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

종료
그러는 동안 나는 유리가 창에 잘 맞는다는 것을 확인했고, 유리에 먼지가 잔뜩 끼어 흐릿했기 때문에 맑은 시냇물 속에 담가 돌멩이에 닿아 깨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씻었다. 그런데 이 반짝이는 유리를 해가 있는 쪽으로 높이 치켜들고 비춰보는 순간 나는 지금껏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경이를 보게 되었다.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세 명의 소년 천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 그러나 이 모습은 너무나 희미하고, 어렴풋하게 비쳐서 나는 그것이 태양빛 속에 있는 것인지, 유리 속에 있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단지 내 공상 속에 떠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리판을 움직여보면 일시적으로 천사들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면 갑자기 다시 천사들이 보였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난 이후에 나는 수년간 유리 액자 속에 그대로 끼워져 있는 동판화나 스케치는 그 긴 세월 동안 어두운 밤이면 유리에 자신의 모습을 전한다는 것을, 말하자면 유리 속에 자신의 거울상과 같은 것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원에 머문 날들 133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작품 속에는 유달리 "철 지난 쓸모없고 이상한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꼽으면서, 제발트는 켈러의 잡동사니 사랑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 고물들 지속적으로 순환해야만 하는 자본과 달리 교환관계에서 빠져나와 있다 것입니다. 이는 바로크 판타지이자 시인 특유의 수집벽으로서, 제발트는 켈러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가능성에 대해서 다음처럼 씁니다.
그리고 슐뤼터가 마찬가지로 언급하고 있듯이 그 서사적 태도가 자신의 아이러니적 성격을 획득하는 방식은 사물과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바라본 지나치게 선명한 이미지들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켈러의 예술적 영감이 아무리 그의 내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켈러를 때늦은 혹은 감춰진 사순절 설교자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리라. 켈러의 무상성 철학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바로 그 철학을 감싸는 명랑한 광채다.
전원에 머문 날들 131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5 ~⟨고독한 산책자⟩] 5장은 소설가이자 산문가인 로베르트 발저를 다룹니다. 제발트의 다른 책에서도 로베르트 발저의 언급이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제발트는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로베르트 발저는 살아 생전에 문학적인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동시대 작가인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로베르트 발저를 참 좋아하는데요, 한국에서도 발저의 소설과 산문집이 여러 권 출간 돼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끝⟫이라는 산문집과 ⟪벤야멘타 하인학교⟫라는 소설을 애정합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내세우려는 사람이 많은 시대에서 발저의 작품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모두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세상에서, 어찌 보면 개성없이 개성만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저의 인물들은 이상하리만치 자기 존재감을 지우기에 열중합니다. 우뚝 군림하려는 마키아벨리즘적 인물상의 대척점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하인과 같은 위치의 사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발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바로 발저가 '재'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해당 내용을 재인용하면서 5장 시작합니다.
벤야멘타 하인학교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벤야멘타 하인학교』. 생전에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다. 로베르트 발저는 1970년대 그의 난해한 작품들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스위스의 국민작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소설은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입학하는 귀족 태생의 소년 야콥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성장과 발전으로
세상의 끝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평생 고독 속에 칩거했다. 현존 작가 마르틴 발저(M. Walser)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깊이 은둔했던 시인’이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운명적 친화성을 느꼈던 소설가 제발트(Sebald)는 발저의 인생행로에 남은 흔적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고도 했다.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작가는 흔히 작품 외에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소상
산책자20세기 독일문학사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놓인 작가이자 스위스의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중단편 42편을 모아 엮은 대표 작품집『산책자』. 저자가 남긴 수백편의 작품 중 그를 대표하는 작품을 엄선하여 수록한 것으로, 작가 배수아의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다. '걷기'는 저자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로, 실제 저자는 많은 시간을 걸으며 길 위의 작은 것들에 시선을 두고 그 관찰과 사색을 작품에 담아냈다. 저자는 산책에 강박적으로 몰두했는데
실제로 조금만 깊이 정신을 집중하면 겉보기에 전혀 흥미롭지 않아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전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닌 점들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재를 휙 하고 불면 일말의 저항도 없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재는 겸손하고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것 그 자체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점은 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믿음으로 뭉쳐 있다는 점이다. 재보다 더 덧없고 연약하고 가련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재보다 더 유순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재는 개성을 가질 줄 모르며, 원래의 나무로부터 의기소침이 의기양양과 떨어져 있는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재가 있는 곳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재를 밟아보라. 그러면 밑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느껴지지도 않으리라.
전원에 머문 날들 151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첫장만 읽고는 시험과 과제가 겹쳐 책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문은 소설보다 생각의 영역이 넓고 깊어 가볍게 읽지 못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russist 께서 올려주신 내용을 참고서 삼아 이번 여름 여행을 시작하며 차근차근 잘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은 면에서 참 훌륭한 독서 길라잡이님이십니다. ^^
사실 매번 모임 때마다 저 혼자 말하는 느낌이라, 제가 뭘 잘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하긴 합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종종 감상 남겨주세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5 ~⟨고독한 산책자⟩]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발저의 형제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후손을 많이 낳아서 기르는 것이 관례이던 시대에 아버지인 아돌프 발저는 무려 십오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후에 로베르트 발저를 포함해서 총 여덟 명의 형제를 낳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저 형제들은 이상하게도 단 한 명의 자식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시작되었던 산업혁명이 근 한 세기가 넘도록 절정을 유지하던, 막대한 생산성의 시대에서 자신의 후대를 남기는 순환의 고리가 끊어졌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게 읽힙니다. 더욱 재밌는 점은, 발저가 쓴 산문 중에서 발저가 가상의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에게 쓴 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짧은 산문에서, 발저는 제도권 중심의 교육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빛나는 교육'이 필연적으로 한 인간에게 "빛나는 성과를 요구하고, 빛나는 인생행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발저는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들아, 줄곧 성공만 생각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너는 부족한 교육 덕분에 오히려 모범이 되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끔찍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자유인이 되는 거야. 자연의 아들, 세상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 너는 자유롭게 숨 쉬고 살게 될 거다. 모범적인 사람들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여담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도 "아들아 인생을 어떻게 살아라" 하는 시리즈가 유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러한 교육관은 아버지가 자기 시대에 정답이라고 믿는 가치관이 아들의 시대에서도 유효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 근거합니다. 어쩌면 발저는 그러한 '빛나는 교육'의 외피를 입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경계했던 것 같아요.
세상의 끝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평생 고독 속에 칩거했다. 현존 작가 마르틴 발저(M. Walser)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깊이 은둔했던 시인’이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운명적 친화성을 느꼈던 소설가 제발트(Sebald)는 발저의 인생행로에 남은 흔적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고도 했다.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작가는 흔히 작품 외에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소상
다시 돌아와서 본문 얘기를 해보자면, 5장에서도 제발트는 자신이 다루는 인물과 자신을 겹쳐 봅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조부의 외형과 발저의 그것이 매우 흡사했다고 밝히면서, 발저 산문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산문적 특성이기도 하죠. 앞서 4장에서 소개한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저의 글에서는 자기 시대를 적극적으로 혁명하려는 정치적 열망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만 발저는 지독한 끈기로 매일 희망도 절망도 없이 글쓰기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다만 헤벨처럼 민중들을 궐기하려는 욕구가 없었고, 루소처럼 코르시카를 배경으로 자신만의 정치적 이상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뫼리케처럼 전원 풍경으로 도피하면서 자신을 문학저 격벽 안쪽에 세워두지도 않았습니다. 또 켈러처럼 다시 한번 문학으로써 정치 참여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벌저의 글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자기 생의 방향타를 쥐고서 무언가로 변모해 가려는 의지가 흐릿합니다. 그런데도 그 과정은 전혀 체념적이거나 비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세계 몰락을 예언하는 표현주의적인 선지자"라기보다는, "미미한 사물의 전문 투시자"라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쩐 일인지 맑고 무구한 눈동자가 연상됩니다. 제발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토로 그늘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펼치는 페이지마다 더없이 다정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순수한 절망에서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항상 같은 이야기를 쓰지만 절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며, 미세한 부분에서 예리함을 발휘하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라워하고, 지상에 확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지만 공중에서 주저 없이 자신을 놓아버리는 그런 작가, 읽는 도중에 벌써 해체되기 시작해 몇 시간 뒤에는 글 속의 하루살이 같은 인물과 사건, 사물 들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지는 산문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원에 머문 날들 153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제발트도 언급하듯, 발저의 글 근저에는 유용해지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나아가 망각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유의 잉여성이 있습니다. 언젠가 발저는 자신은 이 산문 저 산문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다채롭게 조각나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나'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인공 '나'가 '나'라는 책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행인들 무리 속에 안전히 은신하고 있다." 이는 제발트가 2장에서 루소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나'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거의 은폐되는 방식으로 산문을 전개한 것이 연상됩니다. 또한 제발트는 발저가 크라이스트를 다룬 산문을 읽으며, 고트프리트 켈러와 크라이스트와 로베르트 발저가 기이한 방식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듯 전혀 상관없어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인물 사이에서 연결점을 모색하고, 그것을 전경화하는 것은 제발트 특유의 서술법입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드러나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5장 마칩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때부터 나는 모든 것이 시공간을 뚜이ㅓ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법을 차츰 배우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작가 클라이스트의 삶이 툰에서 악치엔 양조장 직원으로 일했다고 주장하는 스위스 산문작가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베를린 반제 호수에 울려퍼진 권총 소리가 헤리자우 요양원의 창에서 바라본 풍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발저가 떠난 산책과 내가 떠난 소풍이, 출새일과 사망일이, 행복과 불행이, 자연의 역사와 우리 산업의 역사가, 고향의 역사와 망명의 역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 모든 여정에서 발저는 항상 내 옆에서 같이 걸었다. 나는 일상의 작업을 중단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딘가 구석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방금까지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있던, 도저히 몰라보고 지나칠 수 없는 고독한 방랑자의 형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그의 두 눈으로 찬란한 제란트를 보았고, 또 이 제란트에서 은은히 빛나는 하나의 섬 같은 호수를 보았으며, 이 호수의 섬에서 다시금 다른 섬, "가벼운 아침 햇살의 안개에 싸여, 가물거리는 희끄무레한 빛 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생피에르섬을 본 것처럼 생각된다.
전원에 머문 날들 186-187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6 ⟨낮과 밤처럼⟩~] 6장에서는 화가이자 친구인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을 다룹니다. 얀 페터 트리프는 제발트와 함꼐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로서, 제발트가 작고할 때까지도 긴밀히 교류했던 사람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전에 다뤘던 산문집 ⟪캄포 산토⟫의 한 챕턴에서, 제발트는 친구였던 트리프를 만나럿 슈투트가르트 지역으로 갔던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6장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캄포 산토⟫의 ⟨재건 시도⟩를 한번 읽어보세요. 본문에 나오는 도판 자료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는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정물과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단순히 현실을 정밀하게 모사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세부 사항은 사실주의적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서 원근법이 미세하게 틀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마치 그림에 유리를 덧씌워놓은 것처럼 보이게끔 유리의 미세한 실금을 그려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평면에 삼차원을 외삽(interpolienren)"합니다. 하지만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그림 대결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이 겨냥하는 바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외려 현실이 재현되는 맥락, 재현가능성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은 현실과 완벽히 겹쳐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되레 그림이 현실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갈 때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과 그 효과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불가능이란, 아무리 극도로 정밀하게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라는 2차원의 평면 위에서는 "결국 일정한 수효의 기호만 그려넣을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에 바탕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곰브리치의 표현을 재인용하자면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가 황금빛 문직물의 모든 바늘땀을, 천사의 머리칼의 모든 가닥을, 나뭇결의 모든 무늬를 다 그려넣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아무리 확대경을 들고 헌신적으로 작업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의 '현실'을 다만 환기할 뿐이며, 그러기 위해서 적절한 기호를 택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이 도드라지고 어떤 기호가 포착됩니다. 트리프는 바로 그때 포착되는 '단 한 순간의 기호'를 포착하는 데 능합니다. 이를테면, 죽은지 일주일된 생쥐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압정 크기만한 핏방울"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재현 예술이 현실을 환기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캄포 산토W. G. 제발트 선집 3권. W. G. 제발트의 유고집 <캄포 산토>(2003)가 독일에서 출간된 지 15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작은 문학-에세이-학술의 경계를 휘젓는 제발트식 글쓰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작으로 손꼽힌 책이다.
이제 그 동물은 바닥도 배경도 없는 무 속에 감싸여 그 박쥐 같은 귀를 쫑긋 세운 채 희박한 공기 속을 부유한다. 눈가의 새까맣고 얼룩덜룩한 털은 마치 상장처럼, 아니면 북극을 통과해 여름밤을 가로질러가는 비행기 승객의 수면안대처럼 보인다. '우리는 꿈들을 이루는 재료와 같다. 우리의 시시한 삶은 잠으로 완성된다.'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표면의 환영주의 이면에 무시무시한 깊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현실의 형이상학적 안감이다.
전원에 머문 날들 206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6 ~⟨낮과 밤처럼⟩]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은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 앞에서 그림들 간의 참조점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그림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한 작품에서 빈 구두 한 짝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그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유발한 다음에, 전혀 다른 시공간인 15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느닷없이 한 귀퉁이게 그 구두를 가져다 놓는 식입니다. 이른바 그림 안에서 (글쓰기에서나 볼 법한) 인용과 참조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사실성은 한 치 오차도 없을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대상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반복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목적도 아니고요. 롤랑바르트가 카메라를 든 사진사에게서 죽음의 사진을 보았고 사진에는 사멸해가는 사물의 잔여물이 있다고 했지만, 결정적으로 사진 예술이 장례업이 아닌 이유는, 사진 예술이 삶 자체가 아닌 "삶과 죽음의 근접성"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비춰 볼 때, 트리프의 작품은 현실을 모사하기보다는 현실을 예술의 방식으로 환기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현실을 재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현실의 무한하고도 압도적인 규모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환기합니다. 다만 트리프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업이 이뤄지는 방식에서 그의 작품이 안팎으로 연결되고 그 경계에서 사유할 가능성이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제발트는 구두 그림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개에 관해서 언급하며 6장을 마무리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개는 후일 해당 그림을 관람하게 될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다소 특이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비슷하면서도 다른 얘기인데, 영화에서 주인공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장면은 매우 예외적이고 많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있고요. 그 부분을 같이 읽어보면서 6장과 '전원에서 머문 날들' 모임도 함께 마무리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 속에서 자기 신발의 역사와 불가해한 상실에 대해 숙고하는 붉은 머리 여성은 그 비밀의 공표가 그녀 바로 등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비밀의 담지자로서 시간의 심연을 훌쩍 뛰어넘는 개는 어떤 점에서는 우리보다 더욱 정확히 알고 있다. 개의 왼쪽 (길들여진) 눈은 미미하게나마 빛을 덜 발하고, 왠지 삐딱하고 낯선 인상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그늘진 눈이 우리를 꿰뚫어본다고 느끼는 것이다.
전원에 머문 날들 214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글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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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기간] 6개 장을 나눠서 읽습니다. 아래에 범박하게나마 기간을 나눠놓겠습니다만 각자 속도와 스케줄에 맞춰서 읽어주세요:) 대화도 기간에 특별히 구애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평일에는 각자 바쁘시리라 짐작하고 주말에 비해서 더 긴 시간을 배정했습니다. 또한 3월 25일과 4월 8일은 마음껏 게으를 수 있도록 하루 쉬고 갑니다.) 글과 그 글을 담은 책은 물성과 형식이 정해져 있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첫장에서부터 마지막장까지 넘기면서 읽지만 우리 생각은 그렇지 않잖아요. 전후좌우로 무람없이 발산하는 생각을 틀에 가둬두지 마시고 자유롭게 풀어두셨으면 해요. 어떠한 강제성도 없는 이 모임 끝에서 그게 무엇이든 각자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1. ⟨하늘에 혜성이 떠 있네⟩ 3월 21일 ~ 3월 24일 (4일) 2. ⟨이 호수가 바다였다면⟩ 3월 26일 ~ 3월 29일 (4일) 3. ⟨무엇이 슬픈지 나도 모른다⟩ 3월 30일 ~ 4월 2일 (4일) 4.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 4월 3일 ~ 4월 7일 (5일) 5. ⟨고독한 산책자⟩ 4월 9일 ~ 4월 14일 (5일) 6. ⟨낮과 밤처럼⟩ 4월 15일 ~ 4월 18일 (4일)
화제로 지정된 대화
[#머리말] 머리말 부분은 짧아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만 이 책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라고 생각하시고 각자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제발트는 머릿말에서 앞으로 읽어나갈 에세이에 나올 사람들, 즉 요한 페터 헤벨, 고트프리트 켈러, 장 자크 루소, 뫼리케, 로베르트 발저, 얀 페터 트리프을 짤막하게 언급합니다. 서두에서도 밝히듯, 이 에세이는 제발트가 한창 작품활동을 하던 20세기 말, "너무 늦어지기 전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에 대해서 경의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한 결과물입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하늘에 혜성이 떠 있네⟩부터 시작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1 ⟨하늘에 혜성이 떠 있네⟩] 해당 산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독일의 배경과 ‘달력이야기’라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산문 문학장르에 대해서 알아두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19세기 독일에서는 오늘처럼 활자를 접할 수 있는 매체가 그리 많지 않고 제한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달력은 이즈음의 신문과 비슷하게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매체였습니다. 당시 달력에는 요일과 날짜뿐 아니라 축제일과 해당 지역의 풍습은 물론 간단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도 실었는데요,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이야기를 읽으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달력이야기’의 역사는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요한 페터 헤벨 역시 이러한 '달력이야기꾼'으로서 19세기 독일 라인 지역에서 '가정의 벗'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작가이자 종교가, 교육자였습니다. '가정의 벗'이라는 필명에서도 보듯, 달력이야기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오락을 제공하는 친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따듯한 구연체로 짧지만 재미있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기고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실제로도 달력은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일 정도였다고 하네요. 제발트는 헤벨이 쓴 이야기의 특징을 다음처럼 소개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1 ⟨하늘에 혜성이 떠 있네⟩] 제발트는 프랑스혁명이 일었던 18세기 말, 독일에서 태어나 19세기 초에 생을 마감한 달력편찬자이자 이야기꾼인 헤벨을 탐구함으로써, 당시 심어진 폭력의 씨앗이 한 세기가 흐른 뒤에 독일에서 어떠한 형태로 발아했는지 그 세속사(世俗史)를 추적합니다. 제발트는 헤벨의 진정한 기교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관념으로 회수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의 시선을 우주적 차원에 주어 지구상의 일을 순수하게 관조하는 능력에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제발트가 헤벨의 서술법에서 발견했다는 것들은 제발트 본인의 것이기도 합니다. 제발트의 산문을 보면 일견 무미건조한 다큐멘터리식 서술법을 유지하다가도 잊을만하면 한번씩 '나'가 나와서 일상 범위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에피소드를 담담하게 나열합니다. 객관성을 유지하되 지나친 거리감으로 인해서 관객이 되지는 않는, 좋은 거리감이 제발트의 산문에서는 돋보입니다. 여담이지만 좋은 독자는 좋은 작가에게서 훗날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는 어떤 씨앗을 발견하는 것 같아요.마찬가지 의미에서, 제발트는 헤벨이 일찍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었지만 유럽에서 계속되는 전쟁을 보면서 그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음을 시사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헤벨이 어떤 비극의 씨앗을 보았으리라고 짐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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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호수가 바다였다면⟩~] 이 산문에서 제발트는 생피에르섬에 머물렀던 장 자크 루소를 추적합니다. 재밌게도 제발트는 대학생 시절에 생피에르섬에 가봐야겠다고 최초로 마음먹은 시점으로부터 무려 31년이 지난 1996년에 이르러서야 섬을 방문하게 됐다면서 얘기를 시작합니다. 장 자크 루소가 50대에 이르러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망명 생활을 하던 도중에 잠시 생피에르섬에 들렀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무려 31년이 지나서 50대에 접어들고나서야 코르시카섬에 당도하게 됐다는 제발트의 언급은 공교롭게 들립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제발트가 장 자크 루소의 삶 위에 자신의 그것을 포개면서 시작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포갬'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요, 코르시카섬에서 루소의 행적과 그런 루소를 다룬 몇몇 텍스트에 대한 언급과 제발트가 실제로 코르시카섬에서 경험한 에피소드들이 한 문단 안에서 뒤섞이는 대목도 있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문장을 소개하면서 2차 시기 시작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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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호수가 바다였다면⟩] 제발트는 루소와 20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서 생피에르섬을 방문합니다. 본문 곳곳에서 제발트가 루소의 삶에 자신의 그것을 겹쳐보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는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발트 역시 루소와 마찬가지로 고국 독일을 떠나서 이민자로 살아가면서도 모국어로 죽는 그 순간까지 작품 활동을 펼쳤던 작가로서, 루소의 생애와 맞물리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루소는 자신의 작업물로 인해서 살던 곳에서 추방되었고 곳곳을 떠돌면서도 각종 박해와 음해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떠돌면서 건강이 나날이 쇠하는 와중에도 수천 쪽의 글을 집필하면서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 사실을 모르더라도 본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가 루소의 나이에 이르러서 생피에르섬을 찾는 행위 자체는 특별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루소 이후에 명성을 얻은 생피에르섬에 무수한 관광객이 찾아왔다고 제발트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는 루소의 행적을 보존해놓은 공간을 단순히 관광하지는 않습니다. 대다수 여행객이 루소의 방에 놓여 있는 단촐한 풍경을 보고 실망해서 떠나는 와중에도, 제발트는 문헌학자 특유의 태도로서 그냥 지나칠 법한 과거의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여기서 의미를 부여한다함은 어설프게 대상을 나 자신으로 회수하지 않고, 대상에게 시선을 주어서 달라붙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제발트는 마치 200년 전의 루소처럼 방을 바라보고, 환희에 차서 생피에르섬을 거닐던 200년 전의 산책자처럼 외경을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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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엇이 슬픈지 나도 모른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조금 늦게 올립니다. 앞서 1장과 2장을 읽으면서 느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영웅과는 거리가 멉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커다란 역사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기는 하지만 영웅적인 면모는 부족하며, 외려 자기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신 저자는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쉽게 비판하기보다 그들이 자기 시대에서 노출한 한계를 담담히 서술하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작고 평범한 인물들이 관조적인 거리를 확보한 제발트에 이르러서 시공간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돼 있음이 드러나는 구조로 이 책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1장에 등장하는 헤벨은 19세기 독일의 진보적인 보수주의자로서 나폴레옹을 지지하며 나폴레옹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 적도 있지만, 후일 유럽에서 자행된 전쟁을 목도하고서는 태도를 바꾸어 자국민을 민족쇼비니즘의 수사로 궐기하기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런 수사에서 20세기 독일에서 벌어질 참상의 징조가 엿보인다는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또 2장에서는 한 세기 전인 1765년 생피에르섬으로 도망친 루소를 얘기합니다. 루소는 생피에르섬에서 '코르시카 헌법 구상'의 편집에 몰두하면서 코르시카에 기대를 걸며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주장했고 "언젠가 이 작은 섬이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 비슷한 시기에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이 반세기 후에 유럽 대륙을 전쟁으로 몰아가리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3장의 뫼리케 또한 자기 시대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는 혁명의 낭만성을 보고 듣고 읽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로서, 정치와 거리를 둔 채 가정과 전원 생활로 도피했던 세대에 속했습니다. 제발트는 뫼리케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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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뫼리케가 탐닉한 가족적인 울타리 안쪽의 생활은 일견 평화로워보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로움은 "우리돔 속으로 들어간, 완벽하게 배열된 미니어처의 세계"이며, 그가 처한 시대의 혼란을 감안했을 때 '완벽함'이란 완전함이 아닌 불안함이며, 도피한 이의 자족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산업화의 참상과 자본의 축적이 초래할 소란, 또 국가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책략이 서서히 드러나는 상황에서 뫼리케가 헌신한 비더마이어의 예술은 "불길한 결말에 대한 예감 탓에 죽은 듯이 사지가 경직되는 반사 반응" 같은 것이었다고 제발트는 쓰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정세와 규모가 예측할 수 없이 변화한 탓에 사람들은 커다란 스케일로 사고하기를 강요받았고, 기념비적인 것을 해야한다는 시대의 강박 관념을 느껴야 했다고 합니다. 뫼리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뫼리케는 특유의 미세한 작업을 포기한 채 당시의 시류에 따라서 기념비적인 것에 몰두했는데요, 제발트는 뫼리케의 그러한 시도가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는지를 나른한 시선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의 서술은 차갑고 냉정하지만은 않습니다. 외려 제발트의 서술에서는 안쓰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건 암다ㅗ 지독한 근시의 문학에 대한 애도와 존경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3 ~⟨무엇이 슬픈지 나도 모른다⟩] 오타가 있네요. (떠오르는대로 받아 쓰다 보니 오타도 있고 비문도 보이네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면, 제발트는 뫼리케의 생애와 그 작품에서 실패와 좌절, 도피와 시대적 불일치를 읽어내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후대인으로서 지난 세기의 인물인 뫼리케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단죄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그런 건 너무 쉬운 일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보다 제발트는 뫼리케라는 인물이 애당초 지향하고자 했던,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좌초한 개인적인 소망과 문학적인 지향점 따위를 읽어냄으로써, 지독한 근시 문학가에 대한 애도와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발트의 지독히도 쇄말한 글쓰기 스타일은 '전체보다 큰 부분'이라는 역설적인 표어를 누구보다 잘 보여주고 있고, 그런 제발트에게 뫼리케의 실패를 쓰는 일은 퍽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영웅담에서는 한 개인의 좌절과 실패가 성공적인 결말에 이르기 위한 복선이나 반전 요소로 쓰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의 산문에서는 한 사람의 좌절과 실패를 함부로 교훈화하기보다는 관조적 거리를 확보한 채 그저 서술합니다. 이상한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패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나온 세대의 실패와 좌절에서 최초로 지향했던 바를 읽어내고, 그로부터 어떻게 또 얼마나 멀어졌는지 살핌으로써 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에 착종한 모순을 서술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복하지만 이는 극복하고 성장하거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신데렐라 스토리와 결이 다릅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은 사카구치 안고의 ⟨문학의 고향⟩이라는 산문에서도 연결해서 읽을 만한 지점이 나옵니다. 안고는 좋은 문학은 모럴이 없다는(amoral) 감각 위에 세워졌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상태를 '고향'으로 삼으라고 독자에게 권합니다. 안고는 어렸을 적 읽었던 '빨간 모자' 이야기에서 할머니로 분장한 늑대에게 모든 미덕을 갖춘 소녀가 우적우적 잡아먹히는 장면을 읽고 나서, "내쳐저 홀로 남겨진,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어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에는 착한 사람이 선행 끝에 보상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얘기 따위는 없습니다. 외려 가련한 소녀가 잡아먹히며 끝나는 결말은 어떤 절망스러운 절벽이며, 다리를 건너오자마자 다리가 무너지며 돌아갈 길이 콱 막혔을 때 느낄 법한 막막함입니다. 안고는 이를 "뭔가 얼음을 꽉 껴안고 있는 애달픈 슬픔,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안고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3장 마치겠습니다.
불량소년과 그리스도‘이 작가를 보라’ 2권. 일본 무뢰파(無賴派)를 대표하는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의 수필집이다. 대부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로, 혼탁한 세상에서도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자신의 윤리’를 지켜나가기를 당부하는 18편의 에세이를 담았다. 주류 담론, 이념, 사회 등에 자신을 의탁하기 쉬운 게 인간이지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스스로의 책무를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인 나’를 긍정할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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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 4장에서는 스위스계 독일 소설가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를 다룹니다. 한국에도 고트프리트 켈러의 장편 소설 『초록의 하인리히』와 연작 선집 『젤트빌라 사람들』이 번역돼 있습니다. 앞서 1장에서 3장까지 다룬 인물처럼 고트프리트 켈러 또한 19세기의 정치적인 격동기를 거친 인물로서, 누구보다 자신의 시대 안에서 크게 진동하고 그러한 경험을 글로써 옮겨냅니다. 켈러가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요구가 일었던 시기로서, 역자에 따르면 "괴테와 쉴러로 대표되는 '예술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고 문학의 현실 참여"가 강조되던 시기입니다. 켈러 역시 그러한 참여로서 정치적인 입장을 자신의 작품에서 잘 드러냈는데요, 19세기 후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유재산의 기원에 대하여』에서도 알 수 있듯, 켈러가 19세기 중후반부에 들불처럼 번지던 자본주의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위화감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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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 제발트는 켈러가 ⟪초록의 하인리히⟫ 초고를 집필하던 1850년에, "프로이센에서 진보와 자오 사상이 일상의 질서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말하면서, 시민 계급에서 혁명의 열망이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전환되는 과정을 켈러가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개인들이 실패한 혁명을 개개인의 경제적인 번영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사회 전반적인 풍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품 속 초록의 하인리히가 유년 시절 어머니의 지독한 근검절약을 회상하는 장면은 당시의 사회 풍조를 굉장히 입체적인 방식으로 조명하고 있는데요, 금욕주의에 가까운 근검절약 정신이 "자본 증식의 원칙에 항거"하는 것이기는커녕 자본에 대한 은폐된 욕망을 되비추는 거울상이라는 것입니다. 켈러 역시 그렇게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아끼고 모은 재산이 다음 세대에게 죄책감으로 옮겨 새겨짐으로써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르상티망을 훌쩍 넘어서, 화폐 유통량의 급증에 따라 사회 전체가 타락할 위험이 가일층 증대되는 현실"을 보았을 것이라고 제발트는 설명합니다. 요약하면 19세기는 좌초한 혁명의 열망이 개개인의 사유 재산의 축적으로 전환되었던 과도기라는 것입니다. 켈러는 자신의 작품에서 여러 유대인을 등장시키는데, 재현된 유대인의 이미지는 당대의 통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은 금융 거래의 발명자이자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재산을 그러모은다는 당시의 통념과 달리, 작품 속 유대인들은 오려 자본의 증식과 투자의 순환과 무관하게 "가짜 금"으로서 자본과 구분되는 "진짜 금"을 추구했다는 것이 제발트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진짜 금이란 "언제나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 거의 무에서 자아낸 사눔ㄹ이거나 자연 풍경에 은은하게 어린 반조"입니다. 나아가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실상 "그들을 지배했던 민족들의 역사를 또다른 방식으로 거울처럼" 되비추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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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독한 산책자⟩] 5장은 소설가이자 산문가인 로베르트 발저를 다룹니다. 제발트의 다른 책에서도 로베르트 발저의 언급이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제발트는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로베르트 발저는 살아 생전에 문학적인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동시대 작가인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로베르트 발저를 참 좋아하는데요, 한국에서도 발저의 소설과 산문집이 여러 권 출간 돼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끝⟫이라는 산문집과 ⟪벤야멘타 하인학교⟫라는 소설을 애정합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내세우려는 사람이 많은 시대에서 발저의 작품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모두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세상에서, 어찌 보면 개성없이 개성만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저의 인물들은 이상하리만치 자기 존재감을 지우기에 열중합니다. 우뚝 군림하려는 마키아벨리즘적 인물상의 대척점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하인과 같은 위치의 사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발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바로 발저가 '재'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해당 내용을 재인용하면서 5장 시작합니다.
벤야멘타 하인학교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벤야멘타 하인학교』. 생전에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다. 로베르트 발저는 1970년대 그의 난해한 작품들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스위스의 국민작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소설은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입학하는 귀족 태생의 소년 야콥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성장과 발전으로
세상의 끝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평생 고독 속에 칩거했다. 현존 작가 마르틴 발저(M. Walser)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깊이 은둔했던 시인’이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운명적 친화성을 느꼈던 소설가 제발트(Sebald)는 발저의 인생행로에 남은 흔적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고도 했다.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작가는 흔히 작품 외에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소상
산책자20세기 독일문학사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놓인 작가이자 스위스의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중단편 42편을 모아 엮은 대표 작품집『산책자』. 저자가 남긴 수백편의 작품 중 그를 대표하는 작품을 엄선하여 수록한 것으로, 작가 배수아의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다. '걷기'는 저자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로, 실제 저자는 많은 시간을 걸으며 길 위의 작은 것들에 시선을 두고 그 관찰과 사색을 작품에 담아냈다. 저자는 산책에 강박적으로 몰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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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5 ~⟨고독한 산책자⟩] 5장은 소설가이자 산문가인 로베르트 발저를 다룹니다. 제발트의 다른 책에서도 로베르트 발저의 언급이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제발트는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로베르트 발저는 살아 생전에 문학적인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동시대 작가인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로베르트 발저를 참 좋아하는데요, 한국에서도 발저의 소설과 산문집이 여러 권 출간 돼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끝⟫이라는 산문집과 ⟪벤야멘타 하인학교⟫라는 소설을 애정합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내세우려는 사람이 많은 시대에서 발저의 작품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모두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세상에서, 어찌 보면 개성없이 개성만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저의 인물들은 이상하리만치 자기 존재감을 지우기에 열중합니다. 우뚝 군림하려는 마키아벨리즘적 인물상의 대척점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하인과 같은 위치의 사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발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바로 발저가 '재'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해당 내용을 재인용하면서 5장 시작합니다.
[#5 ~⟨고독한 산책자⟩]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발저의 형제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후손을 많이 낳아서 기르는 것이 관례이던 시대에 아버지인 아돌프 발저는 무려 십오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후에 로베르트 발저를 포함해서 총 여덟 명의 형제를 낳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저 형제들은 이상하게도 단 한 명의 자식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시작되었던 산업혁명이 근 한 세기가 넘도록 절정을 유지하던, 막대한 생산성의 시대에서 자신의 후대를 남기는 순환의 고리가 끊어졌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게 읽힙니다. 더욱 재밌는 점은, 발저가 쓴 산문 중에서 발저가 가상의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에게 쓴 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짧은 산문에서, 발저는 제도권 중심의 교육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빛나는 교육'이 필연적으로 한 인간에게 "빛나는 성과를 요구하고, 빛나는 인생행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발저는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들아, 줄곧 성공만 생각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너는 부족한 교육 덕분에 오히려 모범이 되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끔찍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자유인이 되는 거야. 자연의 아들, 세상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 너는 자유롭게 숨 쉬고 살게 될 거다. 모범적인 사람들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여담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도 "아들아 인생을 어떻게 살아라" 하는 시리즈가 유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러한 교육관은 아버지가 자기 시대에 정답이라고 믿는 가치관이 아들의 시대에서도 유효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 근거합니다. 어쩌면 발저는 그러한 '빛나는 교육'의 외피를 입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경계했던 것 같아요.
세상의 끝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평생 고독 속에 칩거했다. 현존 작가 마르틴 발저(M. Walser)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깊이 은둔했던 시인’이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운명적 친화성을 느꼈던 소설가 제발트(Sebald)는 발저의 인생행로에 남은 흔적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고도 했다.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작가는 흔히 작품 외에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소상
화제로 지정된 대화
[#6 ⟨낮과 밤처럼⟩~] 6장에서는 화가이자 친구인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을 다룹니다. 얀 페터 트리프는 제발트와 함꼐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로서, 제발트가 작고할 때까지도 긴밀히 교류했던 사람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전에 다뤘던 산문집 ⟪캄포 산토⟫의 한 챕턴에서, 제발트는 친구였던 트리프를 만나럿 슈투트가르트 지역으로 갔던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6장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캄포 산토⟫의 ⟨재건 시도⟩를 한번 읽어보세요. 본문에 나오는 도판 자료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는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정물과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단순히 현실을 정밀하게 모사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세부 사항은 사실주의적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서 원근법이 미세하게 틀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마치 그림에 유리를 덧씌워놓은 것처럼 보이게끔 유리의 미세한 실금을 그려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평면에 삼차원을 외삽(interpolienren)"합니다. 하지만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그림 대결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이 겨냥하는 바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외려 현실이 재현되는 맥락, 재현가능성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은 현실과 완벽히 겹쳐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되레 그림이 현실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갈 때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과 그 효과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불가능이란, 아무리 극도로 정밀하게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라는 2차원의 평면 위에서는 "결국 일정한 수효의 기호만 그려넣을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에 바탕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곰브리치의 표현을 재인용하자면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가 황금빛 문직물의 모든 바늘땀을, 천사의 머리칼의 모든 가닥을, 나뭇결의 모든 무늬를 다 그려넣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아무리 확대경을 들고 헌신적으로 작업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의 '현실'을 다만 환기할 뿐이며, 그러기 위해서 적절한 기호를 택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이 도드라지고 어떤 기호가 포착됩니다. 트리프는 바로 그때 포착되는 '단 한 순간의 기호'를 포착하는 데 능합니다. 이를테면, 죽은지 일주일된 생쥐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압정 크기만한 핏방울"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재현 예술이 현실을 환기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캄포 산토W. G. 제발트 선집 3권. W. G. 제발트의 유고집 <캄포 산토>(2003)가 독일에서 출간된 지 15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작은 문학-에세이-학술의 경계를 휘젓는 제발트식 글쓰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작으로 손꼽힌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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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6 ⟨낮과 밤처럼⟩~] 6장에서는 화가이자 친구인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을 다룹니다. 얀 페터 트리프는 제발트와 함꼐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로서, 제발트가 작고할 때까지도 긴밀히 교류했던 사람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전에 다뤘던 산문집 ⟪캄포 산토⟫의 한 챕턴에서, 제발트는 친구였던 트리프를 만나럿 슈투트가르트 지역으로 갔던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6장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캄포 산토⟫의 ⟨재건 시도⟩를 한번 읽어보세요. 본문에 나오는 도판 자료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는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정물과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단순히 현실을 정밀하게 모사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세부 사항은 사실주의적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서 원근법이 미세하게 틀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마치 그림에 유리를 덧씌워놓은 것처럼 보이게끔 유리의 미세한 실금을 그려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평면에 삼차원을 외삽(interpolienren)"합니다. 하지만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그림 대결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이 겨냥하는 바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외려 현실이 재현되는 맥락, 재현가능성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은 현실과 완벽히 겹쳐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되레 그림이 현실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갈 때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과 그 효과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불가능이란, 아무리 극도로 정밀하게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라는 2차원의 평면 위에서는 "결국 일정한 수효의 기호만 그려넣을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에 바탕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곰브리치의 표현을 재인용하자면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가 황금빛 문직물의 모든 바늘땀을, 천사의 머리칼의 모든 가닥을, 나뭇결의 모든 무늬를 다 그려넣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아무리 확대경을 들고 헌신적으로 작업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의 '현실'을 다만 환기할 뿐이며, 그러기 위해서 적절한 기호를 택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이 도드라지고 어떤 기호가 포착됩니다. 트리프는 바로 그때 포착되는 '단 한 순간의 기호'를 포착하는 데 능합니다. 이를테면, 죽은지 일주일된 생쥐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압정 크기만한 핏방울"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재현 예술이 현실을 환기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6 ~⟨낮과 밤처럼⟩]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은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 앞에서 그림들 간의 참조점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그림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한 작품에서 빈 구두 한 짝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그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유발한 다음에, 전혀 다른 시공간인 15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느닷없이 한 귀퉁이게 그 구두를 가져다 놓는 식입니다. 이른바 그림 안에서 (글쓰기에서나 볼 법한) 인용과 참조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사실성은 한 치 오차도 없을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대상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반복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목적도 아니고요. 롤랑바르트가 카메라를 든 사진사에게서 죽음의 사진을 보았고 사진에는 사멸해가는 사물의 잔여물이 있다고 했지만, 결정적으로 사진 예술이 장례업이 아닌 이유는, 사진 예술이 삶 자체가 아닌 "삶과 죽음의 근접성"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비춰 볼 때, 트리프의 작품은 현실을 모사하기보다는 현실을 예술의 방식으로 환기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현실을 재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현실의 무한하고도 압도적인 규모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환기합니다. 다만 트리프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업이 이뤄지는 방식에서 그의 작품이 안팎으로 연결되고 그 경계에서 사유할 가능성이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제발트는 구두 그림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개에 관해서 언급하며 6장을 마무리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개는 후일 해당 그림을 관람하게 될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다소 특이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비슷하면서도 다른 얘기인데, 영화에서 주인공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장면은 매우 예외적이고 많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있고요. 그 부분을 같이 읽어보면서 6장과 '전원에서 머문 날들' 모임도 함께 마무리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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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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