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

D-29
극단적인 간명함을 의도했으나 소설이 쌓아올리는 감정과 사회의 복잡한 관계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전달하지 못하는 이 내용 요약만 보아도, 뫼리케가 각종 에피소드와 서브플롯, 인물과 간막극들을 잔득 채워넣은 이 작업설계도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시로 고통받는 그의 두 눈은 아주 미세한 사물들에서 뜻밖의 경이를 발견해내는 데 반해, 보다 넓은 파노라마적 풍경으로 향할 때면 그의 시야는 흐려지고,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운명의 굴곡은 멜로드라마적인 성격 속에 흡수되어버린다.
전원에 머문 날들 98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3 ~⟨무엇이 슬픈지 나도 모른다⟩] 오타가 있네요. (떠오르는대로 받아 쓰다 보니 오타도 있고 비문도 보이네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면, 제발트는 뫼리케의 생애와 그 작품에서 실패와 좌절, 도피와 시대적 불일치를 읽어내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후대인으로서 지난 세기의 인물인 뫼리케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단죄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그런 건 너무 쉬운 일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보다 제발트는 뫼리케라는 인물이 애당초 지향하고자 했던,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좌초한 개인적인 소망과 문학적인 지향점 따위를 읽어냄으로써, 지독한 근시 문학가에 대한 애도와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발트의 지독히도 쇄말한 글쓰기 스타일은 '전체보다 큰 부분'이라는 역설적인 표어를 누구보다 잘 보여주고 있고, 그런 제발트에게 뫼리케의 실패를 쓰는 일은 퍽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영웅담에서는 한 개인의 좌절과 실패가 성공적인 결말에 이르기 위한 복선이나 반전 요소로 쓰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의 산문에서는 한 사람의 좌절과 실패를 함부로 교훈화하기보다는 관조적 거리를 확보한 채 그저 서술합니다. 이상한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패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나온 세대의 실패와 좌절에서 최초로 지향했던 바를 읽어내고, 그로부터 어떻게 또 얼마나 멀어졌는지 살핌으로써 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에 착종한 모순을 서술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복하지만 이는 극복하고 성장하거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신데렐라 스토리와 결이 다릅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은 사카구치 안고의 ⟨문학의 고향⟩이라는 산문에서도 연결해서 읽을 만한 지점이 나옵니다. 안고는 좋은 문학은 모럴이 없다는(amoral) 감각 위에 세워졌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상태를 '고향'으로 삼으라고 독자에게 권합니다. 안고는 어렸을 적 읽었던 '빨간 모자' 이야기에서 할머니로 분장한 늑대에게 모든 미덕을 갖춘 소녀가 우적우적 잡아먹히는 장면을 읽고 나서, "내쳐저 홀로 남겨진,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어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에는 착한 사람이 선행 끝에 보상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얘기 따위는 없습니다. 외려 가련한 소녀가 잡아먹히며 끝나는 결말은 어떤 절망스러운 절벽이며, 다리를 건너오자마자 다리가 무너지며 돌아갈 길이 콱 막혔을 때 느낄 법한 막막함입니다. 안고는 이를 "뭔가 얼음을 꽉 껴안고 있는 애달픈 슬픔,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안고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3장 마치겠습니다.
불량소년과 그리스도‘이 작가를 보라’ 2권. 일본 무뢰파(無賴派)를 대표하는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의 수필집이다. 대부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로, 혼탁한 세상에서도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자신의 윤리’를 지켜나가기를 당부하는 18편의 에세이를 담았다. 주류 담론, 이념, 사회 등에 자신을 의탁하기 쉬운 게 인간이지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스스로의 책무를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인 나’를 긍정할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의 고독이나 우리들의 고향이라는 것은 이렇게 참혹하며 구원의 길이 없는 것일까요. 나는 아무래도 참혹하고 구원의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암흑의 고독에는 아무리 봐도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 살아 있는 몸은 헤매면 구원의 집을 기대하고 걸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고독은 항상 광야를 헤멜 뿐, 구원의 집을 예기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최후에는 참혹한 것, 구원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입니다. 모럴이 없다는 것 자체가 모럴인 것처럼 구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구원인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문학의 고향, 혹은 인간의 고향을 봅니다. 문학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량소년과 그리스도 174쪽, 사카구치 안고
화제로 지정된 대화
[#4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 4장에서는 스위스계 독일 소설가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를 다룹니다. 한국에도 고트프리트 켈러의 장편 소설 『초록의 하인리히』와 연작 선집 『젤트빌라 사람들』이 번역돼 있습니다. 앞서 1장에서 3장까지 다룬 인물처럼 고트프리트 켈러 또한 19세기의 정치적인 격동기를 거친 인물로서, 누구보다 자신의 시대 안에서 크게 진동하고 그러한 경험을 글로써 옮겨냅니다. 켈러가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요구가 일었던 시기로서, 역자에 따르면 "괴테와 쉴러로 대표되는 '예술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고 문학의 현실 참여"가 강조되던 시기입니다. 켈러 역시 그러한 참여로서 정치적인 입장을 자신의 작품에서 잘 드러냈는데요, 19세기 후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유재산의 기원에 대하여』에서도 알 수 있듯, 켈러가 19세기 중후반부에 들불처럼 번지던 자본주의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위화감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지금 십자로에 서서, 저 멀리 나무 우듬지들 사이로 유혹하듯 반짝거리는 탑 꼭대기의 황금빛 둥근 장식을 바라보고 있는 벤첼 슈트라핀스키가 깨닫는 바처럼, 행복과 향락을 약속하는 경제적 번영의 이면에는 사람들이 그토록 쉽게 단념해버리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또한 노동이 있고, 궁핍과 빈곤이 있으며, 어둠이 있다. 켈러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유령들이 흔하게 발견된다.
전원에 머문 날들 117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4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 제발트는 켈러가 ⟪초록의 하인리히⟫ 초고를 집필하던 1850년에, "프로이센에서 진보와 자오 사상이 일상의 질서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말하면서, 시민 계급에서 혁명의 열망이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전환되는 과정을 켈러가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개인들이 실패한 혁명을 개개인의 경제적인 번영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사회 전반적인 풍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품 속 초록의 하인리히가 유년 시절 어머니의 지독한 근검절약을 회상하는 장면은 당시의 사회 풍조를 굉장히 입체적인 방식으로 조명하고 있는데요, 금욕주의에 가까운 근검절약 정신이 "자본 증식의 원칙에 항거"하는 것이기는커녕 자본에 대한 은폐된 욕망을 되비추는 거울상이라는 것입니다. 켈러 역시 그렇게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아끼고 모은 재산이 다음 세대에게 죄책감으로 옮겨 새겨짐으로써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르상티망을 훌쩍 넘어서, 화폐 유통량의 급증에 따라 사회 전체가 타락할 위험이 가일층 증대되는 현실"을 보았을 것이라고 제발트는 설명합니다. 요약하면 19세기는 좌초한 혁명의 열망이 개개인의 사유 재산의 축적으로 전환되었던 과도기라는 것입니다. 켈러는 자신의 작품에서 여러 유대인을 등장시키는데, 재현된 유대인의 이미지는 당대의 통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은 금융 거래의 발명자이자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재산을 그러모은다는 당시의 통념과 달리, 작품 속 유대인들은 오려 자본의 증식과 투자의 순환과 무관하게 "가짜 금"으로서 자본과 구분되는 "진짜 금"을 추구했다는 것이 제발트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진짜 금이란 "언제나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 거의 무에서 자아낸 사눔ㄹ이거나 자연 풍경에 은은하게 어린 반조"입니다. 나아가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실상 "그들을 지배했던 민족들의 역사를 또다른 방식으로 거울처럼" 되비추었다고 말합니다.
벼락부자만큼이나 많은 패배자를 양산했던 자본시장의 팽창과 정치적 소요로 인해서 19세기 내내 점차 많은 독일인들과 스위스인들이 이민을 떠나야 했고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내몰렸다.
전원에 머문 날들 124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큰 줄기를 말하기는 했지만 이 책은 여러가지로 자신만의 지류를 뻗어나갈 수 있다는 특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9세기 좌초된 혁명의 열망이 개개인의 자본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전환되었다는 관점에서 4장을 소개하긴 했지만,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본 대목은 앞선 흐름과 무관한 에피소드입니다. 작품 속 초록의 하인리히가 친척 동생 안나의 관에 있는 미닫이 뚜겅에 끼워넣을 유리를 구해내는 장면입니다. 하인리히는 집에 방치돼 있던 액자 유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안나의 관에 끼워넣기 위해서 시냇물에 씻는데요, 그 과정에서 어떤 형상이 투명한 유리에 떠오르는 광경을 발견합니다. 이 부분은 2장에서 루소가 투명성이라는 주제로 유리에 천착했다는 대목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같이 읽어보면서 4장을 마치겠습니다.
루소의 글에서 나타나는 투명성이라는 주제를 파고든 장 스타로뱅스키는 "완벽히 맑은 풍경의 순간이란 개인적 실존이 스스로의 한계지점에서 해소되고 대기 속으로 꿈꾸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라고 쓴다. 스타로뱅스키에 따르면, 스스로를 남김없이 투명하게 만들기는 현대적 자서전 문학의 창시자가 품은 최고의 야심이었다. 수정은 이러한 야망의 상징으로, 스타로뱅스키에 따르면 우리는 "그것이 순수한 상태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딱딱하게 굳은 영혼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연금술과 형이상학 사이를 오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스타로뱅스키는 루소가 그의 ⟪화학 강요⟫에서 유리화에 몹시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는 루소가 요한 요아힘 베커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대목을 인용하는데, 베커는 1669년 출판된 ⟪지하 자연⟫의 저자로 유리를 만들 때 쓰는 흙을 광물의 영역이 아니라 동식물은 태운 재에서 얻은 바 있다.
전원에 머문 날들 72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그러는 동안 나는 유리가 창에 잘 맞는다는 것을 확인했고, 유리에 먼지가 잔뜩 끼어 흐릿했기 때문에 맑은 시냇물 속에 담가 돌멩이에 닿아 깨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씻었다. 그런데 이 반짝이는 유리를 해가 있는 쪽으로 높이 치켜들고 비춰보는 순간 나는 지금껏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경이를 보게 되었다.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세 명의 소년 천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 그러나 이 모습은 너무나 희미하고, 어렴풋하게 비쳐서 나는 그것이 태양빛 속에 있는 것인지, 유리 속에 있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단지 내 공상 속에 떠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리판을 움직여보면 일시적으로 천사들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면 갑자기 다시 천사들이 보였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난 이후에 나는 수년간 유리 액자 속에 그대로 끼워져 있는 동판화나 스케치는 그 긴 세월 동안 어두운 밤이면 유리에 자신의 모습을 전한다는 것을, 말하자면 유리 속에 자신의 거울상과 같은 것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원에 머문 날들 133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작품 속에는 유달리 "철 지난 쓸모없고 이상한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꼽으면서, 제발트는 켈러의 잡동사니 사랑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 고물들 지속적으로 순환해야만 하는 자본과 달리 교환관계에서 빠져나와 있다 것입니다. 이는 바로크 판타지이자 시인 특유의 수집벽으로서, 제발트는 켈러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가능성에 대해서 다음처럼 씁니다.
그리고 슐뤼터가 마찬가지로 언급하고 있듯이 그 서사적 태도가 자신의 아이러니적 성격을 획득하는 방식은 사물과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바라본 지나치게 선명한 이미지들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켈러의 예술적 영감이 아무리 그의 내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켈러를 때늦은 혹은 감춰진 사순절 설교자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리라. 켈러의 무상성 철학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바로 그 철학을 감싸는 명랑한 광채다.
전원에 머문 날들 131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5 ~⟨고독한 산책자⟩] 5장은 소설가이자 산문가인 로베르트 발저를 다룹니다. 제발트의 다른 책에서도 로베르트 발저의 언급이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제발트는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로베르트 발저는 살아 생전에 문학적인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동시대 작가인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로베르트 발저를 참 좋아하는데요, 한국에서도 발저의 소설과 산문집이 여러 권 출간 돼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끝⟫이라는 산문집과 ⟪벤야멘타 하인학교⟫라는 소설을 애정합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내세우려는 사람이 많은 시대에서 발저의 작품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모두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세상에서, 어찌 보면 개성없이 개성만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저의 인물들은 이상하리만치 자기 존재감을 지우기에 열중합니다. 우뚝 군림하려는 마키아벨리즘적 인물상의 대척점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하인과 같은 위치의 사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발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바로 발저가 '재'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해당 내용을 재인용하면서 5장 시작합니다.
벤야멘타 하인학교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벤야멘타 하인학교』. 생전에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다. 로베르트 발저는 1970년대 그의 난해한 작품들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스위스의 국민작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소설은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입학하는 귀족 태생의 소년 야콥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성장과 발전으로
세상의 끝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평생 고독 속에 칩거했다. 현존 작가 마르틴 발저(M. Walser)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깊이 은둔했던 시인’이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운명적 친화성을 느꼈던 소설가 제발트(Sebald)는 발저의 인생행로에 남은 흔적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고도 했다.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작가는 흔히 작품 외에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소상
산책자20세기 독일문학사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놓인 작가이자 스위스의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중단편 42편을 모아 엮은 대표 작품집『산책자』. 저자가 남긴 수백편의 작품 중 그를 대표하는 작품을 엄선하여 수록한 것으로, 작가 배수아의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다. '걷기'는 저자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로, 실제 저자는 많은 시간을 걸으며 길 위의 작은 것들에 시선을 두고 그 관찰과 사색을 작품에 담아냈다. 저자는 산책에 강박적으로 몰두했는데
실제로 조금만 깊이 정신을 집중하면 겉보기에 전혀 흥미롭지 않아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전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닌 점들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재를 휙 하고 불면 일말의 저항도 없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재는 겸손하고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것 그 자체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점은 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믿음으로 뭉쳐 있다는 점이다. 재보다 더 덧없고 연약하고 가련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재보다 더 유순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재는 개성을 가질 줄 모르며, 원래의 나무로부터 의기소침이 의기양양과 떨어져 있는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재가 있는 곳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재를 밟아보라. 그러면 밑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느껴지지도 않으리라.
전원에 머문 날들 151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첫장만 읽고는 시험과 과제가 겹쳐 책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문은 소설보다 생각의 영역이 넓고 깊어 가볍게 읽지 못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russist 께서 올려주신 내용을 참고서 삼아 이번 여름 여행을 시작하며 차근차근 잘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은 면에서 참 훌륭한 독서 길라잡이님이십니다. ^^
사실 매번 모임 때마다 저 혼자 말하는 느낌이라, 제가 뭘 잘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하긴 합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종종 감상 남겨주세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5 ~⟨고독한 산책자⟩]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발저의 형제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후손을 많이 낳아서 기르는 것이 관례이던 시대에 아버지인 아돌프 발저는 무려 십오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후에 로베르트 발저를 포함해서 총 여덟 명의 형제를 낳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저 형제들은 이상하게도 단 한 명의 자식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시작되었던 산업혁명이 근 한 세기가 넘도록 절정을 유지하던, 막대한 생산성의 시대에서 자신의 후대를 남기는 순환의 고리가 끊어졌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게 읽힙니다. 더욱 재밌는 점은, 발저가 쓴 산문 중에서 발저가 가상의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에게 쓴 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짧은 산문에서, 발저는 제도권 중심의 교육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빛나는 교육'이 필연적으로 한 인간에게 "빛나는 성과를 요구하고, 빛나는 인생행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발저는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들아, 줄곧 성공만 생각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너는 부족한 교육 덕분에 오히려 모범이 되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끔찍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자유인이 되는 거야. 자연의 아들, 세상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 너는 자유롭게 숨 쉬고 살게 될 거다. 모범적인 사람들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여담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도 "아들아 인생을 어떻게 살아라" 하는 시리즈가 유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러한 교육관은 아버지가 자기 시대에 정답이라고 믿는 가치관이 아들의 시대에서도 유효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 근거합니다. 어쩌면 발저는 그러한 '빛나는 교육'의 외피를 입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경계했던 것 같아요.
세상의 끝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평생 고독 속에 칩거했다. 현존 작가 마르틴 발저(M. Walser)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깊이 은둔했던 시인’이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운명적 친화성을 느꼈던 소설가 제발트(Sebald)는 발저의 인생행로에 남은 흔적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고도 했다.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작가는 흔히 작품 외에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소상
다시 돌아와서 본문 얘기를 해보자면, 5장에서도 제발트는 자신이 다루는 인물과 자신을 겹쳐 봅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조부의 외형과 발저의 그것이 매우 흡사했다고 밝히면서, 발저 산문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산문적 특성이기도 하죠. 앞서 4장에서 소개한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저의 글에서는 자기 시대를 적극적으로 혁명하려는 정치적 열망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만 발저는 지독한 끈기로 매일 희망도 절망도 없이 글쓰기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다만 헤벨처럼 민중들을 궐기하려는 욕구가 없었고, 루소처럼 코르시카를 배경으로 자신만의 정치적 이상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뫼리케처럼 전원 풍경으로 도피하면서 자신을 문학저 격벽 안쪽에 세워두지도 않았습니다. 또 켈러처럼 다시 한번 문학으로써 정치 참여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벌저의 글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자기 생의 방향타를 쥐고서 무언가로 변모해 가려는 의지가 흐릿합니다. 그런데도 그 과정은 전혀 체념적이거나 비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세계 몰락을 예언하는 표현주의적인 선지자"라기보다는, "미미한 사물의 전문 투시자"라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쩐 일인지 맑고 무구한 눈동자가 연상됩니다. 제발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토로 그늘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펼치는 페이지마다 더없이 다정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순수한 절망에서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항상 같은 이야기를 쓰지만 절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며, 미세한 부분에서 예리함을 발휘하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라워하고, 지상에 확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지만 공중에서 주저 없이 자신을 놓아버리는 그런 작가, 읽는 도중에 벌써 해체되기 시작해 몇 시간 뒤에는 글 속의 하루살이 같은 인물과 사건, 사물 들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지는 산문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원에 머문 날들 153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제발트도 언급하듯, 발저의 글 근저에는 유용해지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나아가 망각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유의 잉여성이 있습니다. 언젠가 발저는 자신은 이 산문 저 산문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다채롭게 조각나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나'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인공 '나'가 '나'라는 책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행인들 무리 속에 안전히 은신하고 있다." 이는 제발트가 2장에서 루소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나'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거의 은폐되는 방식으로 산문을 전개한 것이 연상됩니다. 또한 제발트는 발저가 크라이스트를 다룬 산문을 읽으며, 고트프리트 켈러와 크라이스트와 로베르트 발저가 기이한 방식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듯 전혀 상관없어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인물 사이에서 연결점을 모색하고, 그것을 전경화하는 것은 제발트 특유의 서술법입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드러나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5장 마칩니다.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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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증정] 텍스티의 첫 코믹 추적 활극 『추리의 민족』 함께 읽어요🏍️[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박소해의 장르살롱] 11. 수상한 한의원 [책증정] SF미스터리 스릴러 대작! 『아카식』 해원 작가가 말아주는 SF의 꽃, 시간여행
🍷 애주가를 위한 큐레이션
[그믐밤] 30. 올해의 <술 맛 멋> 이야기해요. [그믐밤] 19. <주종은 가리지 않습니다만> 부제: 애주가를 위한 밤[서강도서관 x 그믐] ④우리동네 초대석_김혼비 <아무튼, 술>
남들보다 한 발짝 먼저 읽기, 가제본 북클럽
[바람의아이들] "고독한 문장공유" 함께 고독하실 분을 찾습니다. 💀《화석맨》 가제본 함께 읽기조지 오웰 [엽란을 날려라] 미리 읽기 모임[선착순 도서나눔] 중국 대표 작가 위화의 8년 만의 신작 《원청》! 출간 전 같이 읽어요
혼자 읽기 어려운 보르헤스, russist 님과 함께라면?
(9)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부 같이 읽어요(1) [보르헤스 읽기] 『불한당들의 세계사』 같이 읽어요(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일본 장르소설을 모았습니다
[박소해의 장르살롱] 21. 모든 예측은 무의미하다! <엘리펀트 헤드>[박소해의 장르살롱] 10. 7인 1역 [박소해의 장르살롱] 7. 가을비 이야기 [일본미스터리/클로즈드서클] 같이 읽어요!
스토리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스토리 탐험단의 첫 번째 여정 [이야기의 탄생][작법서 읽기]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함께 읽기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함께 읽으실래요?
하금, 그믐, 지금
딱히 이번이라고 뭔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근거는 없었다.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어느 여성도 셰익스피어의 비범한 재능을 갖지 못했을 거예요.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겨울에는 러시아 문학이 제 맛
[문예세계문학선] #01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함께 읽기[그믐밤] 8. 도박사 1탄, 죄와 벌@수북강녕[브릭스 북클럽]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1, 2권 함께 읽기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내셔널 갤러리 VS 메트로폴리탄
[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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