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혼자 읽기

D-29
[ 제임스 노토풀로스가 크레타에서 ‘크라이피아드’를 들으며 노래를 통해서 오랜 과거의 유산이 전해진다는 생각이 붕괴되는 경험을 하던 것과 거의 동시에, 유럽의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1953년 9월에 40명의 켈트어 학자가 루이스―루이스는 스코틀랜드의 본토 북서쪽에 위치한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루이스 앤 해리스 섬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의 스토노웨이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했다. 스토노웨이에서 핵심 주제 시간은 ‘생생한 묘사가 들어 있는 민간설화에 관한 소논문’이라는 진부한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그때까지도 패리의 통설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뭔가를 듣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 던컨 맥도널드Duncan MacDonald는 안정되고 침착한 느낌을 주는 작달막한 남자였다. 사실 그의 본명은 던컨 맥도널드가 아니라, ‘던컨 맥돔날릭 돈체이딕 이에이닉 돔네일릭 타메이드(노먼의 아들인 도널드의 아들인 이에인의 아들인 던컨의 아들인 도널드의 아들인 던컨)’였다. 그들은 대대로 음유시인이었던 맥루리 가문의 후손이었는데, 맥루리 가문은 맥도널드 가문의 가장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일이 업이었다. 맥도널드 가문은 지금은 버려져 폐허가 되어버린 던툴룸성에 살았던 사람들인데, 이 성은 스카이 섬의 북쪽 끝과 맞닿은 민치 해협 해안가에 있다. 그의 아버지와 형도 이야기꾼이었고, 어머니는 유명한 가수였으며, 어머니의 남자 형제는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파이프 연주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들 중 한 명으로, 게일어(스코틀랜드의 켈트어를 가리킴 _옮긴이)를 사용했던 머나먼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켈트의 위대한 구전 이야기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들 중 한 명으로, 게일어(스코틀랜드의 켈트어를 가리킴 _옮긴이)를 사용했던 머나먼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켈트의 위대한 구전 이야기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밀먼 패리가 발칸 지역에서 가인들에 관해서 발견했던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든 이 유산에도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청중들은 던컨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민속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스토노웨이에서 그날 오후에 그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는데―제목이 ‘그런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한 시간 정도 길이였다―, 이 이야기는 필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가 이전에, 그러니까 1936년, 1944년, 1947년, 1950년에 각각 한 차례씩 네 차례나 한 적이 있었다. 이날 오후에 참석자들은 글로 옮긴 전문과 그가 1950년에 이야기했던 그대로를 영어로 번역한 책자를 받았다. ]
[ 그는 게일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한 청중의 말대로 그것은 “세련되고 균형 잡히고 우아했다. [···] 그가 암송한 모든 게 무게감 있고 충분히 생각해서 고른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점점, 이 점잖은 석공의 전통에 대한 자신감은 그가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글로 적힌 본문과 거의 한 단어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예컨대 ‘수바카스(기쁨)’를 ‘두바카스(슬픔)’로 바꾸고, 감탄사 한두 개와 동의어 몇 개가 바뀌는 등 미세한 실수가 몇 개 있긴 했지만, 이야기의 7,000개가 넘는 단어 전체가 정확하게 그가 3년 전에 했던 그대로였다. 분석 결과, 다섯 차례 모두 거의 똑같았다. 이것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그대로를 읊은 것으로, 맨 처음에 배운 이래로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똑같이 읊어왔음을 뜻한다. 그의 가족은 적어도 200년 전에 만들어진―1817년부터 확인이 가능하다―영웅 이야기를 일종의 기억 속의 가보로 머릿속에 보관해왔던 것이다. ]
[ 노래를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패리의 가설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던 세계에서 이것은 하나의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던컨 맥도널드는 호메로스를 보는 또 다른 방식을 제공했던 것이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자신의 예술 작품으로 썼던 시인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배운 것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바꾸어서 읊었던 시인으로 보는 것도 아닌, 마치 박물관 학예사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부과된 변화들에 저항하고, 세세한 것까지 옛날 그대로 보존하는 정확성을 중시하듯 정확하게 일하는 시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시인들한테 이야기란 세상과 시간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훌륭한 지혜와 소중하게 여겼던 이해를 담아 지킬 수 있는 성스러운 유물상자였다. 시는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 음악은 죽음을 거부했던 것이다. 시의 역할을 이렇게 이해하면, 호메로스의 그리스어에서 특별한 구절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바로 ‘클레오스 아프티톤kleos aphthiton’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아-프티토스a-phthitos’는 ‘바래지 않는’ ‘죽지 않는’ ‘영원한’ ‘불후의’라는 의미를, ‘클레오스kleos’는 호메로스에서 모든 중요한 말덩어리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내는 말로, ‘이야기’ ‘명성’ ‘명예’ ‘영광’이라는 뜻이다. ]
[ 그때 이후로 민족지학자들은 패리가 주장한, 공연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 구전 시인 전통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해왔다. 그 전통들은 완전히 정형화된 구절로만 된 것도 아니고, 과거의 이름이나 이야기나 단어를 정말로 정확하게 보존하는 인간의 기억력에 기대고 있었다.187 던컨 맥도널드의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들려준 15만 단어로 된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18세기의 문맹시인 던컨 밴 매킨타이어Duncan Ben Macintyre는 적어도 자기 시의 6,000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호메로스 학자 더글러스 영Douglas Young에 따르면 헤브리디스 제도에 있는 벤베쿨라 섬에 사는 80대의 작은 농장주, 앵거스 맥밀런Angus McMillan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일흔 개가 넘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각 이야기는 최소 한 시간 길이고, 어떤 것은 일고여덟 시간짜리도 있는데, 그중 하나는 58,000단어로 이루어진 것으로 거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맞먹는 길이였다. [···] (그는) 거의 한 차례도 쉬지 않고 여덟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근처 바라 섬에 사는 로더릭 맥네드Roderick MacNed라는 사람은 15년 동안 겨울마다 매일 밤, 혼자 연습해보는 일도 없이 술술 이야기를 했다는 보고가 있다. 스코틀랜드 본토 러카버에 사는 존 맥도널드John Macdonald는 600개가 넘는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각 이야기는 비교적 짧고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한 이야기꾼은 자신이 알고 있는 50만 개가 넘는 단어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
[ 이처럼 인간의 기억을 기념비의 형태로 바라보는 생각 덕분에, 마침내 호메로스의 기원을 기원전 9세기나 10세기 너머로 잡는 일이 가능해졌다. 서사시를 모든 기록수단 가운데 가장 견고하고 오래된 수단으로 본다면, 호메로스를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문자사용 이전 세기들로 확 끌어당길 수 있게 된다. ]
[ 이때, 『일리아스』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글라우코스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성찰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무 이파리에도 세대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세대라는 게 있소. 나뭇잎은 바람에 날려 땅에 흩어지지만, 나무는 새 이파리를 만들어내고, 봄은 다시 오는 법이라오. 사람도 그와 같아서 한 세대는 태어나고, 한 세대는 죽는 것이오. ]
[ 글라우코스에게는 모든 생명이 땅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땅의 충만함과 땅의 무심함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이런 확고한 단순성과 어떤 철학적 평온을 지니는 것, 그리고 트로이의 평원에 모인 전사들이 ‘봄에 나는 새싹과 꽃처럼 무수하다.’라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은191 호메로스에서 흔히 보이는 태도가 아니다. 글라우코스는 스스로를 수천 수만 개의 나뭇잎들 가운데 하나로, 일시적인 현상으로, 어떤 요령부득의 개체성으로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덧없음을 이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호메로스의 시 대부분이나 그 안의 대부분의 영웅들이 생각하는 바와 상반된 태도다. 그 영웅들에게는, 그리고 호메로스에게는 그런 덧없음이 삶에서 가장 주된 슬픔이며 가장 끈질긴 고통의 근원인 탓이다. 그것은 시 자체가 치유하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장면 한 장면, 호메로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게 다가 아니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음을 조용히 보여준다. 『일리아스』 전체는 서사시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찬가다. 세상은 망각해버리고 말지만 시는 기억한다. 바로 그런 인식이 호메로스가 자연의 본성이 지니는 역설에 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슬픈 눈으로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 까닭인 것이다. 시가 알고 있는 것만큼 아는 존재는 신뿐이다. ]
[ 인간의 기억은 기껏해야 세 세대 정도 지속되지만, 시는 하나의 기억하기라는 행위가 되어서 과거를 영원한 노래로 붙박아둔다. 아가멤논은 승리가 그에게 가져다줄 전리품을 탐하는 욕망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아직 갖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 속에 계속 남아 있게 될 그런’ 물건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가 틀렸다. 우리는 그런 약탈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우리가 아는 거라곤 시가 보존해온 게 전부기 때문이다. ]
[ 서사시는 삶과는 다르다. 비록 현재의 이 순간이 현재로부터 과거를 잘라내는 하나의 칼날이 되어 ‘그때’로부터 옮겨온 ‘지금’만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는 시간이 가한 그 상처를 동여맨다. 오디세우스가 말한 대로, 뮤즈는 시인과 이야기꾼에게 ‘자신의 방식’, 노래의 길을 마련해주어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그 길 위에서 지금의 현실과 더불어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노래를 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사시가 기원전 700년경이나 호메로스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남긴 직후보다 훨씬 이전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현실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시에 고대성의 징후와 암시가 곳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
[ 예컨대, 엠포리오와 피테쿠사이(기원전 750~550년에 번성했던 그리스 식민지로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음 _옮긴이) 시대까지 철은 농사짓는 도구를 만드는 재료였는데, 호메로스는 철을 가장 값지고 진귀한 금속으로 취급했기에 금이나 청동196, 색다른 짙은 색깔의 보석과 같은 급의 전리품으로 집으로 가져온다. 또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강철과도 같은 기질에 대해 언급하면서, 열을 가하면 신비롭게도 강렬한 붉은 불꽃이 생긴다고 말한다.197 이것은 정확히 기원전 1200년 이전의 청동기시대에 철이 차지하고 있었던 위상을 말해준다. 호메로스의 전사는 ‘은못을 박은 칼’을 들고 다니는데, 그런 칼은 기원전 16세기 미케네의 무덤에서 발견되지만 그 이후에는 거의 발굴되지 않는다. 방패는 커다란 8자 모양이거나 커다란 탑처럼 생긴 것으로 그 뒤에 사람이 성벽 뒤에 숨듯이 숨을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기원전 14세기 이후의 환경에서는 고고학자들에게 전혀 발견된 적이 없는 장비들이다. ]
[ 이런 작은 단서 덕에, 호메로스의 그리스어가 여러 면에서 선형 B 문자가 쓰이던 시기보다 이른 시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좀 더 분명해진다. 호메로스에 나오는 어떤 문구들은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호메로스 학자들은 오랫동안 당혹스러워했었다. 하지만 어떤 단어는 글자 하나가 더 들어가면 의미가 제대로 읽힌다. 예컨대 ‘digamma’ 혹은 ‘wau’는 영어로 ‘w’ 소리로 발음되는데 이것이 선형 B 문자에서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고, 호메로스 본문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본문에서는 아가멤논이 ‘아낙스 안드론anax andrōn(인간의 우두머리)’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 말이 원래는 ‘와낙스 안드론wanax andrōn’이었다고 가정하면 뜻이 통한다. 포도주wine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oinos’인데, 원래 형태는 영어에 더 친숙하게 들리는 ‘woinos’이다. 초기 형태로 썼을 때만 제대로 읽히는 이런 단어들은 아이아스가 전투에 나갈 때 가지고 갔던, 거인까지도 완전히 감싸는 방패를 묘사할 때도 쓰였다. 그런 방패는 기원전 14세기에 이미 약간 둥그스름한 방패로 대체되었지만, 이런 무기들을 묘사할 때 원래 사용되었던 단어들 가운데 일부는 서사시 안에서 살아남았다. 결국 전투 장비와 단어의 형태, 그리고 시의 형태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호메로스의 기초는 궁전시대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다시 말해 최소한 기원전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 인간의 어떤 유전자군(하플로그룹 E3bIa2)은 알바니아의 구리광산 지역이 중심지로,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발견되며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두 곳만이 예외다. 한 곳은 스페인 서북 지역에 있는 갈리시아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곳은 웨일스 서북 지역의 사람들인데, 두 곳 모두 청동기시대 초기에 주요 구리 광산지였던 곳이다. 결국, 이 유전자군은 마법 같은 금속을 채취하러 대륙을 횡단해온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살아 있는 기억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청동은 근동 지역을 바꿔놓기 시작했고, 중국과 인더스 계곡 지역과 에게 해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도시 벨트의 가장 북쪽 끝에 있었던 트로이는 북쪽으로 가는 길을 장악한 무역도시가 되었다. 글, 관료제, 상인계층과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갖춘 도시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프카스Caucasus 산맥(흑해와 카스피 해를 잇는 산맥 _옮긴이)을 넘어 직물을 팔고 그 대가로 갈수록 많아지던 광산에서 채굴된 구리를 얻었다. ]
[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뻗은 도시들 가운데 오디세우스가 가본 트로이와 아름다운 도시들은 막 탄생된 도시문명의 상징이자 전형이었다. 같은 시기에, 하지만 훨씬 더 북쪽에서도 그 새로운 금속이 인간 역사에 비슷하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다른 비도시 지역에서도 청동기를 기반으로 한 문화가 출현한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군사적, 심리적 변화가 모두 한꺼번에 카스피 해 근방의 초원지대에서 발칸 지역을 지나 북유럽으로까지 광범위하게 뻗어나갔다. 이런 변화는 아킬레우스가 그 상징이 된 문명을 창조했다. 그것은 도시 세계가 아니라 전사 특권층과 공격적인 남성성을 중심으로 한 세계, 남성적인 신을 찬미하고 폭력이 중심이 되는 세계, 거주지나 공공건물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무기류와 속도와 폭력에 사로잡혀 있는 세계다. 이 전사 세계의 영웅들은 훨씬 남쪽에 있는 도시의 관료, 혹은 성벽 축조 기술자나 성문지기가 아니라, 그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커다란 무덤에 묻히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무덤은 가축을 없앤 목초지 한가운데에 봉분을 우뚝 쌓아올린 무덤이어야 했다. 이런 세계에서는 고기가 중요했는데, 도살하지 않은 상태로 끌고 다니는 고기용 가축은 하나의 이동식 부의 상징이자 나중에 도살해서 음식을 만들어 향연을 여는 데 필요한 물자였다. ]
[ 이 반半목가적인 경제정치 구조는 나중에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될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전사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지역에 따라 다양하고 특수한 문화가 존재했고 연대도 복잡하게 중첩되어서 시간 지체현상도 많이 보이지만, 그것은 동일한 문화적 단계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청동기시대의 족장문화라는 단일 세계는 대서양에서 아시아의 초원지대까지 유라시아 대륙 북부 전체를 가로질러 뻗어나갔다. 영웅이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한 이 세계는 지중해 동부의 발달된 문자문화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수갱식 분묘의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1700년경에 출현한 곳이 바로 이런 세계였다. 호메로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리스 영웅을 통해서 북방 전사 세계의 목소리를 전달했던 것이다. 호메로스는 북쪽 초원지대의 청동기시대 전사들이 말하고 꿈꾸고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당시 아일랜드나 독일의 숲에서 말해지고 노래로 불렸던 것의 반향은 오늘날의 민족지학자들이 수집한 이야기와 시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연결고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곳은 오직 호메로스뿐이다. 그 관계는 양방향적이다. 호메로스는 청동기시대의 유럽을 비추고, 그 시대의 유럽은 호메로스의 세계를 조명하게 해준다. ]
[ 나는 광활한 사막 끝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마스쿠스에서 이곳까지 우리가 거쳐온 길은 거칠고 황량했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별로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장화를 신은 발끝으로 길 위의 흙만 연신 차올리고 있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고, 잠시 후 나는 숙소인 제노비아 호텔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호텔은 유명한 유적지 반대쪽으로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곳은 길이 반듯하게 나 있는 현대적인 마을이었다. 나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내가 오면서 만든 발자국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길이 갈라졌고,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바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한 젊은 남자가 자전거를 끌면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보다 약간 나이는 더 들어 보이지만 키는 나보다 작고, 다소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제노비아 호텔?”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노비아 호텔?” 나는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고, 그는 웃으며 자전거를 돌려 자신이 방금 왔던 길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는 별 내용 없는 평범한 소통, 서로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끼리 나눌 수밖에 없는 종류의 소통 아닌 소통을 나누며 걸었다. 몇 분 뒤에 우리는 다른 갈림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약간 헷갈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를 맞춰보려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자기 자전거에서 손을 떼고 내 팔목을 붙들고 나를 자기 발밑으로 눌렀다. 그러나 그가 나보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그를 붙들고 그의 팔을 내게서 떼어냈다. 그는 나를 넘어뜨리려고 소년들이 싸울 때 하듯 내 발 뒤로 자기 발을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금쯤은 우스꽝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시리아 사막의 오아시스 한가운데에 있는 어느 길에서 두 남자가 마구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광경이라니. ]
[ 돌아 생각해보니 내가 그때 왜 그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왜 그냥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때리고 그를 쓰러뜨린 다음에 발로 차지 않았을까? 호메로스의 전사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칼로 자신을 겁박한 상대라면 두개골을 부수고 죽여버리지 않았을까? 그거야말로 자신의 위엄을 지키는 유일한 행동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일리아스』의 ‘어리석은 아이’처럼 행동했다. 칼에 굴복했고, 상대와 싸우는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칼날이 내 얼굴과 몸에 가할지 모르는 것에 지나치게 겁을 먹었다. 호메로스에서 여자와 아이들은 언제나 어리석은 존재로 불린다. 적에 맞서서 죽음을 무릅쓰지 않는 탓이다. 그들은 양치기 개한테 몰이를 당하는 양처럼 굴복하고 참는다. 나는 그가 나를 강간하는 동안 흙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 뒤에서는 꼭 발정난 개 같은 그의 가련하고 신속한 몸짓이 이루어졌다. 그가 미친 듯이 움직이는 동안 칼끝은 내 목 옆에서 마구 흔들리고 있었고, 내 정신은 멀리 떨어져서 이 꼴을 바라보다가 문득, 진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나에 대한 볼일을 끝내고 나면 내가 경찰에 알리고 그의 얼굴을 지목하게 될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증오와 회한과 수치심 같은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차올라 그 때문에 결국 그가 나를 죽일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내 허벅지와 둔부에 자신의 몸을 밀착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 순간을 준비했다. 그 모든 게 완전히 평범해 보였다. 공포를 자각하지도 않고 극적인 긴장감도 없었다. 맥박을 더 빨리 뛰게 할 만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이 죽음의 일상성에 대한 내 경험이었다. 그 순간까지 나를 만들었던 모든 것들―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집에 대한 나의 애착, 『일리아스』의 전사들이 늘 그리워했던 과수원과 밀밭, 그리고 영국에 있는 내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도 불가해한 일도 아니었다. ]
[ 내 몸 속에서 맥박이 멈추지 않고 뛰는 한 그저 계속해서 존재했던 내 삶이 그동안 내내 품고 있었던, 존재와 비존재가 지니는 단순하고 핵심적인 한 가지 사실일 뿐이었다. 나는 완전히 짐승이 된 느낌이었고, 나와 내 몸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느껴졌다. 나에 관한 모든 것이 그 칼날에 달려 있었다. 칼은 단순히 내 몸만 찌르는 게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시리아의 흙바닥으로 쏟아버릴 것이었다. ]
[ 그 몇 분 안에, 나는 호메로스적인 반응의 전 영역으로 옮겨갔다. 폭력을 받아들이는 어린아이 같은 어리석음에서, 온전한 내 자신이 되기 위해서 그를 죽이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남자다운 인식으로 이동한 것이다. 막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호메로스적인 영웅들이 그토록 익숙했던 세계에 내가 입문하는 순간이었다. 그 세계는 자신의 목숨이 자신을 파괴하려는 자들의 죽음에 달려 있는 그런 세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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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금) 이번 그믐밤엔 소리산책 떠나요~
[그믐밤] 29. 소리 산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이번에는 극단 피악과 함께 합니다.
[그믐연뮤클럽] 4. 다시 찾아온 도박사의 세계 x 진실한 사랑과 구원의 "백치"[그믐연뮤클럽] 3. "리어왕" 읽고 "더 드레서" 같이 관람해요[그믐연뮤클럽] 2. 흡혈의 원조 x 고딕 호러의 고전 "카르밀라"
"동물"을 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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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눔) [핏북] 조 메노스키 작가의 공상과학판타지 소설 <해태>! 함께 읽기.[SF 함께 읽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읽고 이야기해요![책증정] SF미스터리 스릴러 대작! 『아카식』 해원 작가가 말아주는 SF의 꽃, 시간여행[박소해의 장르살롱] 5. 고통에 관하여
버지니아 울프의 세 가지 빛깔
[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서울외계인]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읽기<평론가의 인생책 > 전승민 평론가와 [댈러웨이 부인] 함께 읽기
'하루키'라는 장르
[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마주>[그믐밤] 16. 하루키 읽는 밤 @수북강녕 에이츠발 독서모임 16회차: <기사단장 죽이기> / 무라카미 하루키 저
오늘의 문장 - 은화
오늘의 문장 - 2024년 11월 07일오늘의 문장 - 2024년 11월 01일오늘의 문장 - 2024년 11월 03일오늘의 문장 - 2024년 10월 31일
현대 한국 사회를 조명하는 작품을 작가, 평론가와 함께 읽습니다.
[📕수북탐독] 4. 콜센터⭐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3. 로메리고 주식회사⭐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2.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1. 속도의 안내자⭐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
멀고도 가까운 나라, 중국.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6. <마오주의>[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5. <중국필패>[한길사 - 김명호 - 중국인 이야기 읽기] 제 1권[서울국제작가축제X푸른숲] 위화 작가님의 <인생> 함께읽기 챌린지
🎨 책으로 그림 읽기!
[책증정] 미술을 보는 다양한 방법, <그림을 삼킨 개>를 작가와 함께 읽어요.[책 증정] <자화상 내 마음을 그리다> 읽고 나누는 Beyond Bookclub 6기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책증정] 《저주받은 미술관》을 함께 읽으실 분들을 모집합니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지금 읽기 좋은 뇌과학 책 by 신아
[뇌과학책 함께 읽어요] 3. 도둑맞은 뇌[뇌과학책 함께 읽어요] 2. 뇌 과학이 인생에 필요한 순간[뇌과학책 함께 읽어요] 1.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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