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책 5문5답] 15. 봉달호 편의점주 & 에세이스트

D-29
저는 현직 편의점주이자 에세이스트인 봉달호입니다. 서울 송파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고요, 점포를 운영하며 틈틈이 글을 써서 지금껏 4권의 에세이집을 냈습니다. <매일갑니다, 편의점>으로 데뷔(?)했고, 최근에는 <셔터를 올리며>를 펴냈습니다. <셔터를 올리며>는 ‘그믐 북클럽’ 3기 도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제게 인생책을 묻는다면 “편의점에서 어떤 상품이 가장 맛있어요?”라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고르기 어려운 대답인데요, 가장 존경하는(!) 책은 <카탈로니아 찬가>입니다. 조지 오웰의 작품은 다 좋아하지만 그중 <카탈로니아 찬가>는 제 인생을 바꿔놓은 책이랄까, ‘나도 나중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이런 선택과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던 책입니다. 조지 오웰이라는 인간의 매력에 더욱 빠져들게 만들었고, 존경하게 만든 책입니다. 그런데 <카탈로니아 찬가>는 스페인 내전과 당시의 이념 지형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좀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해요. 그래서 오늘 ‘인생책’으로 소개할 책은 “가장 아끼는 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프라하의 소녀시대>입니다. 시대와 문체는 다르지만 어쩌면 <카탈로니아 찬가>와 비슷한 결을 지닌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일본 에세이스트 요네하라 마리가 쓴 작품인데요, 요네하라 씨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난소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지요. 향년 56세. 러시아어 동시 통역사라는 독특한 ‘본캐’를 갖고 있는 작가였으며,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개성 있는 문체와 시선으로 에세이 분야에 ‘요네하라 마리’라는 별도의 장르를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이분의 인생이 좀 독특해요. 아버지가 일본공산당 간부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체코에 가면서 각국 공산당 간부의 자녀들이 모이는 국제학교에 입학하게 돼요. 모두 50여 개 국가에서 온 아이들이 한 울타리 안에 복작거렸다고 하는데요,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그때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을 담고 있습니다.
Q2 이 책이 인생책인 이유에 관해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저는 에세이를 볼 때, 작가가 소재를 꺼내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비슷한 경험을 했어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제각각이겠지요. 이른바 ‘좋은’ 에세이는 그렇게 소재를 꺼내는 방식에 있어 개성이 있고, 소재를 꺼내는 방식만 보아도 에세이스트의 인품이나 생각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기도 해요.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사례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체코에 가서, 공산주의자 자녀들의 국제학교에 다녔다……. 이런 독특한 경험을 소재로 글을 쓴다면 당신은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대부분은 자신을 관찰자나 주인공으로 삼아 편년체 식으로 서술하겠지요.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되었고, 교육 과정은 어땠고, 선생님은 어땠고, 무슨 일을 겪었고, 장단점은 무엇이고……. 물론 그런 책도 의미는 있겠지만, 에세이로서는 ‘경험은 특별한데 구성은 재미없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개성이나 매력이 없는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달라요. 모두 3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 제목에 친구들 이름이 들어가요. 리차, 아냐, 야스나. 각 챕터의 중심에 특정한 친구를 올려놓으면서, 그 친구를 회상하며 소개하고, 30년쯤 후에 그 친구를 찾아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독자 입장에서는 꽤 흥미진진하지요. 그는 살아있을까, 뭘 하며 살고 있을까, 과연 성공했을까……. 영화 <써니>가 떠오르기도 하고,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 같은 느낌으로 손에 땀을 쥐고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약간의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소녀 시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멋진 남자와 살 것 같았던 친구는 좀 못생긴 남자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고, 대단한 애국자처럼 보였던 친구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고, 화가가 꿈이었던 친구는 그 꿈을 포기하며 살고 있어요. 우리가 사는 인생이 대략 그렇지 않나요?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그런 인생의 풍경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 일품인데, 소재가 독창적이고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도 남다른데다 작가의 독특한 문장의 매력까지 더해져 제가 ‘인생책’으로 꼽으며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이 막막했던 시절에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의욕을 북돋았던 책이고, 에세이 작법의 교본과도 같은 역할을 했으며, 시대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만든 고마운 작품입니다. 서너 번 반복해 읽었습니다. 요즘도 종종 펼쳐 읽곤 합니다.
Q3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신 거예요? 이 책을 만나게 된 계기와 사연이 궁금합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사르를 “연애하고 싶은 남자”라고 표현했던가요? 고인에 대한 애정을 담아 말하자면, 제게 요네하라 마리도 그런 인물이에요. 제가 미혼이고, 일본어나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요네하라 마리와 비슷한 연배로 동시대에 교류하고 있었다면, “저랑 한번 사귀어보실래요?”라고 대시하였을 것 같은 인물이에요. 요네하라 마리를 처음 접한 것은 <마녀의 한 다스>라는 책이었는데, ‘우아, 무슨 이런 독특한 사람이 다 있지?’ 싶었어요. 4차원인 것 같으면서 때 묻지 않고, 방심하는 마음을 틈타 날카로운 이성이 번뜩이며 치고 들어오는 것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대목 또한 있더군요. 그의 4차원적 매력이 빛나는 책은 <발명마니아>가 아닌가 싶어요. 삽화도 직접 그랬는데, 어쩌나 ‘자알’ 그렸는지. <미식견문록>을 읽으면서 그의 국제적 감각에 반했고, <대단한 책>을 읽을 때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함께 책을 읽는 기분이었어요. <교양노트>는 웨스턴 바 같은 곳에서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교양 있는’ 수다를 떠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우리는 작가를 알고, 작가를 사랑하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요네하라 마리 씨는 저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점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수줍게 고백하며 사귀었고, 평생을 따라다니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연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늘도 조심히 문장을 골라 원고를 씁니다. 요네하라의 뒤를 따라 저도 에세이스트가 되었습니다.
Q4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읽는다면, 어떤 분들께 추천하시겠어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옛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의 역사와 상호관계에 대해 모르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배경을 잘 모르고 읽어도 각자 자기 나름으로 해석이 가능한 책이에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이제 박물관의 유물과 같은 용어가 되어버렸지요. 물론 저는 현실에 수립되었던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초기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이 지녔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순수한 이상마저 조롱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양가적 입장을 갖고 있어요. 결과는 참혹했지만 이상의 뿌리마저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축입니다. 사고를 확장하자면, 1980~90년대 우리나라 학생운동이 지금에 와서 이런저런 비판을 받곤 있지만, 저는 그때 우리가 꿈꾸었던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따뜻한 마음마저 능욕할 수는 없다고 봐요. 그걸 지나치게 우상화해서도 안되겠지만. <프라하의 소녀시대>가 그런 내용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읽다 보면 ‘역시 그들도 사람이었구나’ 하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지요. 세상사 가운데 우리가 얻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잊어야 할 것, 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또 하나. 인생에 있어 사람의 ‘선택’이라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오히려 드물고, 시대와 역사의 격랑 가운데 이리저리 흔들리는 경우가 많지요. 어느 역사학자가 “극단의 시대”라고 표현했던 20세기에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렇게 거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기록을 읽다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고마워하는 마음도 슬그머니 생겨나는 것 같아요. 사람과 세상, 시대와 역사에 대한 시선의 폭을 따뜻하게 넓혀보고 싶은 분에게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권합니다.
Q5 마지막으로 책에서 밑줄 그은 문장을 공유해 주세요.
책을 읽다 보면 문장이 아니라 책 자체에 밑줄을 긋고 싶은 책이 있지요. 문장이 아니라 서사로 승부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도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밑줄 긋게 되는 화려하고 촉촉한 문장 같은 것은 없지만 몇 가지를 골라보자면 이렇습니다. 페이지는, 지금 제가 소장하고 있는,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나온 <프라하의 소녀시대> 1판 7쇄본(2013년)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노동자 농민의 해방을 역설한 레닌 스스로가 사실은 생애에 단 한 번도 노동으로 자기 생활을 꾸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며, 지주로서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받아 생활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최근이다. 겨우 열몇 살배기 나이로 본질을 꿰뚫어 본 리차의 냉철한 리얼리즘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30페이지) “펜으로 쓴 것은 도끼로도 파낼 수 없다. …… 이 관용구는 ‘무력에 의한 언론의 우위’를 의미하는 동시에 ‘한번 쓴 글은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97페이지) “단물 빠는 것에 익숙한 자들은 다른 단물에도 민감하죠.” (131페이지) “내게 아냐를 비난할 자격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내가 아냐나 미르차와 같은 처지가 된다면, 아냐가 택한 길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미르차처럼 행동할 용기가 있었을까.” (165페이지) “인체의 기관에는, 어떤 조건 아래서는 6배로 팽창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어떤 이름의 기관이고, 그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181페이지) 181페이지의 인용문은 요네하라 씨가 소비에트 국제학교에 다녔던 시절 인체해부학 과목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냈던 질문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맞춰 보세요. 답은……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관입니다. 동공. 물론 학생들은 다른 답을 추측하며 키득거렸어요. 어쩌면 당신도.
[인생책 5문5답] 인터뷰에 함께 해 주셔서 진솔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자신의 인생책을 소개해 주실 분들은 아래 주소에 입장하여 참여해 주세요. https://www.gmeum.com/gather/template/1 전 국민이 자신의 인생책 한 권씩 소개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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