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
p.25
은영은 다음 날 오후에 회으실로 여자아이를 불렀다. '조직 생활을 하려면 붙임성이 있어야 한다.'는 충고에 여자아이는 눈이 붉어졌다.
"붙임성이 있다는 게 뭐예요? 사람들이 자꾸 저보고 퉁명스럽다고 하는데 저는 정말 모르겠거든요.
p.41
은영은 여자아이가 원하는 대로 서류를 만들어 주었다. 여자아이가 사무실을 나설 때 은영은 겨우 입을 열었다. " 이게 처음부터 다 계획이 돼 있던 거니?"
여자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말문이 막힌 듯했다. 여자아이는 그렇게 몇 초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자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엘레베이터 앞에 섰다.
p.68
대기발령 일주일째 되는 날 윤수가 출근하지 않았다.
그는 그날 오후에 사직서를 냈다. 윤수는 지연이 아닌 다른 팀원들에게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고 후배들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 앞 지하철역까지 잘 왔는데 역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못 오르겠더래.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막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도저히 안 되겠더래. 그래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참 숨어 있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갔대."
회사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술집에서 지연이 다른 대기발령자들에게 설명했다.
공황장애...가 오셨었나 보네요.
p.228
지민이 다녔던 아나운서 아카데미의 한 강사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자기 철학을 펼쳤다. 그 기회는 어느 하루, 한 찰나에 운명적으로 찾아드는 게 아니라 때로는 한 달, 때로는 1년일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다니는 그 기간 전체를 낭비나 고통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기회로 여겨야 한다는 얘기였다.
지민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중에 어느 하루, 어느 10분이 치명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P.323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성 평등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환경 운동, 동물권 운동, 그런 기획들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거대한 질서가 새로 생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변화를 잘 타고 미끄러지는 것 정도가 아닐까?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P.136
"아직도 그 산속에서는 무고한 이들이 홀로 남겨진 채 죽음과 싸우고 있겠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며, 배고픔과 싸우면서.
왜요? 그들이 회교도라 고난을 받는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아니요.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래선 안 됩니다. 그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약자의 죽음 앞에서 침묵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P.170
결코 인간의 언어로 형상화할 수 없는 고통이 단단한 돌처럼 가슴속에 굳어갔다. 주먹을 폈다. 그의 손에는 흰 단추가 남아 있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막 동이 트는 하늘은 우기가 끝난 아름다운 보랏빛이었다. 범준은 깨달았다. 견딜 수 없는 비참한 순간이 만들어내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그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그 무심한 아름다움에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P.192
"그러니까 학살을 했던 민병대가 난민에 섞여들어, 혹은 난민 전체가 민병대나 민병대를 돕는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평화유지군 탓에 잃었던 전력을 보급받기 위해서 이곳에 전술적으로 후퇴해 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원하는 물자로 반격을, 어쩌면 또 다른 학살을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그동안 실려왔던 총상이나 부상 환자들도,,,."
"예, 그동안 여긴 그들의 야전병원 역할을 한 셈이죠."
P.229-230
어쩌면 자신도 주임 신부와 다를 바 없는 부류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보고를 미룬 것이 아닐까. 때때로 자신에 대한 의심이 스스로의 목을 죄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면 기도대에 머리를 박고 울부짖는 수밖에 없었다. 구원해달라고, 이 욕망의 불을 꺼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느님은 답이 없었다. 밤새 차를 몰고 달려가 자신의 부끄러운 욕망들을 모두 고해성사하고 싶었다.
...
그럼에도 그럴 수 없었다. 단 한마디 말에 이곳의 미래를 송두리째 뿌리 뽑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P.258
민병대 장교의 말이 떠올랐다. 이들의 진짜 모습을 보고도 사랑할 수 있냐는. 그리고 아무도 이 마을로 넘어오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고한 여자아이들을 강간하고 죽였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양 떼들이었다. 여자아이를 강간하고 죽인 뒤 주말에 교회에 찾아와 그들은 무슨 기도를 드렸던 것일까?
그들 역시 박 신부를 보고 마치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P.292
마지막으로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문득 죄책감을 느꼈다. 범준은 지금 그의 병실에 찾아와 그가 죽은 것이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
경련이었다. 아주 희미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가냘픈 경련이었다.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변변한 검사 장비 없는 곳을 전전하며 촉진에 의존했기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건 경련이었다. 경련은 많은 징후를 말해준다. 대체로 나쁜 징후였다. 하지만 이 순간 경련은 이 사내가 뇌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P.304
찰과상과 자상 탓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낯이 익었다. 아니 알아보기 힘들었음에도 범준에겐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었다.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돌이켜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수술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여섯 개의 항원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아이에게 심장을 이식해줄 수 있었던, 그가 구했던 바로 그 사내였다.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장강명 연작소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문예지에서 발표된 1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노동과 경제 문제를 드러내는 소설들은 각각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 총 3부로 구분되어 리얼하면서도 재치 있게 한낮의 노동을 그린다.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 임성순 장편소설선택적 죽음(자살)을 도와주는 에이전트가 있다. 이 회사는 전직 의사였던 범준이 세운 회사이다. 그는 ‘선택적 죽음’을 도와줌으로써 그들의 장기를 적출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이식해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어느 날 그는 15년 전 아프리카 의료봉사 때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박현석 신부를 수술대에서 만나게 된다. 15년 사이,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종교적 사명에 불타 젊음을 신에게 바친 박현석 신부와 의술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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