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리다> 혼자 읽기

D-29
얼마 전 신형철 작가님의 고전수업을 듣고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대해 아는 거라곤 <위대한 개츠비>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다였는데, 집필한 작품이 정말 많은 작가였습니다.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이 책에 유독 눈길이 갔던 건 그의 자전적 에세이라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 자체는 짧고, 나머지는 여섯 편의 단편으로 엮어져 있지만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서 읽어보려 합니다. 혼자 읽는 1인 모임이고, 천천히 읽으면서 인상 깊은 구절들을 올려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자존감의 바탕이 되는 '나'라는 존재는 이제 더이상 없습니다. 그저 노동에 필요한 무한한 역량만이 있을 것 같지 않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지만, 막상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큰 집에 혼자 남겨진 작은 소년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무너져 내리다 p. 21, 스콧 피츠제럴드
물론 모든 삶은 무너져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외부로부터 갑작스럽게 날아온 펀치는 크고 강한 충격을 남기기 때문에 당신에게 오래 기억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게 그 충격 탓인 듯해서 약해질 때마다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지만, 그 효과가 단번에 나타나지는 않지요. 내부로부터 오는 충격은 또 다른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감각하게 있다가 손 써보지도 못하고 당하는 경우입니다. 결코 다시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겠구나 하는 깨달음만 종국에 얻는다고 할까요. 첫 번째 종류의 충격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듯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슬며시 찾아왔다가 갑자기 번뜩 깨닫게 되는 거죠.
무너져 내리다 p. 22, 스콧 피츠제럴드
하지만 나는 볼썽사나운 짓을 할 때조차 자기혐오에 사로잡힐 뿐 그보다 더 나쁜 경지로 내려가본 적은 없습니다. 좌절이 반드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좌절은 그 자체의 고유한 병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관절염과 뻣뻣한 관절이 서로 다른 것처럼 좌절은 고통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무너져 내리다 p.38, 스콧 피츠제럴드
그 정적 속에는 모든 의무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내가 지닌 모든 가치관의 하락이 담겨 있었습니다. 질서에 대한 열렬한 믿음, 선한 동기나 결과, 추측과 예언에 대한 경시, 장인 정신이 어느 세계에서나 존재하리라는 느낌, 그런 생각들이 하나씩 사라져갔습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하고 유연한 매개체라 확신했던 소설이 기계적인 집단 예술에 복속되어가는 것을 보았지요.
무너져 내리다 p. 39, 스콧 피츠제럴드
그러나 사무치는 모욕감은 어쩔 수 없습니다. 글의 세계가 번쩍거리고 구역질나는 다른 세계에 굴복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 모욕감은 거의 집착에 가까워집니다.
무너져 내리다 p.39, 스콧 피츠제럴드
지금까지 어떻게 남달리 낙천적인 젊은이가 모든 가치관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무너져 내렸음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젊은이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어진 고독한 시간과 불가피하게 계속되는 일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되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헨리의 저 영웅적인 자세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내 골치 아픈 정신 상태를 감안하면 숙이거나 말거나 할 특별한 머리 같은 건 남아있지도 않았으니까요. 한때 내게 심장이 있었다는 사실, 그것만이 내가 확신하는 전부였습니다.
무너져 내리다 p.43, 스콧 피츠제럴드
그래서 도대체 뭘 말하자는 거냐고요? 내가 생각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지각 있는 성인은 본래 어느 정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인이라면 본질적으로 갖는 더 나아지려는 욕망, 그것을 글로 밥 벌어먹는 사람들은 '끈임없는 노력'이라고 하지요. 그 노력은 그저 우리의 젊음과 희망이 끝나는 종국에 가서 불행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예전에 나는 종종 행복감에 도치된 나머지 그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지 못했습니다. 고작 적막한 길거리를 걸으며 그 행복의 파편들을 책 속에 녹아내려 했을 뿐입니다.
무너져 내리다 p.50, 스콧 피츠제럴드
이 젊은 부부는 그들 스스로를 머리와 어깨라는 별칭으로 부르는데, 의심할바 없이 타복스 부인이 문학적, 정신적 자질을 담당하고, 유연하고 날렵한 그녀 남편의 어깨가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무너져 내리다 p.105, 스콧 피츠제럴드
응... 왜냐하면 너와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 너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친구야. 하지만 이곳에 묶여 있으면 난 불안해져. 뭐랄까... 나 자신을 허비하고 있는 느낌이야. 내겐 두 가지 모습이 있어. 네가 사랑하는 나른한 옛 모습과 에너지가 넘쳐서... 무모한 것을 하고 싶어하는 그런 모습. 그건 어딘가 다른 곳에서는 유용할 지도 모를 나의 일부분이겠지. 내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때도 유지될 부분.
무너져 내리다 p.115, 스콧 피츠제럴드
자신이 무엇을 위해 결혼하는지 아는 아가씨를 만나니 반갑군요. 열에 아홉은 결혼을 영화 속 멋진 석양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하거든요.
무너져 내리다 p.136, 스콧 피츠제럴드
사촌이었지만 그들은 친하지 않았다. 사실 마저리에게는 절친한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녀는 여자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버니스는 부모님이 주선한 이번 방문을 통해 마저리와 비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깔깔거리거나 눈물을 흘리기를 기대했다. 그것이 모든 여자들의 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저리는 그런 관점에 냉담했다. 버니스는 마저리와의 대화가 남자들과의 대화만큼이나 똑같이 어려웠다. 마저리는 결코 깔깔거리거나 겁을 먹지 않았고, 당황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사실 마저리에게는, 버니스가 여성 특유의 마땅하고 은총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자질이 거의 없었다.
무너져 내리다 p.167, 스콧 피츠제럴드
버니스는 인기 없는 현재 상황에 희미한 고통을 느꼈다. 마저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저녁 내내 한 남자와만 춤을 추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향인 오클레어에서도 그녀보다 지위와 미모가 떨어지는 다른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여자들에게 뭔가 부도덕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설사 걱정한다 해도 그녀의 엄마는 다른 여자들이 스스로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으며 남자들은 사실 버니스 같은 여자를 존중한다며 그녀를 안심시켰을 것이다.
무너져 내리다 p.168, 스콧 피츠제럴드
글쎄요, 어떤 여자가 그런 시시껄렁한 방문객을 영원히 도와줄 수 있겠어요. 요즘에는 모든 여자가 스스로 알아서 헤쳐 나가요. 난 심지어 옷 입는 거랑 다른 것들에 대해 암시를 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그 애는 화가 났는지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거예요. 걔는 자기가 인기가 별로 없다는 것 정도는 알 만큼 분별력이 있어요. 하지만 분명 자신은 대단히 고결한데 나는 너무 경박하고 변덕스러워서 끝이 나쁠 거라고 생각하고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걸요.
무너져 내리다 p.170, 스콧 피츠제럴드
갑자기 그녀가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고 어떤 기운이 두 눈에 번쩍 스쳐 지나갔다. 인물을 읽는데 노련한 독자라면 그것이 이발소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스치며 나타났던 표정과 어렴풋이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것이다. 그것은 어쩐지 조금 발전된 표정이라고 할까, 버니스에게 완전히 새로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연한 결과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무너져 내리다 p.205, 스콧 피츠제럴드
문은 닫혔고 해는 저물었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지금껏 버텨낸 강철 같은 음울한 아름다움만이 남았다. 그가 품었을 슬픔마저도 환상의 세계, 젊음의 세계, 풍요로운 삶의 세계 속에 남겨지게 되었다. 거기가 바로 그의 겨울 꿈들이 활짝 피어났던 곳이었다.
무너져 내리다 p.249,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문득 '소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허공에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소멸. 있음에서 없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 짧은 밤 시간 동안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는 모든 행동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이며, 만취로 점점 더 느려지는 행동에 대한 대가는 또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무너져 내리다 p. 261, 스콧 피츠제럴드
그러나 현재가 중요한 법. 현재 해야 할 일들과 사랑해야 할 사람이 먼저였다. 물론 지나친 사랑은 금물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혹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상처를 줄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는 결혼상대에게 똑같은 맹목적인 애정을 요구하게 되고, 만약 거기에 실패하면 사랑과 삶에 큰 상처를 안고 돌아설 것이다.
무너져 내리다 p. 280, 스콧 피츠제럴드
음... 사람들의 뒷머리라고 할까요. 머리가 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사람들의 목을 보고 싶어요.
무너져 내리다 p.298, 스콧 피츠제럴드
쿠: 그런데 어째서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복잡하고 산만하게 자기 표현을 했을까요? 정: 절망을 대놓고 표현한다는 건 어려운 법이니까요. 게다가 자아와 책임감이 강한 사람에게 더욱 힘든 일이겠지요.
무너져 내리다 p. 306, 스콧 피츠제럴드
작가로서의 정서적인 좌절이라고 생각해요. 피츠제럴드는 영문학에서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서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누군가 한물간 작가라거나 이제는 끝난 작가라고 비판하지 않았을까 싶고, 그런 비판을 이겨내기에는 피츠제럴드의 자아가 너무 쇠약해져 있었던 거지요.
무너져 내리다 p. 308, 스콧 피츠제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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