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에서 개 산책, 요리, 운동, 바느질하며 사는 미술관 중독자 최경화입니다. 미술관과 추리소설을 좋아합니다. 스페인 미술관 산책, 포르투갈 시간이 머무는 곳, 오늘 오후는 평화로울 것이다-노견과 여행하기를 출판했고, 기회가 되면 번역도 합니다.
인생을 바꾼 책은 없어요. 저를 만든 가장 아래 칸 벽돌은 어릴 때 내키는 대로 아무데나 펴서 읽던 각종 백과사전입니다. 그래도 인생책에 백과사전을 꼽기는 좀 그러니까 (밑줄 그은 문장을 공유해달라는 질문이 있기도 하고요) 제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미술사라는 학문에 한정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E. 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입니다.
[인생책 5문5답] 21. 최경화 미술관 중독자
D-29
호두언니
도우리
Q2
이 책이 인생책인 이유에 관해 조금 더 듣고 싶어요.
호두언니
‘서양미술사’를 선택하고 제 책장을 찾아보니, 1950년에 출간된 책의 한국어 초판인 1997년판을 가지고 있군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책을 만들고, 미술관을 드나들고, 그림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하는 동안 꾸준히 제 옆에 있던 책입니다.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그리고 포르투갈로 이사하면서 내가 과연 이 책을 또 볼까? 하면서도 그래도 버릴 수 없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펼쳐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돼요.
도우리
Q3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신 거예요? 이 책을 만나게 된 계기와 사연이 궁금합니다.
호두언니
미술대학 없고, 서양미술사나 미학 개론 같은 교양 과목도 없던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했습니다. 어학연수 갔던 스페인에서 들은 미술사 강의는 반도 못 알아들었지만 즐거웠어요. 무엇보다 그곳의 미술관에 매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엔 미술사학과가 있는 학교도 적고 전공자도 얼마 안 되는데,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의 미술사학과는 한 학번에 팔십 명 정도의 학생이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학문이더군요. 미술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읽은 책 중 하나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무슨 이야긴지 하나도 모르면서 어쨌든 꾸역꾸역 읽었던 것 같습니다. 막상 미술사 석사 과정에 들어가고 보니 곰브리치처럼 미술 이야기를 조곤조곤 해주는 교수님은 없더군요. (이 책의 원제는 The Story of Art, 미술 이야기이지 히스토리 오브 아트가 아닙니다) 하수 미술사학도인 저는 당장 닥친 과제와 읽어야 할 아티클, 논문 쓰기 등에 치여 곰브리치식의 이야기는 잊었습니다. 찾아야 하는 화가나 주제가 나오는 부분만 다시 발췌독을 할 뿐이었죠.
그러다 미술책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펼친 ‘서양미술사’는 유려했습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의 여러 예술가와 수많은 사조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는 것에 놀랐어요. 곰브리치는 미술이 점차 나아진다는 식으로 얘기해서 별로야, 라면서 뚱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서문에 이 점에 대한 서술(혹은 변명 혹은 주의)이 있었더군요. 제가 여러 미술책이나 전시 카탈로그, 사람들이 미술을 대하는 방식에 품고 있던 불만은 이미 70년 전에 곰브리치도 품고 있었습니다. 제가 미술사라는 세계에 발가락만 살짝 담그고 한참 지난 다음에 도달한 생각이 이미 몇십 년 전에 활자화되어 제 책장에 있었던 것이죠. 어릴 적 아무데나 펼쳐 읽던 백과사전처럼 가끔 이 책을 아무 장이나 펼쳐 읽어봅니다. 저는 또 무릎을 치고요.
유럽 중심의 서술이다, 여성 예술가를 다루지 않는다, 현대미술을 덜 다룬다 등의 비판이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학자가 책을 쓸 정도로 전 세계의 미술을 다 알 순 없겠죠.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시기도 고려해야 할 것이고요. 미술사와 출판 두 분야에 코를 들이미는 저는 미술사 서적 저자로서의 곰브리치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작품을 엮어 명료하면서도 일반적인 단어로 이야기하는 능력은 드문 것이니까요.
최대한 직접 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저자의 문장 때문에 저의 여행 욕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림과 조각, 건물을 직접 보고 싶어서 했던 수많은 여행들은 제 안의 중간층 벽돌 정도 되니까, 인생책 맞네요.
도우리
Q4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읽는다면, 어떤 분들께 추천하시겠어요?
호두 언니
서양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분께 추천하지만, 서양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은 이미 접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아직 안 읽어본 분들은 벽돌책이지만 도판이 많으므로 너무 부담갖진 마시고요(그래도 절대 적은 분량은 아닙니다). 옛날에 읽어봤는데 재미없더라 하는 분께는 초판 서문을 다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도우리
Q5
마지막으로 책에서 밑줄 그은 문장을 공유해 주세요.
호두언니
“우리가 미술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미술에는 언제나 발견해야 될 새로운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