠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게 아니면 뭐가 최선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일단 소설 속의 U노는 첫 보디빌딩 대회 출전이고, 이전까지의 운동이 취미였다면 '본격적'이 되어버렸고, 몸 만들기와 별개로 이전에는 신경쓰지 않았던 꾸밈노동을 대회 출전을 위해 하게 되는데요. 이것들이 다 바벨의 무게만큼 U노를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것이었다고 할 때, 이 소설에 속도감마저 없었더라면 읽는 이도 그만큼 무거웠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이 함의하고 있는 시의적인 문제들과는 별개로요.
소유정
그래서 독자가 벤치프레스 밑에서 영 낑낑대지 않게 문체가 무게를 덜어주는 느낌이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는데요. 이럴 줄은 알았지만(?) 마무리가 좀 아쉬움이 남았어요ㅋㅋ S코와의 재회, 그리고 우린 둘다 멋져-☆ 하는 마지막 대사에서 '맞다, 이거 일본소설이었지..'하고 어떤 전형성을 발견해버렸어요. 저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U노에게 있어 가장 큰 역경이 바로 '웃음'이었다는 거였어요. 스테이트먼트 귀걸이, 왁싱, 반짝거리는 비키니, 하이힐, 태닝, 다카라즈카 수준의 메이크업 같은 것들은 해본 적이 없지만 일단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근데 심사 대상이 아님에도 웃어야 한다는 게, 그것이 U노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이.. 좀 좋았어요. T이와의 대화에서 "그런 건 그러니까, 근육이랑은 상관없잖아요?"하고 마침내, 실토해버리는 것도 후련했고요. 이 장면이 저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네요.
강보원
그리고 저도 <나의 친구, 스미스>에서 결말이 조금 아쉬웠던 것 같아요... 일본 소설의 전형성이라는 것도 읽으면서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듣고 보니 그랬구나 싶네요 ㅎㅎ 지금 댓글을 달면서 든 생각인데, 결국 대회를 준비하는 소설이고 대회가 클라이막스에 들어가는 이상 소설의 전개 방향은 이미 매우 한정되어 있잖아요. 잘 되든가, 안 되든가, 뭐 소설의 방향처럼 포기를 하든가... 몇 개 더 있겠지만 이 정도겠죠? 대회장을 박차고 나오는 장면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저는 여기서 어떤... 한국 영화적인...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었고... 아무튼 그래서 결국은 좀, 이 대회라는 것 자체가 마지막에는 비중이 좀 적어지는 식으로 소설이 구성되었어야 더 맞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결국 <나의 친구, 스미스>의 결론은 대회가 아닌 자기 자신만의 운동이 더 중요하다, 인데 소설은 반대로 대회에 모든 하중이 걸려 있게끔 구조화 되어 있어서요...
박혜진
아마 유정 평론가님이 이야기한 이 지점 때문에, 수상작이 아니라 후보작에 그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 부분이 우리가 소설에 기대하는 보편적 깊이가 작동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웃음과 관련해서는 저도 정확히 같은 이유로 좋았어요 ㅎㅎ
소유정
<취미는 사생활>는 역시나 시점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올 줄 알았어요*ㅇ*... 저도 3인칭->1인칭으로 변하는 부분에서 잠시 브레이크가 걸렸다가 그때부터 쭉 '이 사람 뭐지?'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을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가가 의도한 건가? 싶기도 했고요. 그렇다고 해도 이 급격한 시점 변화를 완전히 이해하기에 충분히 설득이 되지는 않지만요. 어쨌거나 저는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했다가,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에 대한 의심 때문에 중간 이후부터는 거의 잊고 말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좀 압도된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아무 목적 없이 자기 돈과 시간과 노동력을 다 써가며 우호적일 수 있어?' 하며 잔뜩 의심했는데, 이상하게 은협은 '나'에 대한 별다른 의심이 없더라고요? 저는 이게 가장 의문이었는데...생각해보니 은협은 누구를 의심할 조금의 여유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네 아이와 보일 씨만 챙기기에도 바쁘니까. 은협이 누군가를 의심할 여유도 없어서 그냥 '나'를 믿어 버린 거라면,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나'에 대한 의심을 조금이라도 지울 수 있게끔 한 게 이 서술 방식이 아닐까 싶었어요. 기화 평론가의 말씀처럼 "여러 사람의 관점을 드나들면서 그들의 인지 방식을 모두 안다는듯 서술하다가도, 다시 시치미 떼며 ‘나’의 위치에서 서술하는 방식이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효과"가 독자의 여유를 뺏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전능한 것처럼, 또 '나'의 내밀한 구석을 보여줄 듯 말 듯하며 독자가 지금의 '나' 말고는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만드려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만일 정말로 의도된 거라고 한다면 완전 성공이었어! 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유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유정
무튼 저는 화자의 언변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어쩐지 5장에서부터는 약간 푸슈슈-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결말에 대해서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좀 궁금하고요! 소설의 완성도나 개인적인 만족도를 평가하는 데 있어 결말도 중요한 요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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