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과그런책] 이승우 <지상의 노래>

D-29
그는 칼을 휘둘렀지만 칼을 휘두름으로써 벌어질 일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다. 숙고했더라면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을 밀고 가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뜻이다. 충동적이었다는 듯은 아니다. 어쩌면 칼을 휘두르기 위해, 휘두를 자격을 얻기 위해 숙고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중략) 그는 두려웠고, 머릿속으로 크고 작은 빗금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걸 느꼈고,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 했고, 알게 될까 봐 두려웠고, 어쩔 줄 몰랐고, 그러나 어쩌지 못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느꼈고,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무작정 내달렸다. 그는 무슨 일인가를 벌였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어서 알지 못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77, 이승우 지음
어느날 후는 무심코 성경을 옮겨 적다가 어느 부분에서 문득 멈추고 자기가 옮겨 적은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런 기분을 불러 내는지는 알기 힘들었다. 그는 그 야릇한 기분이 무엇인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처음 접한 이야기가 분명한데도 처음 듣는 것 같지 않았다고 할까.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데도 이미 아는 것 같았다고 할까. 아니, 이미 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모르는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미 안다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88, 이승우 지음
그에게 말씀을 전해 주던 형제는 후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성경이 큰 거울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비추지 못하는 것, 비출 수 없는 것은 없다. 성경은 크고 환하고 깊다. 세상은 거울인 성경보다 크지 않고, 기억은 거울인 성경보다 환하지 않다. 사람의 마음은 성경인 거울보다 깊지 않다. 성경은 형제의 모든 것을 비춰 낸다. 형제가 한 일과 하려고 한 일, 한 생각과 하려고 한 생각을 비추고, 드러낸 것과 감춘 것을 비추고, 드러낸 것 속에 드러내지 않은 것과 감춘 것 속에 감추지 않은 것, 드러내려고 감춘 것과 감추려고 드러낸 것을 비춘다.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다. 하늘을 올라가도 피하지 못하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도 달아날 수 없다. 성경은 크고 환하고 깊은 거울로 우리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해야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지, 무엇을 하려고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알게 한다.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형제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88, 이승우 지음
신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차별 업싱 평등하고 차별 없이 하찮은 존재다. 개인마다 개인만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특성은 신의 시선으로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닌 것을 내세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것이 모든 형제들을 형제로 호칭하는 이유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하찮은 존재이고 한없이 하찮은 존재로 서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차이를 부감함으로써 생기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이 세상의 욕망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라고 형제는 설명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93, 이승우 지음
형제는 말없이 응시함으로써 진술을 요구했다. 침묵은 가장 물리칠 수 없는 재촉이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94, 이승우 지음
너를 사랑해서 병이 들었다. 내 병은 너 때문에 생겼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암논의 이 요구는 그에게는 자연스럽고 절실하지만 다말에게는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다. 암논은 자기 사랑을 어떤 것이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증처럼 내민다. 사랑한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사랑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무엇이나 용납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는 교루를 하면서도 그 요구가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 그의 사랑이 상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06, 이승우 지음
다말은 논리적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에 맞는 생각은 사랑 이전이나 이후의 것이다. 논리에 맞게 생각하고 논리에 따라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하지 않거나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에 사로잡힌 자의 맹목적 열정을 알지 못한 다말은 자기의 사려 깊은 말들이 암논의 마음을 움직일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암논의 귀에는 다말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는 설득되지 않는다.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자를 설득할 논리는 없다. 설득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의 열정에 충분히 사로잡히지 않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의 열정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은 자만이 이치에 맞고 사려 깊은 말에 설득된다. 암논을 보라. 그는 설득되지 않는다. 설득될 수 없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06, 이승우 지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진 못했지만 제목을 통해 '열정 = 고통'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는데요. 연희와 박중위, 다말과 암논의 이야기를 보면서저는 모두에게 동정심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열병이라던가 더 정확한 병명을 붙여주는게 맞지 않을까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열정에서 동정으로 옮겨가는 것이라는 알베르 까뮈의 말도 생각나네요. ("To grow old is to move from passion to compassion.")
사랑을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과 사랑의 부재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무슨 일이든 하는 것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무소불위인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무소불위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07, 이승우 지음
큰 거울인 성경은 후가 누구인지를 후에게 알렸다.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해야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지, 무엇을 하려고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알게 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12, 이승우 지음
신분을 증명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증명할 수 있지만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신분이었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40, 이승우 지음
그 평가는 부당했다. 평가할 자격이 없는 사람의 평가가 부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당한 평가도 효력은 같았다. 아니, 부당한 평가는 부당하기 때문에, 부당한 만큼 효력이 더 크게 나타난다. 부당한 평가는 그 평가의 부당함과 부당한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가리기 위해 빠르고 거부할 수 없는 효력을 주문한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44, 이승우 지음
장과장의 부하들은 지시받은 일을 했다. 그들은 그 일의 용도와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알리고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무엇이든 저절로 알게 될 때까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이었다. 무엇이든 저절로 알려질 때까지 알려고 할 권리는 그들에게 없었다. 알려지면 알고 알려지지 않으면 모른 채로 지냈다. 안다고 유리한 것도 없고 모른다고 불리한 것도 없었다. 안다고 불리한 것도 아니고 모른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알든 모르든 달라지는 것이 없으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고 애쓸 이유가 없었다. 알려지는 것을 알지 않으려고 수고할 필요도 없었다. 알려지면 알지 않을 권리 또한 없었으므로 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누군가의 손에 들린 연장이었다. 부리는 자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 연장이다. 연장은 사고하지 않고 일한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47, 이승우 지음
어떤 일도 누군가의 적극적인 의지나 의식적인 동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적극적 의지나 의식적 동의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를 방해한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57, 이승우 지음
필요한 것이 주어지자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알아졌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62, 이승우 지음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만이 용기를 내거나 체념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은 용감해질 필요가 없고 체념할 이유도 없다. 용감해질 수도 없고 체념할 수도 없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73, 이승우 지음
아내는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p.179, 이승우 지음
되새김질해보는 공감가는 문장입니다.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의 해석이 되는 말과 가깝다고나 할까요? 정치판에서는 이런 이분법적인 논리가 적용되겠지만 평범한 삶에서는 누군가를 도우면 누군가는 못 도우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안다는 걸 모르는 것. (영어로 더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영어로 정리해보자면) 이 세상을 우리는 내가 아는 앎 known known, 모르는 앎 unknown known, 아는 무지 known unknown, 모르는 무지 unknown unknown 으로 구분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중에서 저에게 가장 미스테리한 것이 unknown known '안다는 걸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이에 해당할까 싶은데, 뭔가 지금의 나와 단절되어 있지만 어떤 자극을 통해 되살아 날 수 있는 잠재된 기억이나 잠재력 같은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데자뷰처럼.
이 장면을 보면서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숙주'라는 표현과, 책 사피엔스에서 제국주의도 결국 전지구적으로 인류가 하나되는 과정이라는 유발 하라리의 관점이 생각났습니다. 효율적이지만 폭력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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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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