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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림 독서의 장 📖
D-29
유빈모임지기의 말
태수빈
p.46
아가야, 웃으렴. 겁내지 말고. 팔매질을 하렴. 운동회 날 박을 터뜨리려 애를 쓰는 아이들처럼. 싸우렴. 다치지 말고. 구멍에 빠지지 말고. ..... 보살이 아니라 아수라가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자식이 넷. 그러나 그 아이들을 지킬 건 팥밖에 없고. 팥 정도밖에 없고.
p.72
사람들이 웃었지만 채원은 진심이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진심을 말할수록 웃는 걸까. 대학원이다보니 스무살들도 아니고 동기들은 채원을 질투하거나 견제하기보다는 재밌어했다. 특별히 재밌는 사람이 아닌데 재밌어하니 재밌는 사람인 척하기로 했다.
p.143
운이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삶의 불공평함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먹지도 않을 약을 더 많이 달라고 화를 낸다. 호 선생보다는 젊은 의사들에게 더 혹독하다. ... 아이는 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운이 좋았던 적이 있어야 이해할 것이다. 큰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파도가 부서질 줄 알았는데 계속되었다. 평생 그랬다. ... "내가 운을 좀 나눠줄게. 악수." 아이가 피식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싱거운 할아버지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p.235
"친구였나요, 그 이상이었나요?" 감이 좋은 사람이야, 하고 수지는 탄복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생각해봐도 역시 친구에 가까웠다. "어떤 사람이었어요?" "좋은 사람, 늘 기분 좋게 건조한 사람" "그건 너무 단순한 설명인데요." "그런데 잘 없어요.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마음의 마개가 잘 닫혀 있느냐 덜컥거리며 쏟아지느냐. 상대방을 고려 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p.275
매력을 넘어서는 장기적인 어떤 것, 그게 뭔지는 잘 몰라도 아직 그게 부족하다는 건 이삭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영은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법을 익혀보라고 넌지시 권했다. 혼자 있을 시간도 공간도 없는 이삭은 그 말을 듣고 부루퉁했지만,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종종 강변의 전철역에서 내렸다. 집까지 한시간도 넘게 남은 거리에서 충동적으로 내려 매번 같은 벤치에 앉았다. 벌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자전거들과, 사람들이 하늘에 날리고자 하는 갖가지 장난감들과, 다리 아래 변색된 눈금들을 보았다. 사람 안쪽에도 저런 눈금이 있으면 좋을 텐데, 차오른다면 알 수 있게.
p.323
유능하고 책임감 있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지만, 이상하게 편한 사람은 아니라고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설아에겐 설아만이 짓는 독특한 표정이 있었는데, 주로 뭔가 멍청한 말을 한 사람에게 그 표정을 했다. 얼굴 근육을 몇개 움직이지 않으면서 온도를 뚝 떨어뜨리는 표정이었고, 그 얼굴을 대한 당사자들은 '아, 내가 지금 머저리 같았구나'하고 흠칫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냉담한 표정을 제일 자주 마주하는 건 정신건강의학과의 전근용이었다.
p.405
동열이 동정을 느낀 건 아니었다. 요즘 느끼는 감정들엔 쉽게 이름이 붙지 않았다. 청소년을 잔인하게 살해한 남자가 자신의 아픈 아이를 보고 싶어할 때 배 속에서 뭔가 미끈한 게 동열의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불편함은 감정이라기보단 소화불량에 더 가까웠다. 처음 몇주는 애써 소화해보려 했지만 이제 동열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아마 공보의 기간이 끝나고 이곳을 떠나서도 몇년 지나야 소화가 끝날 것이다. 동열은 동요에 휩쓸리지 않고 그저 재소자가 형기를 끝마칠 수 있을 만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고심할 뿐이었다.
p.468
모든 곳이 어찌나 엉망인지, 엉망진창인지, 그 진창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잦게 좌절되는지, 노력은 닿지 않는지, 한계를 마주치는지, 실망하는지, 느리고 느리게 나아지다가 다시 퇴보하는 걸 참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을 수 있을지 현재는 토로하며 물었다. 압축이 쉽지 않았다.
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개정판스테디셀러 『피프티 피플』의 10만부 판매 기념 전면개정판. 그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소설 속 세상에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의 감수성에 걸맞도록 문장 표현을 다듬었고 출간 이후 달라진 의료 정보 등을 손보아 전보다 한층 섬세해지고 정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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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빈
p.10
"요샌 다들 자기가 어디서 누굴 위해 일하는지도 모른다니까."
정말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서 누구 위해 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만난 대부분 사람들은 그랬다. 물론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p.20
그렇다. 요컨대 핵심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 그러므로 그들 역시 사업가이고 사업을 위해서는 문제의 소지가 없는 것이 좋다. ..... 적어도 법이 있는 국가라면 형법에는 다음과 같거나 거의 유사한 항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31조(교사범) ①타인을 교사하여 죄를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 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
p.103
우리는 자신이 통계 외의, 예외적인 존재라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유일하지 않다. 통계적 정보가 충분히 누적되면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고르는 방식 같은 취향조차 드러난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인 게 바로 프로파일링이라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반복된다면 아무리 작은 단서만으로도 그걸 통계적으로 감추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거기에 심리적 분석까지 개입하면 빠져나갈 여지는 없다.
p.135
"우리가 컨설팅을 한다고 해서 자동차 만드는 일에 대해, 가전제품을 만드는 일에 대해, 건물을 짓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거 같아?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우릴 고용하지. 왜냐면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결정이 아닌 컨설팅의 결과라고, 객관적인 평가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 "객관? 우리가 컨설팅할 때 참고하는 모든 자료들을 누가 만든다고 생각해? 바로 회사야. 내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객관적인 건 아니지." ... "물론 다른 이유도 있어. 돈을 내는 사람들에게 뭔가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게 해주니까. 그건 제법 중요하거든. 또 우린 아주 깔끔하고 정확하게 끝맺음을 하니까."
P.204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내게 왜 그토록 친절하게 회사의 마크를 설명해줬는지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고 그것은 진정, 주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의해서 들어야 했던 그의 말은 그가 마지막 했던 말이다. 결국 모든 걸 받아들이거나 체념할 거라는 말. 받아들이거나 체념하거나...... 과연 이 두 단어의 거리는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p.269
나는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곳에서 죽음은 대량생산되고 있었다. 우리 삶의 최악의 것들이 조립되는 공장이었다. 이걸로 됐다. 내가 죽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알고 있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 같았으니까.
컨설턴트 - 2010년 제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2010년 제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컨설턴트>. 1인칭 시점의 회고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익명성과 자본주의가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회사'라는 거대한 구조는 곧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인의 삶을 지배하며 거기에 속한 구성원은 무력하게 모든 걸 '받아들이거나 체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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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혜
1. 걱정은 그다지 현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소처럼 우직하게 일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사람이었다. 배가 고프면 부두에 나가 일을 하고 품삯을 받아 그걸로 배를 채우면 그뿐이었다. 그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그저 남들보다 큼 모집과 남다른 힘뿐이었지만 그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자리는 어디에나 있었고 금복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생계의 방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입에 풀칠할 일이 걱정’이라던 그의 부모의 우려는 결국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나 입에 풀칠할 걱정이 없다는게 오히려 걱정이었다. 걱정은 뭐든지 쉽게 생각했으며 바로 다음날 닥쳐올 일조차 걱정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의 뛰어난 육체적 능력은 그를 매우 단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71p
2. 처음에 금복은 칼자국의 집에서 지내는 게 그저 불편하기만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세사람의 기묘한 동거에 익숙해졌다. 부엌살이가 따로 있어 손끝에 물 튈 일도 없었고 집안에 바라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 걱정도 이전처럼 금복을 유난스럽게 바치지 않는데다 그녀 자신으로서는 팔자에도 없는 금의옥식을 누리게 됐으니 달리 불만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109p
3.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과연 금복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런 행운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주인공이 된 것일까?’ 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불경스런 질문이며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금복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금복은 늪지내에 벽돌공장을 지음으로써 무모하고 어리석은 여자가 되었다. 188p
4. 금복은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취한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길이 치솟은 가운데서도 영사기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 스크린에선 계속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평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던 금복은 마침내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자들의 모습이 스크린 위에 겹쳐서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본능처럼 문득 자신의 딸, 춘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춘희가 아직도 공장에서 벽돌을 만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한번도 제대로 보듬어주지 않았던 딸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회한이 밀려왔다. 하지만 모든게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301p
5. 트럭 운전사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한 여자가 있었다. 어릴 때 자신과 힘을 겨루던 벽돌공장의 벙어리 계집애였다. 사내애처럼 덩치가 큰데다 예쁜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지만 트럭을 몰고 낯선 도시를 지날 때마다, 트럭의 불빛만을 의지해 밤새도록 좁은 산길을 꾸불꾸불 하염없이 넘어갈 때마다,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여관방에 고단한 몸을 누일 때마다 그의 머릿속엔 문득문득 자신과 팔씨름을 하던 벙어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372p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문학동네 소설상이 오랜만에 당선작을 냈다. 주인공은 지난해 여름 '문학동네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천명관씨. 등단작 '프랭크와 나'를 제외하곤 아무 작품도 발표하지 않은 진짜 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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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현
이 책을 읽으면서 2006년 강금실 前법무부장관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가 오버랩 되면서 썰을 하나 풀어보자면 내가 보수의 성지인 대구 출생이면서도 왜 민주당 지지자가 되었는지의 이유가 대략 두 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건이었고 두 번째가 바로 강금실 장관의 서울시장 출마였다.
강 장관은 당시 SNS 선거운동으로 싸이월드와 네이버 블로그를 활용하였는데 이때 나는 열성 민주당(당시 열린우리당)지지자였고 자발적 댓글부대가 되어 나름 활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단순히 지지 후보 빨아주기의 수준을 넘어 상대 진영(당시 오세훈 후보)의 지지자들과 댓글로 싸우거나 매크로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싸이월드의 접속 마비를 발생시키는 식이었다. 공격이 성공하면 몇 시간은 접속이 먹통 되거나 같은 글이 도배되니 선거운동으로 1분 1초가 아까운 후보의 상황을 감안하면 나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이때 나는 누구의 지시도 없이 오직 자발적 의지로 강금실 장관의 서울시장 당선이라는 개인적 목표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소추한 한나라당 놈들에 대한 혐오에 분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 일을 벌이던 당시 내 나이가 대충 서른 한 살 정도였는데 요즘 온라인 게임상에서 자동사냥, 맵핵, 자원이나 모으기 위해 매크로를 활용하는 2-30대 친구들을 보노라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나도 참 그 나이에 별짓을 다 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기도 한다.
투표일이 다가오자 강금실 후보가 선거캠페인으로 싸이월드 2999, 3000, 3001..2,3번째 접속자와 오프에서 만나는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여기에서도 나는 매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3천 한 번째 접속자로 확정되었다. (이 경우는 화이트해킹이라 정의해두고 싶지만)
아무튼 이벤트가 끝난 후, 보좌관으로부터 e메일이 왔다. 귀하가 이벤트에 당첨되었고 모일, 모시 모처에서 강 장관님과 만날 예정이니 올 수 있느냐고. 그때 신경호 이사님께 사정을 보고했으나 허락해 주지 않아 실제로 강 장관을 만나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당시 거금을 들여 당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보라색 스카프를 백화점에서 구입, 선거운동 사무실로 보냈다. “나는 서울시민이 아니라서 투표권은 없다. 면담은 나 대신 다른 분을 선택해 주시라. 다만 투표권과는 상관없이 후보님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고 이 선물을 후보님께 꼭 전달해달라” 는 손편지와 함께...
선거 결과, 그녀는 오세훈에게 거의 더블스코어로 낙선하였고 내 바람과 노력은 허무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강금실 장관의 선거캠프 해단식이 있던 날. 나는 언론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한 손에는
내가 준 선물을 들고 선거운동원과 지지자들에게 반대편 손을 흔들며 선거캠프를 떠나는 장면이었다.
2006년 그해는 내 자발적 정치활동 최악의 시절이자 최고의 시절이었다.
보수들은 댓글부대를 돈으로 고용하는지 몰라도 진보 쪽은 자발적 댓글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100만 회원을 보유한 다음카페 이종격투기, 나는 2003년 가입한 이래로 지금까지 활동 중이며 이곳은 지난
대선 때 다음카페 여성시대의 개딸들과 동맹하여 여러 지지활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물론 나야 이제는 중년이 되었기에 그들과 나란히 전면에서 활동하지는 못하고 단지 마음으로만 응원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자, 썰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책으로 돌아가서 딱 두 가지 부분만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팀-알렙 3인방(삼궁, 찻탓캇, 01査10)을 추잡한 젊은이의 이미지로 만드는데 한몫 한 유흥업소 장면. 이 부분은 묘사가 지나치고 심지어 이야기의 연결성과도 무관해 보인다. 게다가 유흥시스템까지 친절히 설명해 주는 장면에서는 눈살이 다소 찌푸려졌다. 또 하나는 찻탓캇이 이철수의 꼬리자르기에 희생되는 장면이다. 중국 밀항 후 잠수타는 것 정도로 끝날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 목이 졸려 손절당하는 장면은 어찌보면 뻔한 클리셰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괜찮은 결말이었다. 임상진 기자에게 내부고발 형식의 인터뷰를 한 것도 알고 보니 팀-알렙의 역공작이었다는 전개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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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P(요즘 젊은이들에게 강연카페가 왜 유행인지 아느냐며 설명하는 이철수)
강사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썼기 때문이죠. 여기 강사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도 기껏해야 삼십대 중반인거 눈치채셨습니까? 기성세대가 말하는 건 일단 불신하고 보는 세대입니다. 인터넷에는 말도 안되는 음모론이 판쳐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쳐준다 싶은 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아이들이에요. 우리는 이점을 이용해야 합니다.
2)82P(임상진 기자와 팀-알랩의 맴버이자 내부고발자인 찻탓캇과의 인터뷰 중에서)
아니, 기자님이 지금 왜 웃으시는지 알겠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기자님도 인터넷 하시잖아요. 거기서 싸움이 어디 팩트랑 논리로 하던가요? 논리 싸움은 두 사람이 아주 좁은 화제를 가지고 붙을 때, 그것도 그 두 사람이 좀 양식있는 사람들일 때에나 가능한 거에요. 인터넷 싸움은 정력과 멘탈로 하는 겁니다.
3)95P(팀-알랩의 삼궁이 이철수에게 줌다카페를 공격하라는 오더를 받고 카페를 둘러본 후)
삼궁은 자신이 미지의 섬에 막 도착한 모험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하나하나가 고유의 질서와 법칙을 지닌 생태계다. 그 세계들은 태어나고 성장하며, 진화하고 죽는다. 어떤 것들은 아름답고 어떤 것들은 위대하다. 어떤 섬의 숲은 산불에도 잘 버틴다. 그러나 모든 세계에는, 그 자신만의 약점이 있다. 작고 가늘지만 세계 전체를 떠받치는 중대한 고리가, 별 생각 없이 풀어놓은 쥐 몇 마리가 토착동물들을 전부 굶어죽게 할 수도 있고, 그 쥐를 잡으려고 뿌린 소독약이 섬의 나무를 몽땅 말려죽일 수도 있다.
4)147P(이철수의 부름을 받은 삼궁이 카페에서 만난 노인의 말)
경제가 사회분위기를 결정하는게 아니야. 사회분위기가 경제를 결정하는 거야. 집단의 힘, 군중의 마음!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믿음을 품게 되면 주변이 다 잿더미고 쓰레기 산이어도 상관없어. 인간은 강한거야. 그런데 멍청한 놈들이 그런 열광을 불러일으킬 생각은않고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다느니 뭘 포기한 세대라느니 하면서 오히려 기를 꺾어놔. 아주 악질적인 사고방식이야.
5)234P(임상진 기자에게 역공작을 한 찻탓캇이 중국밀항을 시도하던 중)
중국 배는 보이지 않았다. 홀린 듯한 기분으로 찻탓캇이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케이블타이가 뒤에서 그의 목을 감았다. 조여지기는 해도 풀리진 않는 플라스틱 끈이었다. 목이 너무 꽉 조인 나머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그 끈을 풀려했지만 무의미한 시도였다. 손톱에 목이 긁혀 피가 났다. 얼굴 핏줄이 터질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제3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장편소설. 그간 <표백>, <한국이 싫어서> 등 사회성 짙은 소설을 써온 장강명의 소설 <댓글부대>는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로 부박한 현실에 정면 돌파를 시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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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현
이 책은 갑자기 죽은 아버지의 지역구에서 보궐선거로 초선의원이 된 주인공 김서희가 경찰인 주민서로부터 토막살인사건 소식을 접하고 사체 일부로 발견된 손이 바로 자신의 전 남편 정상훈의 것이며 그가 끼고 있었던 대기업(SC)의 반지를 보고 이 사건이 해당 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직감. 이때부터 남편의 사망 과정을 추적하며 이 과정에서 김서희는 거대 기업과 종교 그리고 정치권의 검은 음모와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
메지시는 약간 괴랄한 반면, 플롯 중에 토막 난 신체 부위들이 각각 시간을 두고 발견되는 점은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영화 ‘텔미섬띵’을, 그리고 발견된 신체 부위가 각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성서의 일곱 가지 죄악을 다룬 브래드피트, 모건프리먼의 영화 “세븐”을 오마주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밥상 위에 반찬은 이것저것 깔아놓고 다 먹어보기도 전에 숟가락을 놓으라고 하는 불친절만 빼면 나름 읽을만 했다. 이 책이 왜 신체 부위로 장(章)를 구분하였는지, 그리고 왜 장 끝에 SC 화학의 사보 인터뷰 내용을 실어놨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민서와 호규가 자신의 동료 경찰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것만 알면 되긴 할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을 다 읽고도 반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는 못하겠다. 단지 인간이 인간 아님을 넘어 전혀 인간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모습. 이것을 두고 반인간이라는 것인지 혹은 인간이 되기 위해 반인간을 자처한다?? 라고?
이래서 내가 밥상을 일찍 걷은 책.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지적 수준이 미달하고 한번 밖에 읽지 않은 자의 변명이기도 하겠지만 인터뷰 내용을 한번 보라. 참으로 괴랄그 잡채 아닌가 말이다. 제발 글 쓰는 인간들아. 느그들 지적 기량을 펼치기 전에 제발 좀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쓰는 것에 먼저 공들일 것을 부탁하고 싶다. 이건 예술가들에게도 더불어 부탁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당신들 글도 진심 괴랄하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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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P
Q. ‘기업의 종교화’ 주장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종교는 본래 인류에게 필요악이었지. 필요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칼과 창, 전쟁의 무기가 되지. 그건 종교성이 잘못된 탓이 아니야. 종교의 외면이 왜곡된 채로 표현되기 때문이지. 그 왜곡된 상을 지우는게 바로 종교인의 역할이네.
2)83P
Q. 일전에 워크숍에서 종교가 기업의 발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A. 기업의 태동 원리가 무엇인가? 이윤, 곧 돈이야. 돈이 움직이는 곳에 기업이 움직이지. 그런데 돈이 의미 없음에 돈은 무의미의 무의미를 반복하는, 이른바 짐승의 먹이사슬과 아무런 차별성이 없어. 종교적 윤리가 돈을 향한 기업의 태동원리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무의미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새로운 의미로 일깨우는 것이야.
3)110P
Q. 기업이 사명은 무엇입니까?
A. 수많은 언어로 흩어졌다는건 신을 향한 욕망에 눈뜬 선각자들이 짐승인 사람들에게 자연의 원리로 생존할 수 있는 근간을 제시하기 위해 무지와 분열의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뜻하네.
4)211P
Q. 종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A. 참종교는 투명한 눈이라 할 수 있는 기업, 바벨탑의 역군들을 지원하고 밑의 세계, 자연의 질서에서 월권을 욕망하는 이들을 조정, 관리하는 역할을 대신하지. 그게 바로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참인간의 길이요. 사제는 그러한 길의 밑거름 역할을 하는 거야.시대의 수많은 성인이 그러했듯.
5)233P(김병식과 민서, 그리고 후배 호규는 결국 동료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 모든 음모에 거대한 빅브라더의 존재가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
그 순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요란한 총성이 터져나왔다. 놀라 고개를 든 민서의 눈앞에 차량에 기대고 서서 팀원들을 손짓으로 반기던 호규의 몸 전체에 핏방울이 번져 오르는 모습이 펼쳐졌다. 김병식의 죽음 역시 순식간에 벌어졌다. ⦁⦁⦁ 다른 부서의 강력계 형사들이 민서를 향해 저마다 다른 신체 부위를 조준하고 총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민서의 몸은 벌집이 되어벼렸다.
반인간선언 - 증오하는 인간, 개정판『열외인종 잔혹사』로 제14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주원규의 『반인간선언-증오하는 인간』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드라마로 제작되어 매회 화제성을 낳고 있는 OCN 드라마 〈모두의 거짓말〉의 원작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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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하재영
p.32
동물보호관리시스템에 등록된 수많은 유기견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옛 보호자나 새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열흘 뒤 독극물 주사를 맞고 죽을 개들이 내게는 또다른 피피로 보였다. 물론 이것은 감상적일 뿐 아니라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나의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기적인 감정이었고, 그들이 피피라는 인식은 이기적인 사랑에 동정을 덧씌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p.102
언어는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을 개선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언어적 영역보다 정치적 영역에 가깝다. 개의 지위가 가축에서 애완으로, 애완에서 반려로 격상되었다고 해서 상업화된 동물 사육 방식인 '최소 비용, 최대 생산'의 공식이 개를 비껴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p.140-141
사람의 안락사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누군가를 가장 고통 적은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동물의 안락사는 생명을 단절하는 이유를 불문하고 독극물을 주사하는 행위, 즉 죽임의 방법만을 가리킨다. 엄밀히 따지자면 유기동물의 안락사는 죽임의 방법과 상관없이 살처분이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보호소에서의 죽음을 안락사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 없는 죽음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p.199
개 식육업자들은 개가 축산물 위생관리법의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개는 아무 규제 없이 도살하고 유통해도 된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개농장 주인 김씨가 “개는 축산물에 안 들어가기 때문에 어떻게 잡아도 법에 하나도 안 걸려”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다. 그러나 축산물 위생관리법의 목적은 “축산물의 위생적인 관리” “품질 향상의 도모” “공중위생의 향상”이다. 그들의 말처럼 법률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마음대로 도살하고 판매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라면, 그들은 축산물 위생관리법의 목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p.230
문화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성역일까? 문화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침묵해야 할까? 그것만이 문화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사례들, 특히 약자와 관련된 주제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 상대주의가 아니라 윤리적 보편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윤리적 보편주의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지만, 모든 문화를 관통하는 도덕 원리가 하나 이상 존재한다”.
p.232
문화 이면의 역사와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저 눈물겨운 굶주림의 역사 속에서 개식용은 야만적이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이것이 우리가 문화 상대주의를 말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어떤 문화를 지속할 근거가 될 수 없다. 시대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문화와 도덕과 사고방식과 생활양식도 함께 달라진다.
p.259
모호하고 관념적인 죽음이 실재가 되는 것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뿐인지 모른다. 미코를 데리고 화장장으로 가는 길은 내게 그 첫 순간이었다. '개 한마리 죽었다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에 대해서도 상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다. 상실에서 중요한 것은 동물이냐 사람이냐가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p.289
만약 담뱃갑에 붙어 있는 경고문처럼 식품에, 화장품에, 의류에, 침구에, 그 제품의 생산을 위해 희생된 동물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 동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고문이 없으므로 기억은 의지의 문제가 된다.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장도 왜곡도 없이 동물은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같은 종의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책임도 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면 우리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 내가 갔던 그 장소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우리의 인간다움이라고 믿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달팽이들』 『스캔들』 등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 소설가 하재영의 첫 논픽션으로, 버려진 개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번식장, 보호소, 개농장을 취재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번식업자, 유기견 보호소 운영자, 육견업자 등 다양한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개 산업의 실태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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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별
<하얼빈> 김훈
p.32
오래전에 세례를 받던 때의 기쁨은 때때로 안중근의 마음속에서 솟구쳐올랐다. 그때, 멀리서 빛이 다가왔고 안중근은 밝아오는 영혼의 새벽을 느꼈다. 그때, 안중근은 악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아들이 세례를 받는 날 안중근은 그 때의 기쁨이 부활하기를 기도했다.
p.112-113
안중근이 하숙방으로 찾아와서 술을 사주면서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말을 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이 왜 왔는지를 대번에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에게 동행할 것인지를 대놓고 물어보지 않았고, 우덕순도 같이 가자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의 만주 방문을 알리는 신문을 보여주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가기로 되어 있는 운명을 느꼈다. 자신의 생애는 이 불가해한 운명의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우덕순은 생각했다.
p.149
안정근은 검은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안정근은 스물다섯 살이었는데 오래 산 사람의 무게가 풍겼다. 정대호는 안씨 문중의 사내들은 모두 느낌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세상과 차단되어 있으면서도 세상에 부딪치고 있었다. 사내들은 그 강고한 벽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었다.
p.212
이토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둘이서 말하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 정치적 대화는 없었다. 이 과정은 우덕순의 진술과 안중근의 진술이 일치했다.
이 두 사내들 사이에 어떤 신통력이 작동해서 이런 행동이 가능했던 것인지 미조부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 두 사람만의 일인가, 아니면 다른 조선인들에게까지 확산될 수 있는 일인가를 미조부치는 우덕순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p.217
안중근의 정치성은 이토와 코레아와 세계 공통어 '후라'를 그의 한 몸의 리듬으로 연결시키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거쳐서 대련에 닿는 철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었다. 세계 공통어 '후라'는 말해지지 않은 많은 말을 내장하고 있었다.
p.256
안정근은 면회실에 미리 와 있었다. 전옥과 옥리 세 명이 안정근의 뒤쪽에 앉아 있었다. 안중근은 면회실로 들어서면서 안정근을 보았을 때, 자신과 닮은 동생의 얼굴에 놀랐다. 놀라움은 친밀감이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이목구비가 닮았을 뿐 아니라,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그늘까지도 닮아 있었다. 이것이 혈육이구나… 끝날 날이 가까워지니까 안 보이던 것이 더러 보였다.
하얼빈‘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 ‘작가들의 작가’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이 출간되었다. 『하얼빈』은 김훈이 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인생 과업으로 삼아왔던 특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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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혜
1. 말 그대로야. 우리 노숙자들, 열외인간들 중에서 왕이 나타난다는 얘 기야. 그 왕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 도시를 완전히 뒤엎어버려서 우리 에게 권력과 힘을 송두리째 넘겨준다 이 말이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 면 이 왕이 곧 우리들의 메시아가 되는 거야. 왜, 성경 말씀에도 나와 있 지 않은가? 메시아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라고 말이야. 29p
2. 그러나 김중혁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아무리 멀쩡해 보이는 인간이 라 해도 단돈 오백 원조차 없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윤마리아는 실제 로 땡전 한 푼 갖고 있지 않았다. 알지 않는가? 그녀가 오늘 돈 삼천 원이 없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세트도 주문하지 못하고 천오백 원짜리 햄버 거 하나만 주문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나마 이천 원에서 천오백 원을 쓰 고 남은 오백 원짜리 동전으로 이곳을 찾은 것이다. 125p
3. 그렇지만 분위기는 한마디로 엄숙함, 그 자체다. 떨거지 양머리들의 일사불란한 조명은 두목 양머리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에 충분했고, 두목 양머리는 그러한 상황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려는 듯 더욱 낮게 목 소리를 깔고 준비해온 소위 원고를 신중히 검토하는 모습을 연출해 보 였다. 177p
4. 장영달은 이제 거칠 것이 없게 된 자신을 보며 더욱 강렬한 전의를 불 태웠다. 그와 함께 소적 자신의 군인 정신을 다시금 소생시키기 위해 추억의 판타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월남전에서 소총에 장착된 칼로 베 트콩을 살해하던, 오로지 생존을 위한 잔인함 말이다. 그때 장영달은 정 말로 그렇게 믿었다. 베트콩의 숨통을 끊어놓는 일이 진정 나라와 국가 를 위한 일이라고. 지금과 그때가 뭐가 다른가. 211p
5. 하지만 무리들의 대세가 그러한 본능에 가까운 생존 욕구에 포박되었 다 해서 모두가 그렇게 공통의 목표를 좇아가는 건 분명 아니다. 그 중에 는 엄청나다고 할 만한 도심지 한복판에서 벌어진 희대의 인질극에 대한 음모의 핵심을 파헤치고자 하는 공공의 의협심에 불타오른 소영웅주의 자가 분명 존재했고, 지금 그 문제의 주인공이 일을 벌인 결과가 한 양머 리의 간질 같은 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255p
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루동안, 퇴역군인 장영달, 노숙자 김중혁, 외국계 제약회사 인턴 윤마리아, 게임을 좋아하는 청소년 기무 네 주인공이 우연히 코엑스몰에 모여 양머리 탈을 쓴 집단들과 벌이는 소동을 그린다. 심사위원들에게 '거침없는 문체와 발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총체성을 빚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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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p. 53
미개가 어디에 먼저 오느냐. 부자 동네에 먼저 와요. 트랜드라는 게 말이에요. 절대로 가난한 동네에서 부자 동네로 거슬러올라 가는 법이 없어요. 항상 부자 동네 문화가 가난한 곳으로 퍼져요
p. 54
현재를 제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사람이 과거에 사로잡혀 있거나 미래에 홀려 있으면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해요
p.70
그게 다 가면이었던 거지. 지금은 안 그렇잖아. 에너지? 당당함? 내가 누굴 이끌어? 다 전혀 아니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싹 바뀌었어. 아 그러면 요즘은 밖에선 이 모습이 아니야? 지금은 되게 당당해 보이는데. 항상 나를 이끌고. 이게 또다른 가면인 거야.
p.127
과거와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재만 보는 사람이 더 유리할 때도 있어. 여자가 말했다. 과거를 잊을 수 있으니까. 과거를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널 지켜줄게.
p.161
자동차들이 눈에 불을 켰다. 그것들은 형체를 잃은 뒤 붉고 노란 빛의 점선이 되었다. 그 점선은 뭉쳐서 다발이 되어가면서도 다른 다발과 엉키거나 꼬이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다. 빛의 선에는 시작도 끝도 없었고 잠시 뒤에는 방향도 없어졌다. 오직 패턴만이 있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조경란, 박현욱, 박민규 등 역량 있는 신진작가들을 발굴해온 문학동네작가상의 이번 수상작은 한겨레문학상,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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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p. 60
있잖아. 나는 네가 정말 예뻐서 좋았어. 꽃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 다 피어난 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어. 정말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어. 그 모든 아름다운 순간들이 다 나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어. 함부로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았어. 꺾어질 것 같았어.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안아 주고 싶었어. 소중하게 끌어안고 싶었어.
p. 96
진짜와 가짜가 사실은 다 하나일 뿐이야. 한 가지에서 나오는 것이지. 변한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나는 애초부터 이런 존재였어. 네가 나를 아름답게만 바라보고 있었잖아 그것만이 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그것이 진실이라고 혼자 믿어버리고 있었잖아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동시에 매우 쓰고, 거칠고, 추악한 존재야. 한데 너는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것만 바라보았잖아. 이면에 감춰진 진짜를 보지 않고 있던 건 바로 너잖아
p. 111
컵 안에 든 물처럼......아주 맑고 고요했다. 영원히 그렇게 맑고 고요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고, 휘젓지 말고, 그냥 놔두어야 했다. 이 맑고 잔잔한 물을 휘젓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인가? 컵안에 든 물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러자 그 안에 가라앉아 있던 흙이 순식간에 일어나 위로 솟구쳐 올랐다.
p. 124
피부 색깔까지도 모두가 다 달랐다. 그러나 그 어떤 아이도 밉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다, 저마다의 빛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빛을 감추거나 숨기는 법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아이들 모두가 저마다의 빛으로 홀연히 빛났다
그랑 주떼젊은 감성을 위한 테이크아웃 소설 시리즈 「은행나무 노벨라」 제2권 『그랑 주떼』. 도서출판 은행나무에서 200자 원고지 300매~400매 분량으로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만큼 속도감 있고 날렵하며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형식과 스타일을 콘셉트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두 번째 작품은《제리》, 《정크》의 저자 김혜나 작가의 소설이다. 발레에 적합한 몸을 지녔지만 정작 춤에는 재능이 없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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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윤희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p76
진실을 존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쓰면, 정성스러운 거짓말이어야 할 소설이 그저 개소리가 되어버린다고. 그리고 소설에서 진실을 존중하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가 사실성, 혹은 개연성, 핍진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p112
그렇다면 문학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보여주기가 아니라 말하기가 소설의 진짜 힘이고, 소설이야말로 사유와 사변을 담는 예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상업계 관계자들을 만난 뒤로 나는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길게 웅변을 하거나 한 문제를 골똘히 고민하는 장면을 집어넣는 것을 더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조금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나의 소설 쓰기는 이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p190
그러나 “요즘엔 별걸 다 해야 돼요”라는 푸념 아래에는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불안이 깔려 있다. 나도, 편집자도, 마케터도, 서점 관계자도 그렇다. 우리가 점점 책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팔고 있는 것 같다는 존재론적 위기감. 애써 아닌 척해도 콘텐츠와 책은 다르고, 크리에이터와 작가도 엄연히 다르다. 책은 글자로 돼 있고, 작가는 글자로 작업한다. 책의 본질이 굿즈나 토크에 담길 리도 없다. 우린 다 책이 좋아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p218
작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아마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 되는 경우이리라. 무슨무슨 소설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p293
막연히 ‘멋진 소설을 쓰고 싶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되고 싶다’는 마음만 품고 있던 나는 박 편집자와 작업하면서 점점 내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것은 달리 말해 내가 어떤 소설가인지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다.
p310
혹시 한국문학 생산구조 자체가 어떤 영역을 재현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건 아닐까? 이런 가운데 ‘그들만의 문학’이라는 비판이 힘을 얻는 것 아닐까?한국문학장의 관심사가 특정 영역에 치우쳐 있지는 않은가?
<산자들>
p72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단어가 공허하고 기만적인 구호처럼 들렸다. 직장의 의미라든가 업의 본질이라든가 자아실현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연아는 문득 그들이 만들던 사외보에 싣던 글, 명사가 돌아가며 쓰는 ‘추억의 그 맛’ 칼럼이라든가 미식 기행이라든가 음식 장인 인터뷰에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었을까 생각했다.
p97
죽은 자들 편에 선 사람들은 청와대, 시청, 산업은행, 국가인권위원회,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서 행사를 벌였다. 산 자는 국회, 과천 정부 청사, 세종로 사거리,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었다
p156
“아가씨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요.”
노인이 말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p226
면접관들은 절박해 보이는 지원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p268
제가 놓친 게 뭡니까? 애초에 뭔가 괜찮은 걸 노려볼 기회가 저한테 있기나 했습니까? 처음부터 컵에 물은 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 컵의 물을 마시느냐, 아니면 그마저도 마시지 못하느냐였습니다. 다시 대학교 1학년이 된다 해도 똑같이 할 겁니다. 대외 활동이 아니었다면 저는 대학 생활 내내 빌빌대면서 허송세월했을 겁니다. 그렇게 빌빌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단 말입니다!”
p378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말하고 듣는 세계’보다 ‘읽고 쓰는 세계’를 지향하며 책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누구나 책을 써보자고 제안했던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유유히)에서는 자신의 직업인 ‘소설가’가 헌신할수록 더 좋아지는 직업이라고 당당히 고백하며, 부지런히 글을 지어 먹고사는 소설가의 일상과 더불어 문학을 대하는 본심을 숨김없이 풀어놓는다. 소설가 장강명은 오후 11시 반쯤 자고 오전 6시 반 전에 일어난다. 글 쓰는 시간은 스톱워치로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장강명 연작소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문예지에서 발표된 1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노동과 경제 문제를 드러내는 소설들은 각각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 총 3부로 구분되어 리얼하면서도 재치 있게 한낮의 노동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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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유진과 데이브> 서수진
1. 언뜻 보면 부드러운 색을 빠르게 칠한 인상주의 그림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세밀하게 완성한 후에 뭉갠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진이 미술을 전공하던 시절 몰두했던 작업과 비슷했다.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뭉개기 전의 그림을 찾아내려 했다. 해가 지는 시간, 바닷가의 집, 커다란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두 명의 사람,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들의 표정을 살피려 유진은 눈을 더 가늘게 떴다. p.21
2.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헤어지자니까 내가 그러자고 한 거잖아. 그만하고 싶다며!” 데이브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로 답답한 건 유진이었다. 답답하고 화가 나고 억울했다. 너무 억울한 나머지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데이브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유진을 안았다. “왜 울어. 울지 마.” 그러니까 데이브의 말은 이랬다. 자신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유진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관계라는 게 한쪽이 끝나면 끝난 게 아니겠냐고. 유진이 그렇다면 자신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데이브의 말을 들으며 유진은 기가 찼지만 더 이상 화낼 기운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혼잣말처럼 한국어로 “존중 두 번 했다간 큰일 나겠네”라고 중얼거린 게 다였다. p.67
3. 데이브가 툭툭 유진을 쳤다. 유진이 돌아보다 데이브는 소파 위 벽에 걸린 캔버스를 가리켰다. 캔버스에는 유진의 전 연인이 뭉개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유진은 그 그림을 오랜 시간에 걸쳐 공들여 그렸고, 완성한 후에 모두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뭉개진 그의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게 ‘본질’이었다. 그 이후로 유진은 같은 작업을 몇 년간 이어 나갔다. 뭉개버릴 그림을 애써 그리는시간과 애써 그린 그림을 다 뭉개버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는 것처럼 계속했다. 그때는 그랬다. p.98
4. “크리스 닮았지?” 데이브는 킥킥댔다. 스케치 속 살인범은 정말로 데이브의 친구 크리스를 닮아 있었다.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친구였다. 바로 지난주에도 데이브와 함께 크리스를 만났으므로 그가 살인범일 리 없지만 유진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크리스한테 보여줘야지.” 데이브가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 유진은 핸드폰을 들어 선고공판을 검색했다. 한국 뉴스에도 보도가 되었다. 기사에는 피해자의 어머니가 법원 앞에서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다. 유진은 기사를 읽다 말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p.160-161
5. 유진은 모나미술관에 가려고 했다. 뒤돌아 앉아있는 팀을 보고,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괴롭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게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괴로운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싸우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혀서 몸의 무엇도 빼앗기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의 침묵을 대답으로 삼아 그에게서 돌아서고 싶었다.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고 미술관을 빠져나와 배를 타고 서서히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p.179-180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임성순
1. “의술이 인술이라고? 개뿔. 의술은 기술이다.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수을 발판 삼아 지금까지 발전한 거야. 알량한 도덕 나부랭이가 의학 발전에 기여한 적은 없어. 한 명을 실수로 죽이면 그렇게 배운 기술로 열 명을 살리면 돼. 그게 의학의 도리지.” p. 56
2. 애초에 의사로서의 삶이 그의 기대와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술로 헌신하는 존경받는 의사라는 소박한 환상은 대학병원에 인턴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산산이 깨졌다. 그곳에선 수가와 특진료로 계산되는 숫자 속의 환자들과 하나의 기능인, 혹은 전문직으로서의 의사만이 존재했다. 물론 어떤 의사애가 꽃피는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보람조차 밀려오는 환자들과 피곤 앞에서 서서히 빛을 바랬고 어느새 감흥 없는 일상으로 변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처음 기대했던 고결함이나 소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이게 맞는 거라고, 애초에 그가 원했던 의사로서의 삶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할 무렵, 한 사내의 목숨을 앗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까지 저지른 것이다. 그 날 이후 병원의 모든 것은 나락 그 자체였다. p.109
3. “당신들은 늘 그런 식이죠. 당신들의 잣대에 우리를 구겨 넣고 그걸로 우리를 정의 내리죠.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혹시 제 이름, 알고 있나요?” 범준의 얼굴은 굳었다. 그와 8개월을 일했지만 범준이 그를 부르는 호칭은 늘 같았다. 닥터. 이름을 불러본 기억은 없었다. “그렇죠. 당신들에게 우리 모두는, 이 나라는, 우리 민족과 심지어 우리들에게 죽은 아기들조차 하나의 거대한 익명일 뿐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척하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전형일 뿐이죠. 그래도 한 가지는 고맙습니다.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한지 아십니까? 당신이 첫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었죠. 의사의 사회 참여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세요. 그 말이 절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p.189
4. 박 신부는 자신이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아침 성당에서 자동차를 타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박 신부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자기희생과 선행에 대한 이야기라고, 사람의 고귀함은 신분이 아니라 그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며, 사랑의 실천과 참된 이웃이 되는 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검문소에서 달아난 직후 그가 깨달았던 것은 그것이 용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방수포 아래 수없이 늘어선 시신들을 보고 그는 분노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달아났다. p.253
5. “하느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을 주십니다. 그 시험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보다 완전하게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다는 이유로 결코 그분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철컥. 박 신부의 안에서 어떤 스위치가 켜졌다. 박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한국 학생 몇이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긴 했지만 따라 나오진 않았다. 나는 얼마나 완전해졌는가? 오후의 하늘을 청명했다. 박 신부는 멍하니 앉아 지평선을 수놓은 성당들의 첨탑과 지붕, 성인들의 조상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었다. 설사 신이라 해도. p.317
유진과 데이브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마흔 번째 소설선, 서수진의 『유진과 데이브』가 출간되었다. 2020년, 장편소설 『코리안 티처』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서수진의 이번 작품은 국적과 인종을 달리하는 두 연인의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은 소설이다.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될 이 나라의 진짜 모습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세계문학상 수상작가 임성순의 세 번째 장편소설. 작가가 매스컴에서 누차 밝힌 바 있는 '회사 3부작'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앞선 작품들과 다르게 이번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뭇 진중하고 인간의 본성을 향해 좀더 고뇌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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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빈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1. P130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이었다. 사회도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장소이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도 자리의 문제였다. 이것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넓게는 이 세상에서, 좁게는 이 집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2. p76
책이 한 권도 없는 집을 상상하니 어쩐지 쓸쓸했다. 나는 시를 프린트한 A4용지를 벽에 붙였다.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같은 시구를 바라보며 이런 문장이 있는 공간이면 아주 누추하지는 않은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3.P83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장소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 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4.P133
'집'은 여자가 가사 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는 공간, 독립과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거나 최소한 보류하게 만드는 장소다. 그녀가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지적 갈망을 충족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곳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5.P155
물론 나는 화물차를 운전하는 아빠가 부끄럽지 않았다. 착해서가 아니라 직업의 귀천을 따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워야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헬로베이비>
1.P16
난임부부 여러분 힘내세요.
아기는 발이 작아 아장아장 천천히 온답니다.
2.P52
"아버지, 글쎄 내가 무정자증이래."
그 순간 시아버지의 얼굴은 콘크리트처럼 굳었다.
"무정자증?"
"응. 아버지 아들 씨 없는 수박이래. 그러니까 지은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
시아버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속이 안 좋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3.P93
"나 3년 동안이나 임신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난임병원 다닌 지는 2년 됐어. 자연임신 시도할 때도 당신 제대로 협조 안 했지. 배란일에 피곤하다고 잠자리 피하고. 그래서 시험관 하기로 한 거잖아. 신선 7회, 냉동 2회. 아홉 번 모두 실패했어. 두 번도 아니고 아홉 번인데 그걸 모른단 말이야? 그 무서운 난자 채취를 일곱 번이나 했어. 그런데 당신 정말로 그걸 모른다는 거야?"
혜경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얼굴을 살짝 위로 치켜들었다.
"아니 모를 수도 있지..."
4.P136
"나한테 아기는 중국어 같은 거야. 배워두면 충분히 유익하고 그것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거라는 걸 알지만 굳이 내게는 필요 없는 것. 알다시피 난 어려서부터 유럽 문화에 심취했어."
5.P172~173
그 순간 문정의 귀에 새벽 시간의 키보드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타다닥 타다다닥. 완벽해 보이는 박소영이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기였다니.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그녀가 완벽한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공간으로서의 집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전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으로 국내 논픽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하재영 작가가 집에 관한 에세이로 돌아왔다. 그는 신작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일생에 걸쳐 지나온 집과 방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적산가옥촌, ‘대구의 강남’이라 불렸던 수성구의 고급 빌라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헬로 베이비장편소설 《콜센터》로 제6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한 김의경의 신작 《헬로 베이비》가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평균 결혼 연령의 변화, 삼십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임신과 출산을 계획할 수 있는 현실. 그 과정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심리적 압박.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사회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길고 지난한 시간을 견디고 싸워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헬 로 베이비》는 그러한 고민을 안고 난임 병원에서 만난 삼사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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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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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완료
김영훈
유진과 데이브 – 서수진
호주인 데이브와 대한민국인 유진은 서로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문화, 인종, 배움, 성격 등 다양한 사회의 구성요소를 다르게 받아들여 30여년의 긴 세월을 보내온 서로 다름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났고, 사랑을 가졌고, 서로의 가족들과 만남도 가지며 교제의 깊이를 더 깊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소한 것부터 가족들과의 만남까지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었으며, 그 결과 만남을 가지는 내내 싸움과 싸움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데이브는 가족들에게 유진을 소개한다는 생각 속에는 단지 소개일 뿐이며 그녀가 데이브의 가족들 속으로 밀접하게 들어온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유진은 자라온 문화에서 이성의 가족들에게 인사한다는 상황은 어렵고 힘든 일이며, 그의 가족들 속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둘 사이의 생각의 차이가 싸움으로 치환되어지곤 합니다. 반대적인 상황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다가오는데 유진의 집에 인사 오게 되는 데이브의 행동에서 유진은 둘 사이의 크나큰 거리가 존재함을 인식합니다.
유진과 데이브의 만남과 사랑과 헤어짐을 읽으면서 생각의 차이가 우리 삶에 깊이 있게 자리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인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동료라는 이름 아래에 유치원, 초, 중, 고를 거쳐 대학에 성인으로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직장이라는 새로운 공간 안에서 더 다양한 구성요소들로 뭉치고, 뭉개지고, 떨어지면서 싸움 아닌 싸움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생각의 차이를 이해와 배려의 폭만큼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 되어집니다. 특히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베풀고자 한다는 것은 유진과 데이브의 상황처럼 상대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 원하는 것, 기분 좋게 다가가는 베품, 베품에 대한 무보상 등의 행위로 베품을 실천한다면 유진과 데이브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결과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였다면 이해와 배려의 폭을 늘려 나아 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유진과 데이브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마흔 번째 소설선, 서수진의 『유진과 데이브』가 출간되었다. 2020년, 장편소설 『코리안 티처』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서수진의 이번 작품은 국적과 인종을 달리하는 두 연인의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은 소설이다.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될 이 나라의 진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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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별
<고래> 천명관
p.33
어째서 노처녀는 불쌍한 반편이를 캄캄한 물 속으로 밀어넣었을까? 자신에게 끔찍한 사매질을 가했던 주인집에 복수를 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함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p.96
그리고 그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허상을 좇는 동안 나오꼬만 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청춘도 이미 모두 흘러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잔인한 운명을 저주하며 자신의 인생을 희롱한 신에 대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가 택한 복수의 방법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였다. 그리고 그 맹세로 그는 손가락을 하나 더 잘랐다.
p.141
걱정하지 마, 꼬마 아가씨.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자신이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춘희가 점보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자 점보가 말했다.
정말 그럴까?
춘희가 헤어지기 싫다는 듯 점보의 굵은 다리를 껴안자, 이를 위로하듯 점보는 긴 코로 춘희를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p.177
춘희는 점보의 다리를 끌어안고 자신이 처음 세상에 나와 맡았던 냄새를 기억해냈다. 점보도 긴 코로 춘희의 몸을 부비며 반가운 듯 힘차게 콧김을 뿜어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점보와 춘희는 그렇게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으며, 훗날 점보가 불행한 사고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둘은 언제나 한 몸처럼 붙어다니며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p.251
文은 점점 더 말을 잃어가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하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현실로부터 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것으로, 사람들간의 대화와 교통으로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p.330
벽돌에 손을 대는 순간, 그녀의 영민한 감각은 그것이 그냥 벽돌이 아니라 바로 그녀가 공장에 있을 때 文과 함께 만든 벽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비록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그 흔적이 희미해지긴 했으나 그것은 분명히 남발안의 공장에서 만든 벽돌이었다. 그녀는 文의 얼굴과 남발안의 공장 풍경이 떠올랐다. 금복과 점보, 쌍둥이자매의 얼굴도 떠올랐다. 벽돌을 만지는 동안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으며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없는 상실감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교도소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p.362
흙과 불과 물로 빚어낸 벽돌은 공간을 가르고 비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온기를 보존하고
공기를 정화해주는 훌륭한 건축자재였지만 그런 실용적인 쓰임새는 춘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벽돌은 떠나간 사람들을 향한 비밀스런 신호이자 잃어버린 과거를 불러오는 영험한 주술이었던 것이다.
<헬로베이비> 김의경
p.39
문정의 인생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문정은 늦된 아이였다. 문정은 딱히 잘하는 것이 없는 학생이었다, 대학 입학도 쉽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하나씩 있다는 재능이 자신에겐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저출산 시대에 자신이 난임 환자라는 것이 특별히 더욱 절망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p.70
소라는 수술실 거울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맞추며 파이팅을 외쳤다. 이제 소라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소라는 2년에 걸쳐 다섯 번의 난자 채취를 통해 넉넉히 52개의 난자를 냉동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보험을 든 것처럼 든든했다. 이제 냉동해둔 난자와 만나게 할 정자만 구하면 된다.
p.94
감정적이라고? 그럼 넌 이 일에 전혀 감정 동요가 없단 말이지? 혜경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지자 남편은 너무 바빠서 자세히는 몰랐다고, 그래도 자신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라면서 미안하다고 말한 뒤 서재로 도망쳤다. 혜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남편은 학구열이 강한 사람이었다. 궁금한 건 파고들어 밤을 새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모른다고 한다. 남편은 이 모든 과정에 그저 무관심한 것이다. 혜경은 시험관 시술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울었다.
p.121
은하는 시댁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서 아이를 낳으라고 독촉하는 친정엄마도 스트레스를 주는 건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지금은 괜찮아도 나이가 들어 자식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으면 멀어지는 것이 부부 사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아들과 딸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는데도 이혼을 했다.
p.139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설주는 임출육에 대한 게시물만 올렸다. 그것이 설주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있을 때도 설주의 신경은 온통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쏠려 있었다. 임신 출산 육아. 그것이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설주의 삶이었다.
p.168
정효는 그동안 믿고 의지했던 의료진이 혹시 자신에게 사기를 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임신 가능성이 없는 자신에게 언젠가 아기가 찾아온다고 거짓말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중략) 정효는 지옥 한복판에 있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그곳은 지옥이었다.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문학동네 소설상이 오랜만에 당선작을 냈다. 주인공은 지난해 여름 '문학동네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천명관씨. 등단작 '프랭크와 나'를 제외하곤 아무 작품도 발표하지 않은 진짜 신인이다.
헬로 베이비장편소설 《콜센터》로 제6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한 김의경의 신작 《헬로 베이비》가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평균 결혼 연령의 변화, 삼십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임신과 출산을 계획할 수 있는 현실. 그 과정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심리적 압박.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사회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길고 지난한 시간을 견디고 싸워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헬로 베이비》는 그러한 고민을 안고 난임 병원에서 만난 삼사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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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빈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1. P.47 우리 가운데 누가 모든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관습과 제도화된 폭력을 당연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P.52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 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이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3. P.105 유럽 국가들이 개정한 법률에 따르면 동물은 인간도, 물건도 아닌 제3의 존재라는 법적 지위를 가진다. 사람과 물건만을 구분하던 이분법 체계가 권리의 주체인 인간, 권리의 객체인 물건, 그리고 동물이라는 삼분법 체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같은 전환은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자 감정을 가진 개체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4.P.117 그런데 시금치 한단도 원산지를 표시하는 세상에 반려동물은 어느 번식장에서 태어났는지, 그 번식장 환경은 어떤지, 모견과 종견은 누구인지, 임신했을 때 모견이 뭘 먹고 어떻게 지냈는지 아무도 몰라요.
5. P.200
축산물 위생관리법에 들어가지 않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 동물에게 투여하는 약물의 기준치와 휴약 기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유통 경로 확인을 할 수 없는 것, 안전과 위생을 담보할 수 없고 위해가 발생해도 추적할 수 없는 것을 먹는다는 의미다.
6. P.212 공장식 축산의 핵심은 위생과 안전이 아니라 저비용과 고효율이다. 우리는 공장식 축산을 육성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정부 예산을 쏟아 붓고, 그래서 발생한 조류 인플루엔자와 살충제 달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또다시 막대한 혈세를 쏟아붓는 나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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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 p.66
주변에 둘러쳐진 벽의 높이가 달라서 그런 건데 말이야. 어떤 부분은 벽이 사다리보다 높은 거라고. 그럴 때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실제로는 나는 가끔 삼차원을 넘어서 시공간연속체를 어떤 지점에서 굽어보고 내다보는 거고, 너는 삼차원 안에 갇혀 있는 거지. 그래서 나는 과거나 미래의 어떤 지점들이 보여. 하지만 안 보이는 부분도 있어. 중간에 장애물이 있는 곳도 있고, 너무 멀면 흐려지기도 하고.
그 연속체 이야기 좀 그만해.
2.P.79
남자는 논설위원에게 얼른 자기를 소개했다. 논설위원이 석 달 전에 쓴 칼럼 때문에 전화를 건 것이 맞는다고 말했다. 남자는 말하는 기계처럼 말했다. 제가 그 동급생 살인사건의 가해자인데요, 정당방위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전화 거신 분이 가해자인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말문이 막혔던 논설위원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3.P.10-11
우리들한테는, 남자가 말했다. 시간과 공간이 그렇게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야. 시공간연속체 밖에는 시간이 없어. 시공간연속체 안에는 시간이 있고. 그게 전부야. 대부분의 우주 지성체들에게는 시간도 공간처럼 앞이나 뒤가 없어. 굳이 정의하자면 먼저 보이는 게 앞이고 나중에 보이는 게 뒤라는 정도지. 반대편에서 보면 정확히 반대가 되는 상대적인 개념이야.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한쪽 방향으로 체험하지. 그 속도를 조절하지도 못하고. 아주 드라마틱해. 모든 사건을 한쪽 방향으로, 단 한 번씩만 경험하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리석기도 해. 왜 인간들만 그런 식으로 시간을 체험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어떤 진화상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나는 ‘처음에는’ 공간 사이에 그냥 흩어져 있었어. 그러다 외우주를 떠도는 혜성을 보았어. 혜성에서는 재미있는 노래가 들렸어. 반음들이 불규칙하게 섞여서 특이한 멜로디였는데 리듬은 단순했어. 노래는 모두 패턴이야. 그래서 나는 모든 노래에 익숙해. 나는 혜성에 올라탔어.
혜성이 지구와 달 사이에 있을 때 지구로 내려왔어. 그믐달일 때였어. 달빛에 따라 바다가 움직이며 노래하는 패턴을 보았지. 바다에서는 파도 속에 있기도 했고, 다른 동물들 속에 들어가 있기도 했어.
4 P.140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더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남자가 말했다. 낮에는 너무 가느다랗고 빛이 희미해서 볼 수가 없어.
저녁에 가느다란 달 몇 번 본 거 같은데. 해가 막 지려고 할 때.
그건 초승달이야. 초승달도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지만 그믐달이랑 미묘하게 뜨는 시각이 달라. 초승달은 해가 든 다음에 져서, 해가 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져. 그때 볼 수 있는 거지. 그믐달은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5.P.143
우주 알은 그 단체관람객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자유티켓 같은 거였어.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한참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지나친 조각품을 찾아 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어. 이층을 건너뛰고 곧장 삼층으로 올라가거나, 오층부터 거꾸로 내려오면서 전시물들을 감상할 수도 있을 거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달팽이들』 『스캔들』 등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 소설가 하재영의 첫 논픽션으로, 버려진 개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번식장, 보호소, 개농장을 취재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번식업자, 유기견 보호소 운영자, 육견업자 등 다양한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개 산업의 실태를 그려낸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조경란, 박현욱, 박민규 등 역량 있는 신진작가들을 발굴해온 문학동네작가상의 이번 수상작은 한겨레문학상,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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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혜
1. 엄마는 나를 “꺾었다”고 표현하지만 당시에는 ‘꽃 피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여성의 일생이란, 특별한 사람으로 고독하게 지내는 삶과 평범한 사람으로 원만하게 지내는 삶을로 이분되어 있어고,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후자가 더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다.(34p)
2. 결혼한 지 7,8년 되었을 때 처음으로 ‘결심’을 했어. 그전까지는 ‘주어진 상황’에서 ‘해야 하는’일만 했거든. 내 결심이 뭐였냐 하면 ‘포기하자’, 뭘 포기하느냐 하면 이야기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 둘은 연장선상에 있는 거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들어주고 알아주기를 기대하는거니까.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 나만 아프고 괴로워진다는 걸 깨달았어.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말하지도, 바라지도 말자. 그렇게 아빠, 할머니, 시댁 가족들에 대해 다 내려놨어. 그런데 너희만큼은 안되더라. 자식 빼고는 진즉에 다 내려놨어, 고작 30대 초반에.
(62p)
3. 얼마 전에 통화하다가 네가 10대 시절에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나는 왜 그 당시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알아. 네가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었겠니. 나를 신뢰하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니. 너는 엄마를 강요하고 지시하고 야단치는 사람으로 여겼을거야.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 순간을 혼자 감ㄷ아함 외로웠을 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106p)
4.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양재 학원에 다니든, 업계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든 본격적으로 시작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30대 후반이면 아직은 젊은데, 기술을 배워서 내 걸 일궈나갈 수 있는 나이인데....... 친구 말처럼 명인까지는 아니어도 평생 직업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우리 가족이 먹고살 걱정 없이 지냈을 수도 있지. 살면서 이게 가장 후회스러워. 자립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을 날려버렸던게,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로 만들지 못했던 게.(139p)
5. 할머니는 신여성을 자처하는 가부장제의 수호자라는 점에서 모순적이었고, 전통적 어머니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전통적 고부 관계에 얽매여 있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적이었다. 가족관계에서 타자화된 ‘집안의 이방인’, 즉 며느리의 봉사에 가까운 희생 없이는 일상을 영위하지 못했던 할머니에게 주체성에 대한 의지가 있었을까? 또 다른 여성의 헌신에 의존해온 할머니에게 자존감은 자기애나 자기중심성과 동의어가 아니었을까?(199p)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이 책의 표제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썼던 유명한 문장이다. 이 선언은 모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내 안의 ‘여성적 힘’을 선포하는 것이고,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며,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여성에게는 모두 어머니가 없다.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작가 하재영이 어머니의 생애사를 인터뷰하며 그와 교차하는 본인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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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윤희
p27
“쿠데타가 일어날 걸세. 장난 아니게 엄청난 규모로 터질 텐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쿠데타를 일으키는 세력이 우리 노숙자들이라는 사실이네.”
“노숙자들?”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이 도시에서 쓰레기로 분류되는 열외인간들 전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그게 가능할까?”
“가능과 불가능 여부를 묻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야. 우리는 단지 그런 예언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믿음을 갖는 것뿐이네.”
p71
기무가 총을 들고 이곳저곳 설레발치고 다니거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대끼는 지하철 안에서 노골적으로 총을 쥐고 있어도, 그들은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같이 피곤하고 잔인할 만큼 억눌린 얼굴을 하고서, 휴대폰을 유년 시절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거나 타블로이드판 무료 일간지를 뒤적거리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p108
피에스 : ‘최악’ 멤버들의 특징을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최악’ 멤버들은 모두 양의 탈을 쓰고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답니다. 괜히 일반인이나 경비 아저씨들한테 킬십건을 함부로 사용해 봉변당하지 마시고, 반드시 양의 탈을 쓴 ‘최악’ 멤버들에게만 격발하세요.
p180
그대들이여! 중요한 건 이 의식을 통해 그대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공상할 수 있는 자유, 파괴할 수 있는 자유, 동정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꽉 짜여 있는 기계적인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철저하게 무책임하고 황당무계한 미답의 경지를 향유할 수 있는 자유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p261
사람 죽어나가는 게 좀 끔찍하긴 해도, 서울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교통사고와 암으로 송장이 되어 죽어나가는데 이깟 게 뭐 대수겠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같은 종교인끼리 이해 못할 게 뭐 있겠어요. 그러니까……, 뭐랄까? 이번 정규직 사원 인사 발탁 건 말이에요.음…….
p282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참 메시아가 맞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우리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
“무슨 근거로?” 김중혁이 그렇게 따지듯 물었으나, 여두목 양머리의 답변은 확고했다.
“시나리오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루동안, 퇴역군인 장영달, 노숙자 김중혁, 외국계 제약회사 인턴 윤마리아, 게임을 좋아하는 청소년 기무 네 주인공이 우연히 코엑스몰에 모여 양머리 탈을 쓴 집단들과 벌이는 소동을 그린다. 심사위원들에게 '거침없는 문체와 발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총체성을 빚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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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윤희
p22
내가 이 취재를 통해 보려 하는 것은 한국 사회였다. 공채라는 특이한 제도, ‘간판’에 대한 집착, 서열 문화, 그리고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시스템이 어떻게 새로운 좌절을 낳게 됐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p51
문학상의 마케팅 파워도 쪼그라들었다. 상이 그렇게 많으니 상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독자들이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장편소설공모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은 대개 초기 수상작들이었다.
p63
내부 사다리가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에 복권이나 다름없는 공모전이 오히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유능한 인재들이 투고보다는 공모전 도전을 택하면서 업계의 내부 사다리는 더욱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공모전 경쟁률은 점점 더 높아지며, 신인들은 여기에서 경력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p88
그들이 발견하고 키우고자 했던 것은 ‘재능’이었다. 한 명의 뛰어난 소설 천재를 발굴할 수 있다면 그 비용은 거액이 들어도 아깝지 않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진흙 속의 천재를 평론가가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시대인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을 뿐이다.
p137
엘리트들이 한계에 부딪히는 영역이 한곳 더 있다.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작품’을 알아보는 분야다. 전복적인 작품은, 문자 그대로 체제를 전복하려 든다. 따라서 구체제의 엘리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저항하게 되기 쉽다. 상상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작품은 엘리트의 상상력 밖에 있다. 그러므로 엘리트는 그런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종 엘리트들이 일반인보다 더 느리다. 왜냐하면 자기 상상력 바깥에 뭔가가 더 있다는 사실은, 엘리트보다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p313
한국 소설 시장과 노동시장에서 간판이 그토록 중요한 근본 원인은 그곳이 ‘깜깜이 시장’이기 때문이다. 책을 쓰고 만든 사람과 그 책을 읽을 사람, 구직자와 채용 기업 사이에 정보 비대칭성이 너무 크다. 정보가 적은 쪽은 손실을 피하는 안전한 선택을 하려 한다. 여기서 간판은 그 상품이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려 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리고 그 간판으로 인해 신분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부조리한데, 그 부조리를 더 키우는 공통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어지간해서는 그 간판을 떼거나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간판의 영향력이 아주 오래간다. 이로 인해 시장 전체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p351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데에는 돈 한 푼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서관 이용자들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 실패란 ‘상당한 시간을 들여 꾹 참고 읽었지만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책임을 뒤늦게 깨닫는 일’이다. 한 독자는 내게 그런 상황에 대해 “기분이 더럽다.”라고 표현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시간과 노력이 문제다.
p430
바꿔 말하자면, 한국에서 간판이 만드는 차별과 서열의 구조는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런 ‘합의’는 여러 각도에서 공고히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실제로 그 간판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간판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 각자에게 최선의 선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판 외에 달리 더 좋은 선택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문학공모전이라는 제도와 공개채용이라는 제도를 밀착 취재, 사회가 사람을 발탁하는 입시-공채 시스템의 기원과 한계를 분석하고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고발하는 논픽션이다. ‘당선’과 ‘합격’이라는 제도가 사회적 신분으로 굳어지며 ‘계급화’되는 메커니즘을 밝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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