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군부와 강화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원로들 사이에 끼인 천황이 종전 및 강화 방침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한 것은 6월 중순 이후부터로 보인다. (p.386)
그러나 천황의 정책 선회는 늦은 감이 잇었다. 7월 16일 뉴멕시코의 사막지대에서 원폭실험에 성공한 미국의 해리 투르먼 대통령은 7월 26일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 명령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7월 26일 스탈린 소련 수상을 맞이하여 개최된 포츠담 회담을 통해 사실상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p.387)
최종적으로 8월 14일에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천황이 재차 포츠담 선언의 수락 방침을 결정했고, 도고 외상이 이날 밤에 이러한 방침을 스위스를 통해 연합국 측에 전달했다. 또한 이날 밤에 포츠담 선언 수락을 표명하는 천황의 육성을 녹음하여 8월 15일 아침에 방송을 통해 송출했다. 이로써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을 맞게 되었다. (p.390)
정치가와 군인 등 국가전략의 수립과 실행에 책임을 진 인간들이 편협한 시각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그릇된 대응전략을 추진할 경우 국제사회의 모범생이라도 일순한 국제사회의 우범자로 전락할 수 있음을 근대 일본의 정치외교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p.391)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9장 아시아·태평양전쟁, 박영준
문장모음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