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시무시하게 아름다운 세이렌을 만난 이후 오디세우스는 사지를 지치게 만드는 스킬라와 그녀의 친구이자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삼키는 카리브디스를 만나게 된다. 머리가 여섯 개 달린 암초 모습의 스킬라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개의 머리들로 만들어진 내장을 가졌고 사람을 집어 들어 먹는다. 카리브디스는 입이 엄청나게 크고 모든 것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바다의 지옥 같은 소용돌이 괴물로 사람을 아래로 잡아당겨 빠져죽게 만든다. 스킬라를 벗어나려 방향을 틀면 카리브디스가 그를 삼킬 것이고, 카리브디스에서 멀리 떨어져 도망가려 하면 스킬라가 그의 선원들을 집어먹을 것이다. 이쪽으로 갈 것인가, 저쪽으로 갈 것인가, 어떤 운명을 선택할 것인가? 두 괴물 모두 악몽 같은 여성적 위협이다. 위에서 집어 들고 목숨을 앗아가든지, 제 안에 빠져 죽게 하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하데스에서 오디세우스가 여성들에 대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여기서는 정반대로 바뀐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현명한 선택을 한다. 스킬라에게 당할 각오를 한 것이다. 카리브디스는 선원들과 자신을 통째로 삼킬 것이지만, 스킬라는 한두 사람을 집어먹을 것이고 배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디세우스의 장점이다. 인생에서 불가능한 선택에 직면했을 때에도, 그는 소용돌이와 바위 사이를 항해하는 용기를 발휘한다.
그런 지혜로움이 발현되는 것은 그의 내적 자아 덕분이다. 다른 영웅들과 달리 오디세우스는 한 가지 면만을 지닌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폭풍우가 몰아쳐서 만신창이가 되었고 사실 이 외부의 풍경들은 그 부서진 내면이 투영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난파하는 곳마다 거기에는 교훈이 있다. “그는 많은 곳을 가보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정신을 배웠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의 맨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귀향과 자신의 여인’을 갈망할지 모르지만 시의 핵심은 이 우발성, 즉 어떤 지배적인 영속성도 부재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
『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혼자 읽기
D-29
장맥주
장맥주
[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의 맨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귀향과 자신의 여인’을 갈망할지 모르지만 시의 핵심은 이 우발성, 즉 어떤 지배적인 영속성도 부재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오디세이아』의 훌륭한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소설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매혹적인 상상의 영역’을 최초로 그린 것이고, “그 영역에서는 아무도 진리를 소유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이해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추상적인 확실성은 적용되지 않는다. 당신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어떤 것도 틀렸을 수 있고, 선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나쁠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의 종착지인 섬, 꿈의 이타 카만 해도 그렇다. 그보다 더 진정한 곳은 없다. 오디세우스는 그곳을 집이라고, “남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한 곳”이라고 불렀지만, ―『오디세이아』의 24권 중간 지점에서―막상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장맥주
[ 이타카가 이런 모습이라는 사실은 시의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곳은 그리스 세계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북부 그리스의 한 부분으로, 그리스 세계의 심장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다. 호메로스가 가장 친숙하게 느꼈던 그리스 세계의 심장부는 에게 해 동부로, 아시아의 영향을 받아 문화적으로 한층 세련된 곳이었다. 이 과장된 주변성은 저 멀리 바깥으로 떨어져 나와 있는 변 방 소국의 해적왕 오디세우스와 꼭 어울린다. 그러나 그곳은 그가 사랑하는 나라다. 파이아케스인들이 그를 바다 건너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 고향땅에 도착했을 때 오디세우스는 잠이 들어 있었고, 그들은 잠든 그를 해안에 데려다놓았다. 다음 날 잠에서 깼을 때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타카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아테나가 언질을 주고 나서야 그는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본 뒤, ‘허리를 구부려 생명을 주는 대지 위에 입을 맞춘다.’ ]
장맥주
[ 『오디세이아』는 궁전의 안락함과 화려함이라는 심상을 수시로 등장시킴으로써 청자를 은근히 조롱해왔다. 파이아케스인들은 부유하고 성공적인 근동 지역 왕국 의 전형이다. 그들의 궁전과 정원과 과수원은 모두 아시리아의 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처럼 읽힌다.511 이집트는 그리스인들의 꿈이었던 물질적 부, 즉 황금의 보고로, 중심 무대에서 살짝 벗어나서 어른거린다. 필로스와 스파르타의 왕과 왕비는 위엄을 가지고 호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키르케조차도 아름답게 장식된 궁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런 궁전을 보지는 못한다. 그의 왕국은 혼돈 상태이며, 그가 그동안 그토록 갈망했던 아늑하고 달콤하고 평화로운 초록 오아시스가 아니다. 왕국은 그간의 시련으로 분열되어 있고―욕망과 현실 사이, 아름다운 이타카와 실제의 이타카 사이에 놓여 있는―그 긴장이 이 위대한 시를 매서운 결론을 향해 이끈다. 시는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장소와 쉽게 또는 감상적으로 재결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
장맥주
[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런 궁전을 보지는 못한다. 그의 왕국은 혼돈 상태이며, 그가 그동안 그토록 갈망했던 아늑하고 달콤하고 평화로운 초록 오아시스가 아니다. 왕국은 그간의 시련으로 분열되어 있고―욕망과 현실 사이, 아름다운 이타카와 실제의 이타카 사이에 놓여 있는―그 긴장이 이 위대한 시를 매서운 결론을 향해 이끈다. 시는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장소와 쉽게 또는 감상적으로 재결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호메로스는 말한다. “인간에게 제 고향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다.”라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타카에서 시는 정반대의 모습을 제시한다. 즉, 인간에게 자신의 고향보다 더 고통을 주는 것은 없으며, 설령 안락함에 대한 욕망이 가장 강한 곳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
장 맥주
[ 오디세우스는 계속해서 지중해 세계에서 완전히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북부의 빈곤한 떠돌이로 등장해왔다. 이제 그는 실패한 왕으로, 동지가 거의 없는 국외자의 신분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지닌 유일한 무기는 속임수와 은폐의 기술이고, 아테나는 그에게서 일말의 고결함도 남겨두지 않는다. ]
장맥주
[ 호메로스의 교훈은 폭력의 쓸모, 혹은 한 점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이고 여자들을 노예로 삼고 팔며, 도시를 정복하 여 그곳의 사람들을 절멸시키고, 정의는 개인적인 보복으로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사실, 갱들이 활보하는 지옥을 만들어내는 호메로스의 그 모든 요소들이 현대의 문명인들에게는 늘 불편하게 다가왔다. 포프는 ‘『일리아스』에서 지나치게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잔혹한 정신’에 충격을 받았고, 윌리엄 블레이크는 호메로스가 유럽을 전쟁으로 황량하게 만들었다며 그를 비난했다. 토머스 페인의 미국인 친구이자 계몽주의를 옹호했던 조엘 발로우는 어떻게 호메로스가 시인으로서 성공적으로 유럽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주된 강의 주제로 삼았다. ]
장맥주
[ 하지만 그는 군인 의 삶에 남자들이 저항하기 힘든 매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처참한 대량학살의 광경을 영광의 구름으로 잘 덮어서 장엄하게 보이도록,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그 광경이 눈부시게 빛나 보이도록 만들었다. 아킬레우스를 제 이상으로 삼아 인간괴물이 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만이 아니었다. 오로지 군대의 명성에 있어 앞선 예보다 우월하고 싶다는 욕망 하나 때문에 인구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나라가 페르시아나 이집트만도 아니었다. ]
장맥주
[ 사실 이 시들에서 가치 있고 근본적인 것은 그 반대의 것이다. 삶의 모든 측면들을 명료하고 차분하고 동정어린 시선으로, 즉 사랑을 담은 심장과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호메로스는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이 안다. 그는 트로이 해안의 그리스 전사들보다도, 그리고 트로이의 시민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가 아무리 많은 실패를 거듭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처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다. ]
장맥주
[ 호메로스는 심지어 그리스의 신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신들은 시에서 간혹 끔찍하고 신뢰할 수 없으며 무절제하고 결국은 어리석은 존재로 나타난다. 이 절대적 권위가 없는 세계의 비애와 소란 너머에 있는 이해의 저수지, 그것이 그가 지닌 가치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21세기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고 있다. 호메로스가 형 이상학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갱과 도시 모두에 마음으로부터 공감하는 다문화주의자라고, 오디세우스에게서 두 세계의 미덕을 아우를 수 있는 인간을 보는 융합주의자라고, 심지어 여성의 위엄과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그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진보적인 페미니스트라고까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호메로스는 감상적으로 바라본 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계를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묘사하는 것이 시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수전 손택은 시몬 베유의 가혹하고 극단적인 비평을 논평하며, 어째서 호메로스의 암울함이 불가피한 것인지에 대해서 고찰한 바 있다. ]
장맥주
[ 진실보다는 현실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상상력을 넓히는 일이 더 필요한 시대가 있다. 우선, 현실 세계를 합리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진실에 부합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늘 진실만을 원하는가? 우리에게는 진실 외에도 꼭 필요한 게 있다. 바로 정지의 순간이다. 진실은 균형 상태지만, 진실의 반대는 불균형 상태일지언정 거짓은 아닐지도 모른다. ]
장맥주
[ 호메로스가 잘못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다는 점이, 미덕을 향해서 제 식대로 삐뚜름하게 서 있는 특정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의 핵심이다. 그는 우리에게 한 묶음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시들은 설교가 아니다. 우리는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조차도 우리가 전형으로 삼아야 할 남자로 보기를 원치 않고, 여자일 경우엔 페넬로페나 헬레네도 마찬가지다. 청동기시대 폭력행위의 성지를 참배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
장맥주
[ 호메로스의 위대함은 감춰진 생생함을 폭로함에, 삶의 정수를 분명하게 드러냈음에 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인이 아니다. 그는 세계 속에서 반짝거리는 빛이다.
그는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권위에 굴복해야만 하는 걸까? 스스로를 낮추는 게 옳은 일일까? 자아에 몰입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일은? 폭력을 장려해야 하는 걸까? 꼭 사랑해야 하나? 호메로스는 그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현실을 극화 해서 우리에게 들려준 뿐이다. 그는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끓어오르는 활력과도 같이 생기 있고 복잡한 삶의 공기 속에서, 그리고 그가 반복해서 말하듯이 당신의 등 뒤에서 활기를 찾아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찬란한 자취 속에서 숨 쉬고 있다. ]
중간에 참여할 수 없는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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