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의 인생책> 임정균 평론가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함께 읽기

D-29
이야기를 하다보니 다소 모호해 보였던 에리카의 상징성이 더 뚜렷해지는 듯하네요. 조금 정리해보자면 단순히 에리카를 미국적 상징으로만 볼 때 제3세계 출신의 찬게즈에게 에리카는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적 존재이지요. 에리카와의 사랑은 현재 살아있는 미국적인 것,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국가, 부와 계급에 대한 찬게즈의 욕망이며, 에리카와의 결혼을 꿈꾸는 것은 그 욕망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에리카는 이미 죽어버린 크리스로 상징되는 죽어버린 미국적인 것, 동물화되기 이전의 인간적인 것, 미국적인 것의 ‘노스탤지어’를 잊지 못하고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하지요. 그런데 찬게즈가 겪는 정체성 혼란의 과정에 개입하는 에리카의 기시감에 주목해보면 작가가 에리카를 통해 이야기하려던 것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이해해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는 이 인물을 둘러싼 찬게즈와 크리스의 관계에서 1989년 한국에 소개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떠올랐어요. 우리에겐 '상실의 시대'로 더 유명하죠. 기즈키의 죽음으로 상처를 입은 나오코라는 인물의 상황은 에리카와 거의 유사한 상황에 있는 듯 보이며, 나오코를 향한 와타나베의 사랑과 에리카를 향한 찬게즈의 사랑도 거의 유사한 정념이 흐릅니다. 특히 에리카의 실종 이후 “그녀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자, 나는 상실이라는 잔잔한 흐름에 휩쓸려 버렸어요.”(159쪽)라는 찬게즈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와타나베의 고백과 대응하는 듯해요.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받아들였다. 아니면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 386~387쪽.) 죽음의 상실감은 우리 인간의 삶에 늘 내재한 것이며, 그 상실감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로부터 배우는 모든 것들이 앞으로 닥쳐올 또 다른 예기치 못한 상실에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상실감’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퉁쳐버릴 수 없는, 특수한 한 개인의 상실이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크리스의 죽음, 기즈키의 죽음, 나오코와 에리카의 죽음은 단순히 죽음과 상실, 그로 인한 슬픔으로 환원되지 않는 각각의 고유한 슬픔으로 존재하고, 또 그 슬픔은 그러한 대상을 상실한 남은 사람 고유의 슬픔으로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여러 죽음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건 결코 단련되지 않는 슬픔입니다. 앞서 경험한 상실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후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할 때의 슬픔을 반감시켜 주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전쟁, 재난, 그리고 테러로 누군가를 잃은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무수한 피해자를 낸 여러 사건들은 실제로 피해자의 수만큼의 상실로 결코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측량이 불가능한 슬픔과 상실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임 초반 제가 이 소설이 형식적 측면에서 테러 피해자의 슬픔과는 다른 관점에서 쓰였다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실은 911테러를 다룬 어느 소설보다도 그 같은 사건의 상실감과 슬픔에 대해 매우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평론가님이 노르웨이의 숲 얘기를 하시니 딱 그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 그리고 9.11 테러에 대한 상실감과 슬픔을 에리카를 통해 표현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9.11 테러의 상징성까지 접근하지 못한 저의 해석 능력 부족을 느꼈습니다. 사실 소설을 읽을 때 너무 제 기준에서 읽는 버릇을 버리고 싶고, 자꾸 제 감정선에 치우쳐져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버릇을 고치고도 싶은데, 이번에도 평론가님 글을 보면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에리카가 찬게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고요. ‘그렇게/충분히/모든 것을 극복할 만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어요. ^^ 제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 소설의 주제인 근본주의와 관련해서 소설의 범위를 조금 초과하여 이야길 나눠볼까합니다. 지난번에도 조금 이야길 했듯 본질은 철학의 오랜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선 본질 혹은 실체(substance)에 관한 가장 오래된 논의는 플라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헬라스어로 본질(ousia)은 일차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있는 것’, 즉 ‘자산(property)’을 뜻합니다.(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역주, 서광사, 295쪽 81번 각주 참고.) 그것이 어떤 존재가 그 존재이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서 ‘본질’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인데, 이런 점에서 본질과 근본은 그 의미상 그리 동떨어진 개념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근본, 본질 같은 개념을 끌어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요. 플라톤에게 본질은 형상(eidos)과 이데아(idea)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요. 이를 위해 플라톤은 『국가』에서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이데아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물 또는 존재의 ‘본모습’ 혹은 ‘참모습’으로 지성에 의해서나 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같은 책, 294쪽 80번 각주 참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형상(eidos)과 질료(hylē)로 구분하였고, 이로써 철학적 의미의 존재 혹은 실체라는 것의 개념은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종합이라는 이원론의 토대가 마련되죠. 철학의 테마가 인간 존재로 넘어온 근대철학에서도 이러한 이원론은 계속되는데, 인간 존재란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이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의 기저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부터 칸트의 오성과 이성의 발견,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물질적인 것(육체)에 대한 평가절하와 관념적인 것(정신)에 대한 평가절상이 항상 뒤따릅니다. 이 같은 관념론(idealism)의 오랜 전통이 의문시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였고, 주지하다시피 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의해서였죠. 마르크스 역시 존재 혹은 실체라는 것을 이원적으로 본 것은 다르지 않으나 그 토대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어요. 요컨대 마르크스의 하부구조 결정론은 한 사회의 법제적, 정치적, 문화적 의식 형태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의 기반 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상부구조라고 보고, 물질적인 것, 다시 말해 경제적인 생산관계의 총체를 하부구조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유물론적 관점은 인간 존재를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20세기 초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도 이러한 흐름에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유물론의 대두가 관념적인 것의 구축(驅逐)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사회적 증상을 해석하기 위한 철학적 방법론을 뜻하지, 관념적인 것에 대한 평가 절하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인간에게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 같은 관념적인 것이 인간의 구체적 삶을 구속하고 있음을 비판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것의 상대적인 평가절상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엔 자연과학의 비약적인 발전도 기여했을 겁니다. 인간이 어떤 형상이나 관념적인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각 개인의 정체성이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인간에게 어떤 형상이나 관념적인 것, 다시 말해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죠. 다만, 정체성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것, 그리고 ‘나’를 ‘나’이게끔 하는 특성 혹은 본질은 물질적인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육체에 존재하는 걸까요. 곧장 이런 의문들이 들고, 이 의문에 대한 답이 이 소설이 보다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철학적인 질문인 듯해요. 이와 관련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수수께끼의 해답이 인간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는 인간의 육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묘사하죠. 인간의 본질은 육체에 있는가.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아맞힌 건 다름 아닌 인간 오이디푸스입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다른 점은 그가 영웅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서사시가 영웅들의 모험담이라면, 희곡, 특히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반은 신인 영웅이 아니라, 고귀한 인간들의 이야기이죠.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힌 명석한 인간이었으나, 그로부터 시작된 비극적 사건들은 그를 인간적 고뇌의 순간으로 몰아붙입니다. 문학이야말로 인문학(the humanities) 그 자체임을 상기할 때, 문학의 본령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고뇌는 다름 아닌 ‘인간다움’에 대한 본질적 탐구인 셈이죠. 요컨대 인간다움은 사건(혹은 사태)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인간적 욕망과 은폐되었던 ‘진실’이 드러날 때 겪게 되는 인간의 필연적 고통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찬게즈가 비로소 어떤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 있죠. 그리고 그 순간 ‘주저하는’ 찬게즈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근본주의에 대한 민낯과 이를 욕망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동요합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오래된 서구 인간관에 대한 현대적 이야기로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프랑스에서 헤겔을 전공한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전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국가인 미국과 일본을 둘러본 이후 ‘근대’라고 하는 역사적 시대의 종언을 고하며, 그 시대상을 스노비즘으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148~151쪽 참고.) 요컨대 헤겔적 역사(여기서 역사적 의미의 근대 개념이 나옵니다) 이후의 인간은 동물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욕망과 욕구의 차이에서 비롯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욕망을 가지지만, 동물은 욕구만을 가진다는 것인데, 라캉은 욕망은 욕구(need)가 요구(demand)가 될 때의 틈에서 생겨난다고 해요. 즉, 욕구로서 필요로 하는 것을 언어화할 때에 잉여로서 생성되는 것이 욕망인데, 이 과정은 반드시 타자를 필요로 합니다. 가령 아기가 배가 고파 젖을 필요로 할 때에 울게 되는데 이것이 일종의 언어이자 요구인 셈이죠. 아기가 말을 배우면 보다 정확히 자신의 필요를 타자인 어머니에게 요구하게 되죠. 그런데 코제브가 본 미국과 일본의 소비사회는 그러한 욕망이 사라진 사회, 소비자의 욕구(need)를 사회적 소통 없이 즉각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질적 교환은 자본주의의 화폐 물신에 의해 매우 추상화된 차원에서 이루어지죠. 사회적 소통이 어떤 식으로든 불가능해진 이 사회에서 이러한 현실은 노골적인 상태로 은폐되어 있습니다. 즉, 그것은 은폐되지 않은 상태로 은폐되어 있죠. 이 방식은 지젝이 지적했듯 냉소적 주체들에 의해 가능한 것인데, 그들은 그것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역설적이게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 그 효과를 다하죠.(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61~65쪽 참고.) 이 냉소적 주체야말로, “재정(fund)에 관한 사항에만 신경을 쓰고 자산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들의 진짜 본질(substance)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언더우드샘슨의 기본 원칙과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 본질과 근본적인 것에서 그 어떤 의미론적 차이를 우리는 결코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 바로 저 문장에 그 어떤 역설적 함의를 인지하지 못하고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제기하는 진짜 근본주의가 아닐까요.
매우 어려운 말들이 많아 반의반의반도 이해를 못했지만, 평론가님과 이 책을 읽은 덕분에 슈루룩 읽지 않고, 깊게 생각하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근본주의에 대한 의미도 처음에 제가 받아 들였던 것과는 많이 달랐고, 핵심 문장도 잘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평론가님의 마지막 문장들에 공감합니다. 한달 간 감사했습니다~ ^^
분량이 짧다보니, 이야기의 주제가 소설 이외의 방향으로 나가면서 저조차도 조금 어려웠던 듯하네요... 좀 더 우리 삶과 생활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리고 @siouxsie 님이 끝까지 따라 읽어주셔서 저야말로 너무 든든했습니다. 늘 건강하셔요!
이렇게 한권을 조목조목 뜯어서 읽을 기회가 잘 없는데, 좋은 말씀 나눠 주셔서 너무나 풍성한 독서가 되었습니다. 다른 책으로 다음기회에 또 만나뵐수 있기를 희망하며, 한달동안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이렇게 한권의 소설을 자세히 살펴보기는 처음이네요. 더구나 여러 독자분들과 함께 읽으니 저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길 기대합니다. @바나나 닙도 건강하셔요!
이제 슬슬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독서를 마무리해야 할 때로군요. 지난 시간에는 에리카가 단순히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 테러, 재난 등으로 인해 피해자가 겪는 슬픔을 이야기하는 인물이 아닐까 이야기했었는데요. 오늘은 그런 맥락에서 개똥벌레에 관해 짚어보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미 개똥벌레 불빛에 관해 언급해주신 분들도 계신대요. 9·11 테러 직후 에리카와 만난 찬게즈는 유니언스퀘어를 걷다가 개똥벌레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에리카가 이렇게 말하죠. “저기 좀 봐요! 저 녀석이 건물들하고 경쟁하려고 하네요.”(145쪽) 찬게즈는 곧 개똥벌레의 불빛이 거대한 도시의 불빛에 삼켜지는 것을 보죠. 이후 찬게즈는 다시 개똥벌레를 떠올리며 이렇게 깨달아요. “나는 나 나름의 방식으로, 대륙과 문명 테두리를 넘어설 정도로 밝은 개똥벌레의 불빛을 냈던 거죠.”(159쪽) 여기서 개똥벌레의 불빛은 도시의 불빛처럼 거대한 적과 싸우는 개인을 상징하는 듯해요. 마치 찬게즈가 미국에 대항해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요. 그런데 찬게즈가 이렇게 한 이유에는 다른 것도 있어요. “나는 만약 에리카가 지켜보고 있다면(중략) 나를 알아보고 마음이 움직여 나한테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녀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자, 나는 상실이라는 잔잔한 흐름에 휩쓸려 버렸어요.”(159쪽) 저는 개똥벌레에 비유한 찬게즈의 마음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적에게 말을 거는 이 소설은 다소 거칠고 강한 어조를 띠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한 개인의 목소리가 아무리 강하고 거칠어 봤자, 한낱 개똥벌레의 불빛에 불과하죠. 그럼에도 찬게즈는 그것이 에리카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고백해요. 바로 그 고백을 통해 우리는 찬게즈가 궁극적으로 말을 거는 대상이 미국의 극우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9·11테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 소설은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이나 비판이 아니라, 테러로 인해 미국인들이 느꼈을 어떤 상실감과 슬픔에 말을 거는 일, 어쩌면 진상규명과 애도의 행위라고까지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길지 않은 소설이다 보니, 일정의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조금 떨어진 면도 없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도 이 책을 이렇게 자세히 볼 수 있어서 뜻밖의 생각을 하기도 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이미 끝인사를 남겨주신 분들도 계시지만, 그간의 소회를 남기면서 인사 나누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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