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혼자 읽기

D-29
[ 학자들이 따져본 결과 『일리아스』에서는 모두 264명이 죽는다. 그렇게까지 많은 숫자라고는 볼 수 없다. 시리아 북쪽의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일어난 한 건의 잔학행위, 아프리카 난민들이 하룻밤 사이에 지중해 한가운데에 빠져 죽은 숫자, 바그다드에서 일주일 동안 일어난 차량 폭파 테러―어떤 사건이건 사상자가 그보다는 많다. 눈먼 파멸의 여신 아테Até는 이름에 ‘잘못됨’과 ‘사악함’이라는 의미가 모두 들어 있는데, 오로지 서사시를 통해서 이 여신에게 사로잡힐 때만이 그 인물들이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파멸 앞에서 가련할 정도로 허약한 인간은 행복을 간구하는 자신의 기도가 제대로 전달되기를 애처롭게 바란다. 이것이 바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기도의 여신들이 결점투성이의 비극적인 인물들로 나오는 까닭이다.   그들은 쩔뚝거리고 멈칫거린다. 모두 얼굴이 쭈글쭈글하고 핼쑥하며, 사팔뜨기라 당신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언제나 제 임무에 충실하다. 파멸의 여신을 따라 터덕터덕 걸으면서 그녀를 노하게 만들었다가 그녀의 눈을 가렸다가 한다. 하지만 파멸의 여신은 힘이 세고 재빨라 그들 모두를 앞질러 껑충껑충 나아가며, 온 세상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면서 인간에게 비극을 가져다준다. 기도의 여신들은 그저 그녀 뒤를 쫓아다니면서 부상자들을 치유하려 애쓸 뿐. ]
[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신성한 힘을 불러올 수 있는 무엇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호메로스는 그와 다르게 보고 있다. 제우스 스스로가 이렇게 말한다. “땅 위에서 숨 쉬고 돌아다니는 것들 중에 인간보다 더 고통 받는 생물도 없느니라.” 이 신의 제왕은 ‘더 비참하다’는 뜻으로 ‘오이주로테로스oi̎zurotero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일리아스』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내내 통곡하며 탄식하는 모습을, 울부짖는 소리가 쉬지 않고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다. ]
[ 시인은 목숨이 얼마나 가련한 것인지,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헛된 짓인지를 선명하게 말해줄 비유 대상을 떠올린다. 시인의 의식 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바로 물고기다. 어쩌면 물고기가 죽은 자의 몸을 뜯어 먹는 혐오스런 생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또는 낚시 바늘이든 그물이든 창이든 일단 덫에 걸리고 나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무기력에 빠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호메로스에게는 물고기나 어부나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
[ 바다를 갈망하며 아가미를 벌렁거리는 물고기는 단지 희망이 없다는 사실에 사무치는 게 아니다. 『일리아스』에서 물고기를 잡는 행위는 호메로스의 가장 씁쓸한 농담을 자아내는 비유 대상이다. 아킬레우스의 친구이자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인물 파트로클로스에게는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오직 아킬레우스만이 그를 이해하고 아껴주는 존재였다.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그리스인들에게 크나큰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아킬레우스에게서 갑옷을 빌려, 트로이인들이 바글거리는 곳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그는 트로이인들을 들어서 해안가 모래 위로 끌어다놓은 배에다 내리꽂는다. 그의 ‘아리스테이아aristeia’가 발현되는 순간, 그가 위대해지는 순간, 그가 무섭게 변하는 순간이다. 파트로클로스는 멈출 줄 모르고 트로이인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난자하며 돌아다닌다. “파트로클로스는 내내 울면서 그들을 칼로 정신없이 베고 다녔다. ]
[ 『일리아스』에서는 무려 2,380행이 진행될 때까지 첫 싸움이 시작되지 않지만, 이후에는 피가 갈수록 흘러넘쳐서 거의 피바다가 될 정도에 이르고, 점점 더 야만적이 되어가다가 절정에 가서는 아킬레우스가 슬픔 때문에 광란에 휩싸인 폭한이 되어 트로이인들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장면에까지 도달한다. 그 정점은 헥토르의 죽음이다. 초원에서 온 장수가 마침내 도시의 장수를 만나서 살해한다. 그리스인들은 전투가 달콤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전사들은 전투를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느낄지 모르지만, 호메로스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이제 새날의 해가 경작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는 고요한 수면과 바다의 깊은 조류에서 빠져나와 하늘 위로 올라갔다. 트로이인들이 다 같이 모였다. 그들은 죽은 이들을 보고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물로 시신의 피를 깨끗이 씻어내고 따뜻한 눈물을 흘리면서 시신들을 들어 올려 마차에 실었다. 위대한 프리아모스 왕이 소리 내어 울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조용히 눈물만 흘리면서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시신들을 쌓아올렸고 시신이 다 타고 나자 그들은 신성한 일리오네Ilione(트로이의 그리스어 이름 _옮긴이)로 돌아왔다. ]
[ 리치먼드 래티모어가 “알아보기가 어렵다.”라고 번역한 그리스 원어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칼레포스chalepos(어렵다)’는 ‘정서적으로 고통스럽다’는 뜻과 ‘하기 힘들다’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슬픔에도 쓸 수 있고 걷다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울퉁불퉁한 땅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디아그노나이diagnonau(알아보다)’는 ‘구별하거나 식별하다’라는 뜻으로, 한데 뭉쳐져 있는 덩어리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꺼내는 것, 수북이 쌓여 있는 피와 흙먼지 범벅의 시신에서 신원을 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문구는 아수라장이 된 시신더미에서 죽은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보기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다른 죽음들의 더미 속에서 나 자신의 죽음을 보는 것이 극도로 참혹한 경험이라는 뜻,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다. ]
[ 호메로스가 트로이에 있는 그리스인들을 그린 초상화는 기원전 2000년 이후 수 세기간의 역사적 상황에 들어맞는다. 범선과 전차로 무장하여 새롭게 강력해진 북방의 전사들이 북서 아나톨리아에 있는 부유한 무역도시의 경계 밖에서 여자와 물건을 달라고 시끄럽게 요구하면서 빌붙어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호메로스가 그린 것은 보다 항구적인 무엇이다. 그것은 잘 정립되어 있고 방어벽도 튼튼한 어떤 사회가 그런 사회를 갈망하고 부러워하고 파괴하고 싶어 하는 외부인들로부터 공격받은 사건인 것이다. 트로이 포위 작전은 하나의 전쟁, 즉 두 나라가 맞붙어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보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게토 지역의 갱 집단이 풍요로운 도시와 맞선 일이라는 것이 사실에 훨씬 더 가깝다. 외부인들과 내부인들, 유목민과 정착민, 결핍된 사람들과 여유 있는 사람들, 분노한 사람들과 불쾌해진 사람들―요컨대 그리스 전사들의 영웅 콤플렉스는 그저 과대해석된 갱 집단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
[ 그리스인들처럼 이 갱단들도 ‘도시의 유목민’이다. 정성스레 가꾼 집에 정착해서 살지 않고, 특별한 주거지 없이 수시로 변하는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곳에 ‘머물거나’ ‘머리를 누이고 쉰다.’ 그들은 뿌리가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며 자신들의 영광을 몸으로, 외모와 장신구로, 그리고 자신의 팔에 안기고 침대에서 함께하는 여자의 성적 매력으로 과시한다. ]
[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한다. “매일 이어지는 상호 작용에서 그들이 가장 신경 쓰는 일은 강인하다는 평판을 유지하는 일이다.” 어떤 보복 행위도 적이 다시 보복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는 일종의 가속장치 같은 게 만들어진다. 어떤 모욕 또는 당신이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소한 암시만 있어도 무자비하고 강한 징벌적 성격을 띤 보복 공격이 뒤따른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이 사랑한 여종을 빼앗음으로써 공개적으로 그에게 굴욕감을 주었기 때문에 그를 못 견디게 죽이고 싶어 한다. 세인트루이스의 갱단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보복한다. ]
[ 호메로스는 보통 끔찍할 정도로 극단적인 폭력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점잖게 이야기한다. 아마 세대를 이어 내려오며 시가 진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언어적 위엄이 폭력 자체 위에 덧입혀졌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제10권보다 갱들이 쓰는 언어가 호메로스적인 실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곳은 없다. 책이 그려내고 있는 행동은 기이할 정도로 끔찍하다. 품위와 위엄의 껍질을 완전히 벗겨버린 탓이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트로이인들이 있는 쪽으로 슬그머니 들어간다. “두 마리의 사자가 컴컴한 밤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들은 학살의 아수라장 속으로, 시체들과 널브러진 전쟁도구와 시커먼 피 사이로 들어간다.” ]
[ 말은 상처를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이 영웅이 정의를 세우는 한 방식이다. 희생자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이 센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한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붙잡아서 벌을 주는 일이 범죄자에게 전능한 느낌을 준다.”라고 제이콥스와 라이트는 말한다. “동시에 그들의 객관적인 무능을 가려준다.” “순식간에 아드레날린이 밀고 올라왔어요.” 세인트루이스 갱단의 앞잡이들 가운데 하나가 폭력에서 특히 끔찍한 부분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최고였죠.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
[ 호메로스의 이 하위 텍스트에도 자기 확대, 성적 만족감, 다른 남자들의 몸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섹스와 폭력의 극장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모두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납치당한 여성 헬레네, 두 차례나 납치당한 여성 브리세이스(한 번은 아킬레우스가 몰살시킨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또 한 번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아킬레우스로부터), 그리스인들이 트로이의 남자들을 죽이고 다른 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여자들을 취할 것이라는 그칠 줄 모르는 호언장담, 구혼자들이 페넬로페에게 성적으로 구걸하는 일,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와 자고 싶어 한 구혼자들과, 그 구혼자들과 잠자리를 함께한 자신의 여자 하인들에게 가한 무자비한 응징. 이것이 호메로스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현실이며, 그것은 오늘날 갱단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
[ 법이 신통치 않을 때는 이치에 맞는 유일한 정의가 보복이고, 『일리아스』에서는 그것이 그리스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윤리다. 해변에 진을 치고 있는 그 갱단의 컴컴한 심장부는 ‘개인적인 모욕이 정체성을 공격하는 곳, 과도한 역공이 가해지는 곳, 가벼운 무시가 인격에 주된 타격을 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곳, 분쟁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는 이들에게 명예가 쌓이며 전사들이 그런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곳, 명예가 마치 진짜 자본처럼 축적되고, 누군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서 그의 콧대를 꺾어주는 일이 동료 집단 사이에서 당신의 가치가 올라가게 만드는 곳, 불관용이 존경을 받고 힘이 인정받는 곳’이다. 이 모든 문구들은 제이콥스와 라이트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살인이 난무하는 슬럼가에서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지만, 문구 하나하나가 『일리아스』의 세계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 도시 자체가 손에 잡힐 듯 떠 있다. 꿈 같은 질서의 세계와 전사가 끊임없이 시험받지 않는 곳, 그가 자기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있는 곳이. 주변화된 갱단의 일원들은 담장 밖에 갇혀서 오직 선망과 증오의 감정으로 담장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따름이다. ]
[ 전사 갱단에서 폭력은 생존과 번영을 의미한다. 폭력이 없다면 그들은 도시에, 지식인과 상류층에게 공격당해서 시들시들 꺼져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폭력은 단지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하는 것일 뿐이다. 폭력은 그들의 운명이다. 이들 갱단한테도 자기네들만의 서사시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가 어디서 무슨 이유로 살해당했는지 누구도 잊지 않는다.” 버클리 대학의 사회학자 마틴 산체스 얀코프스키는 이렇게 썼다. ]
[ 그리스인들처럼 갱단 내에도 행동 규칙이란 게 있다. 산체스 얀코프스키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서른여덟 개의 갱단 내에서는 강간이나 무기를 이용한 싸움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스군 진영 내에서도 비슷한 제재가 가해진다. 그러나 그 안에는 모든 갱단의 삶에 배어든 자연스런 배설본능이 반영되어 있다. 아킬레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아가멤논과의 연합을 거의 깰 뻔했다. 그럼에도 현대 갱단의 삶과 그들이 하는 말은 매우 거칠고―갱들은 찢어진 상처를 ‘보지’라고 부른다―그 지점에서 호메로스는 억제한다. L.A의 갱단 세계는 성과 폭력, 지배와 학대를 대놓고 연결시키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지만, 호메로스는 감추고 품위 있어 보이게 만들려 애쓴다. 시를 관통해서 잠재되어 있는 성적인 부분은 절대 표면을 뚫고 나오는 법이 없다. 호메로스는 끔찍할 정도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일 때도 있지만 결코 추해지지 않는다. 마치 시가 진화해온 세월 동안 언어가 씻기고 닦인 것만 같다. 해변에서 그리스인들이 나누는 지저분한 대화는 필로스의 방에서 듣기에 무리 없는 말로 전달되었다. 중남부 L.A.와 동부 세인트루이스의 절망적인 이들이 쓰는 말은 예의를 벗어던지고 몸과 그 아래에 놓인 고통을 노출시킴으로써 호메로스의 언어에 대한 일종의 고고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밝혀내는 것 자체를 일종의 진실로 돌아가는 일인 양 여겨서는 안 된다. 호메로스적 진실, 호메로스의 의미는 상반된 특성들을 통합하고 융합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호메로스가 습득한 지혜는 전사들의 분노를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서 이해하되, 그것을 도시의 언어로 보고 듣는 일이다. ]
[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견한 엄청난 트로이의 보물들이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당시 소련이 자기 나라로 가져다두었기 때문이다. 트로이에는 은과 금으로 된 그릇, 청동, 보석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조각한 돌도끼가 묻혀 있었는데, 모두 기원전 2400년이나 늦어도 1800년 전의 것들로 추정된다.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조롱거리가 되었는데, 잿더미 속에 여러 층으로 파묻혀 있던 도시, 즉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생각하는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시기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앞선 때의 유적인 초기 청동기시대의 트로이 2번 층이 호메로스의 트로이 왕과 관련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
[ 하지만 미케네와 마찬가지로 슐리만의 추측은 한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성문과 탑 등과 함께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는 층을 발견했고, 그것들을 ‘붉은 잿더미에 파묻힌 트로이 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조수 빌헬름 되르프펠트는 나중에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기원전 1300년경에 파괴된 트로이 6번 층이라는 의견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고, 신시내티의 고고학자 칼 블레겐은 기원전 1200년이 조금 지나서 종말을 고한 트로이 7a번 층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1988년에서 2003년 사이에 만프레트 코르프만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독일 발굴단의 대규모 발굴 작업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그것이 지금은 보편적으로 합의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영국 고고학자 도널드 이스턴이 썼듯이, 그 유적들에서 나온 ‘물리적 증거물들은 세 개의 묶음으로 서로 나뉨에도 모두 하나의 특성을 지녔으며 하나의 사건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가정되고 있다.’ 호메로스를 트로이에 있는 어떤 고고학적인 유물들과도 연계시킬 만한 근거는 없다. ]
[ 기원전 1200년경이라는 시간만이 유일한 기준이지만, 그것은 헤로도토스가 역사서를 쓰면서 추측한 시기일 뿐이다. 그런데 그의 추측과 다른 고전기 그리스인들의 추측은 사실상 근거가 거의 없는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시대에는 먼 과거의 시기를 어림짐작하는 제대로 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호메로스를 기원전 1200년경의 트로이와 연계시키는 게 그보다 1,000년 전의 트로이와 연계시키는 것보다 더 타당한 근거는 전혀 없다. 만약 유물이 판단 근거가 된다면, 보다 늦은 시기의 트로이가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트로이’라고 명명한 도시보다 근거가 더 빈약해 보인다. 미케네에서 발굴된 수갱식 분묘의 전사들이 호메로스에 나오는 영웅들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라 그 영웅들의 아들들과 손자들이라고 상상하는 게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2000년경의 트로이인들이 그리스인들이 포위 공격한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는 슐리만의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할 만한 내적 근거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 트로이의 나중 시기로 추정되는 층들에서 발굴된 것들은 슐리만이 여기서 발견한 것과 들어맞는 게 하나도 없다. 슐리만이 발굴해낸 것은 한 무더기의 금과 은으로 된 물건들로 금으로 된 팔찌 여섯 개와 머리띠 두 개, 역시 금으로 된 왕관 한 개와 바구니 모양의 귀고리, 조개 모양의 귀고리 56개, 금으로 된 구슬과 스팽글과 단추 8,750개 등이었다. 이 장신구들은 아마도 트로이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트로이에서 제련과 주물을 한 증거가 적지 않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물들은 트로이가 북쪽과 남쪽 모두와 어떤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슐리만이 발굴해낸 아름다운 바구니 모양의 금귀고리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발견된 다른 귀고리들과 똑같고, 스칸디나비아산 호박보석은 물론 청동기시대의 시칠리아 섬에 있는 카스텔루치오라는 지역에서 발견된 뼈에 돋을새김을 한 명판까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
글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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