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혼자 읽기

D-29
[ 호메로스가 트로이에 있는 그리스인들을 그린 초상화는 기원전 2000년 이후 수 세기간의 역사적 상황에 들어맞는다. 범선과 전차로 무장하여 새롭게 강력해진 북방의 전사들이 북서 아나톨리아에 있는 부유한 무역도시의 경계 밖에서 여자와 물건을 달라고 시끄럽게 요구하면서 빌붙어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호메로스가 그린 것은 보다 항구적인 무엇이다. 그것은 잘 정립되어 있고 방어벽도 튼튼한 어떤 사회가 그런 사회를 갈망하고 부러워하고 파괴하고 싶어 하는 외부인들로부터 공격받은 사건인 것이다. 트로이 포위 작전은 하나의 전쟁, 즉 두 나라가 맞붙어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보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게토 지역의 갱 집단이 풍요로운 도시와 맞선 일이라는 것이 사실에 훨씬 더 가깝다. 외부인들과 내부인들, 유목민과 정착민, 결핍된 사람들과 여유 있는 사람들, 분노한 사람들과 불쾌해진 사람들―요컨대 그리스 전사들의 영웅 콤플렉스는 그저 과대해석된 갱 집단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
[ 그리스인들처럼 이 갱단들도 ‘도시의 유목민’이다. 정성스레 가꾼 집에 정착해서 살지 않고, 특별한 주거지 없이 수시로 변하는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곳에 ‘머물거나’ ‘머리를 누이고 쉰다.’ 그들은 뿌리가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며 자신들의 영광을 몸으로, 외모와 장신구로, 그리고 자신의 팔에 안기고 침대에서 함께하는 여자의 성적 매력으로 과시한다. ]
[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한다. “매일 이어지는 상호 작용에서 그들이 가장 신경 쓰는 일은 강인하다는 평판을 유지하는 일이다.” 어떤 보복 행위도 적이 다시 보복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는 일종의 가속장치 같은 게 만들어진다. 어떤 모욕 또는 당신이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소한 암시만 있어도 무자비하고 강한 징벌적 성격을 띤 보복 공격이 뒤따른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이 사랑한 여종을 빼앗음으로써 공개적으로 그에게 굴욕감을 주었기 때문에 그를 못 견디게 죽이고 싶어 한다. 세인트루이스의 갱단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보복한다. ]
[ 호메로스는 보통 끔찍할 정도로 극단적인 폭력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점잖게 이야기한다. 아마 세대를 이어 내려오며 시가 진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언어적 위엄이 폭력 자체 위에 덧입혀졌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제10권보다 갱들이 쓰는 언어가 호메로스적인 실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곳은 없다. 책이 그려내고 있는 행동은 기이할 정도로 끔찍하다. 품위와 위엄의 껍질을 완전히 벗겨버린 탓이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트로이인들이 있는 쪽으로 슬그머니 들어간다. “두 마리의 사자가 컴컴한 밤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들은 학살의 아수라장 속으로, 시체들과 널브러진 전쟁도구와 시커먼 피 사이로 들어간다.” ]
[ 말은 상처를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이 영웅이 정의를 세우는 한 방식이다. 희생자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이 센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한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붙잡아서 벌을 주는 일이 범죄자에게 전능한 느낌을 준다.”라고 제이콥스와 라이트는 말한다. “동시에 그들의 객관적인 무능을 가려준다.” “순식간에 아드레날린이 밀고 올라왔어요.” 세인트루이스 갱단의 앞잡이들 가운데 하나가 폭력에서 특히 끔찍한 부분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최고였죠.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
[ 호메로스의 이 하위 텍스트에도 자기 확대, 성적 만족감, 다른 남자들의 몸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섹스와 폭력의 극장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모두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납치당한 여성 헬레네, 두 차례나 납치당한 여성 브리세이스(한 번은 아킬레우스가 몰살시킨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또 한 번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아킬레우스로부터), 그리스인들이 트로이의 남자들을 죽이고 다른 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여자들을 취할 것이라는 그칠 줄 모르는 호언장담, 구혼자들이 페넬로페에게 성적으로 구걸하는 일,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와 자고 싶어 한 구혼자들과, 그 구혼자들과 잠자리를 함께한 자신의 여자 하인들에게 가한 무자비한 응징. 이것이 호메로스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현실이며, 그것은 오늘날 갱단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
[ 법이 신통치 않을 때는 이치에 맞는 유일한 정의가 보복이고, 『일리아스』에서는 그것이 그리스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윤리다. 해변에 진을 치고 있는 그 갱단의 컴컴한 심장부는 ‘개인적인 모욕이 정체성을 공격하는 곳, 과도한 역공이 가해지는 곳, 가벼운 무시가 인격에 주된 타격을 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곳, 분쟁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는 이들에게 명예가 쌓이며 전사들이 그런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곳, 명예가 마치 진짜 자본처럼 축적되고, 누군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서 그의 콧대를 꺾어주는 일이 동료 집단 사이에서 당신의 가치가 올라가게 만드는 곳, 불관용이 존경을 받고 힘이 인정받는 곳’이다. 이 모든 문구들은 제이콥스와 라이트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살인이 난무하는 슬럼가에서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지만, 문구 하나하나가 『일리아스』의 세계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 도시 자체가 손에 잡힐 듯 떠 있다. 꿈 같은 질서의 세계와 전사가 끊임없이 시험받지 않는 곳, 그가 자기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있는 곳이. 주변화된 갱단의 일원들은 담장 밖에 갇혀서 오직 선망과 증오의 감정으로 담장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따름이다. ]
[ 전사 갱단에서 폭력은 생존과 번영을 의미한다. 폭력이 없다면 그들은 도시에, 지식인과 상류층에게 공격당해서 시들시들 꺼져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폭력은 단지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하는 것일 뿐이다. 폭력은 그들의 운명이다. 이들 갱단한테도 자기네들만의 서사시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가 어디서 무슨 이유로 살해당했는지 누구도 잊지 않는다.” 버클리 대학의 사회학자 마틴 산체스 얀코프스키는 이렇게 썼다. ]
[ 그리스인들처럼 갱단 내에도 행동 규칙이란 게 있다. 산체스 얀코프스키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서른여덟 개의 갱단 내에서는 강간이나 무기를 이용한 싸움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스군 진영 내에서도 비슷한 제재가 가해진다. 그러나 그 안에는 모든 갱단의 삶에 배어든 자연스런 배설본능이 반영되어 있다. 아킬레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아가멤논과의 연합을 거의 깰 뻔했다. 그럼에도 현대 갱단의 삶과 그들이 하는 말은 매우 거칠고―갱들은 찢어진 상처를 ‘보지’라고 부른다―그 지점에서 호메로스는 억제한다. L.A의 갱단 세계는 성과 폭력, 지배와 학대를 대놓고 연결시키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지만, 호메로스는 감추고 품위 있어 보이게 만들려 애쓴다. 시를 관통해서 잠재되어 있는 성적인 부분은 절대 표면을 뚫고 나오는 법이 없다. 호메로스는 끔찍할 정도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일 때도 있지만 결코 추해지지 않는다. 마치 시가 진화해온 세월 동안 언어가 씻기고 닦인 것만 같다. 해변에서 그리스인들이 나누는 지저분한 대화는 필로스의 방에서 듣기에 무리 없는 말로 전달되었다. 중남부 L.A.와 동부 세인트루이스의 절망적인 이들이 쓰는 말은 예의를 벗어던지고 몸과 그 아래에 놓인 고통을 노출시킴으로써 호메로스의 언어에 대한 일종의 고고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밝혀내는 것 자체를 일종의 진실로 돌아가는 일인 양 여겨서는 안 된다. 호메로스적 진실, 호메로스의 의미는 상반된 특성들을 통합하고 융합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호메로스가 습득한 지혜는 전사들의 분노를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서 이해하되, 그것을 도시의 언어로 보고 듣는 일이다. ]
[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견한 엄청난 트로이의 보물들이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당시 소련이 자기 나라로 가져다두었기 때문이다. 트로이에는 은과 금으로 된 그릇, 청동, 보석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조각한 돌도끼가 묻혀 있었는데, 모두 기원전 2400년이나 늦어도 1800년 전의 것들로 추정된다.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조롱거리가 되었는데, 잿더미 속에 여러 층으로 파묻혀 있던 도시, 즉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생각하는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시기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앞선 때의 유적인 초기 청동기시대의 트로이 2번 층이 호메로스의 트로이 왕과 관련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
[ 하지만 미케네와 마찬가지로 슐리만의 추측은 한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성문과 탑 등과 함께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는 층을 발견했고, 그것들을 ‘붉은 잿더미에 파묻힌 트로이 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조수 빌헬름 되르프펠트는 나중에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기원전 1300년경에 파괴된 트로이 6번 층이라는 의견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고, 신시내티의 고고학자 칼 블레겐은 기원전 1200년이 조금 지나서 종말을 고한 트로이 7a번 층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1988년에서 2003년 사이에 만프레트 코르프만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독일 발굴단의 대규모 발굴 작업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그것이 지금은 보편적으로 합의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영국 고고학자 도널드 이스턴이 썼듯이, 그 유적들에서 나온 ‘물리적 증거물들은 세 개의 묶음으로 서로 나뉨에도 모두 하나의 특성을 지녔으며 하나의 사건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가정되고 있다.’ 호메로스를 트로이에 있는 어떤 고고학적인 유물들과도 연계시킬 만한 근거는 없다. ]
[ 기원전 1200년경이라는 시간만이 유일한 기준이지만, 그것은 헤로도토스가 역사서를 쓰면서 추측한 시기일 뿐이다. 그런데 그의 추측과 다른 고전기 그리스인들의 추측은 사실상 근거가 거의 없는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시대에는 먼 과거의 시기를 어림짐작하는 제대로 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호메로스를 기원전 1200년경의 트로이와 연계시키는 게 그보다 1,000년 전의 트로이와 연계시키는 것보다 더 타당한 근거는 전혀 없다. 만약 유물이 판단 근거가 된다면, 보다 늦은 시기의 트로이가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트로이’라고 명명한 도시보다 근거가 더 빈약해 보인다. 미케네에서 발굴된 수갱식 분묘의 전사들이 호메로스에 나오는 영웅들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라 그 영웅들의 아들들과 손자들이라고 상상하는 게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2000년경의 트로이인들이 그리스인들이 포위 공격한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는 슐리만의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할 만한 내적 근거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 트로이의 나중 시기로 추정되는 층들에서 발굴된 것들은 슐리만이 여기서 발견한 것과 들어맞는 게 하나도 없다. 슐리만이 발굴해낸 것은 한 무더기의 금과 은으로 된 물건들로 금으로 된 팔찌 여섯 개와 머리띠 두 개, 역시 금으로 된 왕관 한 개와 바구니 모양의 귀고리, 조개 모양의 귀고리 56개, 금으로 된 구슬과 스팽글과 단추 8,750개 등이었다. 이 장신구들은 아마도 트로이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트로이에서 제련과 주물을 한 증거가 적지 않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물들은 트로이가 북쪽과 남쪽 모두와 어떤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슐리만이 발굴해낸 아름다운 바구니 모양의 금귀고리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발견된 다른 귀고리들과 똑같고, 스칸디나비아산 호박보석은 물론 청동기시대의 시칠리아 섬에 있는 카스텔루치오라는 지역에서 발견된 뼈에 돋을새김을 한 명판까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
[ 호메로스를 거꾸로 보는 것도 한번 시도해볼 만하다. 그리스인들이 지중해에 이르렀던 이야기를 호메로스에서처럼 그리스인들 자신이 이야기한 대로가 아니라, 글자를 사용하고 관료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지중해 연안 지역의 문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야기한 대로 들어보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에 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내용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게 없지만, 정확히 호메로스의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문화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을 다루고 있는 이집트나 히타이트나 히브리어의 기록들은 한 움큼 전해진다. 자신들이 속하지 않은 세계에 도착한 북방의 인도-유럽 전사들, 그곳에서 적절하게 처신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 즉 미개인처럼 보이는 이들에 관한 기록들이 있는 것이다. 호메로스 이야기의 좀 더 냉정한 판본들은 이상할 정도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여기서는 갑자기 그의 적들에게 목격된 건지도 모를 아킬레우스가, 그리고 똑똑하고 부유하고 자기만족적인 도시민이 묘사했을 것 같은 오디세우스가 보인다. 여기서 그리스의 영웅주의는 갱단의 무법자 행태에 다름 아닌 것으로 묘사된다. 호메로스 전사들의 아름답고 유려한 말들도 그저 잘난 척 허세를 부리는 모습으로 우스꽝스럽게만 보인다. 이렇게 새로운 관점에서는 ‘호메로스’가―시의 품격과 이해와 비극적인 아름다움이―벗겨져나간 호메로스 이야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
[ 『시누헤 이야기The Tale of Sinuhe』는 이집트의 어느 공무원이 시의 형식으로 쓴 짧은 자서전인데, 이런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것은 재생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쓰인 글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기원전 1800년경 나일 강의 서쪽 기슭에 있는 이집트 도시 테베에 살았던 한 관리의 무덤에 묻혀 있었다. 애초에 무덤에서 도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843년에 런던의 한 경매장에 나와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된 이 파피루스 조각들은 현재 대영박물관과 베를린에 나뉘어 보존되고 있다. 기원전 1000년경까지는 이집트에서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이집트 연구자들이 그 내용을 해독해내기 전까지 3,00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은 아무도 이것을 읽지 않았다. 이야기는 그리스인들이 지중해에 도래한 순간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시기에 쓰였다. 해적질을 일삼고, 폭력적이며, 조만간 몸을 원 없이 치장하고 미케네의 무덤에 충분히 나타나게 될 금에 굶주린 사람들. 이들은 그들과 완벽히 반대되는 정신적 틀을 가진 이들이었다. 고대 세계의 가장 풍요로운 문화권에서 나온 우아하고 음울한 이 운문소설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첫 버전들과 같은 시대에 창작된 작품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시에 담긴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
[ 시누헤의 이집트는 거대한 국가조직이다. 그는 신神-파라오의 편의를 돕는 거대한 용역산업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 말하자면 궁정관리―이집트에서 ‘서기’라고 부르는 사람―이자 관료였다. 아마도 그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었을 것이다. ‘필경사가 되어라.’ 동시대의 파피루스에는 젊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권유하는 말이 들어 있다.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손은 점점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당신은 하얀 옷을 입고 다닐 것이고 존경받을 것이며 궁정 조신들이 당신에게 깍듯이 인사할 것이다.’ 고통과 갈등이 존재의 중심에 있다는,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불편한 것이라는 호메로스적인 가정은 시누헤의 세계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
[ 가난한 이집트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서른다섯이면 수명을 다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수천 명이 노역장에 살면서 파라오 체제와 기념비를 남기려는 체제의 야심을 위해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일생을 땀에 절어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 위로 관료계층인 중간계층, 즉 시누헤가 속한 계급은―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인구가 1퍼센트도 안 됐을 것이다―문화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품위 있게 아마포로 만든 옷을 입었고, 호메로스 세계의 가장 깊은 수준들을 뒤덮고 있는 압도적인 위험과 파괴에 대한 느낌은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는 지속성이란 것이 존재했다. 영웅이 될 필요도 없었고, 영광을 차지하고 말겠다는 그리스인들의 갈망은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에게 선함이란 파라오의 권위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파라오의 권위와 우주의 지배력 사이에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승의 삶은 천국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대기실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용하고 변화가 없는 삶일수록 더 나은 삶이라 여겼다. ]
[ 시누헤는 자신이 매일 입고 다니는 하얀 아마옷을 사랑하고, 자신이 일하는 주거지에 있는 모든 질서를 사랑한다. 그는 오로지 독자적으로 삶을 영위해나가는 영웅이 아니다. 그에게는 개인의 정체성이나 운명에 관한 어떤 존재론적인 위기나 고민도 따라다닌 적이 없다. 시누헤는 파라오의 ‘추종자’이자 ‘진정한 친구’다. 그의 삶의 영역은 그가 봉사하는 권위자에 의해 규정된다. 그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파라오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인데, 바로 그때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한결같고 아름답게 정돈된 삶이 공포의 섬광에 파괴되고 만 것이다. 그는 궁전에서 늙은 파라오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처럼 권위주의적인 국가에서 살고 있던 그는 그 소식을 못 들었다면 좋았으리라 생각하며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그 파급효과가 미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이 책임을 추궁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로 근심에 빠진다. ]
[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이집트를 떠나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쪽으로 도망친 그는 들판 이 구석 저 구석에 숨어가며 밤에 몰래 국경을 빠져나가 마침내 어퍼 레테누Upper Retjenu라 불리는 세계의 한 귀퉁이에 도착하게 된다. 어퍼 레테누는 레바논의 이집트식 이름으로, 레바논 위쪽까지 포괄하는 지역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테누라는 말은 셈족의 언어 형식이 아니다. 근동 지역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인도유럽 계열의 언어인 그것은 아마 리키아어에서 온 말일 것이다. 아나톨리아 남서부 지역에 살았던 전사들인 리키아인들은 호메로스에게는 트로이인들의 동맹부족으로 알려진 이들이다. 말하자면 시누헤는 북쪽의 전사문화로 둘러싸인 저 멀리 광야까지 간 것이었다. 그는 호메로스가 그렸던 땅에 도착했다. 그 땅은 그에게 익숙한 그런 곳이 아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무화과와 포도가 열리고, 물보다 포도주가 더 흔하고, 꿀과 기름이 있으며, 나무에는 온갖 종류의 과실이 열리는 좋은 곳이다. 보리도 있고 에머 밀도 있고 ‘온갖 종류의 가축이 셀 수 없이 많다.’ ‘이아Iaa’라 불리는 그곳은 ‘골풀이 흔한 곳’이며, 습기가 많고 땅이 비옥하고 초지가 풍부하며 그가 태어난 이집트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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