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인용구에 이어서 말하자면, 역사 속에서 자행된 숱한 학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스스로 행위가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게끔 하는 심리적인 우회로를 만드는 데 귀재입니다. 그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너무 흔합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대를 상종도 못할 악마로 규정한 다음에, 그런 악마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옳다는 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구체적인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런 행위 기저에는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종(種)으로 보지 않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나'가 코브히스 마을의 어느 전기철조망 안에서 한 무리의 돼지들을 보고 느낀 소회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는 마을의 미친 남자에게 예수가 기적을 행한 마태복음 4장을 떠올립니다. 내용인즉, 예수가 미친 사람에게 들려 있던 귀신들을 불러내서 풀밭에 있는 돼지 무리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이후에 이천마리가 넘는 돼지들이 비탈에서 굴러떨어져서 물속에 빠져죽었다 내용인데요, 통상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우화에서 예수가 행한 기적을 읽어내거나 오늘날 돼지가 불결함의 상징이 된 근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우화는 우리가 우리의 병든 정신을 항상 우리보다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든지 파괴해도 좋다고 여기는 종에게 거듭하여 떠넘긴다는 뜻이 아닌가?"
살펴보면 '나' 지속적으로 포착하는 역사의 비극과 참상은 더 이상 되돌아갈 곳이 없는 까마득한 절벽 속으로 투신하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비극 이전으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기에는 폐허에서 희망이 태어난다는 식의 안이한 낭만주의가 없고, 위기야말로 희망이 깃드는 곳이라고 하는 한탕주의 도박 같은 아이러니도 없습니다. 어떤 비극은 비극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죽음은 완전한 소멸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비정함마저 느껴집니다. 물론 이런 것들에서도 의미를 뽑아올릴 수 있는 여지는 남아있지만요. 여담으로 하나 더 언급하면, 3장의 마지막은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에 수록된 ⟨틀뢴, 우르바크,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의 마지막과 완벽히 겹쳐집니다.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라는 문장이 하나 더 있다는 점과 "내 시골 별장의 고요한 여유 속에서" 부분을 제외하고는 완벽히 동일한데, 제발트 특유의 위트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보르헤스의 단편도 정말정말 흥미롭고 3장과 연결지어서 얘기할 대목이 많긴 하지만,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보고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3장 마치겠습니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픽션들<픽션들>은 2백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상상은 심심풀이 환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의 미궁에 대한 깊은 통찰과 독창적인 사유로 이루어진 상상이다. <픽션들>은 20세기 문학에서 돋보이는 큰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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