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死者)와 권력

D-29
초기 크리스트교 사회에서 성자의 유골이 갖는 권위는 대단했다. 성자의 뼈는 절도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아무 뼈에다 성자의 이름을 붙여 장사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1215년 제 4차 주교회의에서는 유골 날조의 문제를 안건으로 다루고 해결 방안을 훈령으로 공표했다. 유골의 신성은 비유로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부패하지 않은 수녀의 시신처럼, 각각의 유골은 실제로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겨졌다. (안디옥으로도 알려진)안티오키아의 부왕 콘스탄티누스 갈루스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갈루스는 아폴론 사원 앞에 순교자 성(聖) 바빌라스의 관을 담은 교회를 세웠는데, 놀랍게도 교회가 세워진 이후로 아폴론이 내리던 신탁이 끊겼다고 한다. 갈루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당하자 그의 이복동생 율리아누스가 새로운 부왕 자리에 올랐는데, 기독교 질서를 거부했던 율리아누스는 다시 한번 고대신 신앙을 부흥시키려고 한다. 그렇지만 (기록에 따르면) 신탁이 들리는 일은 없었고, 부왕은 그리스도 신봉자들에게 바빌라스의 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한다. (테오도레트라는 기록자는 아폴론의 신탁이 멈춘 이유는 성자의 신성함 때문이 아닌 단순히 자신의 신전 앞에 시체가 있는 것을 아폴론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성자의 유해 한 구가 기독교와 '이교도', 이전 왕과 새로운 왕이라는 권력 질서의 다툼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성자의 유골은 도시에게, 심지어는 국가에게도 권력의 기반을 제공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이 다섯 도시는 초기 기독교를 이끌었다. 그 중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크리스트교의 수도 후보로 부상했는다. 예상했겠지만 성자의 뼈 덕분이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에 존재하는 사도의 두 묘, 이름만 으로도 위세를 자랑하는 베드로와 바울의 묘를 앞서기 위해 예수의 제자 안드레아의 유골을 아시아에서 가져온다. 그 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순교자의 유골을 경쟁적으로 수집한다. 이 싸움은 1204년 십자군이 목표였던 이슬람 제국은 제쳐두고 경제적인 목적으로 같은 크리스트교인 동로마 제국을 치면서 마무리된다. 불타는 콘스탄티노플은 자신이 보관하던 안드레아의 유골을 로마에게 빼앗긴다. 성자의 유골은 산 사람이 할 수 없는 역할을 대신했다. 정치 질서는 서로 다른 두 사람, 집단, 공동체가 동의하였을 때 생겨난다. 따라서 성자의 유골은 인간을 중재함과 동시에 인간과 신을 매개했다. 맨 처음 수녀의 사체에서 기적을 보았던 것처럼 성자의 유골은 인간을 향한 신의 섭리, 즉 인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증언한다. 성자의 유골은 예수의 몸에 난 구멍과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어떤 한 대집단이 형성되면서 따라붙은 건국설화를 웅변할 수 있는 기초가 유골이다. 날조된 역사일수록 유골은 더욱 소중하다. 꾸며낸 것이라고 하더라도 거듭 강조하고 되풀이하면 현실이 되는 법니다.
사자와 권력 p.210, 올라프 라더
수백 년 이래 인류는 성자의 유골이 막강한 신비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왔고 또 보고 있다. 물론 그렇기를 바라는 믿음이 전부라 할지라도 말이다. ......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 새로운 방향설정이 불가피할 때조차 성자의 유골은 새로운 사회적 흐름에 안정감을 심어주곤 한다.
사자와 권력 p.182, 올라프 라더
유골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요지는 유골이 보이냐의 문제이다. 강한 신앙이 있기에 메카로의 순례가 성립하지 않는다. 메카의 존재가 신앙을 가능하게 한다.
8. 알렉산더 대왕과 에리스의 황금사과 (p.213~p.251) 알렉산더는 시신을 좇았고, 그의 시체 역시 추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추모했던 대상은 영웅 아킬레우스이다. 알렉산더는 아킬레우스와 그의 친우 파트로클로스의 묘를 찾아간 뒤, 고국으로 돌아와 신전의 사제에게 트로이 전쟁에서 사용되었다는 무기와 방패를 받는다. 이는 아킬레우스가 신의 무기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차용한 행위이다. 알렉산더는 스스로가 아킬레우스라는 일종의 선언을 하고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알렉산더의 역사는 대부분 그의 행적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에 기반한다. 시기와 저자에 따라 그의 출신과 행적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알렉산더의 신화는 당대의 정치 상황에 따라 수정 당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집트의 기록이다. 이집트는 특이하게도 알렉산더가 필리포스 2세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은 알렉산더가 이집트 마지막 왕 넥타네보스 2세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이 전설 때문에 알렉산더의 시신을 둘러싼 싸움이 발생한다. 알렉산더의 거대한 제국은 대왕이 죽고 난 다음 위기를 맞게 된다. 직계 후손은 살해 당했고, 친척 역시 정신 장애를 가졌다. 따라서 알렉산더의 측근들이 권력 다툼에 참여할 명분이 존재했다. 페르디카스 장군이 알렉산더의 시신을 확보하면서 승리자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왕의 관이 놓인 홀의 입구를 막고 600여 명의 병사를 동원해서 분위기를 조성했다. 뒤이어 이집트 왕국의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를 향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페르디카스는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와 함께 제국의 섭정을 맞으며 삼두체제를 형성한다. 그렇게 제국은 이전의 통일된 모습을 유지할 것처럼 보였으나 알렉산더의 묘역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는 문제로 사건이 벌어진다. 페르디카스는 바빌론에 두기로 한 무덤을 마케도니아의 전통적인 왕조 묘역으로 옮긴다. 독단적인 그의 시도가 성공만 한다면 페르디카스는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더의 정통성을 업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가 끼어든다. 그는 병사를 데리고 관을 습격한 다음 이집트로 돌아가 버린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파라오로 임명 받지 못하고 섭정으로 있던 자신의 위태한 처지를 개선하고자 일을 꾸몄다. 그는 이후 룩소르라는 고대 신전에 알렉산더 신전을 만들고 이집트를 통치하지도 않았던 알렉산더의 죽은 혈육을 파라오로 모신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동시에 파라오가 되는데 이는 고대 이집트의 장례식이 새로운 파라오의 즉위식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의 시신을 되찾고자 쳐들어온 페르디카스를 무찌른다.
9. 카를 대제의 장구한 숨결 (p253~p291) 유럽 역사에 대한 무지로 요약이 어렵다 카를 대제는 샤를마뉴 대제의 다른 표현이다. 카를 대제는 알렉산더보다 높은 영향력을 지녔다. 알렉산더는 전설에 가깝지만, 카를 대제가 남긴 업적은 유럽인들의 기억과 두 눈에 남아 있었다. 영향력을 원했던 많은 정치가들이 카를 대제를 숭배의 대상에 포함시켰다. 대제는 중세 프랑스와 독일의 시초처럼 여겨졌다. 히틀러 역시 스스로를 대제와 동일시했다. 그는 카를 대제가 아니었다면 삐딱한 독일 민족을 하나로 묶을 자가 없었다고 말했다. 나아가 히틀러는 카를 대제가 온 서양의 수호자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분열된 카를의 제국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죽음 이후에도 많은 호출이 있던 탓일까? 그의 묘 역시 산 사람의 영역으로 여러 번 나오게 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3세은 정치적 목적 때문에 카를 대제의 묘를 열게 된다. 오토 3세는 독일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키려는 목적 아래 대제의 묘를 찾는다. 대제의 묘는 종교적 가치를 부여받고, 대제의 묘를 찾는 과정 역시 종교적 구도의 형상을 띈다. 오토 3세는 카를 대제의 유물을 폴란드 왕과 나눠 연대를 꾀하고, 카를 대제의 ‘이교도 전도자’라는 명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
앞선 챕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자 숭배는 권력의 굴절이 일어나는 순간에 발생했다. 크리스트교의 비대해진 몸집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운 것처럼 잘려나갔다. ‘대(大) 시스마’라는 단어는 크리스트교의 분열을 이야기하는 용어다. 분리, 분열이라는 그리스 말에서 온 ‘대 시스마’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로 나뉘는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왕, 프리드리히 1세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서로 다른 두 명의 사람이 자신이 교황이라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각각 알렉산더 교황과 빅토르 교황이라 불린 두 사람은 제국 내의 반목을 불러온다. 프리드리히는 빅토르의 손을 들었지만 유럽의 다른 실권자들은 알렉산더의 손을 들었다. 싸움은 빅토르 교황이 병사하면서 일단락 되는듯했지만 프리드리히의 자문 역을 맡은 대주교 라이날트 폰 다셀이 부추기는 바람에 거세진다. 프리드리히는 기도 폰 크레마를 교황 파스칼리스 3세로 멋대로 세우고, 제후들은 프리드리히에게 등을 돌린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카를 대제의 관이 열렸다. 프리드리히는 카를 대제의 유골을 관에서 드러내고 성대한 예식을 치렀다. 프리드리히의 호출을 들은 체도 안 하던 제후들은 카를 대제의 예식에는 얼굴을 보여야 했다. 프리드리히는 스스로를 새로운 카를로 포장하며 카를 대제의 초상화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쯤 되면 그림이 그려진다. 사자 숭배는 권력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에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더 매력적이다. 오토 3세와 프리드리히 역시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싶어했고, 나폴레옹과 히틀러 역시 그러했다. 나폴레옹은 교황에게 “당신이 보고 있는 나는 카를 대제요”라고 일갈하며 자신이 쥔 권력을 정당화했고, 히틀러가 카를 대제의 제국을 독일인과 함께 수고하겠다고 말한 것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 이후이다.
10. 프리드리히 2세와 구세주 예수의 묘 (p.293~p.313) 이 챕터에 등장하는 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싶었고 비어있는 묘는 충분한 대답 같았다. 죽음이 사라진 묘에는 다양한 비유가 붙었다. "다윗의 집", "솔로몬의 침상", "지구의 심장" 등등. "교황 알렉산더 3세는 1181년 제후들에게 칙서를 보내면서 순례자로 예수의 무덤을 찾는 자는 모든 죄의 씻김을 받을 것이라 하고 있다." 그러니 신성한 묘가 자리한 예루살렘이야말로 축북받은 도시였다.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에게서 탈환해 기독교도에게 돌려놓겠다는 명분 아래 일어났다. 그리고 이 신성한 전쟁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했다.
1228년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황제와 교황은 권력을 두고 다퉜고, 교황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며 세속 권력을 원하는 교황을 비판했지만 당대 신학자들의 입장은 한 문장이었다. "교황이 진짜 황제다." 이미 파문까지 당한 프리드리히에게 남은 수는 예루살렘이었다.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계로 돌리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이미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었고, 교황이 프리드리히 2세의 퇴위를 결정하는 순간 그는 끝장이었다. (여기서 파문의 두 가지 종류를 알아두어야 한다. 파문에는 대파문과 소파문이 존재했다. 대파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파문이다. 파문을 당한 자는 그 즉시 기독교 세계에서 제명을 당하며 교회와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대파문의 효력은 현세 뿐 아니라 내세까지 영향을 미쳤다. 소파문은 경중이 약한 파문으로 교회 일에 간여하지 못하는 형벌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소파문만 당한 상태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예루살렘을 점령해간다. 근방의 도시를 공략하면서도 이집트의 술탄이자 살라 웃딘의 조카인 알말릭 알카밀과의 협상을 통해 소유권을 양도 받았다. 얻어낼 것은 얻어내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면서 프리드리히는 마침내 예루살렘의 대성전에 오른다. 프리드리히는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성전에서 스스로에게 예루살렘의 왕관을 씌운다. 이 대관식의 축사는 필사되어 각국의 왕과 교황에게 전달되는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교황에게 보내진 필사본은 "최고 왕의 명성과 권위"를 위해 황제가 왕관을 썼다고 하지만 영국의 왕에게는 다음과 같이 보내진다. "아, 주님은 기적의 권능을 행사하사 제후들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왕을 높이 세우셨느니라. ...... 이를 행하신 것은 바로 주님의 손이로다!" 앞서 프리드리히 2세가 소파문을 당한 상태란 것을 명심하면, 이 대관식의 의미심장함을 알 수 있다. 이 대관식은 하나의 예배이며 신성한 예식이었다. 그런데 교황도 추기경도 주교도 아닌 소파문을 당한 황제가 직접 예배를 주관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성전은 다시 교황의 밑으로 들어가려는 목적이 아닌 스스로의 권위를 교황과 무관하게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화가 난 교황은 예루살렘의 주교 게롤드의 성직 수행 정지 처분을 내린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예수에게 선택받은 왕으로, 새로운 다윗으로 등극한다. 이렇게 프리드리히 이전에는 초라한 기념비와 작은 추모만 거행되던 예루살렘이 화려한 성전의 도시가 되었다.
집단이든 혹은 개인이든 정치권력은 그 기초를 다지고, 자신을 관철하며 부단히 강화해나가는 데 있어 상징을 이용한다. 이것이 정치의 논법이다. 그래서 한 사회나 국가의 지도계층 안에서는 상징을 누가 확보하는가를 두고 끝없는 싸움이 벌어진다.
사자와 권력 p.311, 올라프 라더
11. 처벌과 복권, 죄인은 영혼이 사라진 육신이다 (p.315~p.337) 저 위에 쓰기 싫었지만 억지로 써 놓은 책 소개와는 다르게 주로 사자를 숭배하는 사례가 책 전반에 걸쳐 나왔다. 이 챕터는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이 모욕과 처벌의 대상이 된 사례를 이야기한다. 89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주교 복을 입은 교황이 주교 자리에 앉아서 처벌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산 사람이 아닌 시체였다. 죽은 지 9개월이 지난 교황 포르모수스는 무덤에서 파헤쳐져 죄인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의 세 손가락은 꺾이고 몸은 외국인 순례자들이 묻히는 곳에 묻혔다가 티베르 강에 던져지는 형벌에 처한다. 교황이 되기 전 주교로 지켜야 할 교회법을 어겼다는 명목이었다. 그는 부러진 손가락으로 안수할 권한을 박탈 당하고, 이름이 없는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새로운 교황이 포르모수스의 정치적 반대세력에 속했기 때문이 벌어진 일이다. 포르모수스가 교황으로 행한 모든 임명은 취소 당하지만, 왕들만은 예외로 남았다. 새로운 교황 스테파누스 6세가 제후들의 영향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상황은 급변한다. 스테파누스 6세는 실각하고 감옥에서 교살 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다시 포르모수스의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고 미리 강에서 건져둔 포르모수스의 유골을 베드로 대성당의 묘지에 안치한다. 이러한 사건은 사자 숭배의 기능을 역으로 증명한다. 죽은 사람이 제공해주는 정통성, 카리스마, 명분 등등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중요하다. 새롭게 권력을 원하는 사람은 기존에 존재하는 권력이 존경하는 시체에 대해 분노를 터트린다. 이 경우에는 "육신을 능욕함으로 기억을 능멸하려는 게 정확한 목표"가 된다.
비슷한 사례가 반복되기에 가장 흥미로웠던 사례만 적어두고자 한다. 1961년 콩고 총리였던 루뭄바는 콩고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적인 절차에 거쳐 당선된 인물이다. 현재 루뭄바시라고 불리는 곳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그는 벨기에 군에게 납치되어 고문 당하다가 죽는다. 그의 시체는 황산이 담긴 욕조에 빠진다. 루뭄바는 제 1세계에 반기를 든 반제국주의자였다. 경제 자립을 외치면서 콩고의 자원을 원하던 서구 자본가들의 불만을 샀고, 벨기에가 가지고 있던 콩고군 작전권을 돌려 받으려 했다. 벨기에는 이에 불만을 가지고 카탕가에 파견되었던 벨기에 군사자문단에게 루뭄바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12. 현대 무덤의 마력, 에필로그 (p.339~p.383) 죽은 사람에게서 살아있는 권력을 끌어내는 시도는 비합리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마술적 사고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사례도 충분할 것이다. (이 책을 정리하면서 한국의 예를 들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다. 할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정치인의 취임사나 서울과 대구로 나뉘어진 현충현, 국장의 문제 등등. 하지만 정치적인 실마리도 굳이 드러내기는 싫어서 적지 않았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 한국으로 복귀한 정치인이 이전 대통령의 묘역을 들리는 뉴스가 나와서 참 묘했다고만 적어두겠다. 이 장에서는 룩셈부르크와 캐나다의 예시가 등장한다. 두 국가 모두 현대 국가와는 무관한 근대 국가의 인물을 추모한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에게 수모를 당한 룩셈부르크는 1346년 사망한 룩셈부르크의 얀(Jan Luxem-bursky)의 유골을 독일에게서 돌려 받고 대성당에 안치시킨다. 룩셈부르크는 크레시 전투에서 사망한 영웅을 돌려받음으로써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한다. 이 영웅이 한낱 용병대장이었으며 권력 투쟁에 몰두한 야심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캐나다의 경우도 특이하다. 프랑스 계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퀘벡 시는 자신들이 정복 당한 것을 기념한다. 'Le Conquete'라는 말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투 이후 사망한 프랑스 장군 몽칼름을 기리는 말이다. 퀘벡시는 우르술라 수도원의 수녀들이 200년 전 감추어 둔 몽칼름의 유골을 2001년 대중에게 공개한다. 이 행위는 자신들의 패배를 기억하는 행위이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규정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동일감을 고취한다.
아픔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 아픔을 낳게 한 사건으로 정신적 일체감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특히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 때, 그래서 무력감과 원통함으로 가슴을 칠 때.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무엇으로도 떼어낼 수 없는 동지의식을 갖게 된다.
사자와 권력 p.345, 올라프 라더
아픈 과거를 스스로 끄집어내는 것은 아직 상실의 아픔이 남아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그 피해를 낳게 한 선조들이 아픔을 충분히 소화하기 못해 앙금이 남은 것이다.
사자와 권력 p.345, 올라프 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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