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 독서의 장 📖

D-29
<유진과 데이브> 서수진 1. 언뜻 보면 부드러운 색을 빠르게 칠한 인상주의 그림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세밀하게 완성한 후에 뭉갠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진이 미술을 전공하던 시절 몰두했던 작업과 비슷했다.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뭉개기 전의 그림을 찾아내려 했다. 해가 지는 시간, 바닷가의 집, 커다란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두 명의 사람,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들의 표정을 살피려 유진은 눈을 더 가늘게 떴다. p.21 2.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헤어지자니까 내가 그러자고 한 거잖아. 그만하고 싶다며!” 데이브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로 답답한 건 유진이었다. 답답하고 화가 나고 억울했다. 너무 억울한 나머지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데이브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유진을 안았다. “왜 울어. 울지 마.” 그러니까 데이브의 말은 이랬다. 자신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유진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관계라는 게 한쪽이 끝나면 끝난 게 아니겠냐고. 유진이 그렇다면 자신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데이브의 말을 들으며 유진은 기가 찼지만 더 이상 화낼 기운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혼잣말처럼 한국어로 “존중 두 번 했다간 큰일 나겠네”라고 중얼거린 게 다였다. p.67 3. 데이브가 툭툭 유진을 쳤다. 유진이 돌아보다 데이브는 소파 위 벽에 걸린 캔버스를 가리켰다. 캔버스에는 유진의 전 연인이 뭉개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유진은 그 그림을 오랜 시간에 걸쳐 공들여 그렸고, 완성한 후에 모두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뭉개진 그의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게 ‘본질’이었다. 그 이후로 유진은 같은 작업을 몇 년간 이어 나갔다. 뭉개버릴 그림을 애써 그리는시간과 애써 그린 그림을 다 뭉개버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는 것처럼 계속했다. 그때는 그랬다. p.98 4. “크리스 닮았지?” 데이브는 킥킥댔다. 스케치 속 살인범은 정말로 데이브의 친구 크리스를 닮아 있었다.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친구였다. 바로 지난주에도 데이브와 함께 크리스를 만났으므로 그가 살인범일 리 없지만 유진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크리스한테 보여줘야지.” 데이브가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 유진은 핸드폰을 들어 선고공판을 검색했다. 한국 뉴스에도 보도가 되었다. 기사에는 피해자의 어머니가 법원 앞에서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다. 유진은 기사를 읽다 말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p.160-161 5. 유진은 모나미술관에 가려고 했다. 뒤돌아 앉아있는 팀을 보고,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괴롭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게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괴로운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싸우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혀서 몸의 무엇도 빼앗기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의 침묵을 대답으로 삼아 그에게서 돌아서고 싶었다.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고 미술관을 빠져나와 배를 타고 서서히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p.179-180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임성순 1. “의술이 인술이라고? 개뿔. 의술은 기술이다.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수을 발판 삼아 지금까지 발전한 거야. 알량한 도덕 나부랭이가 의학 발전에 기여한 적은 없어. 한 명을 실수로 죽이면 그렇게 배운 기술로 열 명을 살리면 돼. 그게 의학의 도리지.” p. 56 2. 애초에 의사로서의 삶이 그의 기대와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술로 헌신하는 존경받는 의사라는 소박한 환상은 대학병원에 인턴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산산이 깨졌다. 그곳에선 수가와 특진료로 계산되는 숫자 속의 환자들과 하나의 기능인, 혹은 전문직으로서의 의사만이 존재했다. 물론 어떤 의사애가 꽃피는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보람조차 밀려오는 환자들과 피곤 앞에서 서서히 빛을 바랬고 어느새 감흥 없는 일상으로 변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처음 기대했던 고결함이나 소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이게 맞는 거라고, 애초에 그가 원했던 의사로서의 삶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할 무렵, 한 사내의 목숨을 앗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까지 저지른 것이다. 그 날 이후 병원의 모든 것은 나락 그 자체였다. p.109 3. “당신들은 늘 그런 식이죠. 당신들의 잣대에 우리를 구겨 넣고 그걸로 우리를 정의 내리죠.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혹시 제 이름, 알고 있나요?” 범준의 얼굴은 굳었다. 그와 8개월을 일했지만 범준이 그를 부르는 호칭은 늘 같았다. 닥터. 이름을 불러본 기억은 없었다. “그렇죠. 당신들에게 우리 모두는, 이 나라는, 우리 민족과 심지어 우리들에게 죽은 아기들조차 하나의 거대한 익명일 뿐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척하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전형일 뿐이죠. 그래도 한 가지는 고맙습니다.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한지 아십니까? 당신이 첫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었죠. 의사의 사회 참여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세요. 그 말이 절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p.189 4. 박 신부는 자신이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아침 성당에서 자동차를 타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박 신부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자기희생과 선행에 대한 이야기라고, 사람의 고귀함은 신분이 아니라 그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며, 사랑의 실천과 참된 이웃이 되는 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검문소에서 달아난 직후 그가 깨달았던 것은 그것이 용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방수포 아래 수없이 늘어선 시신들을 보고 그는 분노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달아났다. p.253 5. “하느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을 주십니다. 그 시험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보다 완전하게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다는 이유로 결코 그분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철컥. 박 신부의 안에서 어떤 스위치가 켜졌다. 박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한국 학생 몇이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긴 했지만 따라 나오진 않았다. 나는 얼마나 완전해졌는가? 오후의 하늘을 청명했다. 박 신부는 멍하니 앉아 지평선을 수놓은 성당들의 첨탑과 지붕, 성인들의 조상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었다. 설사 신이라 해도. p.317
유진과 데이브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마흔 번째 소설선, 서수진의 『유진과 데이브』가 출간되었다. 2020년, 장편소설 『코리안 티처』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서수진의 이번 작품은 국적과 인종을 달리하는 두 연인의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은 소설이다.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될 이 나라의 진짜 모습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세계문학상 수상작가 임성순의 세 번째 장편소설. 작가가 매스컴에서 누차 밝힌 바 있는 '회사 3부작'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앞선 작품들과 다르게 이번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뭇 진중하고 인간의 본성을 향해 좀더 고뇌하는 양상이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1. P130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이었다. 사회도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장소이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도 자리의 문제였다. 이것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넓게는 이 세상에서, 좁게는 이 집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2. p76 책이 한 권도 없는 집을 상상하니 어쩐지 쓸쓸했다. 나는 시를 프린트한 A4용지를 벽에 붙였다.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같은 시구를 바라보며 이런 문장이 있는 공간이면 아주 누추하지는 않은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3.P83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장소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 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4.P133 '집'은 여자가 가사 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는 공간, 독립과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거나 최소한 보류하게 만드는 장소다. 그녀가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지적 갈망을 충족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곳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5.P155 물론 나는 화물차를 운전하는 아빠가 부끄럽지 않았다. 착해서가 아니라 직업의 귀천을 따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워야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헬로베이비> 1.P16 난임부부 여러분 힘내세요. 아기는 발이 작아 아장아장 천천히 온답니다. 2.P52 "아버지, 글쎄 내가 무정자증이래." 그 순간 시아버지의 얼굴은 콘크리트처럼 굳었다. "무정자증?" "응. 아버지 아들 씨 없는 수박이래. 그러니까 지은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 시아버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속이 안 좋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3.P93 "나 3년 동안이나 임신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난임병원 다닌 지는 2년 됐어. 자연임신 시도할 때도 당신 제대로 협조 안 했지. 배란일에 피곤하다고 잠자리 피하고. 그래서 시험관 하기로 한 거잖아. 신선 7회, 냉동 2회. 아홉 번 모두 실패했어. 두 번도 아니고 아홉 번인데 그걸 모른단 말이야? 그 무서운 난자 채취를 일곱 번이나 했어. 그런데 당신 정말로 그걸 모른다는 거야?" 혜경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얼굴을 살짝 위로 치켜들었다. "아니 모를 수도 있지..." 4.P136 "나한테 아기는 중국어 같은 거야. 배워두면 충분히 유익하고 그것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거라는 걸 알지만 굳이 내게는 필요 없는 것. 알다시피 난 어려서부터 유럽 문화에 심취했어." 5.P172~173 그 순간 문정의 귀에 새벽 시간의 키보드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타다닥 타다다닥. 완벽해 보이는 박소영이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기였다니.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그녀가 완벽한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공간으로서의 집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전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으로 국내 논픽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하재영 작가가 집에 관한 에세이로 돌아왔다. 그는 신작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일생에 걸쳐 지나온 집과 방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적산가옥촌, ‘대구의 강남’이라 불렸던 수성구의 고급 빌라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헬로 베이비장편소설 《콜센터》로 제6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한 김의경의 신작 《헬로 베이비》가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평균 결혼 연령의 변화, 삼십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임신과 출산을 계획할 수 있는 현실. 그 과정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심리적 압박.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사회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길고 지난한 시간을 견디고 싸워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헬로 베이비》는 그러한 고민을 안고 난임 병원에서 만난 삼사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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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데이브 – 서수진 호주인 데이브와 대한민국인 유진은 서로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문화, 인종, 배움, 성격 등 다양한 사회의 구성요소를 다르게 받아들여 30여년의 긴 세월을 보내온 서로 다름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났고, 사랑을 가졌고, 서로의 가족들과 만남도 가지며 교제의 깊이를 더 깊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소한 것부터 가족들과의 만남까지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었으며, 그 결과 만남을 가지는 내내 싸움과 싸움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데이브는 가족들에게 유진을 소개한다는 생각 속에는 단지 소개일 뿐이며 그녀가 데이브의 가족들 속으로 밀접하게 들어온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유진은 자라온 문화에서 이성의 가족들에게 인사한다는 상황은 어렵고 힘든 일이며, 그의 가족들 속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둘 사이의 생각의 차이가 싸움으로 치환되어지곤 합니다. 반대적인 상황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다가오는데 유진의 집에 인사 오게 되는 데이브의 행동에서 유진은 둘 사이의 크나큰 거리가 존재함을 인식합니다. 유진과 데이브의 만남과 사랑과 헤어짐을 읽으면서 생각의 차이가 우리 삶에 깊이 있게 자리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인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동료라는 이름 아래에 유치원, 초, 중, 고를 거쳐 대학에 성인으로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직장이라는 새로운 공간 안에서 더 다양한 구성요소들로 뭉치고, 뭉개지고, 떨어지면서 싸움 아닌 싸움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생각의 차이를 이해와 배려의 폭만큼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 되어집니다. 특히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베풀고자 한다는 것은 유진과 데이브의 상황처럼 상대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 원하는 것, 기분 좋게 다가가는 베품, 베품에 대한 무보상 등의 행위로 베품을 실천한다면 유진과 데이브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결과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였다면 이해와 배려의 폭을 늘려 나아 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유진과 데이브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마흔 번째 소설선, 서수진의 『유진과 데이브』가 출간되었다. 2020년, 장편소설 『코리안 티처』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서수진의 이번 작품은 국적과 인종을 달리하는 두 연인의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은 소설이다.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될 이 나라의 진짜 모습
<고래> 천명관 p.33  어째서 노처녀는 불쌍한 반편이를 캄캄한 물 속으로 밀어넣었을까? 자신에게 끔찍한 사매질을 가했던 주인집에 복수를 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함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p.96 그리고 그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허상을 좇는 동안 나오꼬만 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청춘도 이미 모두 흘러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잔인한 운명을 저주하며 자신의 인생을 희롱한 신에 대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가 택한 복수의 방법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였다. 그리고 그 맹세로 그는 손가락을 하나 더 잘랐다.  p.141  걱정하지 마, 꼬마 아가씨.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자신이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춘희가 점보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자 점보가 말했다.   정말 그럴까?  춘희가 헤어지기 싫다는 듯 점보의 굵은 다리를 껴안자, 이를 위로하듯 점보는 긴 코로 춘희를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p.177 춘희는 점보의 다리를 끌어안고 자신이 처음 세상에 나와 맡았던 냄새를 기억해냈다. 점보도 긴 코로 춘희의 몸을 부비며 반가운 듯 힘차게 콧김을 뿜어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점보와 춘희는 그렇게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으며, 훗날 점보가 불행한 사고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둘은 언제나 한 몸처럼 붙어다니며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p.251 文은 점점 더 말을 잃어가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하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현실로부터 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것으로, 사람들간의 대화와 교통으로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p.330 벽돌에 손을 대는 순간, 그녀의 영민한 감각은 그것이 그냥 벽돌이 아니라 바로 그녀가 공장에 있을 때 文과 함께 만든 벽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비록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그 흔적이 희미해지긴 했으나 그것은 분명히 남발안의 공장에서 만든 벽돌이었다. 그녀는 文의 얼굴과 남발안의 공장 풍경이 떠올랐다. 금복과 점보, 쌍둥이자매의 얼굴도 떠올랐다. 벽돌을 만지는 동안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으며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없는 상실감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교도소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p.362 흙과 불과 물로 빚어낸 벽돌은 공간을 가르고 비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온기를 보존하고 공기를 정화해주는 훌륭한 건축자재였지만 그런 실용적인 쓰임새는 춘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벽돌은 떠나간 사람들을 향한 비밀스런 신호이자 잃어버린 과거를 불러오는 영험한 주술이었던 것이다. <헬로베이비> 김의경 p.39 문정의 인생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문정은 늦된 아이였다. 문정은 딱히 잘하는 것이 없는 학생이었다, 대학 입학도 쉽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하나씩 있다는 재능이 자신에겐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저출산 시대에 자신이 난임 환자라는 것이 특별히 더욱 절망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p.70 소라는 수술실 거울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맞추며 파이팅을 외쳤다. 이제 소라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소라는 2년에 걸쳐 다섯 번의 난자 채취를 통해 넉넉히 52개의 난자를 냉동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보험을 든 것처럼 든든했다. 이제 냉동해둔 난자와 만나게 할 정자만 구하면 된다. p.94 감정적이라고? 그럼 넌 이 일에 전혀 감정 동요가 없단 말이지?  혜경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지자 남편은 너무 바빠서 자세히는 몰랐다고, 그래도 자신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라면서 미안하다고 말한 뒤 서재로 도망쳤다. 혜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남편은 학구열이 강한 사람이었다. 궁금한 건 파고들어 밤을 새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모른다고 한다. 남편은 이 모든 과정에 그저 무관심한 것이다. 혜경은 시험관 시술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울었다. p.121 은하는 시댁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서 아이를 낳으라고 독촉하는 친정엄마도 스트레스를 주는 건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지금은 괜찮아도 나이가 들어 자식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으면 멀어지는 것이 부부 사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아들과 딸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는데도 이혼을 했다.  p.139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설주는 임출육에 대한 게시물만 올렸다. 그것이 설주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있을 때도 설주의 신경은 온통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쏠려 있었다. 임신 출산 육아. 그것이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설주의 삶이었다.  p.168 정효는 그동안 믿고 의지했던 의료진이 혹시 자신에게 사기를 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임신 가능성이 없는 자신에게 언젠가 아기가 찾아온다고 거짓말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중략) 정효는 지옥 한복판에 있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그곳은 지옥이었다.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문학동네 소설상이 오랜만에 당선작을 냈다. 주인공은 지난해 여름 '문학동네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천명관씨. 등단작 '프랭크와 나'를 제외하곤 아무 작품도 발표하지 않은 진짜 신인이다.
헬로 베이비장편소설 《콜센터》로 제6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한 김의경의 신작 《헬로 베이비》가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평균 결혼 연령의 변화, 삼십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임신과 출산을 계획할 수 있는 현실. 그 과정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심리적 압박.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사회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길고 지난한 시간을 견디고 싸워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헬로 베이비》는 그러한 고민을 안고 난임 병원에서 만난 삼사십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1. P.47 우리 가운데 누가 모든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관습과 제도화된 폭력을 당연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P.52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 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이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3. P.105 유럽 국가들이 개정한 법률에 따르면 동물은 인간도, 물건도 아닌 제3의 존재라는 법적 지위를 가진다. 사람과 물건만을 구분하던 이분법 체계가 권리의 주체인 인간, 권리의 객체인 물건, 그리고 동물이라는 삼분법 체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같은 전환은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자 감정을 가진 개체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4.P.117 그런데 시금치 한단도 원산지를 표시하는 세상에 반려동물은 어느 번식장에서 태어났는지, 그 번식장 환경은 어떤지, 모견과 종견은 누구인지, 임신했을 때 모견이 뭘 먹고 어떻게 지냈는지 아무도 몰라요. 5. P.200 축산물 위생관리법에 들어가지 않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 동물에게 투여하는 약물의 기준치와 휴약 기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유통 경로 확인을 할 수 없는 것, 안전과 위생을 담보할 수 없고 위해가 발생해도 추적할 수 없는 것을 먹는다는 의미다. 6. P.212 공장식 축산의 핵심은 위생과 안전이 아니라 저비용과 고효율이다. 우리는 공장식 축산을 육성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정부 예산을 쏟아 붓고, 그래서 발생한 조류 인플루엔자와 살충제 달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또다시 막대한 혈세를 쏟아붓는 나라에 살고 있다.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 p.66 주변에 둘러쳐진 벽의 높이가 달라서 그런 건데 말이야. 어떤 부분은 벽이 사다리보다 높은 거라고. 그럴 때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실제로는 나는 가끔 삼차원을 넘어서 시공간연속체를 어떤 지점에서 굽어보고 내다보는 거고, 너는 삼차원 안에 갇혀 있는 거지. 그래서 나는 과거나 미래의 어떤 지점들이 보여. 하지만 안 보이는 부분도 있어. 중간에 장애물이 있는 곳도 있고, 너무 멀면 흐려지기도 하고. 그 연속체 이야기 좀 그만해. 2.P.79 남자는 논설위원에게 얼른 자기를 소개했다. 논설위원이 석 달 전에 쓴 칼럼 때문에 전화를 건 것이 맞는다고 말했다. 남자는 말하는 기계처럼 말했다. 제가 그 동급생 살인사건의 가해자인데요, 정당방위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전화 거신 분이 가해자인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말문이 막혔던 논설위원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3.P.10-11 우리들한테는, 남자가 말했다. 시간과 공간이 그렇게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야. 시공간연속체 밖에는 시간이 없어. 시공간연속체 안에는 시간이 있고. 그게 전부야. 대부분의 우주 지성체들에게는 시간도 공간처럼 앞이나 뒤가 없어. 굳이 정의하자면 먼저 보이는 게 앞이고 나중에 보이는 게 뒤라는 정도지. 반대편에서 보면 정확히 반대가 되는 상대적인 개념이야.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한쪽 방향으로 체험하지. 그 속도를 조절하지도 못하고. 아주 드라마틱해. 모든 사건을 한쪽 방향으로, 단 한 번씩만 경험하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리석기도 해. 왜 인간들만 그런 식으로 시간을 체험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어떤 진화상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나는 ‘처음에는’ 공간 사이에 그냥 흩어져 있었어. 그러다 외우주를 떠도는 혜성을 보았어. 혜성에서는 재미있는 노래가 들렸어. 반음들이 불규칙하게 섞여서 특이한 멜로디였는데 리듬은 단순했어. 노래는 모두 패턴이야. 그래서 나는 모든 노래에 익숙해. 나는 혜성에 올라탔어. 혜성이 지구와 달 사이에 있을 때 지구로 내려왔어. 그믐달일 때였어. 달빛에 따라 바다가 움직이며 노래하는 패턴을 보았지. 바다에서는 파도 속에 있기도 했고, 다른 동물들 속에 들어가 있기도 했어. 4 P.140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더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남자가 말했다. 낮에는 너무 가느다랗고 빛이 희미해서 볼 수가 없어. 저녁에 가느다란 달 몇 번 본 거 같은데. 해가 막 지려고 할 때. 그건 초승달이야. 초승달도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지만 그믐달이랑 미묘하게 뜨는 시각이 달라. 초승달은 해가 든 다음에 져서, 해가 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져. 그때 볼 수 있는 거지. 그믐달은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5.P.143 우주 알은 그 단체관람객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자유티켓 같은 거였어.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한참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지나친 조각품을 찾아 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어. 이층을 건너뛰고 곧장 삼층으로 올라가거나, 오층부터 거꾸로 내려오면서 전시물들을 감상할 수도 있을 거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달팽이들』 『스캔들』 등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 소설가 하재영의 첫 논픽션으로, 버려진 개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번식장, 보호소, 개농장을 취재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번식업자, 유기견 보호소 운영자, 육견업자 등 다양한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개 산업의 실태를 그려낸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조경란, 박현욱, 박민규 등 역량 있는 신진작가들을 발굴해온 문학동네작가상의 이번 수상작은 한겨레문학상,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1. 엄마는 나를 “꺾었다”고 표현하지만 당시에는 ‘꽃 피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여성의 일생이란, 특별한 사람으로 고독하게 지내는 삶과 평범한 사람으로 원만하게 지내는 삶을로 이분되어 있어고,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후자가 더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다.(34p) 2. 결혼한 지 7,8년 되었을 때 처음으로 ‘결심’을 했어. 그전까지는 ‘주어진 상황’에서 ‘해야 하는’일만 했거든. 내 결심이 뭐였냐 하면 ‘포기하자’, 뭘 포기하느냐 하면 이야기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 둘은 연장선상에 있는 거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들어주고 알아주기를 기대하는거니까.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 나만 아프고 괴로워진다는 걸 깨달았어.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말하지도, 바라지도 말자. 그렇게 아빠, 할머니, 시댁 가족들에 대해 다 내려놨어. 그런데 너희만큼은 안되더라. 자식 빼고는 진즉에 다 내려놨어, 고작 30대 초반에. (62p) 3. 얼마 전에 통화하다가 네가 10대 시절에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나는 왜 그 당시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알아. 네가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었겠니. 나를 신뢰하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니. 너는 엄마를 강요하고 지시하고 야단치는 사람으로 여겼을거야.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 순간을 혼자 감ㄷ아함 외로웠을 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106p) 4.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양재 학원에 다니든, 업계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든 본격적으로 시작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30대 후반이면 아직은 젊은데, 기술을 배워서 내 걸 일궈나갈 수 있는 나이인데....... 친구 말처럼 명인까지는 아니어도 평생 직업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우리 가족이 먹고살 걱정 없이 지냈을 수도 있지. 살면서 이게 가장 후회스러워. 자립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을 날려버렸던게,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로 만들지 못했던 게.(139p) 5. 할머니는 신여성을 자처하는 가부장제의 수호자라는 점에서 모순적이었고, 전통적 어머니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전통적 고부 관계에 얽매여 있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적이었다. 가족관계에서 타자화된 ‘집안의 이방인’, 즉 며느리의 봉사에 가까운 희생 없이는 일상을 영위하지 못했던 할머니에게 주체성에 대한 의지가 있었을까? 또 다른 여성의 헌신에 의존해온 할머니에게 자존감은 자기애나 자기중심성과 동의어가 아니었을까?(199p)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이 책의 표제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썼던 유명한 문장이다. 이 선언은 모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내 안의 ‘여성적 힘’을 선포하는 것이고,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며,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여성에게는 모두 어머니가 없다.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작가 하재영이 어머니의 생애사를 인터뷰하며 그와 교차하는 본인의 이야기를
p27 “쿠데타가 일어날 걸세. 장난 아니게 엄청난 규모로 터질 텐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쿠데타를 일으키는 세력이 우리 노숙자들이라는 사실이네.” “노숙자들?”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이 도시에서 쓰레기로 분류되는 열외인간들 전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그게 가능할까?” “가능과 불가능 여부를 묻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야. 우리는 단지 그런 예언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믿음을 갖는 것뿐이네.” p71 기무가 총을 들고 이곳저곳 설레발치고 다니거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대끼는 지하철 안에서 노골적으로 총을 쥐고 있어도, 그들은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같이 피곤하고 잔인할 만큼 억눌린 얼굴을 하고서, 휴대폰을 유년 시절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거나 타블로이드판 무료 일간지를 뒤적거리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p108 피에스 : ‘최악’ 멤버들의 특징을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최악’ 멤버들은 모두 양의 탈을 쓰고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답니다. 괜히 일반인이나 경비 아저씨들한테 킬십건을 함부로 사용해 봉변당하지 마시고, 반드시 양의 탈을 쓴 ‘최악’ 멤버들에게만 격발하세요. p180 그대들이여! 중요한 건 이 의식을 통해 그대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공상할 수 있는 자유, 파괴할 수 있는 자유, 동정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꽉 짜여 있는 기계적인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철저하게 무책임하고 황당무계한 미답의 경지를 향유할 수 있는 자유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p261 사람 죽어나가는 게 좀 끔찍하긴 해도, 서울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교통사고와 암으로 송장이 되어 죽어나가는데 이깟 게 뭐 대수겠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같은 종교인끼리 이해 못할 게 뭐 있겠어요. 그러니까……, 뭐랄까? 이번 정규직 사원 인사 발탁 건 말이에요.음……. p282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참 메시아가 맞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우리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 “무슨 근거로?” 김중혁이 그렇게 따지듯 물었으나, 여두목 양머리의 답변은 확고했다. “시나리오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루동안, 퇴역군인 장영달, 노숙자 김중혁, 외국계 제약회사 인턴 윤마리아, 게임을 좋아하는 청소년 기무 네 주인공이 우연히 코엑스몰에 모여 양머리 탈을 쓴 집단들과 벌이는 소동을 그린다. 심사위원들에게 '거침없는 문체와 발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총체성을 빚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p22 내가 이 취재를 통해 보려 하는 것은 한국 사회였다. 공채라는 특이한 제도, ‘간판’에 대한 집착, 서열 문화, 그리고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시스템이 어떻게 새로운 좌절을 낳게 됐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p51 문학상의 마케팅 파워도 쪼그라들었다. 상이 그렇게 많으니 상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독자들이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장편소설공모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은 대개 초기 수상작들이었다. p63 내부 사다리가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에 복권이나 다름없는 공모전이 오히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유능한 인재들이 투고보다는 공모전 도전을 택하면서 업계의 내부 사다리는 더욱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공모전 경쟁률은 점점 더 높아지며, 신인들은 여기에서 경력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p88 그들이 발견하고 키우고자 했던 것은 ‘재능’이었다. 한 명의 뛰어난 소설 천재를 발굴할 수 있다면 그 비용은 거액이 들어도 아깝지 않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진흙 속의 천재를 평론가가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시대인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을 뿐이다. p137 엘리트들이 한계에 부딪히는 영역이 한곳 더 있다.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작품’을 알아보는 분야다. 전복적인 작품은, 문자 그대로 체제를 전복하려 든다. 따라서 구체제의 엘리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저항하게 되기 쉽다. 상상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작품은 엘리트의 상상력 밖에 있다. 그러므로 엘리트는 그런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종 엘리트들이 일반인보다 더 느리다. 왜냐하면 자기 상상력 바깥에 뭔가가 더 있다는 사실은, 엘리트보다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p313 한국 소설 시장과 노동시장에서 간판이 그토록 중요한 근본 원인은 그곳이 ‘깜깜이 시장’이기 때문이다. 책을 쓰고 만든 사람과 그 책을 읽을 사람, 구직자와 채용 기업 사이에 정보 비대칭성이 너무 크다. 정보가 적은 쪽은 손실을 피하는 안전한 선택을 하려 한다. 여기서 간판은 그 상품이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려 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리고 그 간판으로 인해 신분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부조리한데, 그 부조리를 더 키우는 공통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어지간해서는 그 간판을 떼거나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간판의 영향력이 아주 오래간다. 이로 인해 시장 전체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p351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데에는 돈 한 푼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서관 이용자들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 실패란 ‘상당한 시간을 들여 꾹 참고 읽었지만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책임을 뒤늦게 깨닫는 일’이다. 한 독자는 내게 그런 상황에 대해 “기분이 더럽다.”라고 표현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시간과 노력이 문제다. p430 바꿔 말하자면, 한국에서 간판이 만드는 차별과 서열의 구조는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런 ‘합의’는 여러 각도에서 공고히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실제로 그 간판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간판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 각자에게 최선의 선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판 외에 달리 더 좋은 선택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문학공모전이라는 제도와 공개채용이라는 제도를 밀착 취재, 사회가 사람을 발탁하는 입시-공채 시스템의 기원과 한계를 분석하고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고발하는 논픽션이다. ‘당선’과 ‘합격’이라는 제도가 사회적 신분으로 굳어지며 ‘계급화’되는 메커니즘을 밝혀낸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54p 언제나 혼자인 것과 항상 함께인 것 가운데 어느 쪽이 견딜만 할까? 스무살의 내 소원이 서울에 가는 일이었다면 스물여섯 살의 내가 바라는 것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자기만의 방은 독립과 해방의 공간이기 이전에 나의 눈물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권리였다. 83 -84p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장소가 있었다. 품위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나는 매사에 ‘내 돈을 써야 하는 일인가’ 만 생각하는 사람, 폭력적인 시선으로 남을 쳐다보는 사람, 남의 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는 사람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157p 눈을 뜰 때마다 상실을 깨닫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창밖을 보다가, 밥을 먹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심지어 잠에서 깨자마자 난데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떠나보낸 것은 개 한 마리가 아니라 다정한 존재와 함께한 내 삶의 한 시절이었다. 가끔 피피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 시절을 부르는 일이었다. 181p 나는 한 존재를, 한 시절을 잃고 이 집에 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슬픔과 상실을 안고 시작되었지만 그조차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여기가 내 삶의 새로운 배경이 될 것이다. 217p 집은 사적영역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장소다. 집을 권력도, 위계도, 노동도 없는 휴식처로 여기는 것은 전통적 성규범에 따른 시각일 뿐이다. 내가 스스로 정의한 정체성과 외부로부터 요구받는 성 역할은 집안에서 가장 먼저 충돌했다. ‘집안일’, ‘내조’, ‘가정주부’ 등의 언어에는 성별화된 이데올로기가 적용되어 있다. ‘가정적’이라는 말은 남성에게 칭찬인지 몰라도 여성에게는 아니다. 여성은 ‘원래’ 가정적인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공간으로서의 집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전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으로 국내 논픽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하재영 작가가 집에 관한 에세이로 돌아왔다. 그는 신작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일생에 걸쳐 지나온 집과 방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적산가옥촌, ‘대구의 강남’이라 불렸던 수성구의 고급 빌라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얼빈> 27p 아이는 젖빠는 힘이 좋았다. 아이가 젖을 빨 때 김아려는 온몸이 빨려나가는 듯했다. 젖을 물리면서 김아려는 평온하게 긴장해 있었다. 아이가 젖을 자주 토해서, 김아려의 몸에서 젖 삭은 냄새가 났다. 아이의 몸과 어미의 몸이 섞인 냄새였다. 냄새는 깊고 아득했다. 안중근은 그 냄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 슬픔은 한 생명의 아비가 되고 어미가 되는 일의 근본인 것 같았다. 97p 우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토의 일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내내 분명하지 않았다.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자각증세가 없는 오래된 암처럼 마음속에 응어리져있었는데, 만월대의 사진을 본 순간 암의 응어리가 폭발해서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안중근은 몸을 떨었다. 151p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서 다방 밑으로 지나간다면, 이토를 구경하기는 좋지만 이토를 쏘기에는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표적이 멀어지면 실탄의 살상력이 약해질 수 있었다. M1900 권총은 반동이 약해서 삽시간에 여러 발을 쏘면서도 조준을 유지하기에 수월했지만 유효사거리가 짧고 살상력이 모자랐다. 바싹 다가가야 급소를 맞힐 수가 있는데 근접은 위태로웠다. 열차가 플랫폼의 어느 지점에서 정차할 것인지와, 열차가 도착했을 때 러시아 경비대, 청나라 경비대의 포진 위치를 짐작할 수 없었다. 214p 미조부치는 여러 경우를 생각했다. 이토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중근에게 알려주면, 안중근은 자신의 목숨에 대한 희망을 단념함으로써 더욱 완강하게 정치적 신념에 의한 살인임을 주장할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안중근을 처형하더라도 제국의 문명적 위상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토가 죽지 않고 병원에서 살아났다고 안중근에게 말해주면, 안중근은 자신의 목숨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소행은 이토의 평화 구상과 경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법정에서 진술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안중근을 처형해도 제국의 위상은 훼손되지 않는다. 272-273p -너의 말은 다만 말일 뿐이다. 인간의 행위는 몸과 마음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너의 말은 뉘우치는 자의 마음이 아니다. 너의 마음의 진실을 말하라. 뉘우침의 힘으로 새로워져라.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지 않고 말했다. - 제가 이토를 죽인 일을 뉘우친다면, 제가 이토를 죽이는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만약 이 사업에 실패해서 이토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저는 이토를 죽이려는 저의 마음을 뉘우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부님 - 그것은 속세의 마음이다. 뉘우침이 아니다.
하얼빈‘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 ‘작가들의 작가’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이 출간되었다. 『하얼빈』은 김훈이 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인생 과업으로 삼아왔던 특별한 작품이다.
[ 2.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p.22 "그게 팀장님 회사의 문제점입니다. 너무 투박해요. 사실은 성의가 없는 거죠. 젊은이들이 뭘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을 안 한단 말입니다. 인터넷 심리전이 중요하다, 온라인 홍보를 강화해라, 그러면 고작 한다는 게 야당 후보는 좌빨이네, 면상이 비호감이네, 그런 댓글이나 달고 있어요. 그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일에 대해서 고민이 없었는지가 그냥 다 보입니다." .... "오십 대 이상한테나 그렇죠. 신문 읽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애초에 우리편이었어요. 요즘 이삼십 대들은 그런 걸로는 꿈쩍도 안 합니다. 아마 이십 대는 그런 스캔들이 터졌다는 거 자체를 모르는 애들이 절반이 넘을걸요?" [3.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p.77 "그게 타이밍의 문제입니까? 논리나 설득하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야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그만이죠. 타이밍이 중요해요" ... "자기가 다수가 됐을 때요.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 어정쩡한 글을 올리면 처음에는 다들 눈치를 봐요. 이걸 받아들여줘야 하나, 아니면 공격해야 하나. 그런데 누가 '저도 그래요. 공감 100배'라고 댓글을 달면 이제는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둘이 되는 셈이죠. [5.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국민들에게 낙관적 전망을 심어줘야 한다] p.147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국민들에게 낙관적 전망을 심어줘야 한다고. 우리는 전쟁 중이었어.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우고 있었어..... 조금만 부추겨주면 에베레스트도 오를 수 있는 애들한테 '동네 뒷산 오르는 주제에 무슨 엄살이냐'라고 비아냥거리고, '힘드니까 등산이다'라며 멸시하고. 자기들 인생 하나 성공하지 못한 종자들이, 자라나는 애들 미래를 발목 잡고 있어. 다 붙잡아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 [6. 선전은 창조와 생산적 상상력에 관련된 문제이다] p.152 "인간은 말이야, 생각이 바뀌지 않아. 조용필 좋아하던 사람이 늙어서 패티김을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니야. 조용필 좋아하는 사람은 조용필과 함께 늙어가는 거야. 우리 아버지는 백설히와 같이 늙어갔고, 나는 신중현과 같이 늙었어. 촛불 들고 나섰던 애들도 아마 바뀌지 않을 거야. .... 우린 그 다음 세대를 공략해야 해. 아직까지는 머리가 그렇게 굳지 않은 애들. ... 그래서 어른들은 포기하고 어린 애들을 상대로 마케팅을 했지. 먼 미래를 내다보고." [7. 대중에게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p.185 이게 재미있는 게, 이건 유래가 중국이에요. .... 이런 십 대들 놀이가 보면 은근히 국제적입니다. 놀이가 인터넷으로 퍼지니까 국경이 문제가 안 되는 거군요.... 바이럴이 엄청 잘되는 거죠. 멋있고 재미있어 보이기만 하면. 저희가 처음에는 그래서 외국 청소년들한테 유행하는 것 중에서 저희 콘셉트하고 어울리는 거 없나 찾았어요. [9.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p.238 "네, 저희가 386 씹는 문화를 십 대들 사이에 일으킬 겁니다. 그게 쿨해 보인다 싶으면 금방 유행이 될 거예요. 다른 세대로 퍼지는 것도 시간 문제예요. 얘들이 몇년 뒤면 이십 대가 될 거잖아요. 대중문화에서는 사십 대가 삼십 대 따라하고, 삼십 대는 이십 대 따라하거든요. 이십 대가 핵심이에요." ..."... 요즘 애들 영악합니다. 먹이를 주는 손은 절대 물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한테는 방송출연이나 앨범 발매 같은 절대적인 권한이 있잖아요." [심사평] p.241 매우 지적인 글쓰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인터넷 저널리즘의 하나로 자리 잡은 SNS는 실시간 소통의 전파효과는 물론 새로운 연대와 참여의 순기능을 가졌으나 그것이 사악한 특정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에 전 사회적으로 미치는 역기능은 일찍이 나치독일에서 자행했던 대중조작과 흡사함을 암시했다. .... 작가는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평화를 소망하게 하는, 4.3평화정신에 부합한다는 점에 당선작으로 선택되는 영광을 안았다.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제3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장편소설. 그간 <표백>, <한국이 싫어서> 등 사회성 짙은 소설을 써온 장강명의 소설 <댓글부대>는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로 부박한 현실에 정면 돌파를 시도한 소설이다.
p.18 AI 분야는 근원을 따지면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공식' 출범은 1956년에 이루어졌다. 두 젊은 수학자 John McCarthy와 Marvin Minsky는 정보 이론의 창안자로 이미 널리 알려진 Claude Shannon과 IBM의 첫 상업용 컴퓨터를 설계한 Nathaniel Rochester를 설득하여 다트머스 대학에서 여름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기로 했다. .... "이 연구는 학습의 모든 측면이나 지능의 다른 어떤 특징을 원리상 기계에 모사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정확히 기술할 수 있다는 추정을 토대로 진행될 것이다. 기계가 어떻게 언어를 쓰고, 추상화를 이루고 개념을 형성하고, 현재 인간만이 풀 수 있는 유형의 문제를 풀고, 자신을 스스로 개선하게 할지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 p.32 이런 것들은 생각할 가치가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 오래전에 그런 의문을 떠올린 우리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 그런데 마음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단계 하나하나는 마음의 능력을 담은 인공물을 창조하기 위한 단계이기도 하다. 즉, 인공지능을 향한 단계다. 지능을 창조하는 법을 이해하려면, 먼저 지능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대강 말하자면, 한 존재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이 지각해온 것을 토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있는 한 지적이다. p.92 중간에 검토나 추론 없이, 지각을 행동과 직접 연결하는 프로그램이다. AI 분야에서는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을 반사 행위자라고 한다. 사람과 동물에게서 생각이 개입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는 낮은 수준의 신경 반사에서 따온 것이다. ... 또 한 가지 친숙한 반사는 급제동이다. ...여기서 인간 설계자의 목적은 명확하다. 보행자를 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행위자의 정책은 그 목적을 부적절하게 실행한다. 여기서도 목적 자체는 행위자에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의 그 어떤 자율주행차도 사람들이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p.161 문명의 위대한 성취 중 하나는 사람들의 신체적 안전을 서서히 개선해왔다는 것이다. ... 1948년에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3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정신적 안전의 권리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람은 자신의 귀와 눈이 가리키는 증거를 믿는 경향이 있다. ....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에 극도로 취약하다.  p.187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이런 모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명백한 것인데, 기계에 인간보다 높은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이류 시민의 지위로 좌천시키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잃을 수도 있다. 두 번째는 간접적인 것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이 기계가 아니라, 기계를 설계하고 기계에 권한을 위임한 사람이라고 믿는다고 해도, 설계자와 위임자는 그런 사례에서 각 대상자의 개별 상황을 굳이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이 사실은 그들이 남들의 삶에 거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는 사람에게 봉사를 받는 엘리트와 기계의 봉사와 통제를 받는 대다수의 하층 시민으로 대분열이 시작되는 징후일 수도 있다. 2018년 유럽연합은 개인정보보호법 22조에서 그런 사례에서 기계에 권한을 부여하지 못하게 명시적으로 금지했다. .... 비록 원칙적으로는 훌륭하게 들리지만, 실제로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P.240 업계에서 흔히 들리는 후렴구는 인간과 AI가 한 팀을 이루어서 협력할 것이므로, AI는 고용이나 인류에 전혀 위협이 안 된다는 것이다. .... 협력하는 인간-AI팀은 사실 바람직한 목표다. 팀원들의 목적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면 팀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인간-AI팀에 중점을 둔다는 것은 가치 정렬의 핵심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문제에 중점을 둔다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P.246 지적인 시스템이 세상을 그냥 관찰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깨달을 수 있다는 개념은 충분히 지적인 시스템이라면 '올바른'목적을 위해 처음의 목적을 자연스럽게 포기할 것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합리적인 행위자가 그렇게 할 이유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게다가 그 개념은 바깥 세계에 '올바른' 목적이 있다고 전제한다. P.318 우리가 도덕철학을 지닌 이유는 지구에 한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I시스템이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일과 가장 관련이 깊은 접근법은 결과주의라고 불리곤 하는 것이다. 선택행위를 예상 결과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또 다른 주요 접근법은 의무론적 윤리학과 덕 윤리학이다. 대강 말하자면, 둘은 각각 선택의 결과와 별개로 행동의 도덕성과 개인의 도덕성에 초점을 맞춘다. .... 그렇다고 해서 도덕 규칙과 덕이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공리주의자는 그런 것들을 결과와 그 결과의 더 실질적인 달성이라는 측면에서 정당화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P.373 이 문제의 해결책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인 듯하다. 우리에게는 자율성, 행위 주체, 능력을 지향하고 자기 탐닉과 의존성을 멀리하도록 우리의 이상과 선호를 재편할 문화운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고대 스파르타 군대 정신의 현대적인 문화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에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올 세계적인 규모의 인간 선호 가공을 의미할 것이다. 나쁜 상황을 더 안좋게 만드는 것을 피하려면, 해결책을 도출하는 과정과 개인별 균형을 달성하는 실질적인 과정 양쪽으로, 초지능 기계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인간과 공존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것인가 - AI와 통제 문제인공지능이 가져올 장밋빛 미래에 대한 무책임한 낙관과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넘어 현실적이고 폭넓은 관점에서 AI의 현주소, 가능성과 위험, 이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검토하며, 인간에게 이로운 AI를 만들기 위한 방향과 원칙을 제안한다.
반인간선언 - 주원규 p. 83 인류는 이윤이란 단어에 매력과 천박함을 동시에 느끼지. 하지만 이윤은 그 자체로는 무야. 소멸의 없음이 아닌 무의미로서의 없음인데. 인류의 공생. 지속가능한 번영을 지향하면 무의미는 의미가 되고. 그 반대 경우라면 무의미의 무의미의 무의미가 되겠지. 기업이 사투를 벌이는 방향은 무의미의 의미화야. p. 210 민족, 정치, 시민, 정부, 행정 등의 개념을 신봉하는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지. 하지만 기업은 달라. 기업은 이윤 추구 집단이야. 사악해 보이고 게걸스러워 보이지만 그만큼 투명하지. 기업은 욕망에 대해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반드시 기업의 종교화가 필요한 거야. p. 228 서희의 마음은 후련하지도, 후회도 없었다. 다만 기대했다. 서희에겐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이 부정에 대한 기대였다. 자신에게 닥쳐온 상훈의 훼손된 시신도 그가 남긴 유서의 비밀도 그리고 아버지 김의원의 죽음까지도 불의의 사고 혹은 자연의 순리이길 바랐다. 이런 식의 일그러진 신의 섭리와 그에 대한 고발의 연속성이 인정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실날같은 기대, 그 기대에 대한 보답을 마지막으로 유정에게서 얻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제 서희의 인식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유정은 이 모든 사실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p. 232 세상 밖으로 드러나지 말아야 할 진실은 없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p. 256 선언하는 인간, 저주의 상징이 된 반인간은 오늘의 우리일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저주하여 우리의 숨 막히는 현실을 이야기하려 하는 방법으로 사용될지도 모릅니다. 과연 이 지독한 패륜적 독설을 남기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이 끝없는 유예로 남아 있지만 이 이야기를 남긴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인간이기 위해 반인간을 선언하는 이야기에 대해 말입니다.
반인간선언 - 증오하는 인간, 개정판『열외인종 잔혹사』로 제14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주원규의 『반인간선언-증오하는 인간』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드라마로 제작되어 매회 화제성을 낳고 있는 OCN 드라마 〈모두의 거짓말〉의 원작소설이다.
1. 과장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6인용 병실이었다. 입원비가 가장 싼 탓에 늘 환자들로 가득 찬 6인실은 항상 어딘가 어수선했다. 늘 병실엔 한두 명쯤 시끄러운 문병인이 와 있기 마련이고, 또한 여 섯 명 중 한둘쯤은 극성스러운 환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병원 전 체를 장악하는 소독약 냄새를 압도하는 사람 냄새가 6인실엔 있 었다. 그래서 과장은 늘 회진을 돌 때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6 인실을 말 그대로 스쳐 지났다. 예민한 직원이라면 누구나 6인실 에서 환자가 과장에게 말을 결 때 왼쪽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 냄새를 단 두 단어로 정의하고 있었다.초라함과 궁상맞음. 54p 2. 얼마 전 이웃 나라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에이즈 신약 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어차피 평생 치료받지 못하고 살 사람들 이므로 다들 동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투약 대상이었던 사람들 은 실험의 에이즈에 걸린 대조군들보다 일찍 죽었다. 부작용으로 다발성 장기부전과 간부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빠 르게 잊혀졌다. 공모된 망각의 원인은 뻔했다. 언론과 정부를 포 함해, 국제 단체나 NGO 등 어느 한 곳도 이 대륙에서 제약회사와 사이가 나빠져서 좋을 단체는 없었던 것이다. 98p 3. 이 방을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자신의 장기와 맞는 이식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동안 그 선택이 자발적 인 것이며, 온전한 정신하에 판단한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만든 방이었다. 약물중독이나 알코올 의존증, 우울증 같은 것으로 자살 을 택한 사람을 수술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철저하게 맑은 정신으로 자발적인 판단하에 죽음을 택할 것. 그것은 그가 만든 일종의 원칙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유리 너머의 신부가 보이고 있는 모습은 심각한 원칙 위반이었다. 149p 4. 유진의 죽음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내가 한 것이 아니 라는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려 했다. 이제는 사제를 그만 둘 생각이었고 더 이상 사제가 지켜야 할 의무를, 그 비밀을 목숨 을 걸어가며 지켜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 만 같았다. 232p 5. 어떤 언어로도 묘사할 수 없는 짧은, 그러나 영원과도 같은 공 백의 순간이 찾아왔다. 어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무가 그의 눈앞에서 타올라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 같았다. 그 것은 거의 진공과도 같은 공포였다. 그렇게 그는 잠시 사내의 침 대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양, 그는 자신의 앞 에 누워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93p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세계문학상 수상작가 임성순의 세 번째 장편소설. 작가가 매스컴에서 누차 밝힌 바 있는 '회사 3부작'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앞선 작품들과 다르게 이번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뭇 진중하고 인간의 본성을 향해 좀더 고뇌하는 양상이다.
<그랑주떼>, 김혜나 1. 몸은 정확한 선열(Alignement)과 배치(Placement)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유롭게 춤을 출 수가 없습니다. 몸이 틀어진 상태로 춤을 추면 오히려 더 약해질 수도 있어요. 반드시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만 체내의 순환이 원활해져 독소와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체중은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틀어지거나 어긋나 있으면, 그 부분이 신체의 모든 부분에 다 영향을 주거든요. 그러니 단 한군데도 흐트러짐 없이 정확하고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 주세요.“ p.12 2. 애초에 타고나지 못한 재능은 나중에도 결코 생겨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선천적인 질병으로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춤을 전혀 추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러니 이로 인한 별다른 좌절이나 절망, 원망감 같은 것조차 가질 수 없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거나 망가진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었기에, 나에게는 별다른 불만이나 원망이 자라날 수조차 없었다. p.27 3. 리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내 몸은 마치 하나의 어항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나의 어항 속으로 리나의 이야기가 더욱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내 몸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의 근육들이 모두 늘어나고, 관절들이 모두 열리면 리나의 이야기가 더 많이 쏟아져 들어올 것 같았다. 그러면 리나는 영원히 내 곁에 남아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만 같았다. p.63 4. 죽음과도 같은 시간, 외부의 시간은 흐르고 있으나 나에게는 모든 것이 정지되어 흐르지 않는, 흐를 수 없는 시간. 내 몸과 의식의 모든 시간과 기능이 다 멈춰버리고 마는 시간. p.79 5. 나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은 채 멀쩡하고 건강하게 자라난 아이였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만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없었던 일이 되는 줄만 알았던 이야기. 그 이야기...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계속, 나에게 떠오르는 것일까? 왜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일까? 왜 이렇게 자꾸만 밖으로 나오려 하는 것일까? p.110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1. 근육, 식사, 커피, 술 등 관리해야 할 대상들을 적다 보면 거꾸로 내가 어떤 경주에 참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그것도 울트라 마라톤이나 투르 드 프랑스 같은 초장거리 경기다. 그렇게 관리를 해가며 내가 매달리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하고 내 업(業)의 본질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된다. p. 32 2. 한 선배 문인이 한국문학의 위상이 추락했다고 아쉬워하며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어 세대 전에는 소설가가 오피니언 리더 대접을 받았는데, 이제는 아니라면서.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상이 복잡해졌고, 상식으로 논평할 수 있는 일이 줄었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정부 시절 문학이 반독재 투쟁의 전위 역할을 하며 사회적 위상이 과하게 높았던 측면도 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헷갈린다. 고색창연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문학 종사자에게는 어떤 앙가주망 같은 게 있지 않나, 펀드매니저하고는 다르지 않나, 하는 마음이 있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넘길 수 없었고, 조지 오웰은 스탈린에 대해 그랬다. 소설가는 지식인인가? 사회 현안을 살피고 목소리를 내야할 책무가 있나? p.118-119 3. 나는 한때 ‘월급사실주의자’라고 내 소개를 하고 다닌 적이 있다. 내가 지어냈고, 지금도 좋아하는 말이다. 내가 당대 현실에 밀착한 글을 쓰며, 내 경력도 그렇고, 무엇보다 내가 갑자기 튀어나온 별종이 아니라 한국문학에 그런 새 물결이 오고 있는데 나는 그 일선에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담았다. 그런데 기대와 다르게 나 혼자 쓰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작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아마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 되는 경우이리라. 무슨무슨 소설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난 요즘 하루키를 읽고 있어“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다. 나도 내 소개가 될 수 잇는 소설,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장강명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p. 218 4. 스물이 넘어 서서히 내 삶에 책임을 지게 되고, 해방과 독립이 마냥 달콤한 방학 같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문학에 매료돼 있었는데, 이제는 자유가 아니라 ‘의미’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세상만사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큰 것은 큰 것대로 속이 텅 빈 듯했고,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한심해 보였다. 신앙을 떠났으나 여전히 의미는 필요했다. 의미가 없으면 살 이유도 없을 테니. p. 300-301 5. 한편으로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다들 경험하셨듯이 2000년 이후 어느 나라에서나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습니다. 이 세계화는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이뤄진 단일화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치와 경제는 각각 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로, 생산과 소비는 기업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맥도날드 방식’으로, 문화는 ‘젊음, 풍요로움, 섹스’를 중시하는 미국 대중문화를 닮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했어요. 그러다 보니 적어도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점점 비슷해져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대에 진정으로 개인이 남들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게 가능할까? 우리는 다들 비슷비슷하게 규격화된 경로를 거쳐, 비슷 비슷한 허무와 불행에 이르게 되고야 마는 것 아닐까? 그런 문제 의식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쓴 장편소설 ‘표백’으로 데뷔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만의 색을 지닐 수 없고, 모두 흰색이라는 정답으로 표백되어간다는 의미의 제목이에요. p. 326-327
그랑 주떼젊은 감성을 위한 테이크아웃 소설 시리즈 「은행나무 노벨라」 제2권 『그랑 주떼』. 도서출판 은행나무에서 200자 원고지 300매~400매 분량으로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만큼 속도감 있고 날렵하며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형식과 스타일을 콘셉트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두 번째 작품은《제리》, 《정크》의 저자 김혜나 작가의 소설이다. 발레에 적합한 몸을 지녔지만 정작 춤에는 재능이 없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말하고 듣는 세계’보다 ‘읽고 쓰는 세계’를 지향하며 책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누구나 책을 써보자고 제안했던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유유히)에서는 자신의 직업인 ‘소설가’가 헌신할수록 더 좋아지는 직업이라고 당당히 고백하며, 부지런히 글을 지어 먹고사는 소설가의 일상과 더불어 문학을 대하는 본심을 숨김없이 풀어놓는다. 소설가 장강명은 오후 11시 반쯤 자고 오전 6시 반 전에 일어난다. 글 쓰는 시간은 스톱워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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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p. 39 어디사냐는 질문에 집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아이들, ‘가든 하이츠 뒷골목’이나 ‘명문 빌라 건너편’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p. 71 그날 본 집들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살지 않은 집들과 그 집에 사는 여자들이 자꾸 떠올랐다. 세 여자들의 집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작은방에서 세 아이를 돌보는 여자, 동이 트는 시간 담요로 햇빛을 가린 방에서 잠을 청하는 여자, 곰팡이가 핀 벽에 기대어 우두커니 텔레비전을 보는 여자, 그 여자들이 모두 가깝거나 먼 미래의 나인 것 같았다. p. 116 혼자 무언가를 배우고 혼자 낯선 나라에서 지내고 혼자 유기견을 돌보면서,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여전히 처음 하는 일들이 두려웠지만 두려움 때문에 원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변화는 해내지 못할 것 같던 일을 해냈던 날, 행신동 집을 고치던 날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셀프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새로운 일들을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일들을 시도하지 못했다면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범준과 연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p. 193 창밖을 자주, 오래 바라보는 것은 이 집에 와서 생긴 습관이다. 집을 선택하는 것은 매일 보게 될 풍경을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공간으로서의 집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전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으로 국내 논픽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하재영 작가가 집에 관한 에세이로 돌아왔다. 그는 신작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일생에 걸쳐 지나온 집과 방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적산가옥촌, ‘대구의 강남’이라 불렸던 수성구의 고급 빌라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하재영 p. 31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를 꼽으라면 그때인 것 같아. 학생이었던 시절, 누구의 아내도 며느리도 엄마도 아니었던 시절, 내가 그저 나였던 시절. p. 56 내 세대 며느리는 대부분 그렇지 않았을까? 가족이라기보다 집안일 하는 사람, 있어도 없는 사람 p. 81 결혼 후 엄마의 첫 번째 결심은 "포기하자"였다. "이야기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 결국 엄마가 포기한 것은 목소리가 아닐까? 목소리는 자신의 고유함을 설명하는 도구이다. 내가 나 자신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 "주어진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만" 하기를 원하는 사람 앞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도 목소리다. "있어도 없는 사람"의 핵심은 목소리 없는 존재, 침묵하는 자 또는 실어하는 자이다. p. 127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처럼 이상적 어머니상은 신에 필적하기에 모든 어머니는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한다. 어머니가 실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어머니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할 것이다. p. 230 우리가 소원했잖아. 아니, 나는 항상 여기 있었는데 네가 나를 피했지. 지금이라도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야. 걱정스러운 건 네가 몸과 마음이 자주 아픈 거야. 하지만 살아있으니까 걱정도 하는 거지, 언젠가는 내가 없는 세상에서 너희가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걸. 내가 세상을 떠나면 너희는 잠시 슬퍼하고 한동안 그리워하다가 너희의 삶을 살아가겠지.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이 책의 표제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썼던 유명한 문장이다. 이 선언은 모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내 안의 ‘여성적 힘’을 선포하는 것이고,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며,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여성에게는 모두 어머니가 없다.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작가 하재영이 어머니의 생애사를 인터뷰하며 그와 교차하는 본인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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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올해의 마지막 그믐밤 🌜
[그믐밤] 30. 올해의 <술 맛 멋> 이야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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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북스/책증정] <오늘의 역사 역사의 오늘> 담당 편집자와 읽으며 2025년을 맞아요[그믐북클럽] 1. <빅 히스토리> 읽고 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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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작가의 책 읽기는 계속됩니다!
[한강 작가님 책 읽기] '작별하지 않는다'를 함께 읽으실 분을 구합니다![라비북클럽](한강작가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2탄)흰 같이 읽어요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 작품 읽기 [한강 작가님 책 읽기]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으실 분을 구합니다.
빅토리아 시대 덕후, 박산호 번역가가 고른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3!
[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① <위대한 유산>[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② <올리버 트위스트>[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③ <두 도시 이야기>
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앨리슨 벡델 - 펀 홈시무라 타카코 - 방랑소년 1저메이카 킨케이드 - 루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내셔널 갤러리 VS 메트로폴리탄
[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
🎬영상과 독서를 함께 해요.
[NETFLIX와 백년의 고독 읽기]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IMF외환위기 다시 보기1]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어요.영화 <로기완>을 기다리며 <로기완을 만났다> 함께 읽기"사랑의 이해" / 책 vs 드라마 / 다 좋습니다, 함께 이야기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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