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혼자 읽기

D-29
[ 서사시에서는 ‘어느 날 아침에······’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선은 이야기의 공간이 열리고 가인을 둘러싼 시간이 확장되는 호사를 먼저 누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시간을 더 끌기 위해서는 이런 농담도 덧붙일 수 있다.   젊은이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난로에 불을 붙이고 불에다가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는다네. 알리야는 커피를 내린 뒤에 한 잔, 두 잔, 부어 마시고 한 잔, 두 잔에도 잠이 안 깨서 세 잔, 그리고 네 잔, 이제 정신이 번쩍 드는데 일곱, 여덟 잔, 충분할 때까지 계속 마신다네. ]
[ 영웅이 카페인을 충분히 마시고 나자 마침내 정형화된 어구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여행을 위해 ‘긴 갈기의 붉은 말’이 준비되는데, 그 말은 그것이 끄는 마차와 함께 아름답게 묘사된다. ‘산 위의 말괄량이 양치기 소녀가 / 두건을 쓰고 알록달록한 외투를 입은 듯’하다. 영웅의 장비 역시 마찬가지로 멋지게 묘사된다. 그에게는 장검과 단검, 우아하게 생긴 권총이 있는데, 하나는 베네치아산産이고 또 하나는 영국산이다. 마침내 길을 떠난 그는―굳이 말을 안 해도 주인이 뭘 원하는지 척척 아는―훌륭한 말에 올라탄 채 커다란 강을 헤엄쳐 건너 마침내 도시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검붉은 포도주로 목을 축이고 / 담뱃대에 꽉꽉 눌러 채운 담배를 두 차례 피운다.’ 호메로스적인 상황을 20세기 초기의 유럽 산악 지대의 계곡으로 옮겨놓으면 시는 알아서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게 바로 패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이 시는 독특한 한 천재의 작품이 아니라 구전 서사시가 과거의 의미들을 현재로 전달하는 수단인 세계, 그 시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필요 자체가 시의 형태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인 그런 세계가 만들어낸 거라는 사실 말이다. 요컨대, 정형화된 운문은 사회적 필요의 산물인 것이다. ]
[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순간은 1933년 여름, 초기 답사가 끝날 무렵에 세르비아 언덕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한 내륙 마을에 여장을 풀고 있다가 마침내 우연히 거슬라리 한 사람을 만났다. 패리가 만난 첫 서사시 시인이었던 그는 젊었을 때 전사였고, 적군 여섯 명의 목을 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오후 내내 그들에게 자신이 치렀던 전투에 관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해 질 무렵 그가 거슬을 내려놓자, 필경사들은 상당 부분을 다시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친 패리는 사과를 씹으면서 헤르체고비나에서 온 가인 니콜라의 어깨 위로 시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와 지저분한 목이 아래위로 까딱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루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눈을 반쯤 감은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 일을 떠올리며 말했을 것이다. “여태껏 다닌 중에 호메로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경험이었을 거네.” ]
[ 이 순간은 호메로스 이해의 역사에서 키츠와 카우든 클라크가 채프먼의 호메로스를 들여다본 그 저녁이나, 칼 블레겐이 1939년 여름에 3,000년 전 화재로 무너져 조각조각 부서져버린 시인 벽화를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강렬한 순간이다. 패리는 이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운율에 맞춰 노래하는 목소리에서 수천 년간 세대와 세대를 가로질러 시가 전달되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그것은 문자세계 이전에 진공으로 존재했던 인간의 삶이 불현듯 어떤 물질성을 획득한 순간이었다. 헤르체고비나 가인 니콜라 부예노비츠를 통해서 패리는 할릴 바예고리츠에게 어디에서 그 노래를 배웠냐고 물었다. 그는 전부 아버지한테서 배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그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노래와 연주를 배웠을까? 할릴은 자기 아버지가 잠든 사이, 아버지의 거슬을 몰래 훔쳐내서 다른 방에서 조금씩 흉내를 내곤 했던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
[ 산악 지대의 음유시인들은 검정 술이 달린 스카프를 걸치고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헐렁한 바지를 입고는 패리의 말에 따라 노토풀로스가 기대했던 바대로 정형화되고 반복적인 가사를 이용해 즉흥적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아침에는 밤에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불렀다. 노토풀로스는 그 모든 것을 녹음했다. 시인들 중 한 사람은 안드레아스 카프칼라스Andreas Kafkalas라는 이름의 39세밖에 안 된 젊은 남자로, 노토풀로스가 “자연스런 즉흥연주”라고 부른, 예비연습 없이 처음으로 이야기를 노래하는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독일 침략과 점령에 관한 서사시 하나가 끝나자, 노토풀로스는 카프칼라스에게 크레타 섬의 독일 주둔군 사령관 크라이프Kreipe 장군과 관련된 것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데 대해 놀랐다고 말했다. 그래요, 하고 대답한 카프칼라스는 이 미국인이 권유하자 곧바로 지금 그에 관한 노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노토풀로스는 레코드 장비를 켰고, 카프칼라스는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오디세이아』의 짧은 챕터 하나 길이였다. 그가 만들어낸 정형화된 표현이 노래 전체를 채웠는데, 전부 크레타 섬의 전통적인 열다섯 음절의 시행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노토풀로스는 나중에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열다섯 음절로 된 행을 만들 줄 아는 거요? “한 줄에 열다섯 음절이 들어가는 건 줄은 몰랐어요.” 그가 대답했다. “음절을 세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느낌으로 하는 거거든요. 선율에 맞춰서 행을 만드는 거죠.” 전통이 그를 통해 노래하고 있었다. ]
[ 그는 자신이 아테네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다른 크레타인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노토풀로스에게 자신이 ‘크레타의 환대 정신으로’ 특별히 이야기해주고 있는 거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프칼라스가 부른 노래는 무척이나 이색적이고 흥미로웠다. 본래 이야기에서 남은 게 거의 하나도 없었으니까. 영웅적인 사건들이 넘치는 가운데 진실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영국 장교(사실이 아니다) 한 명이(사실이 아니다) 크레타 섬에 도착해서 스파키아에서 온 영웅인 레프터리스 탐바키스Lefteris Tambakis를 만나자고 불렀다(탐바키스는 실존 인물이긴 하나 이런 기관 근처에도 간 일이 없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국 장교는 비장한 태도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서서, 독일인들이 ‘적막한 크레타’ 사람들에게 행한 잔혹한 일들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그 스파키아 용사에게 죽여서든 살려서든 크라이프를 잡아와야 한다는 명령을 낭독했다(그런 명령은 내려진 적이 없으므로 이 역시 전부 사실이 아니다). ]
[ 크레타 군인의 명예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탐바키스는 알고 있다. 그는 변장을 하고 헤라클레이온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찾는다.(그는 그런 적이 없다.) 소녀는 독일 장군의 비서다.(독일 장군에게는 비서가 없었다.) 그는 소녀에게 만약에 그녀가 그를 돕는다면 그녀의 이름이 크레타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될 거라고 말해준다. 그녀는 영웅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이에 동의하고 독일 장군과 동침함으로써 여자로서의 자신의 명예를 희생시킨다. 크라이프―이 노래에서는 카이저리라고 부른다―는 베갯머리에서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준다.(물론 그는 그런 적이 없다.) 그녀는 그것을 탐바키스에게 전하고, 탐바키스는 크노소스에 있는 영국 장교를 만나러 간다.(그런 만남은 없었다.) ]
[ 그녀는 그것을 탐바키스에게 전하고, 탐바키스는 크노소스에 있는 영국 장교를 만나러 간다.(그런 만남은 없었다.) 복병이 매복해서 기다렸다. ‘안다르테스’ 조직이 ‘긴 자동차’를 세워두어 길을 막아두었고(그런 적이 없다) 탐바키스 자신은 아름다운 말을 타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말은 이용된 적이 없지만 크레타의 옛날 노래에 늘 등장한다). 영국 장교는 지금까지 이 이야기에서 매우 주변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크레타인들은 카이저리의 차를 세운 뒤 그를 발가벗겼고(그러지 않았다), 카이저리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걸했으며(그는 그런 적이 없고, 이것은 크레타 시에서 이와 같은 순간에 주로 등장하는 주제다), 그들은 이다 산 위로 기나긴 행군을 시작한다. 여러 마리의 개(동원된 적이 없다)와 ‘전장의 새’라는 이름의 비행기가 납치범들을 찾으러 다녔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파키아에 도착해서(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곳에서 카이저리를 죽이려고 했으나(그러지 않았다) 잠수함 하나가(실은 군함 보트였다) 그를 이집트로 싣고 갔다. 히틀러는 절망에 빠져서(1944년에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유는 달랐겠지만.) 이렇게 말했다. “세계 역사상,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
[ 사건이 벌어진 뒤 그것이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은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크라이피아드Kreipiad’ 이야기에서 장군을 납치해서 이집트로 데려간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등장인물과 스파키아 지리, 그리고 마타 하리 유의 첩자에 관한 달콤한 환상적 서사까지 역사적 진실 위에 마구 덧입혀졌다. 만약 이것이 9년 만에 현대판 이야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대체 어떻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진실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 제임스 노토풀로스가 크레타에서 ‘크라이피아드’를 들으며 노래를 통해서 오랜 과거의 유산이 전해진다는 생각이 붕괴되는 경험을 하던 것과 거의 동시에, 유럽의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1953년 9월에 40명의 켈트어 학자가 루이스―루이스는 스코틀랜드의 본토 북서쪽에 위치한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루이스 앤 해리스 섬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의 스토노웨이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했다. 스토노웨이에서 핵심 주제 시간은 ‘생생한 묘사가 들어 있는 민간설화에 관한 소논문’이라는 진부한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그때까지도 패리의 통설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뭔가를 듣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 던컨 맥도널드Duncan MacDonald는 안정되고 침착한 느낌을 주는 작달막한 남자였다. 사실 그의 본명은 던컨 맥도널드가 아니라, ‘던컨 맥돔날릭 돈체이딕 이에이닉 돔네일릭 타메이드(노먼의 아들인 도널드의 아들인 이에인의 아들인 던컨의 아들인 도널드의 아들인 던컨)’였다. 그들은 대대로 음유시인이었던 맥루리 가문의 후손이었는데, 맥루리 가문은 맥도널드 가문의 가장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일이 업이었다. 맥도널드 가문은 지금은 버려져 폐허가 되어버린 던툴룸성에 살았던 사람들인데, 이 성은 스카이 섬의 북쪽 끝과 맞닿은 민치 해협 해안가에 있다. 그의 아버지와 형도 이야기꾼이었고, 어머니는 유명한 가수였으며, 어머니의 남자 형제는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파이프 연주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들 중 한 명으로, 게일어(스코틀랜드의 켈트어를 가리킴 _옮긴이)를 사용했던 머나먼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켈트의 위대한 구전 이야기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들 중 한 명으로, 게일어(스코틀랜드의 켈트어를 가리킴 _옮긴이)를 사용했던 머나먼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켈트의 위대한 구전 이야기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밀먼 패리가 발칸 지역에서 가인들에 관해서 발견했던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든 이 유산에도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청중들은 던컨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민속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스토노웨이에서 그날 오후에 그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는데―제목이 ‘그런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한 시간 정도 길이였다―, 이 이야기는 필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가 이전에, 그러니까 1936년, 1944년, 1947년, 1950년에 각각 한 차례씩 네 차례나 한 적이 있었다. 이날 오후에 참석자들은 글로 옮긴 전문과 그가 1950년에 이야기했던 그대로를 영어로 번역한 책자를 받았다. ]
[ 그는 게일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한 청중의 말대로 그것은 “세련되고 균형 잡히고 우아했다. [···] 그가 암송한 모든 게 무게감 있고 충분히 생각해서 고른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점점, 이 점잖은 석공의 전통에 대한 자신감은 그가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글로 적힌 본문과 거의 한 단어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예컨대 ‘수바카스(기쁨)’를 ‘두바카스(슬픔)’로 바꾸고, 감탄사 한두 개와 동의어 몇 개가 바뀌는 등 미세한 실수가 몇 개 있긴 했지만, 이야기의 7,000개가 넘는 단어 전체가 정확하게 그가 3년 전에 했던 그대로였다. 분석 결과, 다섯 차례 모두 거의 똑같았다. 이것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그대로를 읊은 것으로, 맨 처음에 배운 이래로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똑같이 읊어왔음을 뜻한다. 그의 가족은 적어도 200년 전에 만들어진―1817년부터 확인이 가능하다―영웅 이야기를 일종의 기억 속의 가보로 머릿속에 보관해왔던 것이다. ]
[ 노래를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패리의 가설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던 세계에서 이것은 하나의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던컨 맥도널드는 호메로스를 보는 또 다른 방식을 제공했던 것이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자신의 예술 작품으로 썼던 시인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배운 것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바꾸어서 읊었던 시인으로 보는 것도 아닌, 마치 박물관 학예사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부과된 변화들에 저항하고, 세세한 것까지 옛날 그대로 보존하는 정확성을 중시하듯 정확하게 일하는 시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시인들한테 이야기란 세상과 시간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훌륭한 지혜와 소중하게 여겼던 이해를 담아 지킬 수 있는 성스러운 유물상자였다. 시는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 음악은 죽음을 거부했던 것이다. 시의 역할을 이렇게 이해하면, 호메로스의 그리스어에서 특별한 구절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바로 ‘클레오스 아프티톤kleos aphthiton’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아-프티토스a-phthitos’는 ‘바래지 않는’ ‘죽지 않는’ ‘영원한’ ‘불후의’라는 의미를, ‘클레오스kleos’는 호메로스에서 모든 중요한 말덩어리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내는 말로, ‘이야기’ ‘명성’ ‘명예’ ‘영광’이라는 뜻이다. ]
[ 그때 이후로 민족지학자들은 패리가 주장한, 공연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 구전 시인 전통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해왔다. 그 전통들은 완전히 정형화된 구절로만 된 것도 아니고, 과거의 이름이나 이야기나 단어를 정말로 정확하게 보존하는 인간의 기억력에 기대고 있었다.187 던컨 맥도널드의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들려준 15만 단어로 된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18세기의 문맹시인 던컨 밴 매킨타이어Duncan Ben Macintyre는 적어도 자기 시의 6,000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호메로스 학자 더글러스 영Douglas Young에 따르면 헤브리디스 제도에 있는 벤베쿨라 섬에 사는 80대의 작은 농장주, 앵거스 맥밀런Angus McMillan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일흔 개가 넘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각 이야기는 최소 한 시간 길이고, 어떤 것은 일고여덟 시간짜리도 있는데, 그중 하나는 58,000단어로 이루어진 것으로 거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맞먹는 길이였다. [···] (그는) 거의 한 차례도 쉬지 않고 여덟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근처 바라 섬에 사는 로더릭 맥네드Roderick MacNed라는 사람은 15년 동안 겨울마다 매일 밤, 혼자 연습해보는 일도 없이 술술 이야기를 했다는 보고가 있다. 스코틀랜드 본토 러카버에 사는 존 맥도널드John Macdonald는 600개가 넘는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각 이야기는 비교적 짧고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한 이야기꾼은 자신이 알고 있는 50만 개가 넘는 단어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
[ 이처럼 인간의 기억을 기념비의 형태로 바라보는 생각 덕분에, 마침내 호메로스의 기원을 기원전 9세기나 10세기 너머로 잡는 일이 가능해졌다. 서사시를 모든 기록수단 가운데 가장 견고하고 오래된 수단으로 본다면, 호메로스를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문자사용 이전 세기들로 확 끌어당길 수 있게 된다. ]
[ 이때, 『일리아스』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글라우코스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성찰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무 이파리에도 세대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세대라는 게 있소. 나뭇잎은 바람에 날려 땅에 흩어지지만, 나무는 새 이파리를 만들어내고, 봄은 다시 오는 법이라오. 사람도 그와 같아서 한 세대는 태어나고, 한 세대는 죽는 것이오. ]
[ 글라우코스에게는 모든 생명이 땅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땅의 충만함과 땅의 무심함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이런 확고한 단순성과 어떤 철학적 평온을 지니는 것, 그리고 트로이의 평원에 모인 전사들이 ‘봄에 나는 새싹과 꽃처럼 무수하다.’라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은191 호메로스에서 흔히 보이는 태도가 아니다. 글라우코스는 스스로를 수천 수만 개의 나뭇잎들 가운데 하나로, 일시적인 현상으로, 어떤 요령부득의 개체성으로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덧없음을 이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호메로스의 시 대부분이나 그 안의 대부분의 영웅들이 생각하는 바와 상반된 태도다. 그 영웅들에게는, 그리고 호메로스에게는 그런 덧없음이 삶에서 가장 주된 슬픔이며 가장 끈질긴 고통의 근원인 탓이다. 그것은 시 자체가 치유하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장면 한 장면, 호메로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게 다가 아니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음을 조용히 보여준다. 『일리아스』 전체는 서사시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찬가다. 세상은 망각해버리고 말지만 시는 기억한다. 바로 그런 인식이 호메로스가 자연의 본성이 지니는 역설에 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슬픈 눈으로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 까닭인 것이다. 시가 알고 있는 것만큼 아는 존재는 신뿐이다. ]
[ 인간의 기억은 기껏해야 세 세대 정도 지속되지만, 시는 하나의 기억하기라는 행위가 되어서 과거를 영원한 노래로 붙박아둔다. 아가멤논은 승리가 그에게 가져다줄 전리품을 탐하는 욕망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아직 갖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 속에 계속 남아 있게 될 그런’ 물건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가 틀렸다. 우리는 그런 약탈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우리가 아는 거라곤 시가 보존해온 게 전부기 때문이다. ]
[ 서사시는 삶과는 다르다. 비록 현재의 이 순간이 현재로부터 과거를 잘라내는 하나의 칼날이 되어 ‘그때’로부터 옮겨온 ‘지금’만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는 시간이 가한 그 상처를 동여맨다. 오디세우스가 말한 대로, 뮤즈는 시인과 이야기꾼에게 ‘자신의 방식’, 노래의 길을 마련해주어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그 길 위에서 지금의 현실과 더불어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노래를 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사시가 기원전 700년경이나 호메로스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남긴 직후보다 훨씬 이전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현실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시에 고대성의 징후와 암시가 곳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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