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발트 읽기] 『캄포 산토』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적갈색 가죽 조각의 비밀] 이번에는 ⟪파타고니아⟫의 저자로서 널리 이름을 알린 브루스 채트윈에 관한 짤막한 에세이입니다. 잠시 샛길로 빠져서 ⟪캄포 산토⟫를 논해보자면, 제가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탓이 더 크리라 짐작합니다만, 전반부에 배치된 산문과 에세이가 더 짜임새 있고 흥미진진했고 후반부로 갈수록 에세이는 짧고 파편적으로 읽혔습니다. 그럼에도 이 에세이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지는 않습니다. 브루스 채트윈이 매번 새로운 대륙을 무대 삼아서 범상한 책을 썼던 것처럼 제발트도 끊임없이 어딘가를 기행하면서 자신이 보고 듣고 읽은 바를 패치워크처럼 엮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서술법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브루스 채트윈은 다가가는 것이 반쯤 금기시 돼 있었던, 그리하여 상상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던 유년의 기억을 자신의 문학적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진기한 소장품들이 간직된 채 잠긴 유리창은 바로 채트윈 문학의 내용이자 형식에 대한 형식에 대한 핵심적 은유가 되었"다는 제발트의 말에서도 보듯이, 유년 시절 목격한 물신적인 소유욕이 기억으로 또 그러한 기억을 기술하는 문학으로 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에세이에서는 유리창 안쪽의 소장품 중에서도 "낯선 가죽"을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제발트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으로 미끄러지는 구조를 띱니다. 소설에서 가죽 조각은 소원을 들어주지만 그 소원이 이뤄지는 즉시 1인치씩 줄어들게 되는 유물입니다. 저에게는 가죽조각이 마치 기억을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여백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게 무엇에 관한 것이건 쓰는 순간 우리는 그 기억으로부터 놓여나게 되지만 점점 더 여백은 줄어들테죠. 하지만 후일 그 여백을 발견한 사람에게 기억은 활짝 열리며 전승되고, 그 기억에 노출된 다시 독자는 자신의 여백을 필요로 하는 아이러니한 연쇄 작용에 동참하게 됩니다. 마치 읽고 쓰는 일이 그런 것처럼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음악의 순간들] 제발트는 우연히 음악을 듣고서, 과거 자신이 경험한 음악적 순간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에세이를 이어갑니다. 유년과 대학교 시절에 경험한 음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세 개의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서술됩니다. 유년 시절 치터를 배우면서 느꼈던 어떤 정서적 방어책으로서 음악의 역할을 새삼 떠올리기도 하고, 성가대장이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다가 기이한 경직 상태를 느끼며 돌발적으로 연주를 머춘 순간에 일었던 정적을 서술하기도 합니다. 또 오페라 <청교도>에 나오는 음악을 떠올리다가 과거 비트겐슈타인에 자신의 그것을 포개보기도 합니다. 인상적으로 읽은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내가 열둘의 나이에, 한참 뒤⏤내가 착각하지 않았디면⏤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어느 연구에서 읽었고 읽는 즉시 설득력 있다고 느꼈던 주장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의 가장 내밀한 비밀이 편집증을 방어하기 위한 어떤 몸짓에 깃들어 있고, 우리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현실의 경악이 일으킨 홍수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263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재건 시도] 1976년 5월, 제발트는 화가 얀 페터 트리프를 만나기 위해서 슈투트가르트라는 도시에 당도합니다. 그리고 문득 슈투트가르트에 기시감을 느낌과 동시에, 유년 시절 '도시 사중주'라는 카드 게임 속에 '슈투트가르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냅니다. 슈투트가르트, 올덴부르크, 부퍼탈, 보름스와 같은 도시들은 이전까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고 언어로서 간접적으로 감각하고 있었던 공간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 역시 '부루마블'이라는 보드 게임을 통해서 세계 곳곳의 관광지와 수도의 이름을 먼저 접하고 나서, 훗날 성인이 되어서 그 각각을 직접 경험하면서 익숙함과 생경함을 동시에 느꼈더랬습니다.) 슈투트가르트 보나츠 역에 내리면서 느꼈던 익숙한 낯설음에 대해서 제발트는 변명처럼 덧붙입니다. 당시 전후 독일은 당시 전쟁으로 황폐화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도시로 단기여행을 가려는 수요가 적었고, 그리하여 "조국은 앞으로도 어쩐지 후미지고 아늑하다고 할 수 없을 미지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라고요. 특히 제발트는 물리적으로 재건된 슈투트가르트에서 느껴지는 어떤 매끄러움에서 불편함마저 느낍니다. 그러한 인상은 슈투트가르트 라인스부르크 거리에서 종전 직후 몇 년 동안 난민 수용소가 존속되었으며, 그곳 거주민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왜 나는 전차를 타고 슈투트가르트 시내로 가다 포이어제라는 역을 지나칠 때면 우리가 주위의 모든 것을 훌륭히 재건했는데도 아직 우리 위로는 불길이 치솟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왜 그럴 때마다 우리가 전쟁 막바지 몇 년간 공포시대를 겪은 이후 일종의 지하 은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이전 작품에서도 보듯, 제발트는 자신이 다루려는 주제를 말하기 위해서 일종의 작가적인 분신으로서 실존 인물을 내세우는데, 그는 바로 시인 휠덜린입니다. 휠덜린이 인생의 불우한 시기를 보내면서 뢴산맥, 하르츠, 크노헨베르크를 걸었고, 할레와 라이프치히로 갔으며, 프랑크푸르트에 당도해서 좌절을 겪은 뒤 다시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와서, 훗날 독일에서 벌어질 만행을 예견하기라도 하듯 "저와 같은 외지인을 친절하게 받아들이소서"라고 말하며 스스로 '문학의 소용'을 물었던 것처럼, 제발트 역시 자신에게 비슷한 물음을 던집니다. (285) 문학의 소용은, 아마 어떤 인과적 논리로 해명할 수 없는 특별한 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단지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이전에는 단지 제후 관저 주재도시였고 훗날 산업도시가 되는 슈투트가르트와, 일곱 개의 언덕으로부터 확장해 나간 프랑스 도시 튈 사이에 있는, 휠덜린이 보르도로 돌아올 때 거쳐갔던 곳에 코레즈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제발트가 태어난지 삼 주가 된 시점이자,휠덜린의 사망 101주기 즈음인 1944년 6월 9일, 마을에 살던 남자들 전부가 보복 작전을 위해 출동한 SS단원에게 붙잡혀 끌려가서 강제노동수용소와 학살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연결'지으면서, 제발트는 휠덜린처럼 묻습니다. "문학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에 대해 제발트는 명확한 대답은 아니지만 다음처럼 씁니다.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 슈투트가르트에도 그러한 과업에 복무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나는 그 집과 그 집이 거하는 도시에 선한 미래가 있기를 기원한다." 제 생각에, 재건은 늘 안팎으로 이루어집니다. 외적으로만 매끄럽고 휘황한 방식의 재건은 화려하게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자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재건과 동시에, 부서진 자리에서부터 초석부터 다시 세워지는 정신의 재건은 늘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현실의 문제가 남습니다. 제발트는 그 '어떻게'의 형식을 자신의 산문 문학으로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상황은 이즈음의 우리도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위정자는 늘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서 '미래를 위한 결단'을 한 자신을 앞세우지만, 그러한 수사로써 변호하려는 미래에 과연 실질적인 피해자가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명명백백한 피해 사실은 늘 현재의 경제 논리에 의해 무마되고 '용단', '결단', '해법' 같은 통속적인 수사 앞에서 발목잡는 논리 따위로 폄하되니까요. 다시 제발트로 돌아가보자면, 역사적 만행을 저지른 데 대한 사과와 그에 준하는 반성이 없는 한, 외적인 '재건'은 반쪽짜리 수사일 뿐입니다. 전후 독일에서 전쟁중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패전국이라는 수치를 경제 기적으로 씻어내겠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독일 사회를 이끌어갔고, 그러한 합의를 이끌어갔던 파렴치한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가 적층되어서 훗날 68혁명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오늘의 우리와 연결지어볼 만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캄포 산토』 마치겠습니다.
트리프트는 당시 완성한 판화 한 점을 내게 선물로 쥐여주었다. 그 판화는 정신병을 앓던 판사회 의장 다니엘 파울 슈레버를 묘사한 것인데, 슈레버의 두개골 속에 거미 한 마리가 들어앉아있다⏤대체 우리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후 내가 쓴 많은 글들의 연원은 바로 이 판화다. 그뿐만 아니라 그 판화의 기법, 엄밀한 역사적 관점을 견지하는 자세, 끈기 있는 세공 작업, 얼핏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사물들을 정물화 스타일로 그물망처럼 엮은 방식도 그러하다. 그때부터 나는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지, 그 실들은 대체 어디로 나아가는지 줄기차게 묻고 있다. ⏤281쪽.
작성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책 나눔][박소해의 장르살롱] 21. 모든 예측은 무의미하다! <엘리펀트 헤드>[도서 증정] <나쁜 버릇>을 함께 읽어요.[김영사/책증정] 골목길 경제학자가 말하는 도시와 사회의 진화!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프런트페이지/책증정]《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었다》 ASMR 들으며 같이 읽어요[책증정] 텍스티의 첫 코믹 추적 활극 『추리의 민족』 함께 읽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중간 참여할 수 있어요!
12월 29일, 올해의 마지막 그믐밤 🌜
[그믐밤] 30. 올해의 <술 맛 멋> 이야기해요.
도스토예프스키 4대 장편
[그믐연뮤클럽] 4. 다시 찾아온 도박사의 세계 x 진실한 사랑과 구원의 "백치"[그믐밤] 10. 도박사 3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수북강녕[그믐밤] 9. 도박사 2탄, 악령@수북강녕[그믐밤] 8. 도박사 1탄, 죄와 벌@수북강녕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이 됩니다_글쓰기를 돕는 책 3
피터 엘보의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를 읽고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요글쓰기 책의 고전, 함께 읽어요-이태준, 문장 강화[책증정] 스티븐 핑커 신간, 『글쓰기의 감각』 읽어 봐요!
2025년을 위해 그믐이 고른 고전 12권!
[그믐클래식 2025] 한해 동안 12권 고전 읽기에 도전해요!
같이 읽고 싶은 이야기_텍스티의 네버엔딩 스토리
[책증정] 텍스티의 첫 코믹 추적 활극 『추리의 민족』 함께 읽어요🏍️[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박소해의 장르살롱] 11. 수상한 한의원 [책증정] SF미스터리 스릴러 대작! 『아카식』 해원 작가가 말아주는 SF의 꽃, 시간여행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법
[버터북스/책증정] <오늘의 역사 역사의 오늘> 담당 편집자와 읽으며 2025년을 맞아요[그믐북클럽] 1. <빅 히스토리> 읽고 답해요
혼자 읽기 어려운 보르헤스, russist 님과 함께라면?
(9)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부 같이 읽어요(1) [보르헤스 읽기] 『불한당들의 세계사』 같이 읽어요(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 한강 작가의 책 읽기는 계속됩니다!
[한강 작가님 책 읽기] '작별하지 않는다'를 함께 읽으실 분을 구합니다![라비북클럽](한강작가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2탄)흰 같이 읽어요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 작품 읽기 [한강 작가님 책 읽기]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으실 분을 구합니다.
빅토리아 시대 덕후, 박산호 번역가가 고른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3!
[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① <위대한 유산>[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② <올리버 트위스트>[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③ <두 도시 이야기>
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앨리슨 벡델 - 펀 홈시무라 타카코 - 방랑소년 1저메이카 킨케이드 - 루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내셔널 갤러리 VS 메트로폴리탄
[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
🎬영상과 독서를 함께 해요.
[NETFLIX와 백년의 고독 읽기]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IMF외환위기 다시 보기1]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어요.영화 <로기완>을 기다리며 <로기완을 만났다> 함께 읽기"사랑의 이해" / 책 vs 드라마 / 다 좋습니다, 함께 이야기 해요 ^^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