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러일전쟁] 에서는 일본이 최초로 영국과 동맹을 맺은 후 당시만 해도 세계 5대 강국으로 불리던 러시아에 개전을 선언하게 됩니다. 러시아로서는 극동의 소국 정도로 여기던 일본이 전쟁을 도발할 줄은 몰랐던 거죠. 러시아를 선제공격하기에 앞서 일본은 우선 대한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부터 체결했습니다. 덕분에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하기가 참 수월해졌죠. 영일동맹의 내용도 그랬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포츠머스 강화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은 대한제국과 만주, 청나라에 대한 특수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청일전쟁 이후 유럽 열강들 등쌀에 밀려 이권을 포기한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본은 강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팽창지향적 성격의 제국으로 변모해갑니다.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박영준, 2020)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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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동맹국인 영국의 요청에 부응하여 육군을 독일령 산둥 방면 기지에 파병하여 칭다오와 산둥철도를 장악했고 해군을 태평양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방면에 파견하여 독일 함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으며 독일령 남양제도를 장악했다. 영국과 미국 등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과 1918년에 해군 함대를 지중해까지 파견하여 독일과의 전투에 임했고 육군은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볼셰비키 혁명군과 교전을 벌였다. (p.211)
이 같은 참전의 결과 1918년 11월에 독일이 항복하자 일본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뒤늦게 참전을 결정한 미국과 더불어 5대 전승국의 일원으로 예우를 받게 되었다. (...)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에 이어 세계대전에서도 승전국의 지위를 얻게 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세계 5대 강국, 나아가 세계 3대 강국의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 (p.212)
파리 강화회의 및 워싱턴 국제회의를 통해 하라 내각은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및 미국 등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국제연맹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과 기회균등 원칙의 천명, 산둥성에 대한 권리의 반환, 해군 전력에서 주력함 군축 등에 합의함으로써 국제협조의 외교방침을 선명하게 보였다. (p.221)
다만 하라 내각이 추진하던 국제협조의 대외정책과 군비통제 방침에 대해서 육해군의 중견 장교들, 그리고 극단적 내셔널리즘을 갖게 될 일분 식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배태되기 시작했다.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는 그다지 영향력을 갖지 못하던 이 그룹들의 발언권은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일본의 침로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p.223)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6장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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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에서는 일본의 세계대전 참전 결정 전후를 살펴봅니다. 1890년대 이후 영국과 독일 간의 패권 경쟁 구도에서 영일동맹은 세계대전 발발 이후 일본을 전쟁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아시아와 태평양 방면에서 독일 해군을 상대로 일본 육해군이 군사적 성과를 거두면서,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 입장에서는 일본의 도움이 절실해집니다. 이후 일본은 지중해 쪽으로 해 군을 보내기도 하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발발 이후에는 시베리아에도 파병을 하게 되지요. 결국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일본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과 더불어 5대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파리 강화회의와 워싱턴 회의의 결과 세계질서는 영국, 미국 등의 승전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축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하라 내각은 국제협조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전략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육해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총력전 노선이 힘을 얻게 되면서 점차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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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갈수록 근대 일본이 처음부터 군국주의 전략을 토대로 전쟁을 준비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1920년대까지의 일본은 물론 제국주의 국가였으나, 주로 민간인 출신의 정치가들로 형성된 내각은 적극적 대륙정책을 추진하려는 육해군 세력과 달리 대체로 서구 열강의 팽창을 방어하는 정도의 입장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거든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전쟁이라는 것은 패할 경우 국력의 대부분을 소진하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볼 때, 일본이 어째서 누가 봐도 무리해 보이는 전쟁으로 국력을 '몰빵'하게 되었는지, 이후 분량에서는 그 과정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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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내정과 외교를 담당한 총리들과 그 내각은 1930년대까지는 비교적 일관되게 국제연맹 및 영국 주도하의 국제질서에 협조하려는 기조를 유지했다. (p.227)
주요 정치지도자들의 국제협조 노선은 미국과의 세계최종전쟁을 예상하며 그에 대비한 군사적 준비의 일환으로 만몽영유 구상을 공유해온 청년 장교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p.243)
이시와라는 동료들에게 육군대학 교관 시절부터 연구해오던 전쟁사 대관을 강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국운 만회를 위한 근본 국책으로서의 만몽문제 해결안」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했다. 이 문서에서 그는 미국과의 세계최종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관동군 주도하에 만몽지역에서 정변을 일으켜 기존의 중국 군대와 관제를 해산하고 일본 군인을 총독으로 삼아 군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정하에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은 각각 역할을 분담하여 공존공영하게 한다고 했다. (p.244)
이 같은 본국 정부의 (무력공격 불확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시와라 등 관동군 주모자들은 지린성 방면에 대한 공격 확대를 지속했고 그 결과 9월 말 시점에 남만주 전역과 중만주의 상당 부분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그에 더해 이시와라 등은 하얼빈 방면으로 군사작전을 확대하여 북만주지역까지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자 10월 3일 본국 정부에서 북만주지역에 대한 작전 확대를 반대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에 관동군은 10월 4일 이에 대한 반박성명을 발표하면서 본국 정부의 지시를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p.251)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위로 수립된 만주국에 대해 본국 정부가 사실상 기정사실화하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이시와라 등 그 주모자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1932년 여름에 이시와라가 도쿄로 귀환했을 때 애초에는 장쭤린 폭살사건의 주범 고모토 다이사쿠처럼 처벌을 각오했으나, 오히려 육군본부 내의 청년 장교들이 그를 영웅시하면서 이후 승진을 거듭하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나타났던 것이다.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독단적 작전을 일삼았던 야전의 부랑아가 본국으로 귀환한 뒤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고 오히려 대륙 팽창의 영웅으로 대접받게 된 것은 향후 일본이 치닫게 되는 군국주의 노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했다. (p.255)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7장 군국주의로의 경로와 만주사변,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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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군국주의로의 경로와 만주사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국가노선이 군국주의로 돌아서게 된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민간인 출신의 내각은 국제협조와 그에 따른 군비축소를 통해 비교적 안정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려 했던 반면, 기존의 세계 질서를 뒤엎고자 하는 번혁 지향의 소장 정치가들과 육해군의 장교들이 득세하면서 그들이 품고 있던 이른바 '총 력전 체제'로 국가전략이 점점 기울게 됩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차대전까지 세 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전국이 되면서 군인들의 자신감이 오를 대로 올랐고, 거기에 미국-영국-프랑스 중심의 세계질서를 뒤집지 않고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세계관이 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이시와라 간지라는 이른바 '또라이'가 본국의 의사마저 무시하며 무리하게 일으킨 만주사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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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국을 세운 것이 일본 정부의 치밀한 전략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토록 자기 세계관에 충실한 괴짜가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물론 이시와라 간지 한 사람을 너무 부각시키기에는, 이렇게 본국의 지시에 불복하고도 귀국 후 처벌은커녕 영웅으로 치켜세운 것처럼 이미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일본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요. 일명 '오족협화'를 표방하며 여러 민족이 조화롭게 사는 낙토를 건설하겠다는 만주국의 이념에 대해 이시와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만주국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곳으로 이주한 가난한 사람들이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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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와라 간지가 자신의 세계관을 담은 책 『세계최종전쟁론』이 국내에도 변역되어 있어 참고 삼아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192쪽으로 짧은 편이네요. 저는 최근 사회학자 조형근의 책 『우리 안의 친일』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이 책의 1장에는 '만보산 사건'과 이후의 화교 학살 사건을 통해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기묘한 동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제가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만주 이주를 독려하고 그곳에서 일어난 작은 분쟁을 확대하는 바람에 무고한 화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옛날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자는 발상도 만주국 수립을 위한 포석으로 일본의 사학자들이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 역시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요.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탄생이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우리 안의 친일』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세계최종전쟁론세계최종전쟁론은 간단하게 말해, 먼저 세계가 두 개의 강대국 그룹으로 재편된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1940년대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체공시간을 가진 항공기와 한 발을 투하했을 때 도시가 사라질 위력을 가진 초월적인 무기가 완성된다. 그러면 이런 강력한 무기를 가진 두 강대국이 세계통일을 위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는 이론이다. 이시와라 간지는 이 세계최종전쟁에 돌입할 두 강대국 그룹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연합,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우리 안의 친일내가 불평등한 세상의 윗자리에 올라가 좋은 일을 하겠다는 실력양성론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런 욕망은 심지어 반일과 친일 청산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 그러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을 수 있다.” 친일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아주 분명하고 명확한 이분법의 논리와 흑백논리에 익숙해져 있다. 고민의 여지가 별다르게 필요 없는 문제로 여겨졌다. ‘친일’은 오늘날 한국 사회 문제의 모든 기원이기에 ‘반일’의 기치로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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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연맹에서의 이탈 이후 일본의 정치세력과 군부는 국제연맹을 주도하는 국가들에 대한 대결의식을 가지면서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야전에 파견된 육군과 해군은 보다 도발적인 정책들을 각각 추진했다. (p.267)
육군의 관동군과 지나주둔군이 만주와 북중국 방면에서의 군사 작전을 통해 판도를 확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해군도 제국의 영역 확대에 본격적으로 참가하려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 육군은 북방 대륙으로 진공하고 해군은 남양 방면으로 진출하려는 해외팽창의 전략론이 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p.275)
1936년 1월 15일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해군군축회의에서 일본 전권대표 나가노 오사미 해군 대장은 1930년 4월에 체결했던 해군군축조약의 탈퇴를 통고했다. (...) 이로써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 평화와 군비축소의 조류 속에 형성되었던 국제연맹, 워싱턴 및 런던 해군군축조약에서 모두 탈퇴하면서 소위 무조약시대를 맞게 되었다. (p.276)
1936년 6월과 8월에 걸쳐 히로타 고키 내각하에서 책정된 「국책의 기준」과 외교전략으로서의 「제국외교방침」, 군사전력으로서의 「제국국방방침」은 국제연맹의 탈퇴와 국제 군축조약의 이탈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을 명시한 문서로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육군과 해군의 전략방침 불일치가 조정되지 않았고 군사전략 및 외교전략 간의 상이한 점이 해소되지 않은 채 병기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육군이 가상 적으로 상정한 세계 최대의 육군국인 소련과 해군이 가상 적으로 상정한 세계 최대의 해군국인 영국과 미국 등과 동시에 싸워야 하는 무모한 전쟁계획이 되고 말았다. (p.238)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8장 중일전쟁,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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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군과 북지나방면군은 1937년 말까지 허베이성, 산시성, 산둥성, 차하르 지역 등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중일 간의 무력분쟁에 대해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따라서 선전포고를 행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내각과 육군 참모본부 등에서는 선전포고 시행 여부를 논의했으나 이 사태를 '전쟁'으로 선언할 경우 일본도 가입한 1928년의 부전조약에 위배될 수 있고 미국이 1936년 21월에 선포한 중립법에 따라 필요한 전쟁물자의 수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천황에 의한 선전포고 절차를 거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태에 대해서도 최초에는 '북지사변'으로, 9월 2일 이후에는 '지나사변'으로 명명하도록 했다. 이 명명 과정은 일본 스스로가 중국에의 병력 파병과 교전 확대가 자신들이 1920년에 참가해온 국제규범을 위반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p.296)
국민당 정부는 이미 난징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12월 13일까지 이어진 난징 공략전은 일방적인 일본군의 압승으로 종료되었다. 전승 무드에 취한 일본군은 중국군 병사는 물론 포로와 민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난징 함락 첫날에 제16사단이 2만 4천 명 내지 3만 2천 명의 중국 병사와 양민을 학살한 것을 비롯하여 피해자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p.299)
결국 1939년 1월 고노에 총리는 '지나사변'이 해결되지 못했고 새롭게 일본 정부 내에서 대두하던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 구상에 대한 내각 내의 대립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각 총사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동아 신질서 건설' 등의 화려한 외교적 슬로건을 제시했으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국지적 분쟁으로 해결될 수 있었던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해 병력 증파를 결정하여 중일전쟁을 확대했다는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p.309)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8장 중일전쟁,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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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은 일본에 중요한 외교적 과제를 제기했다. 즉, 육군이 중심이 되어 이전부터 주장해오던 독일과의 동맹체결을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 및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었다. (p.315)
기갑군단을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 앞에 폴란드는 물론 프랑스도 단기간에 패배하는 양상을 목격한 일본 육군 내에서는 도깅로가의 동맹체결론이 보다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항복으로 인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게 된 동남아 지역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즉 베트남 북부지역에 대한 무력진출론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육군 내의 전략론은 이 지역에 대한 현상유지를 바라는 영국은 물론 미국과의 전면전쟁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p.317)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8장 중일전쟁,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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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중일전쟁]에서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육군과 해군이 서로 경쟁하듯 팽창에 열을 올리면서 중일전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만주국에서 성과를 본 일본은 제2, 제3의 만주사변을 잇달아 벌입니다. 육군은 이른바 '화북자치공작'으로 중국 화북 지역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해군군축조약에 반대하던 함대파 세력들이 득세한 해군에서는 육군의 활약에 자극을 받아 남양 방면으로 팽창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이후 하이난다오 점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만주사변 전후로 있어서 일본의 전쟁계획에 큰 그림을 그렸던 이시와라는 북진 이후 남진을 추진하는 자신의 전략이 육해군 간 의견 대립에 따라 좌초됩니다. 그래서 중일전쟁의 확대를 막고자 하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육군 측의 야망으로 중국에 더 많은 군대를 보내면서 장제스 정부의 저항에 직면해 큰 충돌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 전승 무드에 취한 일본군이 일으킨 민간인 학살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 '난징대학살' 사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에 와서는 독일과의 동맹에 소극적이었던 천황의 의지보다 육해군의 전략이 더 앞서는 상황까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이시와라가 몇십 년 후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던 미국과의 '최종전쟁'이 앞당겨지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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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 역사 무대에 주어지는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정책결정을 했던 정책결정자들의 역할도 전쟁의 원인이나 과정을 설명하는 데 도외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 간의 관계 등 국제구조와 함께 국가정책을 최종 결정하는 인간들의 역할을 같이 고찰해야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파동을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p.321)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9장 아시아·태평양전쟁,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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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노에 총리의 주화론과 도조 육군상의 주전론 대립은 10월 14일에 열린 각의에서도 이어졌다. 고노에 총리가 대미 개전에 승산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자, 도조 육군상은 고노에 총리의 대미 교섭론에 따라 일본이 미국의 주장에 굴복한다면 중일전쟁의 성과는 무로 돌아갈 것이고 만주국의 존립은 위기에 빠질 것이며 조선에 대한 식민 통치도 동요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경우 일본은 만주사변 이전의 소일본으로 위축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 고노에는 자신이 일찍이 표방한 '동아 신질서' 구상에 의해 촉발된 일본의 대외정책 공세화와 그로 인해 조성된 국제정세의 구조적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채 정치외교의 무대에서 무책임하게 퇴장해버리고 말았다. (p.344)
전체적으로 해군과 육군의 현존 군사력 면에서 일본이 대미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한때 연구했던 장기총력전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단기적 군사 우세는 전쟁 기간이 지속된다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단기결전을 추구하거나 미국에 필적하는 경제자원의 공급지역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진주만 공략과 아울러 남방 자원지대의 확보를 개전 초기에 중점적인 전략적 과제로 포함한 것은 이러한 고려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p.352)
그러나 진주만 기습공격을 받은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이 의회 연설을 통해 "진주만을 기억하라."라고 국민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이래 미국의 대응은 전례 없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고립주의 정책으로 회귀했던 미국의 전쟁 DNA가 일본의 거듭된 공세 속에서 살아나면서 1942년 중반 이후를 기점으로 전황이 미국 우세의 국면으로 변화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1942년 5월에 전개된 산호해 해전, 6월 5일에 전개된 미드웨이 해전, 8월부터 실시된 과달카날 전투가 그러했다. (p.363)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9장 아시아·태평양전쟁,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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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군부와 강화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원로들 사이에 끼인 천황이 종전 및 강화 방침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한 것은 6월 중순 이후부터로 보인다. (p.386)
그러나 천황의 정책 선회는 늦은 감이 잇었다. 7월 16일 뉴멕시코의 사막지대에서 원폭실험에 성공 한 미국의 해리 투르먼 대통령은 7월 26일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 명령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7월 26일 스탈린 소련 수상을 맞이하여 개최된 포츠담 회담을 통해 사실상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p.387)
최종적으로 8월 14일에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천황이 재차 포츠담 선언의 수락 방침을 결정했고, 도고 외상이 이날 밤에 이러한 방침을 스위스를 통해 연합국 측에 전달했다. 또한 이날 밤에 포츠담 선언 수락을 표명하는 천황의 육성을 녹음하여 8월 15일 아침에 방송을 통해 송출했다. 이로써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을 맞게 되었다. (p.390)
정치가와 군인 등 국가전략의 수립과 실행에 책임을 진 인간들이 편협한 시각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그릇된 대응전략을 추진할 경우 국제사회의 모범생이라도 일순한 국제사회의 우범자로 전락할 수 있음을 근대 일본의 정치외교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p.391)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9장 아시아·태평양전쟁,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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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는 일본이 남방작전을 실행하면서 미국,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하고, 미국에 대한 초기의 우세가 뒤로 갈수록 빠르게 뒤집히고 본토에 폭격이 가해지면서 결국 항복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장의 앞에서 저자가 밝힌 것처럼, 제국 일본의 전쟁을 설명하는 이 책은 전쟁의 원인에 있어서 국가들 간의 세력균형이나 힘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당시 정책결정자들 개인의 역할을 함께 고찰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941년 이후로만 보더라도 시시각각 정세가 변함에 따라 따라 내각의 구성이 바뀌고, 그들의 성향과 순간의 판단이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책이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전쟁 범죄의 가장 큰 책임자는 다름 아닌 천황 히로히토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연합국 측과의 모종의 합의에 따라 천황이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것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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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장을 읽으면서 개전 무렵에는 미국에 비해 일본 육해군 전력이 미세하게나마 앞섰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다만,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인구 수나 산업 규모 면에서의 일본이 결코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을 텐데도 일본이 부나방처럼 전쟁을 향해 간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손에 쥔 것을 잃기는 싫고, 운이 좀 따르면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고 요행수를 바라는 도박꾼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들이 결정한 것을 스스로 되돌릴 수 없었던 정치가들의 어리석고 편협한 시각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을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부터 분노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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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크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 왜 근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부터 대략 10년 단위로 큰 전쟁을 벌였는가. 둘째, 일본의 육군과 해군, 정부는 과연 어떻게 그 전쟁들을 수행했고 승전과 패전은 어떤 연유로 갈라졌는가. 셋째, 일본의 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p.394)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10장 일본의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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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동
“ 첫째, 청일전쟁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된 요인으로 각 시기마다 일본의 주요한 정책결정자들, 즉 유력한 정치가와 군인들 가운데 일본의 안보나 국위선양과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한 수단이라고 간주하는 인간들이 존재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p.395)
둘째, 정책결정자들의 사상과 정책행위에 더해 근대 일본의 전쟁을 가능하게 했던 또 다른 요인은 육군과 해군의 군사력 건설과 그것을 실전에서 운용하기 위한 군사전략, 즉 전쟁계획의 존재였다. (p.397)
셋째, 일본을 둘러싼 국제질서가 전쟁을 국가의 정책수단으로 선택하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 (...) 일본이 전쟁을 정책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국제기구나 중재 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제3국의 존재는 없었다. (p.400)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10장 일본의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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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동
“ 이 같은 근대 일본의 전쟁 원인들을 검토해보면, 우리는 향후 일본이 또 다른 전쟁국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이 같은 변수들의 존재 여부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놓치지 않으면 안 될 부분은 일본이 그(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의 다섯 번의 전쟁에서는 모두 승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 일본이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고 그런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는 어떤 요인에 의해 패전국이 되었는가를 함께 고찰할 필요가 있다. (p.401) ”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10장 일본의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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