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 새벽달, 책

D-29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p55 밝은 밤 중에서 이런 당연한 재능으로 왜 삶이 힘들어야하는걸까요....
데비는 자기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낙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데비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사람은 자기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휠씬 더 많이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데비를 질투할 수조차 없었다. p50 데비 챙 <애쓰지 않아도> 나무 웃어서 정민은 꿈의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갈 뻔한다. 깨고 싶지 않다. 윤이사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정민을 바라보다 입을 연다. 우리는 네 꿈에서 자주 만났어. 알잖아. 꿈을 기억할지 말지는 너의 선택이었다는 거. 넌 깨어나기 전에 선택할 수 있었어. 그리고 매번 기억하지 않는 걸 선택했고. (중략) 너는 너를 용서해야 해, 머뭇거리며 그 말을 하던 윤이의 얼굴은 꿈속처럼 모호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민은 한동한 침댜에 걸터앉아 있었다. 알람은 10분 후에 울릴 것이었다. 아무리 생생한 꿈이라고 하더라도 꿈은 깨고 나면 유리창에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녹아 흘러내렸다. p70, 꿈결 <애쓰지 않아도>
최은영 작가 <밝은 밤>과 정세랑 작가 <시선속으로>를 함께 보면 좀 더 비교가 되는 것 같아요. 둘다 할머니에서 엄마에서 딸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의미를 두는 시대는 다르지만 어쨌든 일제시대에 태어나 조국 근대화 시대를 거친 우리 엄마 할머니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같아요. 여성 작가가 이렇게 백 년에 걸친 여성의 삶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건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젊은 작가 소설이 대개 자기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배경도 그저 집과 회사, 카페와 술집을 전전하는...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모를 작품을 많이 쓰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일 수 있겠어요.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 읽고 있습니다. ^^ 책 펴는 일이 어렵지, 펴면 속도감 있게 읽히네요. 저는 저주 토끼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토끼들이 문서를 갉아먹어 사라지는 것이었어요. 경쟁사의 남자 삼대가 죽는 것은 업보려니 하는데, 바이러스처럼 옮겨가고 퍼지는 문서 파쇄 현상은... 무서워요.
저주토끼. 단편 하나하나가 속도감있게 잘 읽히면서도 다양한 상징과 해석의 여지를 주어서 좋았어요.
“중요한 것들은 배울 수가 없나봐. 미리 대비할 수가 없나봐, 송문.” 유리가 말했다. 그들은 광장 한쪽에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고양이 두 마리를 바라봤다. 송문은 생각했다. 동물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사는데도 저렇게 아름답구나.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하구나. p91,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애쓰지 않아도>
어제 오늘 행사와 손님맞이로 책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네요. 다들 읽고 계시는 거죠? ㅎ
그러나 어른들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어른들이 조심하라고 하는 사람은 조심하고 봐야 했다. (중략) 나는 그 아파트에서 그 이후로도 10년을 더 살았다. 민성이 아주머니네가 언제 그곳을 떠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아파트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나를 보며 애써 웃어주는 민성이 아주머니를 멀뚱히 바라보며 지나갈 때, 나는 힘이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까지 했다. p143, 호시절 <애쓰지 않아도>
길게 쓰면 업로드가 어렵네요 ㅎㅎㅎ 주인공이 1988년부터 10년간 살았던 아파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부모님이 호시절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절은 마치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풍경같은 곳인데요. 주인공도 그 시절이 따스했지만 동시에 한켠이 걸리는 불쾌감과 불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성이 아주머니네가 이사를 오면서 아파트 주민들은 은근히 그 가족들을 무시합니다. 특히 주인공 집안과 제일 친한 서경이 언니네는 대놓고 무시를 하는데요. 그 이유는 민성이 아줌마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실때문입니다. 또 서경이 언니 부모님은 고기에 체질적, 심리적 거부감이 있는 주인공에게 고기 먹기를 강요합니다. 주인공은 그 시절을 영국남자와 결혼해 그곳에 살면서 다시 환기하게 되는데요. 그 이유가 같은 아파트에 한 집안이 그녀를 노골적으로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이 파트를 읽으면서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 날 담임선생님이 저희에게 한 말이 “우리 동네랑 강원도는 인제 망했으니 이민갈 준비 하자” 그때로부터 근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편견의 단어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고양이를 사랑하면 할수록, 윤주는 어쩐지 인간에게 다 거리감을 느끼게 됐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아니, 그럴 수 있는 동물이다. 배신할 수 있는 동물. 자신의 배신이 온전히 약한 생명에게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 있는 동물. p170, 임보 일기 <애쓰지 않아도> 부모는 꾸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유난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꾸꾸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농담거리로 삼았다. 닭에게 이름을 붙이고 항상 쓰다듬어줬다고,그런 이유로 이제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웃긴 것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에 상처를 받느니 꾸꾸에 대한 이야기를 비밀에 부치는 편이 나으리라고 판단했다. (중략) 말의 목을 껴안고 용서를 빌었던 니체와 대규모로 동물을 사육하고 살처분하는 인간들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자녀들일까. p184, 189 안녕, 꾸꾸 <애쓰지 않아도>
저도 전라도 차별 이야기 공감하며 읽었어요. 부모님이 경상도인데 아버지는 별 말씀 없으셨는데 엄마가 늘 전라도 사람을 싫어하셨어요. 어릴 땐 별 생각없이 그런가보다 하다가 철들고 그게 차별과 편견의 언어라는 걸 알고 엄마에게 여러 번 화를 냈지요. 그래도 평생 그 생각을 지우지 않고 사셨던 거 같아요.
확증편향이 참 무서워요. 본인이 생각하는 그런 전라도 아닌 좋은 사람 만나면 그런가보다 하고, 맘에 맞지 않는 사람 만나면 신념이 굳어지죠. 저도 여러가지로 제 안의 확증편향을 없애고 유연한 사람이 되려하지만 그거야말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확증편향. 배웠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게 많은데 무의식으로 판단할 때마다 제 자신에게 놀라고 실망합니다. 늘 깨어있기란 어려운 거 같아요.
한겨레에 실린 “저주토끼” 정보라 작가 인터뷰 읽어보세요. 흥미롭게 읽었어요. “제가 옛날얘기를 좋아해 그 문체도 좋아하는데요.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면서 아예 수다 떠는 문체가 이론으로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스카즈’(skaz)기법인데, 1인칭으로 말하지만 주인공은 3인칭이어야 돼요. ‘우리 언니 친구가 얘기를 해줬는데 그 친구가…’ 이런 식으로, 그리고 화자의 논평이나 추임새가 들어가요. 한국 판소리 문체에서도 보듯 구비문학은 넉살 좋은 태도가 가능하죠. 기나긴 만연체는 일부러 그 문장 속에 독자를 익사시키려고 씁니다.”
왜 저주토끼를 읽으라고 했는지, 한겨레에 실린 인터뷰에 저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어요. 조선시대에 전기수가 책을 읽어주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런 책을 이제야 읽다니 반성도 되면서, 지난번 남기신 이야기처럼 내가 모르는 이런 책들이 진짜 많겠구나 동감했습니다. 몇년 전 레이 브래드버리 작가의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읽고 느낀 감탄이 <저주토끼>에도 그대로 이어졌어요. 마지막 문단을 몇번이나 소리내어 읽으면서 ‘우와’, ‘우와’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
아프지 않았을 때의 어머니는 미리에 대한 적의를 헤련되게 가공하여 보여줬다. (중략) 하지만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잃어버리고, 의식을 놓아버리자 어머니는 더는 그 감정을 미리에게 숨기지 않알 수 있었다. 미리에 대한 어머니의 염오는 그토록 순수한 것이었다. 그 모습이 미리의 눈에는 차라리 자유로워 보였다. p216
미리는 아머니의 말투, 표정, 몸짓에서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그 당연한 진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주인의 식탁 밑에서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개처럼 노력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작은 증거라도 찾으면 그 자그마한 것을 잡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라도 그런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고 싶었다. (중략)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그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p220
미리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 건 어머니의 자유의지였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미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미리는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때로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삶은 선택할 수 없었다. p227
최은영 <애쓰지 않아도> 를 다 끝냈습니다. 마지막 챕터인 ‘무급휴가’를 읽으면서 초반에 많이들 이야기하신 어금니깨물기와 시즈코상이 생각났어요. <애쓰지 않아도>를 쭉 읽으면서 나랑 작가랑 안맞나 이런 생각도 들었는데, 마지막 챕터를 읽고나니 작가가 계속 궁금해지네요. 올려주신 인터뷰도 재미있어서 (사실 무서울거 같아서 안읽어야지 했는데) 저주토끼와 함께 최은영 작가의 단편이나 장편을 찾아 읽어보려 합니다.
이바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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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그믐, 지금
딱히 이번이라고 뭔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근거는 없었다.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어느 여성도 셰익스피어의 비범한 재능을 갖지 못했을 거예요.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겨울에는 러시아 문학이 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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