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발트 읽기] 『캄포 산토』 같이 읽어요

D-29
나는 섬 깊숙이 답사를 갈 때마다 이곳 남자들 전부가 목적을 잃은 지 오래인 파괴의 제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들은 대부분 작업복인 파란 사복 차림으로 산으로 가는 길목을 죄 막고 보초를 섰으며, 좀더 젊은 남자들은 군인 못지않은 무장을 한 채 지프나 산악용 차량을 타고 점령군이라도 되는 듯 아니면 적의 침공이 임박하기라도 한 듯 사방팔방을 그 지역을 헤집고 다녔다. 위협적인 몸짓에 중장비로 무장을 하고 면도도 안 한 그들의 모습은, 터무니없는 야욕이 넘친 나머지 자기 고향을 잿더미로 만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민병대처럼 보였다. (···) 그 사람들을 마주쳤을 때 그들이 아무개 행인하고는 자신들의 유혈 사업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섞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게 오해할 여지 없이 분명히 주지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 위험지역에서 당장 꺼지지 않으면 실수로 난사할 수도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몸짓으로 나를 길에서 쫒아냈다. ⏤50쪽. 지금 나는 그 옛날 서리가 내리던 초가을 아침 등굣길에 볼파르트라는 도축업자의 가게 마당을 지나던 때를 떠올려본다. 암사슴 여남은 마리를 막 수레에서 부려 보도블록으로 내동댕이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죽은 짐승들의 모습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내겐 이미 그때 사냥꾼들이 전나무 가지에 집착하는 면모며, 일요일이면 비어 있는 정육점 진열대의 흰 타일 위에 야자수가 놓여 있는 모습 또한 어쩐지 수상쩍게 느껴졌다. 빵집이라면 그런 장식은 필요할 턱이 없으니 말이다. 나중에 영국에서 소위 가족 푸줏간이라 불리는 곳의 쇼윈도에서, 진열된 고기 부위와 내장 장식용으로 줄세워 올려놓은 3센티미터 남짓한 녹색 플라스틱 꼬마 나무를 본 적이 있다. 우리가 흘리게 한 피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준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어디선가 공장에서 이러한 플라스틱 상록수 장식물을 대량생산한다는 엄연한 사실은, 바로 그 나무들의 극단적인 부조리성을 통해서 우리 안에 화해 욕구가 얼마나 강렬하며 우리가 그 화해를 예전부터 얼마나 값싸게 사들이고 있었는지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52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생각보다 읽을 거리도 많고 생각해볼 내용도 많아서 모임을 연장해서 2회에 걸쳐서 『캄포 산토』를 읽으려 합니다. 29일+15일로 일정이 변경될 듯합니다. 1회 모임은 2월 27일 자정에 끝이나며, 2부 ⟨스위스를 거쳐 유곽으로⟩까지입니다. 2회 모임은 ⟨꿈의 직물⟩부터 ⟨독일 학술원 입회 연설⟩까지를 읽으며, 총 보름간 진행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글 자체가 온전히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어떤 말들을 첨언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 해서 읽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었기도 하고요. 아마 내일부터 남은 챕터들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논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생소, 통합, 위기] 제발트는 해당 산문에서 페터 한트케의 연극 ⟨카스파르⟩를 다루며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연극 카스파르는 19세기 독일 뉘른베르크 거리에 등장한 정체불명의 괴소년 '카스파르 하우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우저가 발견될 당시 그는 제 6기병연대 4중대장 베스니히(Wessenig) 대위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의 제목은 "바이에른 왕국 국경에서/이름 없는 장소/1828년"(독일어: Von der Bäierischen Gränz / daß Orte ist unbenant / 1828)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익명으로 된 편지 작성자는 1812년 10월 7일에 이 소년이 신생아였을 때 자신이 양육권을 받아 키워왔으며 읽기, 쓰기 그리고 기독교를 가르쳤지만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보내지 않았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내용은 위키백과에도 실려 있는 카스파르 하우저라는 19세기 인물에 대한 대략적인 스케치입니다. 한국어로 번역히 돼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페터 한트케는 '카스파르'라는 연극에서, 사회화를 거치지 않은 한 소년이 언어를 배워가면서 사회 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제발트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언어가 어떤 박탈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호프만슈탈을 인용하며 외부에서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언어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즉, 언어는 단순히 표현수단인 것만이 아니라, 외부 질서의 말씀이나 명령, 나아가 지시문이 빼곡히 적힌 프롬프터처럼 주어지며, 그로 인해 박탈되는 영혼의 상태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박탈 이전의 상태를 '선실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제발트는 끊임없이 카프카를 호출하는데요, 본문에서 언급된 작품은 '유형지에서'이지만 저는 카프카의 '법앞에서'도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의사와는 무관하게 '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떠한 체계 안으로 굴러떨어지게 되는데요, 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습니다. 이른바 '법'은 한 인간의 탄생과 동시에 주어지는 처해지는 실존적인 상황이며, 뉘른베르크의 거리에서 발견된 10대 소년 카스파르에게는 세상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더 길게 얘기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혼자 메아리처럼 말하는 것이 좀 쑥스러워서 이 정도만 써도 될 듯합니다. 인상적으로 읽은 한 대목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카스파르를 항시 포위하고 있는 매체의 익명적 음성들은 그에게 "타인의 침투에 수동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의 소외"를 뜻한다. 카스파르의 내 부에서 무언가가 분열이 일어난다 주위의 영향이 침투하면서 배움이 시작된다. 일단 그는 어릿광대가 되어 자기 주위의 사물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가 인간으로서 얼마나 무능한지 몸소 체험한다. 소파의 쿠션 틈에 손이 끼이고, 책상 서랍이 그의 발등 위로 떨어지며, 흔들의자는 넘어진다. 그러면 카스파르는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는데, 매번 새로운 배움이 곧 새로운 공포인 까닭이다. 익살꾼에겐 "대상을 배운 대로 진지하게 다루는 것과 일부러 서투르게 다루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펼치는 세련된 연기에 불과한 일이, 백치 상태인 카스파르에겐 예측 불허의 사고일 뿐이다. 그 일은 사물을 지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다. ⏤69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역사와 자연사 사이] 이 산문은 이전에 읽었던 ⟪공중전과 문학⟫의 보론처럼 읽혔습니다. 같이 읽으면 좋은 대목이 많았습니다. 제발트의 글 중에서도 유례없을 정도로 비판적인 논조가 인상적인데요, 헤르만 헤세나 에른스트 윙거나 카사크 같은 전후 독일 문학의 작가들이 주장했던, '비극 앞에서 내적 망명으로서 문학'에 특히 각을 세웁니다. 제발트는 앞선 작가들이 문학으로써 내세우는 교육적인 새로운 교육적인 이상향이 또 다른 의미의 엘리트주의임을, 즉 "국가를 앞서고 초월해 활양하는 엘리트 학우회가 견지한 귀족적 이상의 왜상일 뿐인바, 그 학우회는 공인된 파시스트 엘리트들을 배출함으로써 부패의 극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완성"된다고 표한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사크와 같은 작가의 산문을 예외적으로 칭찬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로버트 버턴이 쓴 ⟪멜랑콜리의 해부⟫를 설명하며 후일 자신이 쓰게 될 작품을 예비하기도 합니다. 특히 제발트의 작품을 접근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한 '멜랑콜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대목도 나옵니다. 이에 대한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절대 암흑의 이상을 찾아나서는 여정은 화자가 정확히 알고 있듯이 물론 가망 없는 모험에 그칠 것이다. 망원경의 화각을 좁혀서 시야에 들어오는 천체들을 더 많이 제외할수록 그는 우주 공간을 더욱더 안쪽까지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며, 그러면 그 우주에서 거리가 멀어 어둡게만 보였던 천체들이 빛나며 나타날 것이다. 이 작업은 흔해빠진 의미에서의 허무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 작업은 죽음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검은 점으로 접근하는 것이며, 화자의 상상 속에서는 계속해서 "점점 더 검어지고 굵어지고 길어지기까지 하는" 저 검은 점으로 접근하는 것이자, "망각의 강변에서 편안히 뿌리내린 무성한 잡초"처럼 멩랑콜리가 들러붙는 검은 점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그것은 굴종과는 완전히 다른 도발의 몸짓이다. ⏤144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애도의 구축] 앞서 '역사와 자연사'에 이어서, 제발트는 1950년대 이후 독일 문학에서 제대로 된 애도가 구축되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흔히 착한 독일 남성과 유대계 여성의 연애담을 내세우며 과오를 감정적으로 청산하려 한 작품들이 그 주된 비판의 대상입니다. 다 양보해서 전후 많은 독일인이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일부' 악행을 저지른 독일인이 국가적 규모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대다수의 선량한 독일인'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완벽히 무능했다는 사실은 어디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미히처리의 온당한 불만처럼, 우리 독자들은 분명 생존자들이 겪었던 갈등을 있는 그대로 더 많이 듣고 싶었지만 조악하게 그려진 무고한 희망 인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희망 인물이란 아무런 의무에 매이지 않고 완전히 사적인 삶으로 퇴거해 달관한 고독한 은자들로, 기회주의적인 동족들 속에서 삶을 견뎌낼 수 있는 자들이다."⏤122쪽. 제발트는 비슷한 맥락에서 귄터 그라스의 작품 또한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귄터 그라스가 작품 안에서 작가를 집단적인 양심에 시달리는 존재이며 자기 애도의 철학을 수행했다는 점에서는 흐릿하나마 역사적 책무를 이행했다고 말합니다. 이와 비교해서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를 논의하는데요, 그는 어설픈 우회로를 따르지 않고 곧장 애도의 핵심에서 출발하며, 제발트에 따르면 "죄많은 동시대인의 양심을 관리하는 대표자격"인 인물을 창조해냅니다. 여기서도 제발트의 멜랑콜리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멜랑콜리는 단순한 비관이 아니며, "마치 소설 '성'의 서두에서 미지의 나라로 들어가는 다리를 자발적으로 건넌 여행자처럼 차라리 죽음의 본진에 쳐들어가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의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극복하려는 의지조차 포기했을 때 얻어지는 멜랑콜리한 구원처럼 읽힙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통회] '통회'란 고해성사의 다섯 단계 중 깊이 뉘우치는 단계를 일컫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발트는 페터 바이스라는 인물의 삶을 추적함으로써 독일이 전쟁 중 저지른 만행을 통회합니다. 페터 바이스는 1970년 '저항의 미학'이라는 작품을 쓰며, 전후 독일의 집단적인 망각에 저항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망각에 맞서 기억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면 추모하는 과정에서 추모자는 자기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기억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반복하자면, 고통스러운 기억은 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옥을 묘사하고 관람하는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안전한 자리이며 당사자가 작은 천국에 있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마치 단테가 1만 4233행의 시로 이뤄진 작품을 쓰면서 자신에게 내려진 처형 선고를 떠올렸던 것처럼 페터 바이스는 집필 활동을 계속하면서, 훗날 자신의 작품을 읽을 사람들을 천국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치열하게 지옥을 묘사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밤새의 눈으로] 언어를 다루는 사람에게 망명이란 모국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경험입니다. 이 경험은 내적임과 동시에 외적입니다. 본문에서 제발트는 장 아메리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이후에, 자신의 언어를 가다듬어야 했음에도 쉽사리 그러지 못했음을 토로하는 대목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일상용어를 다시 익히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 언어를 껄끄러운 마음으로, 그 말의 효력을 의심하면서 사용한다." 제발트에 따르면 장 아메리는 수용소의 삶은 겪은 이후에 모국어가 와해되고 위축되는 경험을 했고, 자신이 경험한 바를 기존의 언어로써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미처 발설되지 못한 생각을 전개할 매체'가 필요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이는 나치로 귀결된 기존의 질서, 즉 언어 체계를 작가 자신에 이르러서 새로이 정립하고자 하는 욕망을 발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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