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밤] 10. 도박사 3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수북강녕

D-29
아버지는 천박한 양아치, 큰 형은 생각 없는 건달, 둘째 형은 소심한 허무주의자. 잘 자란 알료샤가 참 대단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소설의 제사인데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렇게 제사를 앞에 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정확히는 확인 필요) 이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찾아보면 이 구절은 작은 선행의 중요성 정도로 설명이 되는데요. 조시마 장로가 누누히 말하는 실천적 사랑을 생각하면 이 해석은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근데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드네요. “작은 선행의 중요성”은 너무나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 도스토옙스키가 다른 소설에서는 제사를 쓰지 않은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 구절은 사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과는 잘 안 맞는 느낌인데... 원래 쓰려고 했던 2부 내용과 어울리는 문장이었을까요? 2부에서 알료샤가 목숨을 바치는 희생을 하고 그 사건을 통해 세상이 바꾸는 모습을 그리려 할 예정이었을까요.
참 기독교적인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퍽 감상적이기도 하고, 희생과 산출량을 연결 짓는 방식도 그렇고요. 그러다 보니 실제 성과는 없지만 본인에게는 치명적인 희생을 한 사람이 자기기만을 하기 좋고요. 하지만 분명히 감동적이기는 합니다. 짧은 문장에 상당히 극적인 드라마가 담겨 있습니다. '나의 헌신이 내 존재 이후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계속 고민을 했는데요. 앞 구절을 생략하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에서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걸 ‘희생’과 연관시키는 게 맞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강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책에서는 어떤 대단한 희생으로 볼만한 이야기는 없거든요. 자신을 목숨을 바칠만큼이요. 그래서 제사의 앞구절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지면 죽는게 당연하지 않나요? 땅에 떨어졌을 때 한 알 그대로 남는 상황, 자연의 섭리 혹은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에 언급한 구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 직전 펼친 강의 중 젊은 시절 장로가 만났던 살인자에게 자백을 권유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이때 소설의 제사인 요한복음의 구절이 언급되는 걸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죄를 저질렀을 때 이를 고백하고 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기독교적으로 보았을 때는 순리이니까요. 작품에서 신의 섭리를 거부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파멸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말이죠. 이들은 땅에 떨어졌음에도 혹은 떨어질 운명임에도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남으려는 인물들로 느껴집니다.
<악령> 첫 시작도 마가복음의 돼지떼 일화로 하기 때문에 밀알 이야기가 독특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돼지떼 이야기는 <악령>을 읽으면 이해가 쉬운 부분인데 저도 밀알은 이 책과는 크게 연관성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작은 선행의 중요성은 '파 한뿌리' 챕터와 연결이 되지만 책의 중심 내용이 이를 다룬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어요. 저는 모든 밀알은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것 같고 그 중에 죽는 밀알, 낱알 껍데기를 깨고 스스로를 죽이면서 엄청난 고통을 통한 파괴적 혁신(?)에 이른 자들이 많은 열매(포교)를 맺는다는 걸로 이해했네요. 평범한 신도들은 그냥 하나의 밀알로 남고요.
@동키돈키 @고쿠라29 말씀 듣고 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저도 고민을 시작하게 됐네요. 제가 위에서 이 구절이 2편을 염두에 둔 것 아니었을까 하고 적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지는 않을 거 같아요. 2편은 먼 훗날 쓸 책이었고, 이 제사는 분명히 출간 시점에 단 것이었을 테고요. 보통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의 메시지는 뒷부분에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을 겁내지 말라’라는 뜻으로요. 그런데 앞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보니 느낌이 확 다르네요. 도스토옙스키의 의도가 뭔지는 저희가 알 수 없지만, 만약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 밀알’에 무게중심이 찍힌 구절이라면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죽는 주요 인물은 세 명입니다. 표도르 까라마조프, 조시마 장로, 스메르쟈꼬프. 그리고 내세나 부활에 대한 희망도, 세계를 구원할 가능성도 없이 그저 죽는 인물은 그 중 한 명이지요. 그렇게 생각해보니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라는 제목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삼형제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는.
@동키돈키 님 덕분에 제사 라는 용어를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악령의 제사는 너무 인상적이어서 기억이 나는데, 까라마조프 씨에 형제들의 제사는 읽어 보지도 않고 넘겼네요. 워낙 자주 인용되는 성경구절이라 인상에 남지 않았나봅니다. 반면 악령의 제사는 성경에서 읽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고요.
@고쿠라29 철학적 대화 와중에 위와 같은 대화도 나와서 역시 러시아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니까, 그 애는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괴로워하더니 슬픔에 잠기는 것이었어요, 자신의 유약함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고상한 측면 때문에 말이에요. 그 애의 슬픔은 대체 어떤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해 봤지요. 나는 그 애한테 매달려 그 내막을 알아냈지요. 그 애는 돌아가신 당신 아버지(당시에는 아직 살아 계실 때였습니다)의 하인인 스메르쟈꼬프와 어떤 일로 함께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자가 바보 같은 그 애한테 어리석은 장난을, 다시 말해서 동물적이고 야비한 장난을 가르쳤던 거예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중) 제10권 소년들, 도스토예프스키
말랑말랑한 빵 조각에다가 바늘을 집어넣은 다음 굶주린 개한테 던져 주면 그 개는 씹지 않고 그냥 삼킬 테니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보라는 것이었지요. 그 두 사람은 그런 빵 조각을 만들어 바로 털북숭이 쥬츠까한테 던져 주었지요. 지금 이 이야기는 먹을 것을 전혀 얻어먹지 못해 하루 종일 울부짖던 어느 집 개에 관한 거죠. (당신은 그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좋아하세요, 까라마조프 씨? 난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 식으로 빵을 던져 주자, 개는 단숨에 삼킨 후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다가 달아나 버리고 말았어요. 내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 결국 종적을 감추고 말았던 것이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중) 제10권 소년들, 도스토예프스키
참 이런 불편하고 끔직한 생각들을 어쩌면 그렇게 잘 하는지요. 아니면 설마 창작이 아니라 목격하거나 들은 이야기인 걸까요.
그 애는 스무로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을 치뜨면서, 〈내가 말하더라고 끄라소뜨낀한테 전해. 난 앞으로 바늘을 넣은 빵을 모든 개들한테, 모든 개들한테 먹일 거야!〉 하면서 악을 쓰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막돼먹은 녀석이라면, 아주 따돌림을 놔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리고는 모욕적인 말을 하기 시작했고, 마주칠 때마다 외면을 하거나 냉소적인 미소를 보내곤 했지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중) 제10권 소년들, 도스토예프스키
세상에는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있지. 그들의 광대짓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모멸적인 소심한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악의적인 풍자의 일종이지. 믿어 다오, 끄라소뜨낀, 그런 광대짓은 때로는 상당히 비극적이란 사실을. 그분은 지금 모든 희망을,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을 일류샤에게 걸고 있어. 일류샤가 죽어 버린다면, 그분은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 버리거나 자살하고 말 거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중) 제10권 소년들, 도스토예프스키
오, 까라마조프 씨, 나는 정말 불행해요. 왠지 모르게 이따금씩 세상 사람들이, 온 세상이 나를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럴 때면 모든 세상 질서를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그때는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겠지.」 알료샤가 미소를 지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중) 제10권 소년들, 도스토예프스키
제 어릴 적을 보는 거 같습니다.
콜랴도 그렇고 표도르도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광대짓이나 포악한 행동이나 그 이면엔 타인이 자신을 무시한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 같아요.
인정 욕구라는 게 참 뿌리 깊은 욕망이다 싶습니다. 특정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든, 세계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이든. 매슬로우의 5단계 이론 같은 걸 보면 존경에 대한 욕망은 배가 부르고 나서 생겨야 할 거 같은데, 옛 문학 작품에서의 이런 묘사들 보면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하긴 트로이 전쟁이나 삼국지의 호걸들도 그토록 명예에 목말라 있었던 걸 보면...
중권을 끝내고 마지막 하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민음사판으로 읽다가 범우사판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조금 늦어졌네요. 지금까지 읽은 총평은 (~ 10편 소년들까지) 스타브로긴?같은 캐릭터인가 잠시 짐작했던 드미트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같고요. (아니 3천루블을 나눈 이유를 읽고는 실소를..ㅎ) 악녀일거라고 추측한 그루셴카는 의외로 순정녀네요. 예심판사가 모르크예 여관에서 드미트리를 심문하는 과정이 꽤나 재밌었어요. 죄와벌의 포르피리 때와는 좀 다르네요. 증거를 잡기위해 난처한 질문을 집요하게 하는 것이. 그리고 10편 소년들에 나오는 콜랴는 13살이라면서 완전 능글능글한 애늙은이에요. 그렇지만 역시 애인지라 여린 마음도 있고, 일루샤에게 쥬치카를 보여준 장면은 감동이었어요. 하권 첫편은 이반이네요.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도스토옙스키의 작가적 능력을 이야기할 때 주제도 굉장히 심오하고, 엄청나게 강렬한 캐릭터들을 창조했다는 점이 주로 거론되지요. 그런데 저는 그가 서스펜스를 자아낼 줄 아는 작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죄와 벌』은 줄거리는 아주 간단한데 순전히 그 서스펜스의 힘으로 읽게 되는 소설이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는 그런 서스펜스가 여러 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표도르 까라마조프를 죽인 건 누구일까? 스메르쟈꼬프와 이반의 기싸움은 어떻게 끝날까? 드미뜨리가 계속 말하지 않는 비밀이 도대체 뭘까? 재판은 어떻게 끝날까? 까쩨리나는 어떤 남자를 선택할까? 그루셴까와 까쩨리나는 누가 이길까? 일류샤는 살아날까? 등등. 사실 구조는 전혀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인데 독자를 궁금하게, 또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작가라고 봅니다. 『악령』은 그런 서스펜스가 좀 덜했던 작품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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