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나'는 더용과 헤어진 뒤 브레드필드에서 19세기 영국 시인이자 번역가였던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의 생가터를 방문합니다. 앵글로 노르만 계통에서 유래한 피츠제럴드 가문은 육백년 이상을 아일랜드에 거주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에드워드의 어머니인 메리 프랜시스 피츠제럴드는 가문의 막대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이렇게 부유한 가문에서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같은 걸출한 문인이 배출됐다는 이야기는, 예술과 자본이 공모를 맺어온 사례의 아이러니한 번안입니다. 꼭 피츠제럴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변에서 잊을 만하면 이런 유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수전노의 집안에서 걸출한 예술가가 탄생함으로써 한 가문의 계보가 이상한 방식으로 균형을 이룬다는 이야기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오이디푸스적인 클리셰입니다. (이런 클리셰는 아무도 불쾌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키기까지 하는 듯합니다. 이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 이후 ‘나’는 브레드필드를 떠나 우드브리지의 한 여관에서 잠을 청하다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를 만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가 앉은 배경의 화원에서 언젠가 여행한 아일랜드의 슬리브블룸산의 기슭을 봅니다. 그곳은 애슈버리 부인의 별장이 위치한 곳으로서 한때 ‘나’는 애슈버리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들과 교류한 적 있습니다. 애슈버리 부인은 남편이 제대한 직후인 1946년, 혼인하고 나서 아일랜드로 옮겨와 상속지를 관리하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애슈버리 가족은 30년대 초에 상속받은 넉넉한 유산을 바탕으로 재산을 지켰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애슈버리 부인은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언젠가는 사정이 호전될 거라는 믿음을 한번도 잃지 않았어요, 우리가 속한 사회가 몰락한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애슈버리 부인과 그 자식들은 삶과 무관한 소일거리에 매달리는데, 막내인 에드먼드는 바다로 진수할 생각도 없으면서 조선(造船)에 매달리고, 애슈버리 부인은 종이봉투에 꽃씨를 모으고 분류하는 일을 하며, 캐서린과 두 동생은 방에 모여서 배갯잇과 침대보를 꿰매면서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할 때까지 솔기를 뜯고 다시 봉합하는 일에 하루종일 매달립니다. 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행히도 저는 근본적으로 실제적이지 못한, 언제나 생각에 잠겨 있는 유형의 인간이에요. 우리 가족은 모두 실생활에 능력이 없는 몽상가들이지요. 아이들이나 저나 똑같아요.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외에도 8장에서 ‘나’는 많은 지역을 돌아다닙니며, 하나같이 터무니없이 팽창한 다음에 덧없이 수축하는 사례라고 할 만합니다. 쌘들링스에서는 과거 귀족들이 사냥 파티를 위해서 자연을 거대한 평지로 깎아낸 땅을 맞닥뜨립니다. 기업활동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은 시민계급의 남자들이 상류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자연을 거대한 저택과 대지를 구입하였고,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신봉하던 기업가 정신에 위배되는, “아무런 소득이 없고 오로지 파괴만을 지향하는, 그런데 누구도 탓하지 않는 사냥”에 몰두했다는 것입니다. 극도의 효율성과 합리성으로 자본을 증식시킨 이들이 나중에는 극도의 비효율성과 비합리성으로 자본을 소진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자본으로써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착취해서 자기 벽에 걸어놓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그런 예술 작품에 돈을 쾌척할 수 있게 만들어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타파하는 데는 십원 한 푼 쓸 의지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오퍼드니스 곶의 한 이름 없는 섬도 비슷한 사례입니다. 지역 주민조차 그냥 ‘섬(The Island)’라고 부르는 곳으로서, 과거 국방부에서 무기를 연구하던 비밀연구소가 있던 장소이며 ‘나’가 여행할 당시인 1972년에는 민간에 개방된 상태였습니다. 이 이름 없는 ‘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작은 축소판이자 그리 멀지 않은 미래처럼 보입니다. 이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4년 전 작성된 한 기사 내용에 따르면,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토성의 고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나’가 바라본 풍경을 함께 읽어보면서 8장 마칩니다.
[동아사이언스, 토성의 ‘절대 고리’가 사라진다]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26785
루바이야트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들은 벗들과 흥겹게 어울리며 즉흥적으로 ‘루바이’를 지었다. 루바이는 4행시를 뜻한다. 페르시아의 시인이자 천문학자인 오마르 하이얌은 수백 편의 루바이를 남겼다. 그로부터 7세기가 지나 영국 시인 피츠제럴드는 친구로부터 하이얌의 루바이가 적힌 필사본을 선물받는다. 그는 약 600년 전의 이 ‘쾌락주의적 불신자’ 하이얌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루바이들을 번안해 ‘루바이야트’라는 이름으로 출간한다. 말이 번안이지 피츠제럴드는 거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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