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死者)와 권력

D-29
1967년 10월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볼리비아 군에 잡혀 총살당한다. 30년 뒤 에르네스토의 유해는 바예그란데의 폐쇄된 공항에서 발굴된다. 추모 받지 못한 그의 유골은 시멘트 반죽과 함께 엉켜 있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체 게바라'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자와 권력』은 죽은 사람을 숭배하는 행위를 역사, 문화 그리고 주로 정치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죽은 사람은 현재의 시간과 유리되어 보이지만,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호출된다. 물론 그 필요는 추모자 자신에게 속한다.
1. 신화의 마력(21p~37p) 발칸 반도에서 기묘한 형태의 추모가 두 차례 일어났다. 1989년 남유럽에서 육백 년 전 사망한 세르비아의 왕, 라자르를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이었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라자르의 유해를 세르비아 전역에 전시하며 다닌다. 일 년 동안 이어진 순례의 행렬은 라자르 왕의 사망지로 알려진 코소보 폴예에서 멈춘다. 패배를 기념하는 삼십 여 미터의 비석 앞에서 세르비야 민족주의자는 말한다. "세르비아의 무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세르비아의 영토다." 밀로셰비치는 이후 코소보 내전을 일으켜 코소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세르비야 이외의 민족에 대한 살육을 지시한다. 민간인 학살, 인종 청소로 악명 높은 코소보 내전은 나토의 개입으로 마무리된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격퇴하고 델로스 연맹의 수장으로 자리한다. 당시 함대 사령관이었던 키몬은 델포이 신탁을 받고 원정길에 나선다. 원정길의 끝에서 그는 전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유골을 발견하고 이를 수습해 아테네에 성지를 세운다. 테세우스의 성지, '테세이온'은 이렇게 세워졌다. 다른 역사적 사료는 이보다 전에 테세이온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아테네에 테세우스 숭배가 만연하였으며, 테세이온은 화려한 의식과 예식의 현장이었음은 확실하다. 테세우스를 통해 아테네는 공동체의 결속을 꾀하고, 아테네를 연맹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했다. 테세우스 숭배는 아테네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1989년 암젤펠트에서 거행된 장대한 행사의 절정을 장식한 것은 한 구의 유골이다. ...... 그는 최근에 죽은 자가 아니다. 그가 죽은 시점은 정확하게 6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바로 크네츠 라자르다
사자와 권력 p.22, 올라프 라더
다시 현대로 돌아오자. 1989년의 뜨거운 여름날,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등장한 사람은 당시 레르비아의 대통령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다. 흥분한 군중의 눈에 헬기에서 내리고 있는 밀로 셰비치는 라자르가 환생한 것처럼 보였다. 대중 앞에 선 밀로셰비치는 채찍을 내려치듯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연설을 했다.
사자와 권력 p.23, 올라프 라더
매우 특이하지 않은가? 보통 다른 민족들은 애써 승리만을 기억하는데 반해, 세르비아 민족은 국가적 파멸을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마치 개선행진이라도 하듯 기세등등하다. ...... 패배로 기억된 전쟁은 세르비아 민족의 단결심을 한껏 고취시켰다. 스스로 선택한 통한이 무서울 정도의 결속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심리학에서도 확인된 바다. ...... 조상의 원수를 갚겠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젖은 오만함은 실제로 일어난 모든 사건을 무력화해버린다. 남은 것은 처절한 복수심과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정치적 계산뿐이다.
사자와 권력 p.24, 올라프 라더
먼저 자신의 이름을 건국 영웅과 결부시키려는 키몬의 의도가 관철되고 있다. 키몬은 시민의 우러름을 받기 위해 테세우스의 후광이 꼭 필요했다. ...... 촌락이든 도시든 모든 아티카의 공동체들이 하나로 결집하는 데 있어 아테네는 정치적 중심지로 떠올라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테네는 이 전설의 영웅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테세우스를 국가의 창설자로 추대한 셈이다. ...... 한때 모든 이오니아인들의 영웅이었던 테세우스는 아티카라는 정치적 공통체의 출현과 함께 아테네를 창설한 왕이 되었다.
사자와 권력 p.32 ~ , 올라프 라더
1. 신화의 마력(21p~37p) 세르비아, 그리스에서 벌어진 시간을 뛰어넘는 추모는 일종의 신화를 담보로 이루어진다. 본 책에서 말하는 신화는 건국설화로 집단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태고사를 의미하며 대부분의 경우 건국 설화를 의미하나 조금 더 작은 집단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정치 세력, 민족 계통, 혹은 경제 동맹(길드 따위의 공동체) 등등 모든 집단은 저마다 신화를 가지고 있다. 올라프 라더는 신화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는 형식을 다음과 같은 세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신화의 서사성이다. 신화는 이야기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아는 신화의 본래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단군 신화는 문헌으로 정착되기 전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구전되었다. 두 번째는 숭배의 격식, 다른 말로는 신성성이다.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구전 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뉘는데 이중 신화는 다른 두 양식과는 다르게 신성성을 포함하고 있다. 신화는 숭배하는 집단에 의해 유지된다. 세 번째는 실제적 형태이다. 신화는 끊임없이 현실의 조형으로 구성된다. 기념비, 조각성, 각종 의식과 상징물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신화를 상기시킨다. 후 시대의 인물이 역사 속 과거의 인물을 차용할 때 일종의 신화화 현상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죽은 사람에게 내려진 평가는 살아있는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또 그 방법이 편리하기도 하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끊임없이 바뀌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행적은 바뀔 수가 없으니.
신화란 한 사회가 그 문화적 뿌리로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이다. ......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인류학』(1958)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신화가 가진 내적인 가치는 어느 특정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 동시에 지속적인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속적 구조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동시에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와 권력 p.26, 올라프 라더
신화는 만들어낸 것을 실제 있었던 것으로, 꾸며낸 것을 생겨난 것으로 바꿔치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우화적인 서술방식으로 인해 별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의식 속에 똬리를 튼다.
사자와 권력 P.27, 올라프 라더
에른스트 카시러는 세 권으로된 『상징형식의 철학에서』한 권을 통채로 신화라는 주제에 할애한다. 거기서 그는 신화에 이중적인 기능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신화는 개인의 의식화를 부추기는 기능을 갖는다. ...... 두 번째로 카시러는 셸링의 견해에 기대어 집단의 형성은 신화에 결부되어왔고, 결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자와 권력 P.27, 올라프 라더
추모가 가지는 정치적 영향력은 한국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례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의 과정을 포함한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범위를 매우 좁게 한정 짓는다면 독립유공자와 6.25 전쟁 장병이 해당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보다 느슨한 개념으로 작용하여 더 넒은 범위의 사람이 추모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국민의례는 그들의 죽음은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민중의례가 존재한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찾아보니, 민중의례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민주열사로 갈음하여 묵념을 진행한다. 여기서 민주열사에 대한 추모가 국민의례에 대한 대항으로 이뤄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2. 유골을 태워라! 무덤, 그 팽팽한 긴장의 현장 (p.39 ~ p 55) 이 챕터에서 올라프 라더는 '인류문화'의 발달에 있어 무덤과 사자숭배(조상숭배)가 중요하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사자 숭배를 통해 "개인의 자아에 대한 각성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데, 이는 근대적 자아보다는 정체성에 조금 더 가까운 개념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이유는 라더가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전적으로 조상과의 관계를 통해 답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죽은 조상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설명되었고 조상의 죽음은 언젠가 다가올 나의 죽음으로 여겨졌다. 무덤과 장례의식은 죽은 사람을 산 사람들과 관계를 갖게 한다. 사자는 죽은 채로 남아있지 않는다. 영정사진은 생전의 한 순간을 포착하여 우리가 그 순간의 모습으로 고인을 기억하게 한다. 숱한 역사 속 매장 의식은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 사용했던 물건을 포함한다. 사자 숭배가 언제 시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모스크바 북부의 순기르라는 지역에서 발견된 유골 옆에는 각종 장신구가 발견되었다.(진주 목걸이, 매머드 상아, 여우 이빨로 만들어진 목걸이 등등) 동시기에 인류는 동굴벽화를 상징과 더불어 그려내기 시작했다. 죽음을 삶의 단편으로 그리려는 시도는 인류 최초의 아이러니가 아니었을까? 이후에 발생한 무덤은 개인을 드러내는 데 치중한다.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름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부터, 조금 더 시각을 자극하는 규모와 비석 등등으로. 이 챕터의 후반부는 무덤이 문화권의 상징으로 제시되는 역사적 예시를 보여준다. 구약시대 요시아 왕은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를 동시에 세우기 위해 아시리아의 종교 사원의 묘실을 베델이라는 성지에서 걷어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하나의 기록물이자 왕족의 권위였고, 아테네의 전쟁영웅 묘역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로마의 귀족에게 허용되는, 그리고 마땅히 지켜져야 되는 화려한 장례의식은 그들의 권위를 세우는 수단이었다.
다음을 수정한다. 두 번째 문단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있던 순간의 모습으로 기억"된다는 설명보다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으로 믿어졌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죽은 자에 대한 추모는 없는 자를 있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그려내길 원한다. ...... 사자는 죽어서도 계속 권리를 행사하는 인격체로 특별한 관계를 지배하면서 산 자들의 식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사자와 권력 p.40, 올라프 라더
인간의 조상숭배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과 맞물려 있다. 즉, 자아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조상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고 조상숭배가 생겨나면서 죽은 선 조의 유해를 의식을 치른 뒤에도 아무 데나 버리지 않고 구덩이나 돌 틈에 묻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인간들은 비로소 무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와 권력 p.41, 올라프 라더
죽은 목숨이 산 목숨에 비해 더 크고 더 견고한 집을 자랑하게 되는 것은 사자, 즉 조상이 생명의 뿌리이자 풍요로움을 주는 바탕이라는 인간의 믿음 때문이다.
사자와 권력 p.42~p.43, 올라프 라더
귀족이라는 사회계층은 조상에 대한 기억 없이는, 잘 정비된 가문의 전통을 강조하는 문화 없이는, 도대체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사자를 추모하면서 가문의 번성을 기원하는 현장인 무덤은 문화의 핵심인 것이다.
사자와 권력 p.53, 올라프 라더
조선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주류 이데올로기는 불교에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로 전환되었다. 제례 의식 역시 이와 같은 흐름을 피할 수 없다. 여성 무당이 주관하던 불교적, 무속적인 제사는 가부장 질서 아래 종법적인 제사로 변한다. 허나 이것은 대체적인 흐름일 뿐 세세하게 살펴볼 때 제례의식이 완전히 유교질서 아래 포섭된 것은 아니다. 불교의 천도재와 기신재, 무속의 위호와 야제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계속 지속되었다. (이 제사를 전부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조상과 왕실에 대한 제사 역시 불교와 무속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특히 왕실의 불교적 제사인 기신재는 연산군대에 승과를 두면서 중시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본래 유교는 사후세계 숭배를 금하였다. 그렇지만 현실 논리를 넘어서는 지점을 유교의 질서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유교는 불교적, 무속적 숭배의 대상인 귀신에 인격을 부여하였다. 귀신이라 하여도 자신의 후손을 어떻게 해치겠냐는 주장은 살아있는 사람의 도덕과 인륜관이 사후에도 남아있다는 논리 아래 제안되었다. (이러한 변환은 역설적으로 유교가 불교와 무속을 밀어내고 주류 이데올로기로 자리한 뒤였기에 가능했다. 승자의 아량이라고 할까.)
3. 무덤, 신성불가침의 영역 (p.57~ p.69) 로마는 무덤을 훼손하는 행위를 법으로 처벌했다. 처벌의 근거는 무덤이 신들의 사유재산이라는 생각에 닿아있다. 무덤이 세워지는 순간 죽음의 신들은 그에 대한 소유권을 가졌고, 무덤을 어떤 방식이든 변형하는 사람은 세무서에 금전적 보상을 해야했다. 결국 무덤은 개인의 관리와 영향보다는 신성과 신을 대변하는 국가 (이는 한국의 분묘관리법과는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법은 분묘 훼손이 개인의 인륜도덕과 종교적 감정을 저해하는 행위로 지정한다.) 시체 훼손은 더 심한 처분을 받았다. 로마 황제의 칙령에 따라 시체 훼손자들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기억의 보금자리가 무덤이라는 비유는 인상적이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제례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이러한 인신공양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화 텍스트에서는 일어나는 일이지만, 실제 사료에서는 암시만 된다고 한다. 다시, 무덤은 기억의 보금자리이다. 기억은 무덤이 가지는 한 가지 기능이다. 숭배와 신비의 기능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무덤의 신비는 산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저편에서 온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과 공유하는 것은 기억밖에 없는데, 기억 하나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위해 사람은 숭배한다. (무덤이 조상 숭배에 대한 연속성을 부여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담이지만 올라프 라더가 인용한 르네 지라르의 이름이 가물거려 검색한 다음에야 기억이 났다. 공부가 부족하다
무덤은 숭배와 의식 그리고 축제를 통해 기억을 언제나 새롭게 다듬는다. 이렇게 다듬어진 기억의 보금자리가 무덤이다. 무덤이 정통성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상의 유용한 도구로 쓰이는 것은 바로 이렇게 기억을 보듬기 때문이다.
사자와 권력 p.61, 올라프 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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