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혼자 읽기

D-29
에코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과학기술로 자연과 물질의 제약을 극복하고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전통적 휴머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입장과 유사하다. 자연은 인간이 통제 가능한 대상이며, 인간은 자연을 배경으로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한다. 그들은 서구 문명의 역사는 언제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쟁, 물질에 대한 정신의 전쟁, 숙명에 대한 자유의 전쟁을 천명하며 전진해 왔고, 역사는 이런 끝없는 투쟁의 이야기였다고 주장한다.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 AI 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8장 인류세: ‘인간’이 만든 인류의 곤경〉 (송은주), 신상규 외 지음
에코모더니스트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사상적 기반인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의 인간 주체는 자연을 배경으로 자기의 의지를 실현해 나가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였다. 근대 이후의 자연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는 죽은 객체로서의 자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하고 이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수동적이고 무력한 대상이었다. 인류세에 들어와 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자연이 더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인간과 공동의 지구 역사를 만드는 행위자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을 별개로 보는 근대 계몽주의의 관점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 AI 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8장 인류세: ‘인간’이 만든 인류의 곤경〉 (송은주), 신상규 외 지음
사고 당시 소련 당국은 주민들을 다 소개한 후 마을에 남은 가축이나 야생동물들을 하나씩 다 쏘아 죽였다. 오염되었기 때문에 살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민들이 키우다가 버리고 간 개나 고양이들이 인적이 끊어졌던 마을에 나타난 사람들이 반가워서 뛰어 나오면 하나씩 총을 겨눠 쏘아 죽였다. 흙도 모조리 파내서 콘크리트 관에 넣어 묻었다. 증언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땅 껍질을 벗겼다.”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 AI 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8장 인류세: ‘인간’이 만든 인류의 곤경〉 (송은주), 신상규 외 지음
인류세의 이야기는 단순히 인간의 종말에 관한 어둡고 음울한 경고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은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고 기계적 보철 장치로 신체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투공성(透孔性)의 존재이며 주변 환경과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연결되어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를 ‘지구에 묶인 자(Earthbound)’라고 표현했다.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 AI 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8장 인류세: ‘인간’이 만든 인류의 곤경〉 (송은주), 신상규 외 지음
과학사가 도나 해러웨이는 인류세에 대한 두 가지 반응, 곧 기술적 해법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과, 반면에 이미 모든 것이 늦었고 어떤 노력도 무의미하다는 비관주의 모두를 비판한다. 우리가 인류세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곤란들과 함께 머물기』라는 해러웨이의 책 제목처럼, 이 곤란들과 함께 이 자리에 기꺼이 머물겠다는 자세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구원해 주리라는 환상 없이, 이 곤란들이 우리를 조만간 피할 수 없는 절멸로 몰고 가리라는 냉소적인 절망도 없이.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 AI 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8장 인류세: ‘인간’이 만든 인류의 곤경〉 (송은주), 신상규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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