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박영준, 2020)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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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논쟁과 대외정책] 에서는 국권강화론, 군비증강론, 강병건설론, 문명개화론 등 메이지 유신 직후 주요 정치세력들의 국가전략들이 소개됩니다. 근대화 초기 일본이 애초부터 군국주의로 노선을 정한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의견들이 각축을 이루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조선과 타이완을 정벌하자는 이도 있었지만 서구 열강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청국과 조선 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는데요. 국가전략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폭넓은 시야를 가진 여러 정치가들의 사상이 맞부딪치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국제정치사에서는 개별 국가의 국력이 증강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국가전략을 논하는 전략가나 정치가들이 등장하는 경향이 종종 발견된다. (...) 1868년의 왕정복고 이후 대내적으로 문명개화와 식산흥업, 부국 건설 정책이 진전되고 타이완 정벌에 성공했으며 세이난 전쟁을 평정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메이지 정부에서도 1880년대를 전후하여 보다 적극적인 국가전략을 모색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p.88)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3장 1880년대 일본 국가전략의 확장과 대외정책, 박영준
임오군란이 수습된 이후에 일본 내에서는 청국을 가상의 적으로 하는 해군증강론이 더욱 적극적으로 제기되었고 관련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 한때 강병보다는 부국 건설에 국가정책의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초미의 급무"로 군비확장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이때였다. (p.97) 이 같은 예산 증액의 실태를 볼 때 임오군란 이후 일본이 군사 체제의 강화에 적극성을 보였고 해외정벌이 가능한 군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기존 연구들의 평가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p.98)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3장 1880년대 일본 국가전략의 확장과 대외정책, 박영준
임오군란 이후 갑신정변을 거친 시기에 나타난 일본 대외정책론의 제 양상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문헌이 1887년 나카에 초민이 저술한 『삼취인경륜문답』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은 양학신사, 호걸군, 남해선생 등 3명의 등장인물이 각각 술에 얼근하게 취한 상태에서 일본을 둘러싼 대뇌외 정세를 분석하고 향후의 대외전략을 논하는 스토리로 구성되었다. (p.103) 나카에 초민의 이 인상적인 책에 등장하는 3명의 인물은 당대 정치세력들의 국가전략론과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학신사는 서구 국가들과의 대응한 조약 개정을 추진하면서 서양 법제의 수용 등에 힘쓰던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대신 등을 표상하고 있고, 호걸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민권파 계열 국권확장론자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청국 등과의 평화전략을 제시한 남해선생은 아시아 연대론자들을 연상시킨다. 요컨대 나카에 초민의 이 책은 1880년대 후반 시점에 존재하던 일본 대외정책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1880년대 후반에 일본에는 호걸군과 같은 군비증강론자와 대륙진출론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증대되어갔다. (p.105)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3장 1880년대 일본 국가전략의 확장과 대외정책, 박영준
[제3장 1880년대 일본 국가전략의 확장과 대외정책] 에서는 가장 새로웠던 부분은 조선에서 벌어진 임오군란이 일본의 군비증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동아시아 3국의 역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부분이었어요. 3장에 소개된 나카에 초민의 책 역시 무척 흥미롭습니다. 국내에도 2005년에 번역되어 나온 바 있네요. 1880년대 후반 일본 내 국가전략들이 경합하는 과정을 3명의 인물의 대화를 통해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아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삼취인 경륜문답(일본근대사상총서 1)
1889년 12월에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전 시기에 견지해온 국제정세관을 바탕으로 보다 중요한 대외전략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1890년 3월에 발표한 「외교정략론」을 통해 군비증강의 성과를 바탕으로 국가독립자위의 길을 보다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국가독립자위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권선을 방어하며 타국으로부터의 침해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익선을 방호하여 자신의 형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는 주권선이 일본의 본토를 의미한다면, 이익선은 바로 조선에 있다고 하면서 일본으로서는 조선국의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p.116) 사실 일본의 육해군이 청국군에 연전연승을 거듭하자 일본 국내에서는 개전 초기에 만연했던 중화제국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보다 강경한 대청 결전론이 팽배해졌다. 후쿠자와 유키치 등은 이 전쟁을 문명을 대표하는 일본과 야만을 상징하는 청국과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민권파를 대표하는 자유당의 당보도 이 같은 인식을 공유하면서 베이징 점령 이후 일본이 동양의 맹주가 되어 동양의 세력균형을 지배하면서 세계 열국의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과감한 논조를 거듭 게재했다. 같은 민권파 정당이 개진당은 보다 강경한 대청 전쟁의 수행을 주장했다. (p.129) 전통적인 중화질서의 맹주였던 청국을 상대로 일본이 승전을 거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이 부국강병 정책의 일환으로 건설한 육해군의 제도와 전력이 청국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발달되었고 수준도 높았다. (...) 둘째, 야전에서 작전지휘를 담당한 육해군 지휘관들이 메이지 유신 이래 이미 해외유학과 국내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충분히 군사교육을 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었던 반면 청국 지휘관들은 그러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미릅했다. 넷째, 육군과 해군 간의 작전방향의 조정이 긴밀하게 이루어졌다. (...) 넷째, 무엇보다도 정치외교전략과 군사전략이 잘 조화될 수 있었다. 이토 총리와 무쓰 외상은 국제정세를 감안하면서 적시에 적절한 정치외교적 판단을 내렸고 대본영 회의를 통해 군 지휘부와의 정책 조정을 도모했다. (p.135)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강구한 국가전략이 전쟁 이후 일본의 정치와 외교를 지배했다. (...) 일본은 전승의 기세에 편승하여 동양의 맹주가 되겠다는 전략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 주권선의 유지를 넘어 이익선의 개장을 계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137)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4장 청일전쟁, 박영준
[제4장 청일전쟁]까지 읽다 보니 거듭 등장하는 이름이 보입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대표적인데요.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최초의 총리이자,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그는 일본이 군비증강과 팽창을 중심으로 한 국가전략론을 펼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민권파도 전쟁 쪽으로 기우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할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청국을 상대로 대단히 유리한 강화조약을 맺고도 유럽 열강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점도 중요하게 봐야 하는데요. 이같은 굴욕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특수권익을 인정받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일본 최초의 동맹체결 사례인 영일동맹조약은 영국이 청국에 대해, 일본이 만주와 대한제국에 대해 특수권익을 갖는다는 점을 상호 인정하고 체약국 가운데 한 나라가 타국과 교전하는 경우 다른 나라는 중립을 지키고 제3국이 참전하는 경우 체약국이 참전하여 동맹국을 원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p.148) 러시아와의 외교 교섭이 결렬되자 일본 정부는 1904년 1월과 2월 가쓰라 총리, 고무라 외상, 데라우치 육군상, 야마모토 해군상 등이 참가한 가운데 거듭 각의를 개최하여 전쟁을 통해 일본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해군 수송선이 준비되기를 기다려서 2월 6일에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2월 10일에는 메이지 천황이 개전 선언을 했다. (p.158)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 가쓰라-태프트 협약, 영일동맹의 개정 등으로 일본의 권리가 승인된 한반도에 1905년 11월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장악했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도 감독하게 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사실 청일전쟁 이후에 획득하여 총독부를 설치한 타이완과 달리 한반도는 일본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외교권을 박탈하여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타국이었다. (p.172)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5장 러일전쟁, 박영준
[제5장 러일전쟁] 에서는 일본이 최초로 영국과 동맹을 맺은 후 당시만 해도 세계 5대 강국으로 불리던 러시아에 개전을 선언하게 됩니다. 러시아로서는 극동의 소국 정도로 여기던 일본이 전쟁을 도발할 줄은 몰랐던 거죠. 러시아를 선제공격하기에 앞서 일본은 우선 대한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부터 체결했습니다. 덕분에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하기가 참 수월해졌죠. 영일동맹의 내용도 그랬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포츠머스 강화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은 대한제국과 만주, 청나라에 대한 특수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청일전쟁 이후 유럽 열강들 등쌀에 밀려 이권을 포기한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본은 강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팽창지향적 성격의 제국으로 변모해갑니다.
일본은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동맹국인 영국의 요청에 부응하여 육군을 독일령 산둥 방면 기지에 파병하여 칭다오와 산둥철도를 장악했고 해군을 태평양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방면에 파견하여 독일 함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으며 독일령 남양제도를 장악했다. 영국과 미국 등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과 1918년에 해군 함대를 지중해까지 파견하여 독일과의 전투에 임했고 육군은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볼셰비키 혁명군과 교전을 벌였다. (p.211) 이 같은 참전의 결과 1918년 11월에 독일이 항복하자 일본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뒤늦게 참전을 결정한 미국과 더불어 5대 전승국의 일원으로 예우를 받게 되었다. (...)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에 이어 세계대전에서도 승전국의 지위를 얻게 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세계 5대 강국, 나아가 세계 3대 강국의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 (p.212) 파리 강화회의 및 워싱턴 국제회의를 통해 하라 내각은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및 미국 등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국제연맹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과 기회균등 원칙의 천명, 산둥성에 대한 권리의 반환, 해군 전력에서 주력함 군축 등에 합의함으로써 국제협조의 외교방침을 선명하게 보였다. (p.221) 다만 하라 내각이 추진하던 국제협조의 대외정책과 군비통제 방침에 대해서 육해군의 중견 장교들, 그리고 극단적 내셔널리즘을 갖게 될 일분 식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배태되기 시작했다.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는 그다지 영향력을 갖지 못하던 이 그룹들의 발언권은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일본의 침로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p.223)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6장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 박영준
[제6장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에서는 일본의 세계대전 참전 결정 전후를 살펴봅니다. 1890년대 이후 영국과 독일 간의 패권 경쟁 구도에서 영일동맹은 세계대전 발발 이후 일본을 전쟁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아시아와 태평양 방면에서 독일 해군을 상대로 일본 육해군이 군사적 성과를 거두면서,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 입장에서는 일본의 도움이 절실해집니다. 이후 일본은 지중해 쪽으로 해군을 보내기도 하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발발 이후에는 시베리아에도 파병을 하게 되지요. 결국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일본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과 더불어 5대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파리 강화회의와 워싱턴 회의의 결과 세계질서는 영국, 미국 등의 승전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축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하라 내각은 국제협조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전략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육해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총력전 노선이 힘을 얻게 되면서 점차 바뀌게 됩니다.
이 책을 읽어갈수록 근대 일본이 처음부터 군국주의 전략을 토대로 전쟁을 준비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1920년대까지의 일본은 물론 제국주의 국가였으나, 주로 민간인 출신의 정치가들로 형성된 내각은 적극적 대륙정책을 추진하려는 육해군 세력과 달리 대체로 서구 열강의 팽창을 방어하는 정도의 입장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거든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전쟁이라는 것은 패할 경우 국력의 대부분을 소진하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볼 때, 일본이 어째서 누가 봐도 무리해 보이는 전쟁으로 국력을 '몰빵'하게 되었는지, 이후 분량에서는 그 과정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내정과 외교를 담당한 총리들과 그 내각은 1930년대까지는 비교적 일관되게 국제연맹 및 영국 주도하의 국제질서에 협조하려는 기조를 유지했다. (p.227) 주요 정치지도자들의 국제협조 노선은 미국과의 세계최종전쟁을 예상하며 그에 대비한 군사적 준비의 일환으로 만몽영유 구상을 공유해온 청년 장교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p.243) 이시와라는 동료들에게 육군대학 교관 시절부터 연구해오던 전쟁사 대관을 강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국운 만회를 위한 근본 국책으로서의 만몽문제 해결안」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했다. 이 문서에서 그는 미국과의 세계최종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관동군 주도하에 만몽지역에서 정변을 일으켜 기존의 중국 군대와 관제를 해산하고 일본 군인을 총독으로 삼아 군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정하에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은 각각 역할을 분담하여 공존공영하게 한다고 했다. (p.244) 이 같은 본국 정부의 (무력공격 불확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시와라 등 관동군 주모자들은 지린성 방면에 대한 공격 확대를 지속했고 그 결과 9월 말 시점에 남만주 전역과 중만주의 상당 부분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그에 더해 이시와라 등은 하얼빈 방면으로 군사작전을 확대하여 북만주지역까지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자 10월 3일 본국 정부에서 북만주지역에 대한 작전 확대를 반대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에 관동군은 10월 4일 이에 대한 반박성명을 발표하면서 본국 정부의 지시를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p.251)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위로 수립된 만주국에 대해 본국 정부가 사실상 기정사실화하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이시와라 등 그 주모자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1932년 여름에 이시와라가 도쿄로 귀환했을 때 애초에는 장쭤린 폭살사건의 주범 고모토 다이사쿠처럼 처벌을 각오했으나, 오히려 육군본부 내의 청년 장교들이 그를 영웅시하면서 이후 승진을 거듭하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나타났던 것이다.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독단적 작전을 일삼았던 야전의 부랑아가 본국으로 귀환한 뒤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고 오히려 대륙 팽창의 영웅으로 대접받게 된 것은 향후 일본이 치닫게 되는 군국주의 노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했다. (p.255)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7장 군국주의로의 경로와 만주사변, 박영준
[제7장 군국주의로의 경로와 만주사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국가노선이 군국주의로 돌아서게 된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민간인 출신의 내각은 국제협조와 그에 따른 군비축소를 통해 비교적 안정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려 했던 반면, 기존의 세계 질서를 뒤엎고자 하는 번혁 지향의 소장 정치가들과 육해군의 장교들이 득세하면서 그들이 품고 있던 이른바 '총력전 체제'로 국가전략이 점점 기울게 됩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차대전까지 세 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전국이 되면서 군인들의 자신감이 오를 대로 올랐고, 거기에 미국-영국-프랑스 중심의 세계질서를 뒤집지 않고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세계관이 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이시와라 간지라는 이른바 '또라이'가 본국의 의사마저 무시하며 무리하게 일으킨 만주사변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국을 세운 것이 일본 정부의 치밀한 전략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토록 자기 세계관에 충실한 괴짜가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물론 이시와라 간지 한 사람을 너무 부각시키기에는, 이렇게 본국의 지시에 불복하고도 귀국 후 처벌은커녕 영웅으로 치켜세운 것처럼 이미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일본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요. 일명 '오족협화'를 표방하며 여러 민족이 조화롭게 사는 낙토를 건설하겠다는 만주국의 이념에 대해 이시와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만주국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곳으로 이주한 가난한 사람들이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습니다.
이시와라 간지가 자신의 세계관을 담은 책 『세계최종전쟁론』이 국내에도 변역되어 있어 참고 삼아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192쪽으로 짧은 편이네요. 저는 최근 사회학자 조형근의 책 『우리 안의 친일』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이 책의 1장에는 '만보산 사건'과 이후의 화교 학살 사건을 통해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기묘한 동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제가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만주 이주를 독려하고 그곳에서 일어난 작은 분쟁을 확대하는 바람에 무고한 화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옛날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자는 발상도 만주국 수립을 위한 포석으로 일본의 사학자들이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 역시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요.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탄생이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우리 안의 친일』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세계최종전쟁론세계최종전쟁론은 간단하게 말해, 먼저 세계가 두 개의 강대국 그룹으로 재편된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1940년대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체공시간을 가진 항공기와 한 발을 투하했을 때 도시가 사라질 위력을 가진 초월적인 무기가 완성된다. 그러면 이런 강력한 무기를 가진 두 강대국이 세계통일을 위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는 이론이다. 이시와라 간지는 이 세계최종전쟁에 돌입할 두 강대국 그룹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연합,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우리 안의 친일내가 불평등한 세상의 윗자리에 올라가 좋은 일을 하겠다는 실력양성론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런 욕망은 심지어 반일과 친일 청산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 그러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을 수 있다.” 친일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아주 분명하고 명확한 이분법의 논리와 흑백논리에 익숙해져 있다. 고민의 여지가 별다르게 필요 없는 문제로 여겨졌다. ‘친일’은 오늘날 한국 사회 문제의 모든 기원이기에 ‘반일’의 기치로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제연맹에서의 이탈 이후 일본의 정치세력과 군부는 국제연맹을 주도하는 국가들에 대한 대결의식을 가지면서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야전에 파견된 육군과 해군은 보다 도발적인 정책들을 각각 추진했다. (p.267) 육군의 관동군과 지나주둔군이 만주와 북중국 방면에서의 군사 작전을 통해 판도를 확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해군도 제국의 영역 확대에 본격적으로 참가하려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 육군은 북방 대륙으로 진공하고 해군은 남양 방면으로 진출하려는 해외팽창의 전략론이 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p.275) 1936년 1월 15일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해군군축회의에서 일본 전권대표 나가노 오사미 해군 대장은 1930년 4월에 체결했던 해군군축조약의 탈퇴를 통고했다. (...) 이로써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 평화와 군비축소의 조류 속에 형성되었던 국제연맹, 워싱턴 및 런던 해군군축조약에서 모두 탈퇴하면서 소위 무조약시대를 맞게 되었다. (p.276) 1936년 6월과 8월에 걸쳐 히로타 고키 내각하에서 책정된 「국책의 기준」과 외교전략으로서의 「제국외교방침」, 군사전력으로서의 「제국국방방침」은 국제연맹의 탈퇴와 국제 군축조약의 이탈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을 명시한 문서로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육군과 해군의 전략방침 불일치가 조정되지 않았고 군사전략 및 외교전략 간의 상이한 점이 해소되지 않은 채 병기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육군이 가상 적으로 상정한 세계 최대의 육군국인 소련과 해군이 가상 적으로 상정한 세계 최대의 해군국인 영국과 미국 등과 동시에 싸워야 하는 무모한 전쟁계획이 되고 말았다. (p.238)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8장 중일전쟁, 박영준
관동군과 북지나방면군은 1937년 말까지 허베이성, 산시성, 산둥성, 차하르 지역 등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중일 간의 무력분쟁에 대해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따라서 선전포고를 행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내각과 육군 참모본부 등에서는 선전포고 시행 여부를 논의했으나 이 사태를 '전쟁'으로 선언할 경우 일본도 가입한 1928년의 부전조약에 위배될 수 있고 미국이 1936년 21월에 선포한 중립법에 따라 필요한 전쟁물자의 수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천황에 의한 선전포고 절차를 거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태에 대해서도 최초에는 '북지사변'으로, 9월 2일 이후에는 '지나사변'으로 명명하도록 했다. 이 명명 과정은 일본 스스로가 중국에의 병력 파병과 교전 확대가 자신들이 1920년에 참가해온 국제규범을 위반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p.296) 국민당 정부는 이미 난징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12월 13일까지 이어진 난징 공략전은 일방적인 일본군의 압승으로 종료되었다. 전승 무드에 취한 일본군은 중국군 병사는 물론 포로와 민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난징 함락 첫날에 제16사단이 2만 4천 명 내지 3만 2천 명의 중국 병사와 양민을 학살한 것을 비롯하여 피해자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p.299) 결국 1939년 1월 고노에 총리는 '지나사변'이 해결되지 못했고 새롭게 일본 정부 내에서 대두하던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 구상에 대한 내각 내의 대립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각 총사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동아 신질서 건설' 등의 화려한 외교적 슬로건을 제시했으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국지적 분쟁으로 해결될 수 있었던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해 병력 증파를 결정하여 중일전쟁을 확대했다는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p.309)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8장 중일전쟁, 박영준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은 일본에 중요한 외교적 과제를 제기했다. 즉, 육군이 중심이 되어 이전부터 주장해오던 독일과의 동맹체결을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 및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었다. (p.315) 기갑군단을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 앞에 폴란드는 물론 프랑스도 단기간에 패배하는 양상을 목격한 일본 육군 내에서는 도깅로가의 동맹체결론이 보다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항복으로 인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게 된 동남아 지역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즉 베트남 북부지역에 대한 무력진출론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육군 내의 전략론은 이 지역에 대한 현상유지를 바라는 영국은 물론 미국과의 전면전쟁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p.317)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제8장 중일전쟁,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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