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전쟁』 혼자 읽기

D-29
[ 보통 농민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된 무기는 비협조였다. 일하는 속도를 늦추거나 심지어 일을 완전히 중단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실속 있게 또 종종 기민하게 전달했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갈릴리에서 예수 주위에 모여든 군중은 굶주리고 괴롭고 병들어 있었다. 예수가 든 비유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과 매우 가난한 사람들로 나뉜 사회를 본다. 대출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큰 빚을 진 농민, 재산을 빼앗겨 일용 노동자로 일해야 하는 사람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이곳 주민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한 가지 증거는 악마의 탓으로 돌리던 신경증적이고 심리적인 증상에 시달리다 치료를 받기 위해 예수에게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이런 병을 ‘몰아내는’ 기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악마를 몰아낼 때 우주적 차원에서 하느님이 사탄에게 거둔 승리를 모방하고 있다.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제자들이 치유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자 그렇게 말했다. 이른바 귀신 들림은 종종 경제적, 성적, 식민지적 억압과 연결되며, 이때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이질적인 힘에 장악된 것으로 느낀다. 한 상징적인 사건에서 예수가 귀신들린 남자에게서 악마의 무리를 몰아내자 이 사탄 세력은 예수에게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말하며 점령의 가장 노골적인 상징인 로마 군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자 예수는 식민지의 많은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한다. ‘군대’를 몰아내 가장 오염된 동물인 돼지 떼에 집어넣은 것인데, 돼지 떼는 몰려가 바다로 곤두박질쳤다. 지배 계급은 예수의 악마 추방을 정치적 도발로 본 듯하다. 이것이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는 이유가 된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폭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평가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가 군사 봉기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나 공격적으로 복수하는 것을 금했다. 예수는 체포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대사제가 보낸 종의 귀를 자른 제자를 책망했다. 그러나 입으로는 심한 말도 했고 부자들에게 호통도 쳤다. 가신 노릇을 하는 ‘서기와 바리새인’을 잔인하게 꾸짖었다. 제자들을 거부하는 마을에는 하느님의 복수를 요청했다. 앞서 보았듯이 팔레스티나의 유대 농민은 제국주의 통치에 비폭력적으로 대항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예수는 유대인 지배 계급이든 로마인 지배 계급이든 — 그는 둘을 구분하지 않았다. — 지배 계급과 맞서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든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질” 준비를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예수는 갈릴리의 유다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개입할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했을 때 하느님이 이미 더 정의로운 세계 질서를 창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종교를 세속 생활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현대적인 ‘종교’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권위적 경전도, 강제적 믿음도, 구분된 성직자도, 의무적인 윤리 규칙도 없었다. 신과 인간을 나누는 존재론적 간극도 없었다. 모든 인간은 신성한 누멘(‘신의 힘’)이나 게니우스(‘수호신’)를 지녔고, 신들은 자주 인간의 형태를 취했다. 신들은 시민체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리스-로마 도시는 기본적으로 종교 공동체였다. 각 도시에는 그 나름의 신성한 후원자가 있었고, 시민의 자부심, 경제적 이해관계, 신앙이 우리의 세속화된 세계에서는 이상해 보일 만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었다. 도시의 신들을 기리는 종교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도시 생활에서 필수적이었다. 공휴일이나 주말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루페르칼리아 축제와 아테네의 판아테나이아 축제는 긴장을 풀고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이런 의식들은 로마인이나 아테네인이 되는 것의 의미를 규정하고, 도시를 과시하고, 시민 생활에 초월적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를 가장 좋은 모습으로 드러내고, 시민에게 시민 가족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심어주었다. 이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신에게 헌신하는 어떤 행동 못지않게 중요했다. 따라서 한 도시에 속한다는 것은 그 신들을 섬긴다는 뜻이었다. 물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도 얼마든지 받아들여졌지만.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로마 제국에서 유대교는 위대한 고대 전통으로 존중받았고 유대인이 공적인 신앙을 피하는 것도 받아들여졌다. 이 시점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직 구분된 전통이 아니었다. 바울의 이방인 개종자들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한 부분으로 보았다. 그러나 혼잡한 그리스-로마 도시에서 기독교인은 종종 현지 회당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그들이 자랑스럽게 ‘새로운 이스라엘’에 속한다고 주장하자 마치 그 모체가 된 신앙에 불경하게 구는 것처럼 보였다. 로마인은 이런 태도를 개탄했다. 바울의 편지들은 차이와 새로움이 위험할 수도 있는 사회에서 개종자들이 두드러지게 될까 걱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개종자들에게 관습적인 복장 규정을 준수하고, 로마 시민에게 기대되는 예의와 자제를 보여주고, 지나치게 환희를 드러내며 신앙을 과시하지 말라고 다그쳤다. 바울은 로마 당국에 도전하는 대신 복종과 존중을 설교했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공자와 붓다의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도 전사 귀족의 공격적인 자기주장에 맞서는 존중과 ‘이타’라는 이상을 계발하고 있었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그러나 긴밀하고 고립된 공동체에는 타인을 배척하는 배타성이 생길 수 있다. 소아시아에서 사도 요한의 전도 활동으로부터 파생한 수많은 유대인-기독교인 모임은 예수에 대하여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되었다. 바울과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신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개종 전에 특별히 격식을 차리는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그런 생각만으로도 경악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관습적인 유대교의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특별한 과제를 위임받은 보통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예수의 지위가 높아졌어도 바울에게는 늘 예수 키리오스 크리스토스와 그의 아버지 하느님 사이에는 늘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그러나 네 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를 우주적 존재, 태초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존재한, 하느님의 영원한 ‘말’(로고스)로 묘사했다. 이런 높은 지위의 그리스도론 때문에 이 회중은 다른 유대교-기독교 공동체들로부터 멀어진 듯하다. 이들의 글은 외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은밀한 상징으로 ‘집단 내부’를 위해 쓰였다. 네 번째 복음서에서 예수는 수수께끼 같은 말로 청중을 당황하게 만드는 일이 많다. 이들 이른바 ‘요한파’ 기독교인에게는 나라가 임하도록 일하는 것보다 예수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지니는 것이 더 중요하게 보였다. 그들에게도 사랑의 윤리가 있었지만 그것은 충성스러운 구성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등을 돌리고, 이탈자를 ‘그리스도의 적’, ‘악마의 자식’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냉대를 당하고 오해받으면서 빛과 어둠, 선과 악, 삶과 죽음으로 양극화된 이원적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가장 극단적인 경전이 〈요한계시록〉인데, 이것은 아마 팔레스티나의 유대인이 로마 제국과 필사적인 전쟁을 하던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중동에서는 성전의 상징적 무게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 상실로 민족 전통은 큰 위기에 처했다. 유대교는 바리새인의 지도자 요하난 벤 자카이가 이끄는 학자 집단 덕분에 살아남았는데, 그는 성전 예배에 기초한 신앙을 책의 종교로 바꾸어놓았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그러나 많은 난관을 거치면서도 기독교 또한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제국 내에 다른 새로운 종교 운동들이 발흥하면서 기독교가 덜 괴상해 보였다는 주장도 있다. 사람들은 이제 거룩한 장소보다는 ‘하느님의 친구’인 인간에게서 신성함을 찾았으며, 교회와 다르지 않은 비밀 결사가 제국 전체에 버섯처럼 퍼져 갔다. 이런 종교 다수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동방에 기원을 두었으며, 이들 또한 특별한 입문식을 요구하고 새로운 계시를 제공하고 삶의 전환을 강요했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기독교는 또 바울처럼 상인과 장인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팍스 로마나를 활용하여 고향을 떠나 여행을 하고 다른 곳에 정착한 자들이었다. 이런 많은 사람이 자신의 뿌리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새로운 사상에 문을 열었다. 기독교의 평등주의 윤리는 하층 계급과 노예에게 인기가 있었다. 여자들 또한 교회를 매력적으로 여겼다. 기독교 경전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려 깊게 대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이나 에피쿠로스 철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내적 평정을 약속했지만 그 삶의 방식은 귀족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나 문맹자도 따를 수 있었다. 교회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플라톤주의자 오리게네스(185~254) 같은 일부 매우 지적인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갔는데, 오리게네스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만한 방식으로 이 신앙을 해석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교회는 의미 있는 조직이 되었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바울의 편지들은 그와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상당한 긴장이 있었고, 그의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 공관 복음 저자들은 자기 나름으로 예수에 대한 견해를 밝혔지만 요한주의자들은 이번에도 달랐다. 다른 복음서도 여럿 돌아다녔다. 기독교인이 마침내 경전의 정전을 확립했을 때 —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의 일이다. — 거기에는 이런 다양한 비전들이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그러나 불행히도 기독교는 지적 순응에 대한 독특한 갈망을 키워 나가는데, 이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음이 증명될 뿐더러 다른 신앙 전통과 분리되는 요인이 된다. 반면 랍비들은 절대 하나의 중앙 권위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랍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느님도 다른 유대인에게 무슨 생각을 하라고 명령할 수 없었다. 붓다는 종교적 권위라는 관념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단일한 신앙 규범과 구조화된 위계라는 관념은 인도의 다종다양한 전통에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중국인은 모든 위대한 스승에게서 — 그들 사이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 장점을 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은 발레리아누스의 죽음 이후 평화로운 40년 동안 교회를 당국에 점점 위협적인 존재로 만들게 된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순교는 늘 소수의 항의가 되지만, 순교자들의 폭력적 죽음은 국가의 구조적 폭력과 잔혹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순교는 늘 종교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었으며, 이것은 나중에도 마찬가지다. 제국의 적으로 겨냥당하고 당국과 완전히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기독교인들의 죽음은 다른 종류의 충성을 도전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로마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고귀함을 얻었으며, 순교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억압자의 문간에 갖다놓음으로써 효과적으로 억압자를 악마로 만들었다. 동시에 이 기독교인들은 원한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들의 신앙에 새롭게 공격적인 날을 세우게 된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예수처럼 자신들이 계속되는 종말론적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검투사처럼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울 때 그들은 (제국주의 권력으로 체현된) 악마의 권세와 싸우고 있었고 예수의 승리의 재림을 촉진하고 있었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자발적으로 당국에 출두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혁명적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국이 자신을 죽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른바 팍스 로마나의 내재적 폭력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드러냈고, 자신들의 고통이 그 종말을 앞당길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 〈5장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의 예수〉
[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의 본성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성경 텍스트를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하느님은 완벽한 순종과 겸손에 대한 보답으로 인간 예수에게 신성을 부여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때에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정통적 입장이 없었고, 많은 주교가 아리우스의 신학을 아주 편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교도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을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실재로서 경험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인간 남녀가 완전한 신이 되곤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당대의 주요한 기독교 지식인이었던 에우세비오스는 회중에게 하느님은 전에도 인간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있다고 가르쳤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는데,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세 나그네를 영접하면서 야훼가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모세와 여호수아도 비슷하게 신의 현현을 경험했다. 에우세비오스가 보기에는 하느님의 말씀, 즉 로고스 — 인간 안의 신성한 요소 — 가 그저 한 번 더 지상으로 돌아온 것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형태로. ] 〈6장 비잔티움, 제국의 무기가 된 신앙〉
[ 무함마드의 삶에 대한 우리의 주요 출처는 쿠란인데, ‘예언자’의 23년 포교 기간 동안 그에게 온 계시를 모은 것이다. 공식 텍스트는 무함마드 사후 20년쯤 뒤 3대 칼리파인 우스만의 지휘에 따라 표준화되었다. 하지만 쿠란은 원래 구전되고 암송되고 외우던 것이었다. 그 결과 ‘예언자’가 살아 있는 동안, 또 사후에도 텍스트는 유동적이었으며, 사람들은 자신이 들은 각기 다른 부분을 기억하고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쿠란은 일관된 계시가 아니다. 계시는 특정 사건에 대응하여 무함마드에게 하나씩 찾아왔기 때문에 여느 경전이나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모순이 있다. 특히 전쟁과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지하드(‘투쟁’)는 쿠란의 주요 주제로 꼽히지는 않는다. 사실 이 말과 그 파생어들은 겨우 41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그 가운데 10개만이 분명하게 전쟁을 가리킨다. 이슬람의 ‘내어줌’은 우리의 내재적 이기심에 맞선 끊임없는 지하드를 요구한다. 이것은 때로는 ‘싸움’을 포함하지만 시련을 용감하게 견디고 곤경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 또한 지하드로 묘사된다. ] 〈7장 이슬람의 딜레마, 정복과 공동체의 꿈〉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물리치려다 실패한 일은 쓰디쓴 타격이었다. ‘예언자’의 사위 우스만이 3대 칼리파(644~656년 재위)가 되었을 무렵 무슬림 군대는 폭동을 일으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제는 거리가 워낙 멀어졌기 때문에 원정은 진이 빠지는 일이었으며 약탈물도 줄어들었다. 병사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늘 낯선 환경에 살면서 안정된 가정 생활은 전혀 누리지 못했다. 이런 불안이 하디스 문헌에 반영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지하드라는 고전적 교리가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 〈7장 이슬람의 딜레마, 정복과 공동체의 꿈〉
[ 많은 하디스가 전쟁을 신이 신앙을 퍼뜨리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나는 인류 전체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예언자’는 말한다. “나는 민족들이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증언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국 건설은 병사들이 스스로 인류에게 혜택을 준다고 믿을 때 가장 빠른 진척을 보이며, 자신이 신의 사명을 받았다는 확신은 처지는 사기를 북돋운다. 또 ‘집에 머무는 느림보’에 대한 경멸도 있다. 병사들은 아마 정복의 혜택은 누리면서도 곤경은 나누려 하지 않는 무슬림에게 분개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하디스에서 무함마드는 정착 생활을 비난한다. “나는 상인과 농부가 아니라 자비와 투사로 보내심을 받았다. 이 움마에서 가장 나쁜 사람들은 ‘종교’(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인과 농부이다.” ] 〈7장 이슬람의 딜레마, 정복과 공동체의 꿈〉
[ 다른 하디스는 매일 죽음과 함께 살아가며 “집은 지었으나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여자와 결혼은 했으나 성교는 하지 못하는” 전사의 고난을 강조한다. 이 전사들은 가난한 자를 돌본다든가 하는 다른 형태의 지하드는 무시하기 시작했으며,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지하드를 수행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어떤 하디스는 싸움이 ‘여섯 번째 기둥’, 즉 ‘신앙 고백’(샤하다), 적선, 기도, 라마단 금식, 하지와 더불어 이슬람의 ‘핵심적 관행’이라고 주장한다. 일부는 전쟁을 하는 것이 카바 옆에서 밤새 기도하거나 여러 날 금식하는 것보다 훨씬 귀중하다고 말한다. 하디스는 쿠란에서는 한 번도 부여한 적이 없는 영적 차원을 싸움에 부여한다. 병사의 의도가 매우 강조된다. 그는 신을 위해 싸우는가, 아니면 단지 명성과 영광을 위해 싸우는가? ‘예언자’에 따르면 “이슬람의 수도원 생활은 지하드다.” 군대 생활이라는 소명은 병사들을 민간인과 격리했다. 기독교 수사들이 평신도와 구분되어 살았듯이, 무슬림 전사들이 부인과 떨어져 살면서 금식과 기도를 열심히 하는 요새 도시는 그들의 수도원이었다. ] 〈7장 이슬람의 딜레마, 정복과 공동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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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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