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책 5문5답] 4. 이인숙 전 중학교 교사

D-29
그믐 인터뷰, 다양한 분들을 만나 그 분들의 인생책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생책 5문5답]입니다. 인생책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나를 알고 세상을 알아가는 데 도움을 준 책. 좋은 삶을 살게 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용기를 주는 책.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의 인생책을 추천받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그 네 번째 주인공은, 30년간 중등 국어 교사로 일하시다가, 5년 전 퇴직 후 쪽빛바다 남해를 바라보며 지내시는 이인숙님입니다. 본인의 인생책을 그믐에 소개해 함께 나누고 싶다고 연락 주신 그믐 회원이십니다. 인숙님의 인터뷰는 3월 6일부터 시작할게요.
초대해주셔서 고맙고 약간 긴장도 됩니다.
Q1: 이인숙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자기 소개와 인생책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도 반갑습니다. 저는 남해서 태어나 자라고 직장생활도 여기서 오랜동안 하면서 결혼 후에도 가깝게 사신 부모님 도움으로 어린 아들들을 키웠고 이젠 손녀를 둔 할머니입니다. 늘 곁에서 내게 날개를 달아주셨던 젊고 건강하신 어머니께서 3년 전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자 코로나까지 닥치면서 삶의 패턴이 확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나의 역사가 시작된 거지요. 나도 모르게 어머니께 너무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비로소 나를 돌아보고 찾는 일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며 그동안 삶을 응시해 보게 됩니다. 남들 앞에 서는 게 제일 자신없고 싫은 일 중의 하나인 내가 겁없이 교사의 꿈을 꾸어 어린 나이에 교사가 되어 서른해가 넘도록 견뎌낸 세월은 사실 부모님의 못다한 꿈을 대신 실현한 셈이랄까요... 성격 좋다는 소리가 좋아서 남들에게 무작정 친절하고 이것 저것 다 해보느라 집중과 선택이 부족했던 젊은 날의 다감하고 어리숙하며 욕심많았던 자신을 토닥이며 안녕~하며 지금부터는 자신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며 여생을 맞이하려는 사람입니다. '자기 앞의 생'은 제가 고등학교 때 유행했던 '모모'라는 노래의 원전이 되는 유명한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소설입니다. 퇴직 후 다시 접하게 되니 어린 모모가 보통 명랑한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닫고 읽고 이번엔 삽화가 곁들인 책을 선물 받아 또 키득거리게 재밌게 읽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줄거리를 대강 요약하자면요 프랑스 외곾 낡은 빌라 건물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이지요.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당면한 존엄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벌써 여기에 제기되고 있어요. 유태인,아랍인,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벨빌이라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낡은 7층 건물에 늙고 병든 육중한 몸으로 세들어 사는 폴란드 출생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의 집에 맡겨진 아이들 중 하나인 모모.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돈을 받고 돌봐준다는 사실을 일곱 살 쯤 알고 밤새 울고 슬픔을 맛보지만 유태인으로 핍박받고 모로코와 알제리에서 몸으로 벌어먹고 살아온 창녀였던 로자는 엄마를 찾아 떼 쓰는 모모를 무릎에 앉혀두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며 돌봐준다. 점차 로자는 정신안정제도 듣지 않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오갈데 없는 모모와 둘만 남는다. 돈도 다 떨어지고 집에 들어오기 싫은 모모는 시내를 헤매다 물건도 훔치고 비행기를 납치하고 인질극을 벌여 아줌마가 새 가발을 쓰고 발을 포근하게 하고 평온하게 죽어갈 별장 하나를 살 상상도 한다, 그래도 모모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알제리에서 삼촌따라 어릴 적 프랑스로 온 하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날이 저물자 무서워 할 로자 아줌마를 찾는다. 로자의 상태가 악화된 이후 호의를 베푸는 이웃들이 많아지고 온갖 방법으로 예순 아홉 살 치매 노인을 육신을 치료하러 애쓰는 가운데 모모의 아랍인 생부가 모모의 엄마를 죽이고 11년간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풀려나 죽기 전에 아들을 한번만 보자고 한다. 다행히 로자가 제정신이 있어서 모모를 지키기 위해 능청을 떨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죽어버리자 비로소 모모는 실제 나이와 죽은 엄마의 이름과 출생에 얽힌 비밀 모두를 다 알게 된다. 갑자기 네 살을 더 먹은 모모, 정신병자 아버지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며 모모를 진심 위로하는 로자. 모모가 떠날까봐 겁나서 나이를 속였다고 다른 애들보다 사랑한다고 흐느낀다. 나치의 유태인 탄압 휴유증으로 자주 무서움과 불안에 떨며 숨을 곳인 일명 유태인 동굴을 찾아 지하실에다 잡동사니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드나드는 로자는 병원에는 절대 가고 싶지 않다. 그들은 억지로 날 살려놓으려 할 거라며 그건 고문이라며 삼십오년간 손님들에게 주었던 엉덩이를 또 의사들에게 내주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러나 의사는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인간적이라며 문제는 불법 체류자여서 사회보장연금을 받을 수 없지만 갈 곳 없는 그녀를 내다버리지는 못할 것이라며 모모를 안심시킨다. 친절한 의사는 무척 힘든 시기이니 잠시 동안이라도 좋은 방이 있는 병원으로 가자고 권유하지만 모모는 로자도 자신을 마음대로 할 신성한 자결권이 있다며 거칠게 항변하자 하얗게 질린 의사는 혼자 남을 모모를 걱정하며 이삼일은 기다려주겠다고 한다. 마침내 모모는 지하실에 만들어 놓은 유태인 둥지를 향해 한밤중에 혼자 부축하기 힘든 로자를 간신히 데려간다. 마지막 기도를 하고 촛불을 잔뜩 켜놓고 칠층까지 아줌마가 필요한 히틀러 사진과 화장품 들을 가지러 여러번 오르내리다가 지쳐 잠이 든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차가워지고 점차 푸르죽죽하게 변해가는 그녀의 얼굴에 화장을 고쳐주며 혼자 내버려두기가 두려워 그녀 곁에서 잠을 자고 이웃 롤라 아줌마가 준 돈과 훔친 돈으로 향수를 네 번이나 사서 몽땅 뿌려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동하는 죽은 사람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모모는 그녀 옆에 누워 있었다. 구급차가 왔고 아는 아줌마의 가족 곁에서 당분간은 함께 있을 것이라며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을 떠올린다.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랑해야 한다.” 거칠게 요약한 줄거리인데 읽으시기에 길 것 같아요..
Q2: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인생책으로 꼽아 주셨는데요, 이 책이 인숙님의 인생책인 이유에 관해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존엄하게 살아가는 비천한(?) 영웅들이 바로 모모,로자를 비롯한 파리 빈민가 벨빌을 지켜내고 있어 봄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생입니다. 존엄한 삶과 죽음은 가문도 학벌도 출신도 핏줄도 아닌 주어진 삶에 최선의 사랑을 다하되 온정과 연대의식을 잃지 않는 일이 아닐까요? 모모와 로자처럼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도와 주며 마지막을 원하는 대로 살던 집에서 편안하게 마칠 수 있도록 책임지는 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고 흔하지 않아 비정상적일지도 모릅니다.
억지로 연명되어지는 삶을 혐오한 작가는 사후에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와 동일 인물임을 깨닫게 했지요. 두 번이나 콩쿠르 상을 받은 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세상은 깜짝 놀랐지요. 로맹가리에게 가혹했던 평론가들도 에밀 아자르에겐 찬사를 보냈으니까요. 기존 이미지로 우리는 쉽게 현혹되고 낙인 찍고 경박하게 유행을 좇아 살아가는 것 같지요. "더 이상 잘 쓸 수 없어서 죽는다. 나는 죽음으로써 자신을 가장 잘 표현했다."며 아쉬운 이별을 선택한 작가는 이미 여섯 해 전 쓴 이 소설에서 자신이 꿈꾸는 존엄하고 자연적인 죽음을 이야기한 듯 ~
모모는 제게 갑작스럽게 가신 어머니를 웃으며 보내드릴 수 있게 위로를 건네주는 거 같아요. 병원에서 식물처럼 연명하는 삶이 아닌 로자 아줌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편안한 곳에서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하게 해 준 셈이니까요. 로자와 모모는 우리 시대 부모 자식의 은유로도 읽히지 않으시나요?
물질과 정신이 균형을 이루는 삶,현실과 이상이 조화를 이루는 삶,과거와 현재가 미래를 향해 일관되게 이어지는 삶을 살고싶은 우리들입니다. 잘 살기를 꿈꾸었던 우리들이기에 이제 잘 죽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라고 불렀던 노래를 다시한번 중얼거리면서 모모가 이야기 속에서 했던 멋진 말들 떠올려 봅니다.
Q3: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계기와 당시 사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주세요.
친구들과 남해 여행지 책방에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제목을 보고 끌리듯 책을 집어들었지요. 2020년 1월 말쯤이었네요. 작가도 책 제목도 낯설지 않고 끌리었던 것은 우울증으로 2017년 여름 오래 몸담았던 직장을 퇴직 후 동료와 한달간 남미 여행 중 들렀던 페루에서의 경험이 작용한 것 같아요. 로맹가리의 인간들을 만나 죽음까지 여정을 그린 단편들이 나의 눈에 비친 부조리한 세계에 팔딱거리는 인간의 모습과 겹쳐지며 멜랑꼬리(?)함을 자극했다고 할까요...에밀 아자르란 또 다른 필명의 '자기앞의 생'을 자연스럽게 찾아 읽게 되었고 이어 2019년 모친의 사고사 이후에도 제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책이 되었습니다. 최근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이 책을 권했어요. 시어머니를 오래 봉양하느라 지쳐 잠시라도 쉴 때 보라고 닮은 듯 다른 모모와 로자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갑자기 한 친구도 시어머니를 오래 봉양하다 힘겨울 땐 말없이 가까운 바닷가를 찾아 바라보다 온다던 말이 떠오르네요. 그 책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바닷가의 이야기이죠. 우리에게 바다는 영생의 이미지이며 궁극적인 인간과 내세의 약속, 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라고 로맹가리가 일찍이 일러 주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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