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주에 걸쳐서 ⟪캄포 산토⟫의 후반부를 읽습니다.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기토끼의 아기, 아기 토끼⟩
2. ⟨스위스를 거쳐 유곽으로⟩
3. ⟨꿈의 직물⟩
4. ⟨영화관에 간 카프카⟩
5. ⟨스콤베르 스콤브루스 또는 흔하디 흔한 고등어⟩
6. ⟨음악의 순간들⟩
7. ⟨재건 시도⟩
8. ⟨독일 학술원 입회 연설⟩
(5) [제발트 읽기] 『캄포 산토』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모임지기의 말
화제로 지정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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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토끼의 아기, 아기 토끼]에서는 전에 읽었던 ⟪현기증. 감정들⟫에서 잠시 등장했던 시인 '에른스트 헤르베크'를 얘기합니다. 헤르베크는 스무살이 되던 해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던 인물로서 담당 의사의 인도로 시를 쓰기 시작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작가입니다. 제발트는 말합니다. 헤르베크의 작품에서 비단 모자에서 마법처럼 꺼내는 토끼는 분명 작가가 그 자신을 그 안에서 발견하는 토템 동물이라고요. 헤르베크는 선천적으로 구순열을 타고 태어났으며, 입술이나 입천정이 두 갈래 갈라지는 구순구개열의 상흔 즉 토순兎脣은 그에게 정체성의 표식이 됩니다. 제발트는 빈 대학의 독어독문학과 교수인 기젤라 슈타인레히너의 말을 빌려서 구순열을 헤르베크 스스로 발견해낸 자아분열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슈타인레히너 실제 구순열이 아메리카 토착민 신화에서 태어나지 못한 쌍생아의 흔적으로 여겨진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갈라진 얼굴을 한 토끼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최고신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 몸 안의 이원성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제발트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구순열을 앓는 토끼를 토템 동물로 삼은 자의 메시아적 소명은 비단 신성한 질서의 선택을 받을 뿐 아니라, 세속의 세계에서 배척당하고 박해받는 역할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헤르베크의 자전적인 글에서 그는 토끼를 자신의 토템 동물로 표현함과 동시에 토끼 고기를 먹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맛있었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끼에 대한 헤르베크의 시선은 양가적입니다. 이에 대해서 제발트는 헤르베크가 자신의 닮은꼴을 잡아먹음과 동시에 어떠한 공모에 가담했으며, 이는 "피해자로서만이 아니라 가해자로서 관여했여했다는 것은 우리가 공동으로 꾸려가는 삶의 시커먼 간계 속에 그가 어떻게 얽혀들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척도"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제발트가 포착해낸 작가의 독창성은 그 자신의 독창성이며, 따라서 헤르베크의 양가성은 제발트의 양가성이기도 합니다. 인상적으로 읽은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기증. 감정들(세계문학전집 123)(양장본 HardCover)W. G. 제발트 소설 『현기증. 감정들』. 형식적인 측면에서 두 편의 짧은 이야기와 두 편의 긴 이야기로 직조된 이 책은 각각 별개인 듯 보이지만 하나의 우주 안에 있는 네 개의 성좌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스탕달과 카프카에 화자 자신을 겹쳐넣고, 단테와 발저, 루트비히 2세, 그릴파르처, 카사노바 등 이미 죽은 이들과 마주하는 환영에 사로잡혀 흘러다니는 일종의 여행 문학이자, 제발트의 작품 중 드물게 자전적인 내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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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크는 이렇게 썼다 "시는 역사를 슬로모션으로 조형하는 구술 형식이다······ 시란 또한 현실에 대한 혐오로서 그 현실은 시보다 어렵다. 시는 학생에 대한 감독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다. 학생은 시를 배우고 시는 책 속의 역사다. 우리는 숲에 사는 동물들에 대한 시를 배운다. 유명한 역사 서술가는 가젤이다."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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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제발트의 작품은 중간중간 생각지도 못한 묘사를 맞닥뜨리는 재미가 있습니다. ⟪현기증. 감정들⟫에서 제발트가 헤르베크와 그라이펜슈타인의 성채를 걷는 장면 중에 인상적인 한 대목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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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와 내가 나란히 앉아 이곳의 놀라운 풍광을 음미하던 화창한 10월의 가을날, 성채의 담벼락 위쪽까지 자란 나뭇잎들의 바다 위로 푸르스름한 안개가 떠 있었다. 바람이 숲 우듬지를 흔들며 지나갔고, 떨어져나온 나뭇잎들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떠올라 아득한 허공으로 하나둘 사라져갔다. 에른스트는 가끔 어딘가 아주 멀리 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포크를 음식에 수직으로 꽂아놓은 채, 몇 분 동안이나 꼼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 우표를 수집한 적이 있노라고,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그리고 아르헨티나 우표를. 그리고 그는 말없이 담배 한 대를 더 피운 뒤, 마치 지나간 자신의 삶에 대한 놀라움이 함축된 표현인 듯, 그에게는 분명 매우 이국적으로 들릴 단어 '아르헨티아'를 한번 더 반복해서 말했다. 우리가 함께한 그날 오전 시간은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우리는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웠으리라. 적어도 나는, 품위 있게 추락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은 결코 다 다르지 못하는 법. 말하자면 그라이펜슈타인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제 옛날 같지 않았다는 의미다.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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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직물] 이번 산문은 나보코프의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전반적인 경향을 탐구합니다. 제발트는 생전 나보코프가 강령술에 심취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그의 작품에서 부유하는 듯한 시선을 감지합니다. "산문에서 빛나는 대목 중 상당수가 우리의 세상만사가 어떤 분류표에도 아직 기재되지 않은 외부의 종에 관찰당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밀사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연극에 어쩌다 한 번씩 객연으로 출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자아낸다." 이때 유령은 과거의 존재이며, 과거와 씨름한다는 점에서 "유령과 작가는 서로 마주 닿는다"고 제발트는 말합니다. 나보코프의 작품에서는 서술자와 그러한 서술자 바깥에서 펜을 쥔 작가를 더 넓고 높은 층위에서 조망하는 듯한 "비가시적인 관찰자"가 개입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나보코프는 문장을 쓰는 작가를 체스 전술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218쪽) 그들은 백의 여왕이 지배하는, 삶의 역전된 상이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키는 거울 속 망명의 세계에 이미 깊이 들어가 있다. 인생은, 운명이 사람을 말 대신 잡고 두는, 밤과 낮이 격자 무늬를 이루는 체스판이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여 잡고 죽이고, 하나씩 하나씩 상자로 돌려보낸다. 필시 나보코프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먼 선배라 할 수 있을 에드워드 피츠 제럴드가 번역한 11세기 페르시아어 운문에 나오는 표현처럼, 영원한 이동에 동참한 것이리라.
새삼스럽게 얘기해보자면, 대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대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이 자신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인 경우입니다. 그 순간 일종의 유령적인 시선을 얻게 됩니다. 자기 과거와 기억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과거와 기억은 물론 같지 않습니다. 과거는 반드시 기억으로써 서술되어야 하는데, 이때 기억으로서 서술된 과거는 재현된 과거입니다. 현재의 시선에서 재편되고 편집된 이야기의 형식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기억을 서술하는 작업은 늘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제발트의 말처럼 "모든 기억 이미지를 하나하나 구출해내려는 작업은 심각한 환상통을 안겨"줍니다. 그 서술방식이 1인칭이든 3인칭이든 자기 자신의 기억을 논하는 한, 시선은 유령의 그것처럼 현실을 중력을 벗어나서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체스판을 내려다보는 건조한 포즈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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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의 마지막 문장은 나보코프의 자서전 중 한 대목을 인용합니 다.
"내가 앉은 식탁 자리에는 서쪽 창문을 통해 느닷없고 경이로운 공중부유 장면이 보였다. 순간, 그곳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흰 여름 양복 차림의 아버지가 공기 중에 영광스럽게 손발을 쭉 뻗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팔과 다리는 흥미롭게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잘생기고도 침착한 얼굴을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힘찬 함성에 맞추어 그는 세 번 날아올랐고, 두번째에는 첫번째보다 더 높이 떠올랐으며, 마지막으로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는 여름날 오후의 코발트블루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영원처럼,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의 모습은 편안히 날아오른 천국 사람 같았다. 그가 주름이 잔뜩 잡힌 의복을 입고 교회의 둥근 천장 위로 떠오를 때, 아래에서는 밀랍으로 만든 가는 초들을 쥔 죽을 운명의 손들이 향내 나는 안갯속으로 차례차례 작은 불꽃들을 일으킨다. 그러면 영원한 안식을 구하는 성직자의 성가가 울려퍼지고, 장례식 백합은 열린 관 속 헤엄치는 불꽃들 사이에 누운 그 누구의 얼굴을 가려놓는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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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간 카프카] 제발트는 한스 치슐러의 ⟪카프카 영화관에 가다⟫라는 작품에 대해서 논합니다. 1950년대부터 쏟아져나온 카프카에 관한 수많은 연구 서적들이 실존주의와 정신분석,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같은 지리멸렬한 헛소리만 반복해왔다고 비판하는 반면, 한스 치슐러의 연구서가 "사실관계에만 천착하고 그 어떤 해설도 섣불리 시도하지 않는" 절제의 태도가 돋보인다고 치하합니다. 한스 치슐러는 카프카가 영화를 보고 남긴 메모에 착안하여, 당시 기술발전의 첨단에 있었던 영화와 사진과 카프카의 작업물이 맺는 관계를 탐구합니다. 제발트는, 오늘날처럼 시각 자극이 범람하는 시대와 달리 카프카 시대에는 영화 이미지가 저급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런 시대에서 카프카가 영화 이미지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카프카는 사랑하는 연인인 펠리체 바우어 양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지들은 아름답지요, 이미지들은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만큼 고통이기도 합니다"라고 쓴 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진은 현실이나 지나가는 풍경을 속사(速寫)로 고정시키는데, 이는 그간 문학 작품에서 작가들이 독자들에게 보여주던 풍경 묘사와 겹치는 면이 상당합니다. 생각해보면 기술이 발전하고, 사진 기술이 발달하고 보편화되고 나서야 우리들은 이미지의 역할에 대해서 새삼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진이나 영화 속에서 이미지를 대하는 방식과 현실의 대상을 대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현실에서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은 여러 모로 금기시되는 행위이므로 무척 가까운 사이가 아닌 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사진과 영화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대상도 일단 한번 속사로 포착하기만 하면 그 대상의 이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춰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에세이 ⟨기술적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책에서도 잘 나옵니다.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본문이 100여 쪽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에게도 이젠 일상어가 된 ‘아우라(Aura)’ 개념을 비롯, 이 아우라에 의거한 예술의 자율성이 붕괴되어 있는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성격 문제, 그리고 사진, 음악, 영화가 오늘날 대중의 지각양식을 어떻게 변모시키고 있는지 등의 진단과 전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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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다양한 대상들을 클로즈업하거나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들의 숨겨진 세부를 강조하거나 또는 대물렌즈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진부한 환경을 탐구해감으로써,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필연성들에 대한 통찰을 증대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예상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유희공간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영화가 등장하기 전에는] 우리의 술집과 대도시의 거리, 우리의 사무실과 가구가 비치된 방, 철도역과 공장들이 하나같이 우리를 절망적으로 가두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거기에 영화가 출현하여 이 감옥같은 세계를 [고속촬영에 의한] 10분의 1초의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버렸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사방으로 흩어진 세계의 파편들 사이에서 유유히 모험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클로즈업에 의해 공간은 확대되고, 고속촬영[즉 슬로모션]에 의해 운동이 그 폭을 넓혔다. 사물을 확대하는 경우에 중요한 점은 단지 그것이 '지금까지' 어렴풋하게 보이던 것을 명확하게 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물질의 전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슬로모션도 단지 모두가 알고 있는 운동양상들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익히 알려져 있는 이 양상들 속에서 미지의 양상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기술적복제시대의 예술작품⟩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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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영화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우리가 대상을 바라봄으로써 얻는 이미지와 차이가 있습니다. 사진과 영화에 이르러서, "실제 시간은 지양되고 이따금 꿈에서처럼 죽은 자들과 산자들, 아직도 태어나지도 않은 자들이 한 차원에서 함께 자리하는 강박상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영 화관의 어두컴컴한 어둠 속에서 오직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스크린 속에서 점멸하는 이미지와 자신의 시선만 남는 경험을 합니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시선만 남고 그런 스크린을 바라보는 자신의 육체는 어둠속에서 잠시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 것인데요, 비로소 영화가 끝나고 새까맣던 사위가 다시 밝아질 때에야 관객은 꿈에서 깨고 난 직후의 이질감을 느낍니다. 제발트는 영화관에 있을 때 관객은 과잉 발달된 시선의 상태에 놓인다고 말하며, 카프카를 떠올립니다. 제발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요지경 상자의 어둠에 갇혀 있다가 다시 거리로 나온 손님들 역시 순수한 관음으로 인해 유실된 자기 육체를 되찾기 위해 마음속으로 기합을 넣어야 한다." 카프카의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는 몽롱한 인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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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콤베르 스콤브루스 또는 흔하디흔한 고등어] 이번에는 얀 페너 트리프라는 작가의 그림을 다룬 짤막한 에세이입니다. 이 에세이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할 만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발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서술법이 잘 드러나는 글이기는 합니다. 인상적으로 읽은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에세이는 짫게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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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가 살아 있을 적에 얼마나 현란한 자태를 뽐내는가는 고등어의 희한한 이름이 말해준다. 에렌바움이 다른 곳에서 덧붙인 바대로 고등어의 이름은 라틴어 형용사 바리우스 내지 그 단어의 축소 변형태인 바리올루스, 바리엘루스, 바렐루스로 거슬러올라가며, 이 단어들은 대략 '얼룩덜룩한' '반점이 있는'이란 뜻이다. '천연두'라는 병명도 바로 이러한 단어들에서 연원한 것으로, 한때 그 병은⏤적어도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표현대로 라면⏤고등어가 여인숙 안주인으로 계산대를 지키는 집에서 옮아오는 병이었다. 인간과 고등어의 삶과 죽음의 관계는 우리가 예감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리라. 나는 첫 낚싯줄을 끌어올릴 때 그랑빌의 판화 작품을 생각했다. 그 그림에서 슈미제트, 넥타이, 연미복을 차려입은 대여섯 마리의 물고기들은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비정하게도 동족을 막 먹어치우기 일보직전이다. 그것들이 우리 중 누군가를 먹으려 했다면 조금은 덜 끔직했을까. 아마도 그래서일까, 물고기의 꿈은 죽음을 불러온다 하지 않던가.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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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갈색 가죽 조각의 비밀] 이번에는 ⟪파타고니아⟫의 저자로서 널리 이름을 알린 브루스 채트윈에 관한 짤막한 에세이입니다. 잠시 샛길로 빠져서 ⟪캄포 산토⟫를 논해보자면, 제가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탓이 더 크리라 짐작합니다만, 전반부에 배치된 산문과 에세이가 더 짜임새 있고 흥미진진했고 후반부로 갈수록 에세이는 짧고 파편적으로 읽혔습니다. 그럼에도 이 에세이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지는 않습니다. 브루스 채트윈이 매번 새로운 대륙을 무대 삼아서 범상한 책을 썼던 것처럼 제발트도 끊임없이 어딘가를 기행하면서 자신이 보고 듣고 읽은 바를 패치워크처럼 엮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서술법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브루스 채트윈은 다가가는 것이 반쯤 금기시 돼 있었던, 그리하여 상상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던 유년의 기억을 자신의 문학적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진기한 소장품들이 간직된 채 잠긴 유리창은 바로 채트윈 문학의 내용이자 형식에 대한 형식에 대한 핵심적 은유가 되었"다는 제발트의 말에서도 보듯이, 유년 시절 목격한 물신적인 소유욕이 기억으로 또 그러한 기억을 기술하는 문학으로 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에세이에서는 유리창 안쪽의 소장품 중에서도 "낯선 가죽"을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제발트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으로 미끄러지는 구조를 띱니다. 소설에서 가죽 조각은 소원을 들어주지만 그 소원이 이뤄지는 즉시 1인치씩 줄어들게 되는 유물입니다. 저에게는 가죽조각이 마치 기억을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여백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게 무엇에 관한 것이건 쓰는 순간 우리는 그 기억으로부터 놓여나게 되지만 점점 더 여백은 줄어들테죠. 하지만 후일 그 여백을 발견한 사람에게 기억은 활짝 열리며 전승되고, 그 기억에 노출된 다시 독자는 자신의 여백을 필요로 하는 아이러니한 연쇄 작용에 동참하게 됩니다. 마치 읽고 쓰는 일이 그런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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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순간들] 제발트는 우연히 음악을 듣고서, 과거 자신이 경험한 음악적 순간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에세이를 이어갑니다. 유년과 대학교 시절에 경험한 음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세 개의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서술됩니다. 유년 시절 치터를 배우면서 느꼈던 어떤 정서적 방어책으로서 음악의 역할을 새삼 떠올리기도 하고, 성가대장이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다가 기이한 경직 상태를 느끼며 돌발적으로 연주를 머춘 순간에 일었던 정적을 서술하기도 합니다. 또 오페라 <청교도>에 나오는 음악을 떠올리다가 과거 비트겐슈타인에 자신의 그것을 포개보기도 합니다. 인상적으로 읽은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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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열둘의 나이에, 한참 뒤⏤내가 착각하지 않았디면⏤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어느 연구에서 읽었고 읽는 즉시 설득력 있다고 느꼈던 주장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 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의 가장 내밀한 비밀이 편집증을 방어하기 위한 어떤 몸짓에 깃들어 있고, 우리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현실의 경악이 일으킨 홍수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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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 시도] 1976년 5월, 제발트는 화가 얀 페터 트리프를 만나기 위해서 슈투트가르트라는 도시에 당도합니다. 그리고 문득 슈투트가르트에 기시감을 느낌과 동시에, 유년 시절 '도시 사중주'라는 카드 게임 속에 '슈투트가르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냅니다. 슈투트가르트, 올덴부르크, 부퍼탈, 보름스와 같은 도시들은 이전까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고 언어로서 간접적으로 감각하고 있었던 공간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 역시 '부루마블'이라는 보드 게임을 통해서 세계 곳곳의 관광지와 수도의 이름을 먼저 접하고 나서, 훗날 성인이 되어서 그 각각을 직접 경험하면서 익숙함과 생경함을 동시에 느꼈더랬습니다.) 슈투트가르트 보나츠 역에 내리면서 느꼈던 익숙한 낯설음에 대해서 제발트는 변명처럼 덧붙입니다. 당시 전후 독일은 당시 전쟁으로 황폐화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도시로 단기여행을 가려는 수요가 적었고, 그리하여 "조국은 앞으로도 어쩐지 후미지고 아늑하다고 할 수 없을 미지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라고요.
특히 제발트는 물리적으로 재건된 슈투트가르트에서 느껴지는 어떤 매끄러움에서 불편함마저 느낍니다. 그러한 인상은 슈투트가르트 라인스부르크 거리에서 종전 직후 몇 년 동안 난민 수용소가 존속되었으며, 그곳 거주민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왜 나는 전차를 타고 슈투트가르트 시내로 가다 포이어제라는 역을 지나칠 때면 우리가 주위의 모든 것을 훌륭히 재건했는데도 아직 우리 위로는 불길이 치솟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왜 그럴 때마다 우리가 전쟁 막바지 몇 년간 공포시대를 겪은 이후 일종의 지하 은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이전 작품에서도 보듯, 제발트는 자신이 다루려는 주제를 말하기 위해서 일종의 작가적인 분신으로서 실존 인물을 내세우는데, 그는 바로 시인 휠덜린입니다. 휠덜린이 인생의 불우한 시기를 보내면서 뢴산맥, 하르츠, 크노헨베르크를 걸었고, 할레와 라이프치히로 갔으며, 프랑크푸르트에 당도해서 좌절을 겪은 뒤 다시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와서, 훗날 독일에서 벌어질 만행을 예견하기라도 하듯 "저와 같은 외지인을 친절하게 받아들이소서"라고 말하며 스스로 '문학의 소용'을 물었던 것처럼, 제발트 역시 자신에게 비슷한 물음을 던집니다.
(285) 문학의 소용은, 아마 어떤 인과적 논리로 해명할 수 없는 특별한 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단지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이전에는 단지 제후 관저 주재도시였고 훗날 산업도시가 되는 슈투트가르트와, 일곱 개의 언덕으로부터 확장해 나간 프랑스 도시 튈 사이에 있는, 휠덜린이 보르도로 돌아올 때 거쳐갔던 곳에 코레즈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제발트가 태어난지 삼 주가 된 시점이자,휠덜린의 사망 101주기 즈음인 1944년 6월 9일, 마을에 살던 남자들 전부가 보복 작전을 위해 출동한 SS단원에게 붙잡혀 끌려가서 강제노동수용소와 학살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연결'지으면서, 제발트는 휠덜린처럼 묻습니다. "문학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에 대해 제발트는 명확한 대답은 아니지만 다음처럼 씁니다.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 슈투트가르트에도 그러한 과업에 복무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나는 그 집과 그 집이 거하는 도시에 선한 미래가 있기를 기원한다."
제 생각에, 재건은 늘 안팎으로 이루어집니다. 외적으로만 매끄럽고 휘황한 방식의 재건은 화려하게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자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재건과 동시에, 부서진 자리에서부터 초석부터 다시 세워지는 정신의 재건은 늘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현실의 문제가 남습니다. 제발트는 그 '어떻게'의 형식을 자신의 산문 문학으로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상황은 이즈음의 우리도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위정자는 늘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서 '미래를 위한 결단'을 한 자신을 앞세우지만, 그러한 수사로써 변호하려는 미래에 과연 실질적인 피해자가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명명백백한 피해 사실은 늘 현재의 경제 논리에 의해 무마되고 '용단', '결단', '해법' 같은 통속적인 수사 앞에서 발목잡는 논리 따위로 폄하되니까요. 다시 제발트로 돌아가보자면, 역사적 만행을 저지른 데 대한 사과와 그에 준하는 반성이 없는 한, 외적인 '재건'은 반쪽짜리 수사일 뿐입니다. 전후 독일에서 전쟁중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패전국이라는 수치를 경제 기적으로 씻어내겠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독일 사회를 이끌어갔고, 그러한 합의를 이끌어갔던 파렴치한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가 적층되어서 훗날 68혁명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오늘의 우리와 연결지어볼 만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캄포 산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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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프트는 당시 완성한 판화 한 점을 내게 선물로 쥐여주었다. 그 판화는 정신병을 앓던 판사회 의장 다니엘 파울 슈레버를 묘사한 것인데, 슈레버의 두개골 속에 거미 한 마리가 들어앉아있다⏤대체 우리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후 내가 쓴 많은 글들의 연원은 바로 이 판화다. 그뿐만 아니라 그 판화의 기법, 엄밀한 역사적 관점을 견지하는 자세, 끈기 있는 세공 작업, 얼핏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사물들을 정물화 스타일로 그물망처럼 엮은 방식도 그러하다.
그때부터 나는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지, 그 실들은 대체 어디로 나아가는지 줄기차게 묻고 있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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