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과 데이브> 서수진
1. 언뜻 보면 부드러운 색을 빠르게 칠한 인상주의 그림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세밀하게 완성한 후에 뭉갠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진이 미술을 전공하던 시절 몰두했던 작업과 비슷했다.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뭉개기 전의 그림을 찾아내려 했다. 해가 지는 시간, 바닷가의 집, 커다란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두 명의 사람,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들의 표정을 살피려 유진은 눈을 더 가늘게 떴다. p.21
2.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헤어지자니까 내가 그러자고 한 거잖아. 그만하고 싶다며!” 데이브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로 답답한 건 유진이었다. 답답하고 화가 나고 억울했다. 너무 억울한 나머지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데이브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유진을 안았다. “왜 울어. 울지 마.” 그러니까 데이브의 말은 이랬다. 자신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유진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관계라는 게 한쪽이 끝나면 끝난 게 아니겠냐고. 유진이 그렇다면 자신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데이브의 말을 들으며 유진은 기가 찼지만 더 이상 화낼 기운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혼잣말처럼 한국어로 “존중 두 번 했다간 큰일 나겠네”라고 중얼거린 게 다였다. p.67
3. 데이브가 툭툭 유진을 쳤다. 유진이 돌아보다 데이브는 소파 위 벽에 걸린 캔버스를 가리켰다. 캔버스에는 유진의 전 연인이 뭉개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유진은 그 그림을 오랜 시간에 걸쳐 공들여 그렸고, 완성한 후에 모두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뭉개진 그의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게 ‘본질’이었다. 그 이후로 유진은 같은 작업을 몇 년간 이어 나갔다. 뭉개버릴 그림을 애써 그리는시간과 애써 그린 그림을 다 뭉개버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는 것처럼 계속했다. 그때는 그랬다. p.98
4. “크리스 닮았지?” 데이브는 킥킥댔다. 스케치 속 살인범은 정말로 데이브의 친구 크리스를 닮아 있었다.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친구였다. 바로 지난주에도 데이브와 함께 크리스를 만났으므로 그가 살인범일 리 없지만 유진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크리스한테 보여줘야지.” 데이브가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 유진은 핸드폰을 들어 선고공판을 검색했다. 한국 뉴스에도 보도가 되었다. 기사에는 피해자의 어머니가 법원 앞에서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다. 유진은 기사를 읽다 말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p.160-161
5. 유진은 모나미술관에 가려고 했다. 뒤돌아 앉아있는 팀을 보고,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괴롭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게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괴로운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싸우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혀서 몸의 무엇도 빼앗기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의 침묵을 대답으로 삼아 그에게서 돌아서고 싶었다.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고 미술관을 빠져나와 배를 타고 서서히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p.179-180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임성순
1. “의술이 인술이라고? 개뿔. 의술은 기술이다.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수을 발판 삼아 지금까지 발전한 거야. 알량한 도덕 나부랭이가 의학 발전에 기여한 적은 없어. 한 명을 실수로 죽이면 그렇게 배운 기술로 열 명을 살리면 돼. 그게 의학의 도리지.” p. 56
2. 애초에 의사로서의 삶이 그의 기대와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술로 헌신하는 존경받는 의사라는 소박한 환상은 대학병원에 인턴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산산이 깨졌다. 그곳에선 수가와 특진료로 계산되는 숫자 속의 환자들과 하나의 기능인, 혹은 전문직으로서의 의사만이 존재했다. 물론 어떤 의사애가 꽃피는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보람조차 밀려오는 환자들과 피곤 앞에서 서서히 빛을 바랬고 어느새 감흥 없는 일상으로 변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처음 기대했던 고결함이나 소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이게 맞는 거라고, 애초에 그가 원했던 의사로서의 삶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할 무렵, 한 사내의 목숨을 앗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까지 저지른 것이다. 그 날 이후 병원의 모든 것은 나락 그 자체였다. p.109
3. “당신들은 늘 그런 식이죠. 당신들의 잣대에 우리를 구겨 넣고 그걸로 우리를 정의 내리죠.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혹시 제 이름, 알고 있나요?” 범준의 얼굴은 굳었다. 그와 8개월을 일했지만 범준이 그를 부르는 호칭은 늘 같았다. 닥터. 이름을 불러본 기억은 없었다. “그렇죠. 당신들에게 우리 모두는, 이 나라는, 우리 민족과 심지어 우리들에게 죽은 아기들조차 하나의 거대한 익명일 뿐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척하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전형일 뿐이죠. 그래도 한 가지는 고맙습니다.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한지 아십니까? 당신이 첫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었죠. 의사의 사회 참여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세요. 그 말이 절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p.189
4. 박 신부는 자신이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아침 성당에서 자동차를 타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박 신부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자기희생과 선행에 대한 이야기라고, 사람의 고귀함은 신분이 아니라 그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며, 사랑의 실천과 참된 이웃이 되는 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검문소에서 달아난 직후 그가 깨달았던 것은 그것이 용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방수포 아래 수없이 늘어선 시신들을 보고 그는 분노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달아났다. p.253
5. “하느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을 주십니다. 그 시험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보다 완전하게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다는 이유로 결코 그분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철컥. 박 신부의 안에서 어떤 스위치가 켜졌다. 박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한국 학생 몇이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긴 했지만 따라 나오진 않았다. 나는 얼마나 완전해졌는가? 오후의 하늘을 청명했다. 박 신부는 멍하니 앉아 지평선을 수놓은 성당들의 첨탑과 지붕, 성인들의 조상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었다. 설사 신이라 해도. p.317
유진과 데이브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마흔 번째 소설선, 서수진의 『유진과 데이브』가 출간되었다. 2020년, 장편소설 『코리안 티처』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서수진의 이번 작품은 국적과 인종을 달리하는 두 연인의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은 소설이다.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될 이 나라의 진짜 모습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세계문학상 수상작가 임성순의 세 번째 장편소설. 작가가 매스컴에서 누차 밝힌 바 있는 '회사 3부작'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앞선 작품들과 다르게 이번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뭇 진중하고 인간의 본성을 향해 좀더 고뇌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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