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혼자 읽기

D-29
[ 우리는 일어섰고, 나는 옷을 입고 그는 바지를 올렸다. 칼은 여전히 손에 든 채로. 나는 웃으며 팔미라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바로 팔을 뻗으면 닿는 위치에서 그와 나란히 걸었다. 우리는 그의 자전거를 놓아둔 곳으로 갔고 그는 자전거를 세워 올렸다. 칼은 자전거 손잡이를 잡은 손에 그대로 들려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자전거가 그와 나 사이에 있게 하고 걸었고, 그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눈을 보고 웃으며 편안한 척,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그가 다시 멈추고 내게로 다가올 때를 기다렸다. 그때를 위해 분노나 공포심 같은 감정은 한 치도 없이 차분하고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걸으면서 나는 길 위에 놓인 돌을 눈으로 찾았다. 때가 왔을 때 그걸 집어 들어 그의 눈 사이로 쳐서 두개골을 으스러뜨릴 심산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나를 처음에 덮쳤던 지점을 지났다. 더 멀리 갈수록 내가 더 안전해진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야자수 수풀 끝에 다다랐고 저 멀리 탁 트인 사막이 푸르스름하게 눈에 들어왔다. ]
[ 그는 내가 갔어야 하는 길을 손가락으로 알려주고는 오른쪽 길을 향해 돌아서 자전거와 함께 그늘진 숲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마을과 호텔을 향해 사막을 가로질러 계속 걸었고, 호텔로 돌아와 샤워부스에서 내가 의식한 것보다 더 오랫동안 서 있었다. 나는 그날 밤 내가 뭔가를 이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이 더없이 범속하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죽음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보다 훨씬 덜 끔찍했고, 전부와 무無가 신비롭게 결합하는 느낌이었다. 아름답지도 쓰라리지도 않았다. 위협이 불러온 것은 극단적인 고요였고, 더없이 분명한 것은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위협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
[ 당시 나는 호메로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런 것들이 전부 호메로스적인 이해의 모든 측면들이라는 사실을. 이런 것들은 효용과 의무가 일상적인 삶의 구조의 한 부분인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시들은 궁전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값싼 전율을 느끼기 위해 만들어낸 과장된 환상이 아니다. 여기에 ‘우와!’는 없다. 호메로스가 순전히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호메로스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한 가지인 것이다. ]
[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그 북쪽의 태곳적 과거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는 다른 어딘가에서 왔다. 절반의 신성神聖을 지닌 그에게는 출신 도시가 없다. 그는 산악 지대의 켄타우로스에게서 길러졌다. 그의 고향은 호메로스에 나오는 다른 누구보다도 저 멀리 북쪽에 있고, 그의 이야기는 『일리아스』에 나오는 다른 모든 것들과 이상할 정도로 단절되어 있다. 그는 트로이를 점령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할 것이고, 아나톨리아 서쪽 지역 전역으로 약탈 원정을 떠나며, 그가 없다 해도 헬레네를 되찾아오는 일에 대한 그 모든 설명이 별 영향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
[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맞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다른 그리스인들과 동떨어져 있어서,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진실을 말한다. 그는 강렬한 사랑과 폭력성을 품고 있으며 그 두 가지가 그의 마음속에 한 덩어리로 묶여 있다. (친구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그의 가장 깊은 사랑이 (그의 적수 헥토르를 향한) 그의 가장 격렬한 폭력성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가까운 이들은 그를 무척 아끼지만,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그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멸시한다. 하지만 그의 주된 특징은 그를 둘러싼 세상이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따르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이다. ]
[ 이렇게 모든 면에서 아킬레우스는 세련된 남쪽의 힘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스스로를 그것들과 대립하는 위치에 두게 된다. 그는 아가멤논이 왕으로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보다 정교해진 정치제도와 오디세우스의 유창한 언변을 비웃는다. 그는 헥토르를 경멸하며, 다른 모든 전사들처럼 도시를 모조리 부숴버리고 싶어 한다. 호메로스는 그를 (북쪽의 위대한 전쟁의 신 아레스와 오디세우스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파괴자’라 부른다. 그래서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인들의 몸과 말을 공격할 때 호메로스의 마음에 떠오르는 심상은 개별적인 죽음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몰락이다. ]
[ “드넓은 하늘 위로 연기가 올라가고 있다. / 분노한 신들이 활활 불타도록 허락한 도시로부터.” 아킬레우스는 남쪽으로 내려오기 이전의 세계, 도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세계, 순수와 온전함을 간직하고 있는, 복잡해지기 전의 세계를 제 안에 품고 있다. ]
[ 그는 『일리아스』의 제9권에서 오디세우스에게 하는 대사에서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전세가 그리스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로부터 브리세이스를 훔친다.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여자, 그가 “내 마음과 동침하는 여인”이라 부른 여자다. 아가멤논이 그에 대한 우월함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했던 그 도둑질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전장에서 물러나 그리스인들이 죽고 다치기를 바랐고, 그들이 전쟁에서 파국적인 실패를 맛보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제 전세가 트로이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마음이 다급해진 아가멤논은 잘못을 바로잡아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를 돌려줄 뿐만 아니라 배를 한가득 채울 전리품과 보물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는 오디세우스를 전령으로 보내서 그런 제안을 전하지만 그에 대해 아킬레우스는 장엄하고 간단치 않은 자신의 신조를 개진하는 것으로 응수한다. ]
[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막사로 돌아오기 바로 전에,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전사의 영광스런 업적을, 영웅들의 과거를 노래로 불러주고 있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오자 아킬레우스는 영웅이 취해야만 하는 의례적인 행동을 한다. 손님에게 살진 양과 염소 고기, ‘기름이 많이 붙은’ 큰 돼지의 등갈비를 대접한 것이다. 모든 게 의례처럼 행해지고 예의바르게 이루어지는데, 그런 장면은 유라시아 초원에서 수천 년에 걸쳐 수천 명의 족장들의 거처에서 일어났음직한 장면이다. ]
[ 호메로스 시의 힘은 이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일리아스』의 주제는 전쟁이나 전쟁의 악함이 아니라 존재 방식에서의 위기다. 당신은 아가멤논처럼 당신의 세계를 지배하려 하는가? 오디세우스처럼 세상을 적절히 다루는가? 헥토르처럼 다른 무엇보다도 가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 때문에 당신의 의지를 꺾는가? 아니면 아킬레우스처럼 사랑의 고결함과 명예의 순수성을 죽음 앞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믿는가? 호메로스에게는 이런 질문들이 절실했다. 초원의 문화가 도시의 문턱에 도달했을 때 그런 질문들에 답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286 아킬레우스의 이야기에는 이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시가 진행되면서 그는 고난을 겪고 성장하고 슬픔에 겨워 이성을 잃고 폭력을 휘두르다가 마침내 새롭고 한층 더 깊은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초원의 세계를 의식한 이 위대한 발화를 통해서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바로 우리 문명 최초의,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이상주의였다. ]
[ 하늘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초원지대 인도유럽인들의 사고에는 수평을 이루면서도 모순되는 측면이 존재한다. 이란어에서 힌두어, 히타이트어, 그리스어와 로마어, 모든 로맨스어, 슬라브어와 독일어 계통, 아일랜드어와 다른 켈트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파생 언어에서는 정定동사(주어의 수·인칭·시제·법에 의해 한정되는 동사의 형을 가리키는 말 _옮긴이)들이 반드시 정확한 시제를 나타내게 되어 있다. 인도유럽어족에서는 어떤 것도 그것이 발생한 시간 안에 위치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중국어족 같은 다른 언어들에서는 시제가 없고 따라서 그런 구별을 지워 없애는 게 가능하다. 그것이 언제 발생했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서도 어떤 행동을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유럽어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이처럼 특수한 의식형태가 시간의 흐름을 한시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영광의 덧없음에 대한 호메로스와 아킬레우스의 고뇌, 서사시가 시간의 효과를 부정하는 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청동기시대에 수천수만 개의 봉분을 만들어서 그것이 페르시아 만 안의 섬나라 바레인에서부터 아일랜드의 클레어 주에 이르는 유라시아 풍경의 한 특징이 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생각 틀 자체가 시간의 지배를 받는 탓에 생겨났다. 인도유럽인들의 사고방식에서 가장 깊은 수준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이 모든 게 지나가버리고 만다는 인식인 것이다. 하늘은 시간 바깥에서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고,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그런 영속성을 지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양극성에 대한 생각이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호메로스의 기본 틀은 그런 인식을 둘러싼 채 만들어져 있고, 그것은 예컨대 메시아라는 생각은 절대 싹틀 수가 없는 사고체계다. 영속성과 덧없음 사이의 틈을 메워줄 것은 없다. 신들은 인간과 관계를 맺어서 아이를 낳을지 모르지만, 그 영웅적인 아들 딸들은 그저 언젠가는 죽고 마는 인간에 불과하다. ]
[ 『일리아스』에는 감추는 것도, 속임수도, 경악스런 사실 앞에 주춤거리는 것도 없다. 피를 보고 내뱉는 쓰디쓴 농담을 기록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고, 신체를 잘라내는 모습을 부드럽게 만들어 표현하지도 않으며, 찢어진 배 사이로 또 무릎과 허벅지 위로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이야기하는 데도 아무런 가식이 없다. 창에 뇌가 짓이겨져 조각조각 튕겨나가는 것도, 부상당해 죽어가는 사람이 살인자들의 발치에서 헛되이 더듬거리다가 순식간에 죽임을 당하는 모습도―‘걸머쥐다’나 ‘추수한 곡물을 줍듯이 모으다’ 같은 표현을 써서308― 잊지 않고 기록하며, 우리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에 어떤 차단막도 치지 않고, 짐짓 이것이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이 아닌 것처럼 꾸미는 완곡어법도 없으며, ‘가장 맑고 가장 아름다운 거울’을 뿌옇게 만들어줄 유약을 바르지도 않는다. 그 거대한 목마에 의해 이곳으로 불려나온 투명성 덕분에 『일리아스』의 언어는 이처럼 지금까지 쓰인 글 가운데 우리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 ]
[ 시몬 베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리아스』를 반전시反轉時로 읽었다. 그러나 시를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비판적인 의도로 지어낸 작품으로만 본다면 이 시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현실이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다툼이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한 적이 없다. 아킬레우스의 방패 위에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좋은 세계와 나쁜 세계의 심상을 멋지게 서로 대립시켜 그려놓았다. 그러나 정의롭고 좋은 세계에서조차도 살인과 폭력은 존재한다. 우리는 평화를 희망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언제나 전쟁과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일리아스』는 그런 어쩔 수 없음에 관한 시인 것이다. ]
[ 이 모든 것이 『일리아스』의 압도적인 고통에 대한 이야기 뒤에 숨어 있다. 그리스인들이 9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역사적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기간이다―이 해변에 있었다는 시인의 설정은 바로 영원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세상의 존재 방식이고, 세상은 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이다. 전쟁은 전사 중심의 사회가 숨 쉬는 공기와도 같다. 또 비극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고통은 그저 낱낱이 이야기로 전달될 수 있을 따름이라는 인식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사상자의 숫자를 세는 것으로도, 전략적으로 개요를 그리는 것으로도 결코 진실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고통과 슬픔에 아주 가까이 파고들어갈 때만 우리는 호메로스가 목표로 삼았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
[ 학자들이 따져본 결과 『일리아스』에서는 모두 264명이 죽는다. 그렇게까지 많은 숫자라고는 볼 수 없다. 시리아 북쪽의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일어난 한 건의 잔학행위, 아프리카 난민들이 하룻밤 사이에 지중해 한가운데에 빠져 죽은 숫자, 바그다드에서 일주일 동안 일어난 차량 폭파 테러―어떤 사건이건 사상자가 그보다는 많다. 눈먼 파멸의 여신 아테Até는 이름에 ‘잘못됨’과 ‘사악함’이라는 의미가 모두 들어 있는데, 오로지 서사시를 통해서 이 여신에게 사로잡힐 때만이 그 인물들이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파멸 앞에서 가련할 정도로 허약한 인간은 행복을 간구하는 자신의 기도가 제대로 전달되기를 애처롭게 바란다. 이것이 바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기도의 여신들이 결점투성이의 비극적인 인물들로 나오는 까닭이다.   그들은 쩔뚝거리고 멈칫거린다. 모두 얼굴이 쭈글쭈글하고 핼쑥하며, 사팔뜨기라 당신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언제나 제 임무에 충실하다. 파멸의 여신을 따라 터덕터덕 걸으면서 그녀를 노하게 만들었다가 그녀의 눈을 가렸다가 한다. 하지만 파멸의 여신은 힘이 세고 재빨라 그들 모두를 앞질러 껑충껑충 나아가며, 온 세상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면서 인간에게 비극을 가져다준다. 기도의 여신들은 그저 그녀 뒤를 쫓아다니면서 부상자들을 치유하려 애쓸 뿐. ]
[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신성한 힘을 불러올 수 있는 무엇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호메로스는 그와 다르게 보고 있다. 제우스 스스로가 이렇게 말한다. “땅 위에서 숨 쉬고 돌아다니는 것들 중에 인간보다 더 고통 받는 생물도 없느니라.” 이 신의 제왕은 ‘더 비참하다’는 뜻으로 ‘오이주로테로스oi̎zurotero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일리아스』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내내 통곡하며 탄식하는 모습을, 울부짖는 소리가 쉬지 않고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다. ]
[ 시인은 목숨이 얼마나 가련한 것인지,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헛된 짓인지를 선명하게 말해줄 비유 대상을 떠올린다. 시인의 의식 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바로 물고기다. 어쩌면 물고기가 죽은 자의 몸을 뜯어 먹는 혐오스런 생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또는 낚시 바늘이든 그물이든 창이든 일단 덫에 걸리고 나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무기력에 빠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호메로스에게는 물고기나 어부나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
[ 바다를 갈망하며 아가미를 벌렁거리는 물고기는 단지 희망이 없다는 사실에 사무치는 게 아니다. 『일리아스』에서 물고기를 잡는 행위는 호메로스의 가장 씁쓸한 농담을 자아내는 비유 대상이다. 아킬레우스의 친구이자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인물 파트로클로스에게는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오직 아킬레우스만이 그를 이해하고 아껴주는 존재였다.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그리스인들에게 크나큰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아킬레우스에게서 갑옷을 빌려, 트로이인들이 바글거리는 곳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그는 트로이인들을 들어서 해안가 모래 위로 끌어다놓은 배에다 내리꽂는다. 그의 ‘아리스테이아aristeia’가 발현되는 순간, 그가 위대해지는 순간, 그가 무섭게 변하는 순간이다. 파트로클로스는 멈출 줄 모르고 트로이인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난자하며 돌아다닌다. “파트로클로스는 내내 울면서 그들을 칼로 정신없이 베고 다녔다. ]
[ 『일리아스』에서는 무려 2,380행이 진행될 때까지 첫 싸움이 시작되지 않지만, 이후에는 피가 갈수록 흘러넘쳐서 거의 피바다가 될 정도에 이르고, 점점 더 야만적이 되어가다가 절정에 가서는 아킬레우스가 슬픔 때문에 광란에 휩싸인 폭한이 되어 트로이인들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장면에까지 도달한다. 그 정점은 헥토르의 죽음이다. 초원에서 온 장수가 마침내 도시의 장수를 만나서 살해한다. 그리스인들은 전투가 달콤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전사들은 전투를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느낄지 모르지만, 호메로스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이제 새날의 해가 경작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는 고요한 수면과 바다의 깊은 조류에서 빠져나와 하늘 위로 올라갔다. 트로이인들이 다 같이 모였다. 그들은 죽은 이들을 보고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물로 시신의 피를 깨끗이 씻어내고 따뜻한 눈물을 흘리면서 시신들을 들어 올려 마차에 실었다. 위대한 프리아모스 왕이 소리 내어 울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조용히 눈물만 흘리면서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시신들을 쌓아올렸고 시신이 다 타고 나자 그들은 신성한 일리오네Ilione(트로이의 그리스어 이름 _옮긴이)로 돌아왔다. ]
[ 리치먼드 래티모어가 “알아보기가 어렵다.”라고 번역한 그리스 원어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칼레포스chalepos(어렵다)’는 ‘정서적으로 고통스럽다’는 뜻과 ‘하기 힘들다’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슬픔에도 쓸 수 있고 걷다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울퉁불퉁한 땅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디아그노나이diagnonau(알아보다)’는 ‘구별하거나 식별하다’라는 뜻으로, 한데 뭉쳐져 있는 덩어리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꺼내는 것, 수북이 쌓여 있는 피와 흙먼지 범벅의 시신에서 신원을 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문구는 아수라장이 된 시신더미에서 죽은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보기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다른 죽음들의 더미 속에서 나 자신의 죽음을 보는 것이 극도로 참혹한 경험이라는 뜻,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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