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과그런책] 이승우 <지상의 노래>

D-29
"이 이야기는 사랑과 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이 죄로 미끄러지거나 죄가 복숭아 속의 벌레처럼 사랑 안에 깃든다." 한국어를 할 줄 알아서 - 번역을 거치지 않고 오롯이 그 책을 느낄 수 있어서 -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 종종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그랬고 두 달 전 읽었던 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가 그랬습니다. 제주 여행 때 들고 간 책인데 숙소에서, 카페에서 푹 빠져 읽으며 꼭 헌책 모임에서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섯명의 사연이 얽히고 섥히는 서사가 너무너무 재밌고, 책에서 다루는 종교적 주제도 진지하면서 무척 흥미로운데다, (문장이나 문체에 무딘 저에게도) 독특한 문장이 매력적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식이었으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이 느껴져서 괴로웠을 테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죄의식을 만들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았을 테니까. 그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 이번 5월 헌책그책 모임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해야 하는 순간"과 믿음을 비롯해 이 책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길 바랍니다.
반가운 책 이야기를 듣고 참여하게 됩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인데 최근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입니다. 천관산 휴양림에 머물며 장흥 천관산을 답사한 이후인지라 더욱 문학기행하는 듯 느껴졌고요. 지상이 '아타콤'으로 그려짐을 보면서 구원의 과정에 대해서 울림을 받았던 글...
와 반갑습니다. 작가님 고향이 장흥이시던데, 그곳보다 이 책을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 싶네요. 저도 올해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공명했던 책이었던지라 저희 책모임에서 함께 다루게 되었고, 더 많은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비가 내리는 날씨에 이 책을 다시 읽으려니 이 책을 처음 읽었던 2월 제주의 다소 우중충한 날씨와 책을 읽은 장소들이 떠올라서 가볍게 소개해 볼게요. [제주 함덕바람집] https://m.blog.naver.com/soonae70/221140262333 열흘 정도 머무느라 반려견 동반이 가능하면서 1박 5만원 이하에 쏙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참 쉽지 않았은데, 정말 뭐 하나 아쉬울 것 없는 저에겐 최고의 숙소였습니다. 패시브 하우스라 단열이 매우 잘되고 바깥 소음 차단에 탁월해서, 소파에 앉아 책 읽기도 참 좋았어요. 숙소 블로그를 보니 책을 좋아하시는 듯 해서 '지상의 노래'를 선물로 드리고 왔는데 어떻게 읽으셨을지 문득 궁금하네요. [알마커피제작소] https://place.map.kakao.com/1491888881 커피 맛에 놀라고, 분위기에 놀라고, 저렴한 가격에 놀랐던 카페. 소위 말하는 예쁜 카페에 관심 없고, 커피도 웬만하면 안 마시는데, 첫눈에 반해서 하루 걸러 한번씩 방문했던 곳입니다. 넓게 트인 창 밖의 파도 치는 바다와 다려도 섬을 배경 삼아, 지상의 노래 책에 푹 빠져들었죠. 커피도 커피인데 빵도 어찌나 맛나던지. 제주 가시는 분들 꼭꼭꼭 들러보시길. ps. 주중이라 그런지 손님도 북적이지 않아서 저희야 참 좋았지만, 한편으로 다음에 왔을 때 문이 열려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 포인트 적립은 정중히 사양했어요 (이미 저렴한 가격인데 무슨 적립을 10% 씩이나 해주시나요...)
천산 수도원의 벽서는 우연한 경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벽서에 의지가 있다면 결코 그렇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알려지는 것이 그 벽서의 운명이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 수도원의 벽서가 세상에 알려질, 우연하지 않은 다른 경로를 상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로든 우연한 경로일 수밖에 없다. 어떤 우연한 경로도 다른 경로보다 더 우연하거나 덜 우연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우연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그 벽서가 어떤 경로로든 알려지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9, 이승우 지음
교회사 강사는 성스러움 속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 신에 대한 믿음의 표현 속에 깃들어 있는 인간의 예술적 욕구를 꿰뚫어 봤다. 수도사들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공간에서 성경을 필사할 때 그들을 충동한 것은 믿음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믿음만큼 중요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대개는 믿음을 드러내고,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미적 감각을 활용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모든 경우에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거꾸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믿음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아름다움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러내려고 한 것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미적 감각을 활용한 작업이 믿음만 아니라 미적 감각 또한 고양시키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을 활용한 작업이 아름다움만 아니라 믿음 또한 고양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더 도드라지는 일도 일어난다. 결과는 동기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동기는 결과를 제어하지 못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사실 그것들은 작업자의 내면에 서로 엉켜 있어서 따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한 경우가 더 많다. 작업자 자신도 내면에 있는 동기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믿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의 진짜 욕망이 아름다움일 수 있고 아름다움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의 진짜 동기가 믿음일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진짜 욕망을 감추고 다른 것을 앞세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자신 스스로 속는 경우가 더 많다. (중략) 초월자에 대한 믿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둘 모두 근본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라는 것.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것. 숭배를 위해 즐기고 즐기기 위해 숭배할 수 있다는 것. '켈스의 책'과 천산의 벽서를 탄생시킨 것은 믿음만도 아니고 아름다운만도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는 그 믿음과 아름다움이 왜 그렇게 표현되어야 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어떤 믿음이 그곳에서 그런 걸 만들게 했는지, 어떤 아름다움이 그런 걸 요구했는지 숙고하지는 않았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25, 이승우 지음
나비가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태풍은 일어날 것이다. 혹은 나비가 수만 번 날갯짓을 해도 태풍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태풍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사소한 현상들이 태풍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풍을 유발한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결과가 무작위로 원인들을 소환하는 이 시스템은 심리학적 요인에 의해 지원받고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인간 심리의 무규칙성과 돌발성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과 인과적으로 관련지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 연희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라면을 먹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그가 라면을 먹은 사건과 연희의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라면을 먹지 않았는데도 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는 자기가 행한 다른 어떤 일을 끄집어내어 그 사건의 원인으로 상정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끌어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죄의식을 덧씌우기 위해 무엇이든 찾아냈을 것이다. 만들어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식이었으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이 느껴져서 괴로웠을 테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죄의식을 만들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았을 테니까. 그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40, 이승우 지음
이 이야기는 사랑과 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이 죄로 미끄러지거나 죄가 복숭아 속의 벌레처럼 사랑 안에 깃든다. 그런 일은 흔하진 않지만 드물지도 않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44, 이승우 지음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시력 문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더 분명하게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은 확대해서 보는 데 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49, 이승우 지음
문은 열리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말할 때까지 문을 열지 말라고 했어요, 하고 말했다. 왜요? 하고 연희가 물었다. 왜냐하면 제가 연희 씨를 사랑하니까요, 하고 박 중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말이 어딨어요, 어서 문을 열라고 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하고 연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박 중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얼마 후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건장한 젊은 남자의 눈물은 연희를 당황하게 했다. 그녀는, 왜 이래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질문이 만들어지다 말고 사라져 버렸다. 왜 이래요? 하고 물은 사람은 박 중위였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왜요? 왜 이렇게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요? 왜 나를 못 믿는 건데요? 왜 이렇게까지 하게 하는 건데요? 왜 이렇게 나를 유치하고 추하고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거예요? 왜요?"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69, 이승우 지음
마음속에 유치하고 추하고 나쁜 사람이 들어왔으므로 그는 자기가 하려고 하는 유치하고 추하고 나쁜 짓을 개의치 않았다. 유치하고 추하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고는 사랑을 얻을 수 없으므로 유치하고 추하고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다만 사랑 때문이라고, 자기의 사랑이 그만큼 뜨겁고 간절하고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세뇌했다. 사랑이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다고, 사랑이 시키는 일에 복종하는 것뿐이라고 끈질기게 속삭이는 내부의 목소리에 그는 복종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가 유치하고 추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 위한 정신 무장이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70, 이승우 지음
불완전한 지식은 불완전한 이해를 낳았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75, 이승우 지음
그는 칼을 휘둘렀지만 칼을 휘두름으로써 벌어질 일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다. 숙고했더라면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을 밀고 가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뜻이다. 충동적이었다는 듯은 아니다. 어쩌면 칼을 휘두르기 위해, 휘두를 자격을 얻기 위해 숙고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중략) 그는 두려웠고, 머릿속으로 크고 작은 빗금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걸 느꼈고,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 했고, 알게 될까 봐 두려웠고, 어쩔 줄 몰랐고, 그러나 어쩌지 못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느꼈고,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무작정 내달렸다. 그는 무슨 일인가를 벌였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어서 알지 못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77, 이승우 지음
어느날 후는 무심코 성경을 옮겨 적다가 어느 부분에서 문득 멈추고 자기가 옮겨 적은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런 기분을 불러 내는지는 알기 힘들었다. 그는 그 야릇한 기분이 무엇인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처음 접한 이야기가 분명한데도 처음 듣는 것 같지 않았다고 할까.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데도 이미 아는 것 같았다고 할까. 아니, 이미 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모르는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미 안다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88, 이승우 지음
그에게 말씀을 전해 주던 형제는 후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성경이 큰 거울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비추지 못하는 것, 비출 수 없는 것은 없다. 성경은 크고 환하고 깊다. 세상은 거울인 성경보다 크지 않고, 기억은 거울인 성경보다 환하지 않다. 사람의 마음은 성경인 거울보다 깊지 않다. 성경은 형제의 모든 것을 비춰 낸다. 형제가 한 일과 하려고 한 일, 한 생각과 하려고 한 생각을 비추고, 드러낸 것과 감춘 것을 비추고, 드러낸 것 속에 드러내지 않은 것과 감춘 것 속에 감추지 않은 것, 드러내려고 감춘 것과 감추려고 드러낸 것을 비춘다.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다. 하늘을 올라가도 피하지 못하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도 달아날 수 없다. 성경은 크고 환하고 깊은 거울로 우리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해야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지, 무엇을 하려고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알게 한다.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형제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88, 이승우 지음
신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차별 업싱 평등하고 차별 없이 하찮은 존재다. 개인마다 개인만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특성은 신의 시선으로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닌 것을 내세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것이 모든 형제들을 형제로 호칭하는 이유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하찮은 존재이고 한없이 하찮은 존재로 서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차이를 부감함으로써 생기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이 세상의 욕망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라고 형제는 설명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93, 이승우 지음
형제는 말없이 응시함으로써 진술을 요구했다. 침묵은 가장 물리칠 수 없는 재촉이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94, 이승우 지음
너를 사랑해서 병이 들었다. 내 병은 너 때문에 생겼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암논의 이 요구는 그에게는 자연스럽고 절실하지만 다말에게는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다. 암논은 자기 사랑을 어떤 것이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증처럼 내민다. 사랑한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사랑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무엇이나 용납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는 교루를 하면서도 그 요구가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 그의 사랑이 상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06, 이승우 지음
다말은 논리적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에 맞는 생각은 사랑 이전이나 이후의 것이다. 논리에 맞게 생각하고 논리에 따라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하지 않거나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에 사로잡힌 자의 맹목적 열정을 알지 못한 다말은 자기의 사려 깊은 말들이 암논의 마음을 움직일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암논의 귀에는 다말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는 설득되지 않는다.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자를 설득할 논리는 없다. 설득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의 열정에 충분히 사로잡히지 않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의 열정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은 자만이 이치에 맞고 사려 깊은 말에 설득된다. 암논을 보라. 그는 설득되지 않는다. 설득될 수 없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06, 이승우 지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진 못했지만 제목을 통해 '열정 = 고통'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는데요. 연희와 박중위, 다말과 암논의 이야기를 보면서저는 모두에게 동정심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열병이라던가 더 정확한 병명을 붙여주는게 맞지 않을까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열정에서 동정으로 옮겨가는 것이라는 알베르 까뮈의 말도 생각나네요. ("To grow old is to move from passion to compassion.")
사랑을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과 사랑의 부재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무슨 일이든 하는 것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무소불위인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무소불위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07, 이승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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