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책 5문5답] 14. 염기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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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들을 만나 그 분들의 인생책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생책 5문5답] 인생책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나를 알고 세상을 알아가는 데 도움을 준 책. 좋은 삶을 살게 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용기를 주는 책. 당신의 인생책을 알려주세요. 함께 읽고 나누겠습니다.
Q1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자기 소개와 인생책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소설가 염기원입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신입생 때 벤처기업을 창업하며 학생 신분으로 세 번의 사업을 했습니다. ‘10대 사업가’라는 타이틀로 지상파 토크쇼에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글을 쓰겠다며 모든 걸 접고 전국 일주를 떠나 시를 끄적였지요. 다시 학교로 돌아온 뒤로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등단한 건 2014년입니다. 융합스토리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문예지 신인상 공모에 당선되었지요. 언젠가 소설가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원고 달라는 곳이 생기지는 않더군요. 웹소설을 쓰면서 IT, 스타트업, 마케팅, 창업 분야 강연과 컨설팅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방송 진행도 하고, 대학에서 창업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그러다 쓴 첫 장편소설, 《구디 얀다르크》로 2019년에 제5회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두 번째 책인《인생 마치 비트코인》을 쓴 이후로 ‘창작의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8편의 장편소설을 썼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온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라는 책을 들고 다시 세상에 나왔어요. <월급사실주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생책 소개가 늦어진 건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먼저 지난 6주 동안 명동에 있는 <소설가의 방>에서 생활하며 정신없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의 방>은 서울프린스호텔에서 하고 있는 사회공헌 활동 중 하나로 신진 소설가가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해주는 사업입니다. 그곳에서 <월급사실주의> 동인 앤솔러지에 실을 소설 마감도 했고, 소재를 얻기 위해 발품을 팔며 서울 도심권 곳곳을 취재하느라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노포도 여러 곳 들렀고요. 두 번째로는, 아마 저만 그러지는 않을 것 같고, 인생책 하나를 꼽기가 무척 힘들었네요. 이번에 출간한《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의 176페이지에 주인공 하나의 오빠인 ‘최강천재’가 소중히 여기는 책들 이름이 나오는데요. 사실 그게 제 대학 시절의 인생책이었습니다. 거기에 과학, 종교,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까지 놓고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명동에 있을 때부터 고민하다가 어제 답을 얻었습니다. 제 인생책은 송대방 작가의 《헤르메스의 기둥》입니다. 미술과 문학, 연금술을 융합한, 두 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인데요. 지적이면서 도발적이고, 무엇보다도 무척 재미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게 소설인지 뭔지, 첫 장부터 독특한 구성인데 소재와 내용은 더 특이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영미문학에 재미를 느껴서 매주 동네 헌책방에 들러 책을 샀어요. 그러다 70년대와 80년대 한국소설에 흠뻑 빠졌죠. 만화책으로 가득했던 서재를 문학 전집이 죄다 차지했고, 그렇게 읽다 보니 활자중독이 됐어요. 방학 때면 백과사전을 가나다순으로 끝까지 읽곤 했습니다. 백과사전에서 제일 재미있던 건 인체와 동물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미술 분야에 빠져들게 되었어요. 파르미자니노(당시 사전에는 파르미지아니노로 표기했던 것 같습니다)의 <긴 목의 성모> 역시 백과사전에 실린 컬러 사진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기괴한 비율의 몸을 가진 성모와 아기 예수를 보며 어린 마음에도 불경스러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르메스의 기둥》의 주인공인 승호가 바로 이 그림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작가는 이 그림의 기둥에 연금술의 비밀이 담겨있다며 독자를 역사 속으로, 어느 추리소설보다 더 긴장되는 상황 속으로 이끕니다. 천재 화가인 파르미자니노는 실제로 연금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고 하는데요. 여느 연금술사처럼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 미술사학도와 그의 여자친구가 <긴 목의 성모>가 담고 있는 비밀을 풀기 위해 벌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날줄로, 중세 프랑스의 연금술사 미셸이 국왕인 프랑수아 1세의 후원을 받아 ‘현자의 돌’을 찾는 이야기가 씨줄로 얽히며 책장 넘기는 손에 땀이 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Q2 이 책이 인생책인 이유에 관해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제 정체성을 소설가로 뒀을 때 이 책이 꽤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든 게 아니라, 그 반대였습니다. 당시 저는 과도하게 패기만만하여 책을 볼 때마다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라는 아주 시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하권으로 된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스물여섯 살의 한국인 청년이라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어요. 아직 십 대였지만 사업을 하다 보니 세상 모든 걸 경쟁으로만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제대로 소설을 써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이 작가에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램덩크에서 윤대협이 강백호에게 한 대사가 있죠. “날 쓰러뜨릴 생각이라면 죽도록 연습하고 와라.” 작가가 제게 그런 대사를 날린 기분이 들었어요. 송대방 작가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니 작품의 주된 소재에 대해 일반인보다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까지 가르치지는 않겠죠. 인문학적 소양을 베이스로 하여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조합하고 긴 이야기를 뚝심 있게 풀어나가는 솜씨에 ‘정말 난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하여 저는 재학 중에 사업가와 소설가, 싱어송라이터를 하겠다는 야망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소설처럼 인생을 펼쳐나가기로 다짐을 했지요. 이후로 꽤 버라이어티한 삶을 살았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창작의 곳간에 소재를 넉넉히 쌓아왔습니다. 소설가가 된 이후로도 가끔 《헤르메스의 기둥》을 떠올리곤 했는데요. 이 책이 제 등단작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읽지 않기를 바라는 그 단편에서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은영 팀장님, 제가 대학 때 'Mercury Falling'이라는 앨범이 나왔어요. 거기서 스팅이 자신을 머큐리로 표현했는데, 그때 유행하던 외국 소설 중에 연금술을 다룬 것들이 많아 저도 여러 권 읽었거든요. 그 앨범을 보고 ‘아, 스팅이 자신을 헤르메스의 현신이라 생각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이 사람이 연금술에 심취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사집을 보고 거기에 어떤 암시가 있는지 영영사전을 펼쳐가며 연구하다가 중간고사를 망쳐버린 적이 있지요.” 덧붙이자면, 장교로 복무하면서 인터넷으로 송대방 작가에 대해 더 알아보다가 출간 과정을 알게 됐습니다. 이 책은 투고를 통해 출간으로 이어졌는데요. 메이저 출판사에서 등단 이력이 없는 작가의 투고작을 출간하는 건 이례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워낙 흥미로워서였겠지요. 원고를 본 출판사가 작가에게 만남을 제의했고, 이후 반년가량 수정 작업을 거쳐 출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 인생책을 쓴 송대방 작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강렬한 데뷔작으로 문학계를 놀라게 한 후로 그는 지금까지 자취를 감춘 채입니다. 프랑스 유학 중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정보도 듣지 못했습니다. 연금술의 비의에 빠진 것인지,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없지요. 후자였으면 좋겠습니다.
Q3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신 거예요? 이 책을 만나게 된 계기와 사연이 궁금합니다.
다시 제 대학 시절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촉망받는 청년 사업가로 사는 걸 거부하고 작가가 되겠다며 전국을 떠돌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요. 전공 공부보다는 소설 읽기에 열심이었습니다. 중앙도서관에 있는 소설 중 한국 문학을 대표하던 출판사의 장편을 대부분 읽었습니다. 그러니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헤르메스의 기둥》을 놓칠 수 없었죠. 당시 저는 무라카미 류에 심취했습니다. 이렇게 독자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쉴 새 없이 드리블하는 작가가 한국에도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야심에 빠진 소설가 지망생으로 살고 있을 무렵이었지요. 히라노 게이치로의 데뷔작을 읽으며 적잖이 놀랐지만,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며 애써 태연한 척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의 첫 장을 펼칠 때는 어디 얼마나 잘 썼나 보자 하는 심정, 시건방진 평론가의 자세였지요.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가 고등학교 때부터 즐겨들었다던 스팅에 저 역시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스팅과 연금술 사이에 연관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헤르메스의 기둥》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건방지게 꼬았던 다리를 풀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성서를 읽으면서 모순과 역설이 왜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르메스의 기둥》을 읽은 이후, 외람된 얘기가 될지 모르겠는데, 연금술과 수태고지를 예수의 탄생과 결부시키는 해석을 접했고 참 혼란스러웠어요. 이 책은 소설가가 되려 했던 저를 완전히 뒤흔든, 놀랍도록 도발적이고 지적인 소설이었습니다. 다 읽고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책 속 이야기에 사로잡혔습니다.
Q4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읽는다면, 어떤 분들께 추천하시겠어요?
미학, 서양미술사, 연금술, 도상학, 매너리즘, 이런 단어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관심이 쏠리는 분에게 추천합니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활자 중독자라면 놓쳐서는 안 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지망생에게도 추천합니다. 젊은 작가의 첫 장편이니 치기 어린 모습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탄탄하게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지, 좋은 참고가 될 거예요. 지적 욕구와 심미적 욕구가 강한 분들이라면 풍성한 식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뇌 속의 다양한 부분이 자극되는데요. 그 황홀한 미식의 향연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책장을 넘기게 될 것입니다. 너무 영업사원처럼 말했나요? (웃음)
Q5 마지막으로 책에서 밑줄 그은 문장을 공유해 주세요.
말씀드린 것처럼 이 소설은 구조부터가 참 독특합니다. 작중 주인공이 “파르미자니노 연구”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차례를 넘기면 프롤로그가 나오는데, 그 위에 문장 하나가 있어요.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은 무엇이냐?” 이 질문 하나가 소설 전체를 관통합니다. 이 질문에 관한 답을 하기 위해서 먼저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에 대한 얘기를 꺼냅니다. 이후 책을 덮을 때까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수많은 사건이 숨 막히게 이어집니다. 또 하나의 문장은 “원근법은 신의 비밀이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인데요. 원근법의 창시자가 브루넬레스키가 아니라, 고대 로마의 폼페이인들이었다는 얘기를 하며 나오는 문장입니다. “무한히 발산하는 급수는 악마의 발명품이다”(정확히 이 문장은 아닐 텐데 대충 비슷할 겁니다)라던, 천재 수학자 닐스 헨리크 아벨의 말을 연상시킵니다. 강렬한 문장 하나로 독자의 호기심을 단번에 끕니다. 소개해 드린 두 문장 때문에 도서관에 있는 온갖 미술 관련 책, 특히 도상학과 미술사 관련 서적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송대방 작가님 나빠요. 소설가 지망생의 꿈을 꺾은 것도 모자라 평점 0.3이던 경영학과 학생에게 전공과 거리가 먼 미술 공부까지 시키다니요. (농담입니다) 지금까지 소설가 염기원의 인생책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제가 소설도 누군가의 인생책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인생책 5문5답] 인터뷰에 함께 해 주셔서 진솔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자신의 인생책을 소개해 주실 분들은 아래 주소에 입장하여 참여해 주세요. https://www.gmeum.com/gather/template/1 전 국민이 자신의 인생책 한 권씩 소개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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