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는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원천인 불을 인간에게 줘버린 프로메테우스를 참혹하게 벌하게 됩니다.
이런 프로메테우스만큼이나 소중한 인물들이 바로 코러스라고 합니다. 비록 당장은 그처럼 될 수는 없지만 어깨를 뒤에서 가만히 쓸어 주는 그런 코러스가 되는거죠.
어떤일에 앞장을 서야만 정의는 아니며 뒤에서 묵묵히 따라가는 코러스도 있다는 걸 잊지말았으면..
sorry
아직 스스로 픽해서 읽기를 주저하고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대한 정여울 작가의 표현들에 웃음지어지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언젠가는 {조용한 시골에서 살아볼까?}라고 생각하는 저에게 던지는 뼈때리는 소리같기도..^^;;
정여울 작가님이 소로가 월든에서 우리에게 하고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이제 제발 칭얼거림은 뚝 그치고 용감하게 삶에 맞서라!아니면 모두 끝장이다!]
sorry
절대 한적하고 평화롭고 살기좋은(?) 시골 전원생활의 꿈은 그냥 꿈인걸로..ㅎ
sorry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6년동안 인두세를 내지 않아 수감된 적이 있다고 한다.
자발적인게 아닌 어떤 조직의 구성원으로만 간주되는 걸 원하지 않았으며 인간다운 삶이 우선 되어지기를 원해서였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부당함도 감수하며 그냥 당장 불편하지 않아 한쪽 눈을 감고 살아갈때가 있다.
{소수가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면 다수는 당해내지 못한다고..p91}
세상의 작은 소리들에도 관심을 갖는것 역시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sorry
확산적 사고..다양한 분야로 상상력을 확장하는 사고는 성인이 되면서 퇴화된다고 한다.
수렴적 사고..자신의 사고와 행동에 제약을 두며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원래 자신의 지식 패턴으로 외부정보를 환원시켜버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의식을 부지런히 부추겨야 한다고 합니다. 무의식은 문제해결의 원천이기 때문.
sorry
우리에겐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 '힐링'을 부르짖으며 한때 너도나도 힐링열풍이 인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힐링은 오히려 아픔에 대한 성급한 알레르기 반응이라는 작가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아픔은 무조건 제거해야하고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조바심으로 너도나도 힐링에 혈안이 되기도..우린 그 아픔이 주는 통증을 가만히 들여다 볼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sorry
<에픽테토스의 지혜>
나에게 달린것(지혜 신념 우정 용기 희망)과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것(국적 부모 인종 외모 평판 재산)을 말하며 우리에게 아직 달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는것 조차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으로 만드는 용기와 공감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들에 너무 목숨걸며 아둥바둥 살아가진 않는가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sorry
현대인들은 '고독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은 아닐까요
『공부할 권리』 p100,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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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y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아는가
외로움은 혼자 있을때 느끼는 슬픔이며
고독은 많은 사람들과도 함께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혼자있음의 자각이다. 혼자있음의 자각을 느끼는 자만이 즐길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요즘은 페이스북이나 sns 등을 통해 아는사람은 많지만 혼자있음의 자각을 느끼는 순간을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고독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는 작가의 표현에 그래, 맞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sorry
{고독한 시간의 가치=그림자와의 만남}
고독 속에서 무의식의 그림자와 당당히 대면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sorry
우리는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가꾸고 꾸미느라 정작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없는 우리 안의 비밀,슬픔,상처,희망을 가꿀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공부할 권리』 P101,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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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y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라스무스 방랑자}에서 자신이 원하던 생활로 살아갈 수 있었던 라스무스는 아늑한 삶은 버리고 방랑자 오스카를 따라 나서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바가 있다.
떠나보면 알수 있을거라는 말에 대해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다.
sorry
길 떠난 방랑자와의 정처 없는 유랑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 고아 소년 라스무스. 우리도 고독한 길 위에 홀로 섬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공부할 권리』 p115,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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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y
떠나보고 내가 알수 있었던 건..
떠난 후에 다시 돌아오는 순간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떠나봐야 현재 나의 위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끼기 위해 가끔씩은 훌쩍 떠남을 추천한다.
창원북카페안온
초창기 여행을 다닐 땐 이 말에 많이 공감했어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늘 그대로 있어주는 것.
요즘은 어디로 떠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듭니다. 일상이 너무 힘들어서인지, 원래 새로운 자극을 계속 받는 것을 선호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돌아갈 곳이 없어도 된다는 것, 이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sorry
작가는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그가 왜 살인을 했는가보다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믿고 싶어 하는' 군중에 무참하게 조리돌림을 당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 '굳이 제대로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돼버린다.
최근 일어난 '정유정 사건'이 떠올랐다.
그녀가 사이코패스니 은둔형 외톨이니 사이코패스 측정 항목에서 몇점이니 하는 것에 더 관심을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그들의 슬픈 고독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창원북카페안온
그래도 뫼르소는 타인과 다르긴 했어도 그것이 문제되지는 않았던 것 같았어요. 뫼르소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방인'취급했을 뿐이죠.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가치관이 같거나 비슷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방인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줬던 작품이었어요.
sorry
때로 우리의 진정한 무기는 타인을 통제하는 '강인함'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나약함'입니다.
『공부할 권리』 p149,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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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y
'공감'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그냥 알고 있는 것과 공감을 한다는 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공감해준다는 것은 정말 큰 위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