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인생책> 이평춘 번역가와 『엔도 슈사쿠 단편선집』 함께 읽기

D-29
당신이 설혹 나를 배신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원망할 마음이 없어졌고, 오히려 당신이 그 옛날 믿고 있던 그 신앙은 자신감이나 재판하는 강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버림 받은 자의 슬픔을 위해서 존재했었다고까지 생각해 봅니다 (p38)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너무 먹먹하고 슬픕니다. 스페인 선교사가 배교를 했다고 해도 그 믿음 밑바닥에는 여전히 예수의 가난한 마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봅니다. 빠르게 성호를 그을 때 누가 볼까 하는 마음과 예수에 대한 배신의 자책감, 그러나 결코 떨어낼 수 없는 믿음과 그런 불쌍한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의 희생이 복합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을테지요. 배교를 했다고 예수를 등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자신이 이전에 정죄했던 죄인들을 이제는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입장으로 뒤바뀐 것이라고 봅니다. 계속 슬프고 먹먹한 이 후유증이 오래 갈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이 책에 실린 <그림자>를 처음 읽었을 때, 슬프거나 안타까운 감정보다는 반가움과 즐거운 감정이 더 컸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엔도 슈사쿠의 소설을 여러 권 읽었는데요. 모든 작품에 작가의 경험이나 생활이 조금씩 투영되어 있긴 했으나 이 소설만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의 실제 생활이나 성격, 사고에 대해서 보다 사실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는 듯해서 반가운 마음이었습니다. 더불어 제가 즐거움을 느낀 이유는, 이전에 읽은 엔도의 여러 소설 속의 모티브가 바로 <그림자>라는 소설 속에 집약되어 들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이었는데요, 그 중 <신들의 아이(황색인)> 또한 '나'가 브로우 신부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또한 <그림자> 14~15쪽에 이따금 외국인 노인이 교회에 찾아와 ‘당신’을 만나는 내용이 있는데, 그는 류머티즘을 앓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걷고 있죠. ‘황색인’의 듀랑 신부가 류머티즘을 앓았던 모습과 겹치는데요. 그렇다면 <그림자> 속 ‘외국인 노인’과 ‘당신’의 관계를 상상하며 쓴 소설이 바로 <황색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더불어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엔도의 소설 <침묵>은 배교한 선교사의 서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엔도가 왜 이렇게 배교한 선교사 이야기를 많이 쓰는지 늘 궁금했는데, <그림자>를 읽으며 이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해서 매우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림자>를 읽으며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12쪽에서 언급하는 ‘소설가가 되고 나서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세 차례나 썼는데,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변형시켜 썼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황색인>, <침묵> 외에도 배교한 선교사 이야기가 또 있을 듯한데 혹시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17쪽에 ‘1년전 어떤 장편소설을 쓰면서 때때로 나는 당신과 만나게 된 그 우연을 생각했습니다’ 라면서 ‘사람들의 발에 밟혀 닳아 움푹 패인 후미에의 그리스도 얼굴’이라는 내용도 나오는데요. 소설 <침묵>이 1966년도 발표작이고, <그림자>가 1968년 발표작이니 집필시기를 감안해 따져보면 여기서 언급한 소설이 <침묵>이 맞을지, 아니면 다른 작품일지도 궁금하네요^^; 글이 너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워낙에 좋아하는 작가이다 보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유미소님의 글 "더불어 제가 즐거움을 느낀 이유는, 이전에 읽은 엔도의 여러 소설 속의 모티브가 바로 <그림자>라는 소설 속에 집약되어 들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내용 감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을 선정하게 된 이유이고 작가 엔도를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시작한지 몇 일만에 글 처음 씁니다. 1. 왜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아직 종교와 자신의 신앙에 대한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아서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신앙은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당신에 대한 경외심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신앙에 대해 생각해야하니까요. 자전적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당신, 그러니까 배교한 신부가 실제 인물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 생활 그 자체나 규율과의 괴리 등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나 전반적인 종교인을 의미하기도 할테구요. 그에 대한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다가, 깊은 강에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2. 당신에 대한 생각의 변화 주인공이 어렸을 때는 엄격한 규율로 다가오던 종교였지만, 막상 떠나니 다시 종교생활이 생각납니다. 신앙과 인간의 나약함과 일상과 사랑에 대한 복잡한 고민이 아버지 옆에서 생활하면서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로 표현됩니다. 그렇지만 그 신부 또한 종국에는 사랑으로 인해 교단을 떠나면서 그 고민이 더 깊어집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신부를 만납니다. 그 신부는 아직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주인공 스스로도 그 고민이 잘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앞서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것 처럼 강인한 규약의 종교관에서, ‘버려진 개의 슬픈 눈’이나 ‘버림 받은 자의 슬픔’에서 나타나듯이 <인간.예수>로의 종교관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는 엔도의 소설 중 <깊은 강>을 이전에 읽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결론을 위주로 생각하게 되네요.
최형주님 올려주신 글 좋은 나눔이 되었습니다.
@최형주 그러고 보니 배교한 신부를 실제 인물이 아닌 신앙 생활에 대한 메타포로 읽어볼 수도 있었네요. 그렇게 대입해 보면 또 새롭고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감상을 이야기 나눠볼 수 있어서 참 좋네요^^
가루이자와에서 버터를 내게 준 당신의 동상 걸린 손,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그림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이상하게 동상 걸린 손으로 몰래 버터를 쥐여 주던 신부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도네요. 당시 시대상도 그려지고요.
내가 배급받은 버터요. 내 것을 주는데 잘못됐나요?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그림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당신>에 대한 여러분이 올리신 글을 보니 <당신>에 대해 거의 파악된 것 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많은 나눔이 되었습니다.
유미소님이 엔도의 작품을 많이 읽으신 만큼 세밀한 부분을 요구하는 질문을 하셨군요. 그럼 질문하신 내용에 관해 적겠습니다.
세 차례의 소설로 추정되는 것은 1.<황색인>의 듀랑신부/ <신의 아이(백색인)신들의 아이(황색인)> 2. <그림자>의 당신 3.<침묵>의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 그러나 <침묵>의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와는 관점이 전혀 다르고, 실패한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연관성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같은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황색인>의 듀랑신부와 <그림자>의 <당신>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황색인>의 경우 전쟁 시기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바다와 독약>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치바'라는 이름의 '나' 또한 기흉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나오는 게 <바다와 독약> 도입부 인물과 겹치기도 하는 등 엔도 문학의 초기작 퍼즐이 전체적으로 맞춰지는 느낌입니다^^
네, 재미있는 발견을 하셨네요. 엔도 소설에는 전쟁을 매개로 하는 소설이 많이 있죠. 실제로 전쟁을 체험한 세대이고, 징집령이 내려졌으나 결핵으로 인하여 연기된 상태로 있다가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유학 시절 결핵이 발병되었으며, 결국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아덴까지> <백색인>을 발표합니다. 이 <백색인>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면서 문단의 자리를 확고히 다지게 되죠. 김해나 작가님이 그믐에서 독자들과 함께 읽으신 <바다와 독약>은 그 뒤의 발표작이고, 말씀하신대로 전쟁상황과 결핵으로 인한 기흉치료를 받고 있는 주인공과 미군포로들의 생체실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과 결핵은 엔도가 체험한 내용이었고 그러한 작가적 체험들이 소설의 소재로 그려진 것 같습니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체험한 것만을 쓴다'는 자세로 글을 썼다고 하는데, 아마도 작가적 상상력에는 작가의 체험이 충분히 반영되고 있고, 왠지 그것이 진실한 글씨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그래서 엔도작품에는 전쟁과 결핵의 문제는 자주 나오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특히 엔도문학은 작가론과 작품론을 완전 분리시키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그래서 하고 있습니다.
제 앞글에서 <김혜나 작가님>을 <김해나 작가님>으로 잘못 입력했군요. 김혜나 소설가 이십니다.
"그리고 17쪽에 ‘1년전 어떤 장편소설을 쓰면서 때때로 나는 당신과 만나게 된 그 우연을 생각했습니다’ 라면서 ‘사람들의 발에 밟혀 닳아 움푹 패인 후미에의 그리스도 얼굴" 은 <침묵>이 맞습니다.
그러면 지금껏 알고 있던 <당신> 과, 지금에 와서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게 된 <당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나로 하여금 네번째 편지를 쓰게한 힘은 무엇일까요?
p.11 나는 그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랬구나!' '역시 그런 거였구나!' 이 감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역시 배교한 것은 아니고 성직자의 직은 내려놓았지만, 현실 속에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예전에 조안 리 씨의 자서전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서강대 학생이자 공부만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던 주인공을 총장인 신부가 직을 버려가며 결국 둘은 사랑을 하고 나는 현실에 절망하기 보다, 지금 내가 여기에서 켤 수 있는 촛불을 켜서 빛을 밝히겠다!며 반대하는 둘의 사랑에 대해 out of sight, out of mind 하지 않고 out of sight, into the mind♡했다던 그 고백이 되게 멋있다고 학창시절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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