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혼자 읽기

D-29
2008년에 가장 위기에 몰린 나라는 한국이다. 지금의 한국을 일으켜 세운 유명한 수출전문 기업 집단, 즉 대우나 현대, 삼성 같은 “재벌”들과 거대한 규모의 제철소, 조선소, 자동차 공장들은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우리는 우리와 상관없는 금융위기의 유탄을 맞은 셈이다.” 한 고려대학교 교수의 지적이다. “우리는 불공정한 세상에 살고 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1장 G20,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그렇지만 죄 없는 희생자를 자처하는 이 정도의 분석으로는 한국의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짚어낼 수 없다.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만 유별나게 동유럽이나 러시아처럼 취약한 모습을 보였던 건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전 세계와 하나로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1장 G20,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1990년대의 혹독했던 시련 이후 한국은행은 충분한 외화를 축적하는 데 집중했고 2008년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2400억 달러에 달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는 한국 금융시스템이 가진 약점을 극복할 수 없었다. 유럽과 달리 서브프라임 대출상품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당시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불량 미국 모기지 증권은 8500만 달러어치에 불과했다. 문제는 보유 자산이 아니라 대차대조표상의 자금조달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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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려 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통화와 자본의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한국 금융업의 상당 부분을 해외 투자자들이 소유했으며 한국의 은행들은 도매금융 자금조달 방식이라는 새롭지만 불안정한 방식으로 전 세계 달러시장에서 단기로 자금을 빌려와 한국 내에서 고금리로 장기간 투자를 했다. 한국의 수출은 호황이었고 달러 대비 원화 가치도 꾸준히 오르자 이런 투자방식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재벌들의 고민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화를 환율에 맞서 지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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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그 어떤 지역이나 국가도 2008년의 한국처럼 수출 불황과 환율 폭락, 그리고 유동성 위기가 종합적으로 덮친 곳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시아 지역 전체로 봤을 때 그 영향은 대단히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태국에서는 금융위기와 함께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었고 중산층이 들고일어나 엄청난 시위와 방콕공항 점거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2008년 12월, 이미 추방당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국민의힘당이 이끄는 태국 정부는 공권력을 앞세워 국민들의 저항을 진압했다.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상품과 용역 수출이 GDP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태국에서 이런 민심의 불안은 경제불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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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한국이 특히 곤경에 처했던 건 금융 부문에서 발생한 긴급사태 때문이다. 달러 자금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2008년 10월 한국 정부는 1000억 달러에 달하는 해외 대출 보증을 설 수밖에 없었고 다른 유동성 자금이나 지원 방법을 위해 최소한 300억 달러를 더 투입해야 했다. 2008년 가을 한국이 보여준 위기 탈출 동원력은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철강업체 포스코나 현대자동차, 그리고 삼성전자 같은 주요 수출제조업체들은 수천만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어 원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려고 했다. 한국 정부의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자발적으로 은행 채권을 매입해 자금조달 문제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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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런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도움은 역시 밖으로부터 왔다. 10월 30일 한국은행은 미연준과 3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고 발표한다. 이를 통해 한국은행은 필요한 만큼의 달러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외환시장은 공황상태에서 벗어났고 그동안 타격을 입었던 금융 부문도 복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2009년 초 한국 정부는 은행간 대출을 위해 550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하고 나섰으며 부실채권 발생에 대비하기 위해 230억 달러를 따로 책정해두었다. 또한 여기에 채권시장안정화기금 78억 달러와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313억 달러가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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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 전역에 걸쳐 2008년의 금융위기에 대한 각국의 대응은 일종의 역사적 분기점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97년 위기 당시 IMF와 클린턴 행정부의 도움에 굴욕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태국과 말레이시아, 그리고 한국은 이제 새로운 수준의 자율성을 갖춘 것이다. 중국이나 서구 국가들과의 차이점은 단지 기술적인 완성도와 전문 인력뿐이었다. 경기부양을 위한 주요 노력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방식을 통해 진행되고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거기에 어떤 지역적인 이해관계가 작용했든 상관없이 아시아 신흥시장국가들의 정책 대응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이런 새로운 회복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1장 G20,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2009년 봄이 되자 중국은 서방 국가들이 원칙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중국의 관점에서 글로벌 불균형을 가져온 원흉은 미국의 무분별한 재정 적자였다. 이제 영국과 미국은 긴축재정을 펼치는 대신 경기부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G20 회담에 참석하기 일주일전인 3월 23일 중국 중앙은행 총재 저우샤오촨(周小川)은 새로운 브레턴우즈 체제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1장 G20,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44년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주장했던 것처럼 진정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국가의 통화와도 상관없는 독립적인 세계 통화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저우샤오촨 총재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IMF에서 1968년 도입한 일종의 국제준비통화인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 SDR)이었다. SDR야말로 단일 초강대국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안정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통화였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하면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적자와 흑자 국가 모두에 통용될 규칙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1장 G20,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유로존의 재정 적자가 불어나면서 유럽중앙은행은 비공식적으로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정책을 실시한다. 중앙은행이 2009년 5월부터 수천억 유로에 달하는 자금을 동원해 장기대출프로그램(Long-Term Refinancing Operation, LTRO)의 형태로 유럽 각국의 은행들에 유동성 자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면 은행들은 그 자금을 가지고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을 매입한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2장 경기부양책,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독일의 하이포리얼에스테이트나 프랑스와 벨기에 합자은행인 덱시아 등을 포함해서 유럽에서도 가장 어려움에 처한 은행들이 이렇게 쉽고도 안전하게 혜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이 은행들은 특히 수익률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유럽중앙은행에서 가져온 자금을 좀 더 수익률이 높지만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포르투갈이나 그리스의 국채에 투자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2장 경기부양책,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영국이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런 투자는 국채 시장을 안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만 분명한 차이점도 있었는데,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은 은행시스템 안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했지만 반면에 유로존에서는 사실상 각 은행들의 대차대조표를 통해 국가부채를 흡수한 것이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제12장 경기부양책,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신뢰(Confidence)”는 경제학에서 그 의미가 가장 쉽게 바뀌는 개념들 중 하나다.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에 모기지 증권과 화폐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평범한 가정들을 무너트리고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가 된 은행들에 대한 신뢰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9년이 되었지만 신뢰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3장 금융개혁,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그러나 지금 주목을 받는 것은 정부의 재정 적자와 채권자경단이 불러올 수 있는 위협이었다. 이 무렵 채권시장을 지배한 실제 분위기를 돌이켜보면 재정정책과 관련된 이런 불안감이 가라앉은 건 금융위기 이후 상황들에 대한 금융위기 이전 정통 중도파들의 승리라고 볼 수 있었다. 채권자경단은 결국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대신 수백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경기부양책을 계속 유지하지 못한 데 따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여파는 노동시장을 넘어 다른 부문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3장 금융개혁,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재정정책 제한 조치의 목적은 신뢰 유지와 민간 부문 회복의 여지를 만들어내는 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로 신뢰가 살아나고 민간 부문의 경기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 부동산 시장은 여전히 휘청거리는 중이며 각 가계들은 부채를 청산하고 방만하게 꾸려왔던 살림살이를 다시 정리해야 했다. 기업의 투자를 통해서만이 경제는 살아난다. 그러려면 금융 안정과 손쉬운 자금조달이 필요하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3장 금융개혁,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막대한 손실을 안고 있는 은행에 대한 처리는 둘 중 하나다. 가장 손쉽고 원칙적인 조치는 휴지 조각이 된 부실자산에 대한 변제 능력이 없는 은행은 퇴출하는 것이다. 아니면 신규 자금을 집어넣어 지금 당장의 파산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에는 신규 자금을 유입해 은행의 자본과 부채의 구성을 변경하는 자본재구성(recapitalisation) 방식이 활용되었다. 이는 자금을 새로 집어넣어 지불 만기를 연장하면 향후 건전한 은행이 될 수 있다는 은행의 선전에 설득 당한 것이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4장 2010년 그리스,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그러나 현실은 은행의 주장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extend and pretend)” 전략 정도로 줄여 말할 수 있는 은행의 주장과 달리, 현실에서 은행 위기는 계속해서 발생했고 그때마다 은행은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 전략을 통해 정부와 국민을 설득했다. 결국 정부와 납세자들은 은행의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 선전에 넘어가 한낮 자금줄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는 동안 의미 있는 은행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4장 2010년 그리스,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기존의 적자에 다시 수백억 달러의 적자가 쌓이고 거기에 금리 상승까지 겹치면서 그리스 경제가 통제 불능 상태로 접어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2010년 한 해에만 그리스가 갚아야 할 채무는 무려 530억 유로에 달했다. 그 정도라면 누구라도 부담을 느낄 액수였다. 그렇지만 그리스의 문제는 유동성 부족이 아니라 상환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 계산에 따르면 그리스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당장 세금을 GDP의 14퍼센트까지 올리고 지출 역시 같은 규모로 줄여나가야 한다고 했지만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4장 2010년 그리스,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그리스에 정말로 필요한 일은 채무를 재조정하고 채권자들에게 채무 감면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 밖의 방법으로는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버린 빚더미 위에 또 다른 빚을 얹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나중에 치러야 할 대가가 더 늘어날 뿐이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4장 2010년 그리스,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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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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