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자르기
“알바생 자르기”
p.33
"합리적이라고요........ 과장님, 지난달에 태국 바이어들 왔을 때 환송회 한 거, 제가 영수증 정리하다 보니까 일차 밥값만 제 월급보다 더 나왔던데요. 그 환송회에 서울 사무소 직원들이 다 갔잖아요. 사장님 오신 다음에 그런 식으로 회식을 몇 번이나 하셨잖아요. 그것도 합리적인가요?"
p.42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여자아이는 가방에 손을 넣어 봉투를 확인했다. 봉투를 땅에 떨어뜨리고 돈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겁이 났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은행을 찾아갈 참이었다. 학자금 대출금을 제때 갚지 못해 독촉을 받고 있었다. 여전히 발목이 아팠다. 인대 수술을 받느라 퇴직금을 다 썼지만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기발령”
p.51
선대 회장은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문화이며, 자신의 목표는 이윤이 아니라 사회 공헌이라고 강조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집안 형편에 읽을 것이 없어서 은행이나 공공기관에 비치된 잡지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했다. 그는 어느 날 잡지 발행 제작비가 라디오 광고 두 편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듣고, 문화 잡지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p.55
"왜 이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저희한테 다른 길은 없는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중훈이 말했다. "그 팀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아세요? 다른 부서에서 똑같이 여섯 명이 얼마나 벌어 오는지는 아세요?" 경영기획실장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말투였다. "저희는 돈 벌어오는 부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돈이 아니면, 어떤 식으로 회사에 기여했나요? 사이트 방문자 수도 매달 줄고 있잖아요." "방문자 수가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으면 거기에 맞춰서 일했을 겁니다."
p.63
"그게 뭐라고...... 난 자기 만나기 전에는 사외보가 뭔지도 몰랐는데." "그 잡지 좋은 잡지였어. 종이 잡지 없앨 때 발행 부수가 1500부나 됐어. 학교나 병원, 교도소 같은 데서 계속 받아 볼 수 없느냐고 문의도 많이 받았어. 그리고 다들 자존심이 상했어. 회사가 우리를 밥벌레 취급했잖아. 적선하듯이 티앤티로 가라고 하니까 기분이 나빴지."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잖아."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거 아니지. 그런데 그때는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p.65
전날 술자리에서는 실존적 형벌이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건 실존적이라기보다는 초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업무 보고서를 쓰라는 건가. 회사 혁신 방안을 사무실 안에서 말없이 꼼짝 않고 앉아서 떠올릴 수 있는 걸까. 자기 주도 학습이라니, 나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 걸까. 눈치? 적응력? 비굴함?
p.67
자회사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왜'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들은 이리 와서 일하라고 하면 이리 와서 일하고, 저리 가서 일하라고 하면 저리 가서 일해야 하는 잡부나 다름 없는 처지였던 걸까. 그런 주제에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부심을 느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p.77
"회사가 자기네들 나가라고 몰아세운 건 알겠어.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변화가 두려운 것도 알겠고. 그런데 회사는 처음에 대안도 제시했고, 대기발령이라는 게 욕하고 때리는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더 영세한 회사들에는 그런 프로세스도 없잖아."
p.78
"그게 기업이지. 쇼 미 더 머니. 사람이나 휴지나." 남편이 말했다. '나는 그런 기만에 화가 났던 걸까?' 연아는 생각했다. "그때 윗분이 화났다면서 나더러 반성문 쓰게 한 건 어떻게 생각해? 그건 옳은 일이야?" 연아가 물었다. '그건 옳지 않지. 잘못한 게 없는데 뭘 사죄해. 아무리 회사라고 해도 그런 건 시키면 안 되지." "쇼 미 더 머니라며. 돈만 준다면 얼마든지 시킬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니지. 그건 인간의 위엄이나 품위에 관계된 일이지. 자기가 돈이 있다고 남의 존엄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게 갑질이잖아." "그러면 대기발령은? 그건 옳은 일이야?" 연아가 물었다. 남편이 생각에 잠겼다.
[2부] 싸우기
“사람 사는 집”
p.164
동네를 새로 지을 때 땅을 깊이 파내면 재개발이다. 재개발을 할 때에는 세 들어 살던 사람에게도 이사비를 줘야 한다. 동네를 새로 지을 때 땅을 깊이 파내지 않으면 재건축이다. 재건축을 할 때에는 세 들어 살던 사람에게 이사비를 주지 않아도 된다. 아니, 주지 말아야 한다. 주지 않아도 될 돈을 멋대로 주는 것은 주인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므로.
재개발은 재건축과 달리 공익성이 있기 떄문에 세 들어사는 사람도 보호해주는 거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공익성도 없는 남의 돈벌이 때문에 쫓겨난단 말인가요? 어차피 쫓겨나는 건 똑같은데 공익성도 없이 쫓겨나는 억울한 사람에게 돈을 더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선녀가 되물었다. 당신은 꽃겨나는 게 아니라 계약이 해지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p.193
"그런데 부위원장님, 사람한테는 왜 집이 필요할까요? 옛날에는 다들 집이 없었을 거 아니에요? 원시인들은 다 떠돌며 살았잖아요. 그런데 어쩌다 아무 데서나 못 자고 집이 필요한 생활을 하게 됐을까? 사람 말고도 집이 필요한 동물이 있나? 아 ,새가 있지. 그런데 새들 둥지는 작잖아. 개집은 사람들이 만들어 준 거고... 그렇지, 토끼굴이라는 말도 있네. 그런데 토끼들이 굴에서 살아요? 난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부위원장님, 우리 어릴 때 운동장에 새끼 돼지를 풀어놓고 아이들이 잡게 하는 놀이가 있지 않았어요? 혹시 기억나요?"
“카메라테스트”
p. 207
지민은 그런 추천제도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런 선택은 '지상파가 아니면 안돼'라는 식의 아집이라기보다 자기 보호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군소 방송에서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이 겪는 일에 대한 무서운 소문은 차고 넘쳤다. 지민은 그런 위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할 기지나 배짱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지 않았다.
“대외활동의 신”
p. 234
"상사가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어떻게 하겠냐는 따위를 묻는 면접관 말입니다. 지원자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트집 잡히지 않을 답을 합니다. 그걸 듣고 면접관은 '모범답안 열심히 외워왔네. 요즘 애들은 말하는 게 죄다 똑같아'라며 고개를 젓고요. 어쩌란 말입니까?"
신이 그런 건 오히려 회사가 직원들에게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내부 고발은 꼭 필요한 일이니 어디로 신고하면 된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최대한 팀 안에서 대화로 해결하라든지. 어차피 다들 시키는 대로 할텐데요 하고 그는 말한다. "최소한 그 부정행위가 어떤 건지라도 알려주고 물어봐야죠. 그 상사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커피믹스 스틱을 몇 봉 집에 가져갔다는 겁니까, 아니면 시체를 토막 내서 비품 창고에 숨겨놨단 말입니까?"
p. 265
악을 쓴다고 다리에 힘이 솟거나, 갈증이 해소되거나, 더위가 가시지는 않는다. 그것은 각성제도 스테로이드도 아니고, 인센티브도 패널티도 아니다. 육체적으로는 더 힘이 들고 더 고통스러워질 따름이다. 그럼에도 신은 대원들이 악을 쓰는 이유를 이해했다. 반복 동작으로 머리가 멍해질 때에는 그렇게라도 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실신해서 쓰러진다. 발바닥이 아프거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울음이 나올 것 같으면 악을 쓰는 게 유용한 요령이다.
[3부] 버티기
음악의 가격
p. 304
소비자가 스트리밍 서비스로 한 곡을 들을 때 뮤지션이 가져가든 돈이 1원도 안된다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한 곡을 재생하면 매출이 7원쯤 발생하는데 거기서 1.3원쯤 되는 돈을 작곡자, 편곡자, 보컬, 연주자가 나눠 갖는다고 했다. 그 1.3원도 서비스 가입자가 아무 할인을 받지 않고 정가로 서비스 요금을 낼 때 얘기였다.
p.310
"제가 예술가가 주인공인 소설에는 좀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리고 프리랜서들한테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거 네가 원해서 하는 거 아니냐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편의점 나가서 일하면 최저임금은 받을 수 있다고. 반박하기가 어렵더라고요."
p.311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 이콘이라고 가정한다. 경제학 밖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판한다. 진실은 언제나 꼬여 있다. 인간은 이콘이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아닌 것도 아니다. 소설을 쓸 때마다 내 안의 이콘이 그렇게 공들일 필요 있느냐며 딴죽을 걸었다. 강연 한 회 수입이 단편소설 고료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p.318
이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은 이미지, 캐릭터, 스토리였다. 지푸라기 개가 포장지라고 여겼던 것이 진짜 상품이었고 음악이 포장지였다. 왜냐하면 음악은 너무 쌌기 때문이다. 상품 가치는 희소성에서 나온다.
P.326
음악이 그렇게 싸져서 모든 사람이 거의 공짜로 음악을 즐기게 됐는데 사람들이 음악으로부터 얻은 효용은 얼마나 늘어났나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 10년 사이에 175만 배나 100배, 아니 열 배라도 더 행복해졌나요? 오히려 반대인가요? 사람들은 이제 음악을 공기처럼, 심지어 어떤 때는 공해처럼 받아들입니다.
P.335
그리고 그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모든 재화와 용역에 무제한 스트리밍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다시 세울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할 테니까. 공급량, 보완재, 대체재를 넘어서.
그러면 좋은 음악은, 다시 소중해질지도 몰라.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장강명 연작소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문예지에서 발표된 1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노동과 경제 문제를 드러내는 소설들은 각각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 총 3부로 구분되어 리얼하면서도 재치 있게 한낮의 노동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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