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

D-29
나는 하지만 루소의 방에서 과거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이 섬이, 100년이나 200년 전에는 전 세계 어디나 그랬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으로 아직 침범당하지 않은 정적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내가 더욱더 쉽게 빠져든 환상이었다. 특히 당일치기 여행객들도 다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저녁 무렵이면 섬은 우리 문명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서 더이상 경험할 수 없는 고요 속으로 잠겨갔다. 이따금씩 호수를 스치며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커달나 포플러나무 잎사귀들이 사부작거릴 뿐, 미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짙어지는 어스름 속으로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고운 자갈이 깔린 길은 점점 더 환해졌다. 나는 울타리가 쳐진 목초지와 은빛의 고요한 귀리밭, 포도밭과 막사를 지나 그새 칠흑같이 컴컴해진 너도밤나무 숲의 끝자락까지 올랐다. 산비탈에서 서자 호숫가 저쪽에서 하나둘씩 불이 밝혀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이 호수 자체에서 부상하는 것 같았다.
전원에 머문 날들 p.56,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69. 우리는 글쓰기를 별로 영웅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확하지 않은 것은 아닌 방식으로 자신을 항상적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강방적인 행위로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작가야말로 사유라는 병에 시달리는 주체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불치의 환자라는 것을 입증한다. ㅡ '이 호수가 바다였다면'에서 제발트가 섬의 곳곳을 다니며 고찰한 루소의 말년을 따라가는 것도 꽤 흥미롭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2 ~⟨이 호수가 바다였다면⟩] 제발트는 루소와 20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서 생피에르섬을 방문합니다. 본문 곳곳에서 제발트가 루소의 삶에 자신의 그것을 겹쳐보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는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발트 역시 루소와 마찬가지로 고국 독일을 떠나서 이민자로 살아가면서도 모국어로 죽는 그 순간까지 작품 활동을 펼쳤던 작가로서, 루소의 생애와 맞물리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루소는 자신의 작업물로 인해서 살던 곳에서 추방되었고 곳곳을 떠돌면서도 각종 박해와 음해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떠돌면서 건강이 나날이 쇠하는 와중에도 수천 쪽의 글을 집필하면서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 사실을 모르더라도 본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가 루소의 나이에 이르러서 생피에르섬을 찾는 행위 자체는 특별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루소 이후에 명성을 얻은 생피에르섬에 무수한 관광객이 찾아왔다고 제발트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는 루소의 행적을 보존해놓은 공간을 단순히 관광하지는 않습니다. 대다수 여행객이 루소의 방에 놓여 있는 단촐한 풍경을 보고 실망해서 떠나는 와중에도, 제발트는 문헌학자 특유의 태도로서 그냥 지나칠 법한 과거의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여기서 의미를 부여한다함은 어설프게 대상을 나 자신으로 회수하지 않고, 대상에게 시선을 주어서 달라붙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제발트는 마치 200년 전의 루소처럼 방을 바라보고, 환희에 차서 생피에르섬을 거닐던 200년 전의 산책자처럼 외경을 묘사합니다.
그들 중 루소의 필체를 해독해보고자 유리 진열대 위로 몸을 숙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60센티미터 너비의 빛바랜 마루 널빤지가 방 한가운데로 가면 심하게 닳아서 판판한 구덩이를 이루고 있다는 것, 반면 딱딱하게 옹이 진 자리는 나머지 나무보다 2~3센티미터 가까이 돌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 또한 없었다. 곁방 개수대의 반질반질한 돌 표면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고, 아직도 화덕 주위에 남아 있는 그을음의 냄새를 맡아본 사람도,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 과수원 너머 남쪽 호반의 풀밭을 내려다본 사람도 없었다. 나는 하지만 루소의 방에서 과거의 시간 속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이 섬이, 100년이나 200년 전에는 전 세계 어디나 그랬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으로 아직 침범당하지 않은 정적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내가 더욱더 쉽게 빠져든 환상이었다.
전원에 머문 날들 56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좋은 작가들은 외부의 상황과 무관하게 매순간 영감을 얻을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작가들이 매번 새로운 경험을 찾아다니는 '경험사냥꾼'으로서 관광객의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늘 자신을 외부 세계에 열어놓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새로운 인식과 관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우주로 나갈 수도 있지만, 내 눈앞의 소금 한 알에서 우주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제발트는 왜 하필 루소가 들렀던 많은 장소 중 하필 생피에르섬를 특별히 여기는 것일까요? 그건 아마 생피에르섬이 루소가 인생에서 드물게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리라 짐작합니다. 게다가 다른 시기와 달리 루소는 생피에르섬에서 써야만 하는 글쓰기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글을 썼고, 훗날 생피에르섬에서 보냈던 행복한 시기의 경험이 루소의 마지막 책인 ⟪고독한 산책자의 명상⟫에 등장한다는 점도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얘기해볼 만한 지점이 참 많은 산문이지만 이쯤하겠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다른 대목을 인용하면서 2장 마치겠습니다.
작가 루소는 생피에르섬에 머물 수 있었던 몇 주 동안 전적으로 한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시기를 문학의 요구로부터 자기 자신을 면해주는 기회로 이용하려 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제 그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는 문학적 명성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소망하겠다고 말한다. 루소가 이제 문학에 느끼는 '불쾌감'은 일시적인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글쓰기에 언제나 동반되는 감정이었다. (···) 시민 계층이 어마어마한 철학적・문학적 에너지를 들여 자신의 해방에 대한 요구를 천명하던 시대에 루소만큼 사유의 병리적 측면을 인식한 사람은 없었다. 루소야말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바퀴를 멈출 수 있기를 그 무엇보다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글쓰기에 집착했다면 그건 장 스타로뱅스키가 말했듯 오직 손에서 펜이 떨어지고 화해와 귀환의 '고요한' 포옹 속에서 본질적인 것이 말해지는 순간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글쓰기를 별로 영웅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확하지 않은 것은 아닌 방식으로 자신을 항상적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강박적인 행위로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작가야말로 사유라는 병에 시달리는 주체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불치의 환자라는 것을 입증한다.
전원에 머문 날들 68,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루소야말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바퀴를 멈출 수 있기를 그 무엇보다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글쓰기에 집착했다면 그건 장 스타로뱅스키가 말했듯 오직 손에서 펜이 떨어지고 화해와 귀환의 '고요한' 포옹 속에서 본질적인 것이 말해지는 순간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머릿속의 바퀴를 멈추고 고요한 본질적인 순간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고 쓰기에 집착하고 있다는 말이 너무 공감이 되네요...
애당초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글을 더 이상 쓰지 않기 위해서라도 글 안에서 자기 생각을 모두 소진하기 위해서 펜을 쥐는 사람도 있겠죠. 아이러니하지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3 ⟨무엇이 슬픈지 나도 모른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조금 늦게 올립니다. 앞서 1장과 2장을 읽으면서 느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영웅과는 거리가 멉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커다란 역사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기는 하지만 영웅적인 면모는 부족하며, 외려 자기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신 저자는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쉽게 비판하기보다 그들이 자기 시대에서 노출한 한계를 담담히 서술하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작고 평범한 인물들이 관조적인 거리를 확보한 제발트에 이르러서 시공간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돼 있음이 드러나는 구조로 이 책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1장에 등장하는 헤벨은 19세기 독일의 진보적인 보수주의자로서 나폴레옹을 지지하며 나폴레옹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 적도 있지만, 후일 유럽에서 자행된 전쟁을 목도하고서는 태도를 바꾸어 자국민을 민족쇼비니즘의 수사로 궐기하기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런 수사에서 20세기 독일에서 벌어질 참상의 징조가 엿보인다는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또 2장에서는 한 세기 전인 1765년 생피에르섬으로 도망친 루소를 얘기합니다. 루소는 생피에르섬에서 '코르시카 헌법 구상'의 편집에 몰두하면서 코르시카에 기대를 걸며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주장했고 "언젠가 이 작은 섬이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 비슷한 시기에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이 반세기 후에 유럽 대륙을 전쟁으로 몰아가리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3장의 뫼리케 또한 자기 시대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는 혁명의 낭만성을 보고 듣고 읽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로서, 정치와 거리를 둔 채 가정과 전원 생활로 도피했던 세대에 속했습니다. 제발트는 뫼리케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보다 훨씬 더 일찍 체념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은 분명하다. 바로 이 점에서 뫼리케는, 어느 영웅적인 시대의 숨결을 살짝 맛본 뒤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비더마이어의 지대로 막 방향을 틀려 있던 한 세대를 대표한다. 그곳은 공론장보다 시민의 사적인 삶이 더 중요하며, 집 정원 울타리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의미하는 가족적 세계의 경계로 간주되는 곳이다.
전원에 머문 날들 90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뫼리케가 탐닉한 가족적인 울타리 안쪽의 생활은 일견 평화로워보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로움은 "우리돔 속으로 들어간, 완벽하게 배열된 미니어처의 세계"이며, 그가 처한 시대의 혼란을 감안했을 때 '완벽함'이란 완전함이 아닌 불안함이며, 도피한 이의 자족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산업화의 참상과 자본의 축적이 초래할 소란, 또 국가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책략이 서서히 드러나는 상황에서 뫼리케가 헌신한 비더마이어의 예술은 "불길한 결말에 대한 예감 탓에 죽은 듯이 사지가 경직되는 반사 반응" 같은 것이었다고 제발트는 쓰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정세와 규모가 예측할 수 없이 변화한 탓에 사람들은 커다란 스케일로 사고하기를 강요받았고, 기념비적인 것을 해야한다는 시대의 강박 관념을 느껴야 했다고 합니다. 뫼리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뫼리케는 특유의 미세한 작업을 포기한 채 당시의 시류에 따라서 기념비적인 것에 몰두했는데요, 제발트는 뫼리케의 그러한 시도가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는지를 나른한 시선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의 서술은 차갑고 냉정하지만은 않습니다. 외려 제발트의 서술에서는 안쓰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건 암다ㅗ 지독한 근시의 문학에 대한 애도와 존경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극단적인 간명함을 의도했으나 소설이 쌓아올리는 감정과 사회의 복잡한 관계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전달하지 못하는 이 내용 요약만 보아도, 뫼리케가 각종 에피소드와 서브플롯, 인물과 간막극들을 잔득 채워넣은 이 작업설계도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시로 고통받는 그의 두 눈은 아주 미세한 사물들에서 뜻밖의 경이를 발견해내는 데 반해, 보다 넓은 파노라마적 풍경으로 향할 때면 그의 시야는 흐려지고,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운명의 굴곡은 멜로드라마적인 성격 속에 흡수되어버린다.
전원에 머문 날들 98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3 ~⟨무엇이 슬픈지 나도 모른다⟩] 오타가 있네요. (떠오르는대로 받아 쓰다 보니 오타도 있고 비문도 보이네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면, 제발트는 뫼리케의 생애와 그 작품에서 실패와 좌절, 도피와 시대적 불일치를 읽어내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후대인으로서 지난 세기의 인물인 뫼리케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단죄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그런 건 너무 쉬운 일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보다 제발트는 뫼리케라는 인물이 애당초 지향하고자 했던,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좌초한 개인적인 소망과 문학적인 지향점 따위를 읽어냄으로써, 지독한 근시 문학가에 대한 애도와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발트의 지독히도 쇄말한 글쓰기 스타일은 '전체보다 큰 부분'이라는 역설적인 표어를 누구보다 잘 보여주고 있고, 그런 제발트에게 뫼리케의 실패를 쓰는 일은 퍽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영웅담에서는 한 개인의 좌절과 실패가 성공적인 결말에 이르기 위한 복선이나 반전 요소로 쓰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트의 산문에서는 한 사람의 좌절과 실패를 함부로 교훈화하기보다는 관조적 거리를 확보한 채 그저 서술합니다. 이상한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패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나온 세대의 실패와 좌절에서 최초로 지향했던 바를 읽어내고, 그로부터 어떻게 또 얼마나 멀어졌는지 살핌으로써 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에 착종한 모순을 서술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복하지만 이는 극복하고 성장하거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신데렐라 스토리와 결이 다릅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은 사카구치 안고의 ⟨문학의 고향⟩이라는 산문에서도 연결해서 읽을 만한 지점이 나옵니다. 안고는 좋은 문학은 모럴이 없다는(amoral) 감각 위에 세워졌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상태를 '고향'으로 삼으라고 독자에게 권합니다. 안고는 어렸을 적 읽었던 '빨간 모자' 이야기에서 할머니로 분장한 늑대에게 모든 미덕을 갖춘 소녀가 우적우적 잡아먹히는 장면을 읽고 나서, "내쳐저 홀로 남겨진,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어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에는 착한 사람이 선행 끝에 보상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얘기 따위는 없습니다. 외려 가련한 소녀가 잡아먹히며 끝나는 결말은 어떤 절망스러운 절벽이며, 다리를 건너오자마자 다리가 무너지며 돌아갈 길이 콱 막혔을 때 느낄 법한 막막함입니다. 안고는 이를 "뭔가 얼음을 꽉 껴안고 있는 애달픈 슬픔,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안고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3장 마치겠습니다.
불량소년과 그리스도‘이 작가를 보라’ 2권. 일본 무뢰파(無賴派)를 대표하는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의 수필집이다. 대부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로, 혼탁한 세상에서도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자신의 윤리’를 지켜나가기를 당부하는 18편의 에세이를 담았다. 주류 담론, 이념, 사회 등에 자신을 의탁하기 쉬운 게 인간이지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스스로의 책무를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인 나’를 긍정할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의 고독이나 우리들의 고향이라는 것은 이렇게 참혹하며 구원의 길이 없는 것일까요. 나는 아무래도 참혹하고 구원의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암흑의 고독에는 아무리 봐도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 살아 있는 몸은 헤매면 구원의 집을 기대하고 걸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고독은 항상 광야를 헤멜 뿐, 구원의 집을 예기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최후에는 참혹한 것, 구원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입니다. 모럴이 없다는 것 자체가 모럴인 것처럼 구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구원인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문학의 고향, 혹은 인간의 고향을 봅니다. 문학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량소년과 그리스도 174쪽, 사카구치 안고
화제로 지정된 대화
[#4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 4장에서는 스위스계 독일 소설가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를 다룹니다. 한국에도 고트프리트 켈러의 장편 소설 『초록의 하인리히』와 연작 선집 『젤트빌라 사람들』이 번역돼 있습니다. 앞서 1장에서 3장까지 다룬 인물처럼 고트프리트 켈러 또한 19세기의 정치적인 격동기를 거친 인물로서, 누구보다 자신의 시대 안에서 크게 진동하고 그러한 경험을 글로써 옮겨냅니다. 켈러가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요구가 일었던 시기로서, 역자에 따르면 "괴테와 쉴러로 대표되는 '예술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고 문학의 현실 참여"가 강조되던 시기입니다. 켈러 역시 그러한 참여로서 정치적인 입장을 자신의 작품에서 잘 드러냈는데요, 19세기 후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유재산의 기원에 대하여』에서도 알 수 있듯, 켈러가 19세기 중후반부에 들불처럼 번지던 자본주의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위화감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지금 십자로에 서서, 저 멀리 나무 우듬지들 사이로 유혹하듯 반짝거리는 탑 꼭대기의 황금빛 둥근 장식을 바라보고 있는 벤첼 슈트라핀스키가 깨닫는 바처럼, 행복과 향락을 약속하는 경제적 번영의 이면에는 사람들이 그토록 쉽게 단념해버리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또한 노동이 있고, 궁핍과 빈곤이 있으며, 어둠이 있다. 켈러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유령들이 흔하게 발견된다.
전원에 머문 날들 117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4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 제발트는 켈러가 ⟪초록의 하인리히⟫ 초고를 집필하던 1850년에, "프로이센에서 진보와 자오 사상이 일상의 질서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말하면서, 시민 계급에서 혁명의 열망이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전환되는 과정을 켈러가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개인들이 실패한 혁명을 개개인의 경제적인 번영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사회 전반적인 풍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품 속 초록의 하인리히가 유년 시절 어머니의 지독한 근검절약을 회상하는 장면은 당시의 사회 풍조를 굉장히 입체적인 방식으로 조명하고 있는데요, 금욕주의에 가까운 근검절약 정신이 "자본 증식의 원칙에 항거"하는 것이기는커녕 자본에 대한 은폐된 욕망을 되비추는 거울상이라는 것입니다. 켈러 역시 그렇게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아끼고 모은 재산이 다음 세대에게 죄책감으로 옮겨 새겨짐으로써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르상티망을 훌쩍 넘어서, 화폐 유통량의 급증에 따라 사회 전체가 타락할 위험이 가일층 증대되는 현실"을 보았을 것이라고 제발트는 설명합니다. 요약하면 19세기는 좌초한 혁명의 열망이 개개인의 사유 재산의 축적으로 전환되었던 과도기라는 것입니다. 켈러는 자신의 작품에서 여러 유대인을 등장시키는데, 재현된 유대인의 이미지는 당대의 통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은 금융 거래의 발명자이자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재산을 그러모은다는 당시의 통념과 달리, 작품 속 유대인들은 오려 자본의 증식과 투자의 순환과 무관하게 "가짜 금"으로서 자본과 구분되는 "진짜 금"을 추구했다는 것이 제발트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진짜 금이란 "언제나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 거의 무에서 자아낸 사눔ㄹ이거나 자연 풍경에 은은하게 어린 반조"입니다. 나아가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실상 "그들을 지배했던 민족들의 역사를 또다른 방식으로 거울처럼" 되비추었다고 말합니다.
벼락부자만큼이나 많은 패배자를 양산했던 자본시장의 팽창과 정치적 소요로 인해서 19세기 내내 점차 많은 독일인들과 스위스인들이 이민을 떠나야 했고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내몰렸다.
전원에 머문 날들 124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큰 줄기를 말하기는 했지만 이 책은 여러가지로 자신만의 지류를 뻗어나갈 수 있다는 특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9세기 좌초된 혁명의 열망이 개개인의 자본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전환되었다는 관점에서 4장을 소개하긴 했지만,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본 대목은 앞선 흐름과 무관한 에피소드입니다. 작품 속 초록의 하인리히가 친척 동생 안나의 관에 있는 미닫이 뚜겅에 끼워넣을 유리를 구해내는 장면입니다. 하인리히는 집에 방치돼 있던 액자 유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안나의 관에 끼워넣기 위해서 시냇물에 씻는데요, 그 과정에서 어떤 형상이 투명한 유리에 떠오르는 광경을 발견합니다. 이 부분은 2장에서 루소가 투명성이라는 주제로 유리에 천착했다는 대목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같이 읽어보면서 4장을 마치겠습니다.
루소의 글에서 나타나는 투명성이라는 주제를 파고든 장 스타로뱅스키는 "완벽히 맑은 풍경의 순간이란 개인적 실존이 스스로의 한계지점에서 해소되고 대기 속으로 꿈꾸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라고 쓴다. 스타로뱅스키에 따르면, 스스로를 남김없이 투명하게 만들기는 현대적 자서전 문학의 창시자가 품은 최고의 야심이었다. 수정은 이러한 야망의 상징으로, 스타로뱅스키에 따르면 우리는 "그것이 순수한 상태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딱딱하게 굳은 영혼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연금술과 형이상학 사이를 오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스타로뱅스키는 루소가 그의 ⟪화학 강요⟫에서 유리화에 몹시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는 루소가 요한 요아힘 베커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대목을 인용하는데, 베커는 1669년 출판된 ⟪지하 자연⟫의 저자로 유리를 만들 때 쓰는 흙을 광물의 영역이 아니라 동식물은 태운 재에서 얻은 바 있다.
전원에 머문 날들 72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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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르소설을 모았습니다
[박소해의 장르살롱] 21. 모든 예측은 무의미하다! <엘리펀트 헤드>[박소해의 장르살롱] 10. 7인 1역 [박소해의 장르살롱] 7. 가을비 이야기 [일본미스터리/클로즈드서클] 같이 읽어요!
스토리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스토리 탐험단의 첫 번째 여정 [이야기의 탄생][작법서 읽기]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함께 읽기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함께 읽으실래요?
하금, 그믐, 지금
딱히 이번이라고 뭔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근거는 없었다.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어느 여성도 셰익스피어의 비범한 재능을 갖지 못했을 거예요.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겨울에는 러시아 문학이 제 맛
[문예세계문학선] #01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함께 읽기[그믐밤] 8. 도박사 1탄, 죄와 벌@수북강녕[브릭스 북클럽]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1, 2권 함께 읽기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내셔널 갤러리 VS 메트로폴리탄
[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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