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발트 읽기] 『캄포 산토』 같이 읽어요

D-29
『현기증・감정들』에 이어서 산문집 『캄포 산토』를 읽습니다. ※ 『캄포 산토』는 제발트가 죽은 이후에 출간된 유고집으로서, 국역본은 120*200의 작은 판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4개의 산문과 14개의 짤막한 에세이로 이뤄져 있습니다. 280쪽 분량을 29일에 걸쳐서 조금씩 읽어보려고 합니다. ※ 특별히 시기를 구분하지 않고,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 안 읽고 얘기하셔도 좋고 아는 척 하셔도 좋고 생판 딴 얘기하셔도 좋습니다. ⏤참여 인원과 관계없이 23/1/30에 시작하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시작]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캄포 산토』를 차근차근 읽어보겠습니다. 29일 간 18개의 챕터, 280쪽 분량을 읽겠습니다. 첫 번째 산문은 '아작시오를 짧게 다녀오다'로서, 작가가 프랑스령 코르시카섬의 도시인 아작시오를 다녀오며 보고 듣고 느낀바를 써 내려간 여행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읽었던 책들은 호흡이 긴 편이라서 나눠서 얘기가 어려웠습니다만, 이번에는 비교적 짤막한 글꼭지들이라서 접근하기가 수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전에 다뤘던 제발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특징이 짤막한 산문에서도 잘 드러나기는 합니다. '아작시오를 짧게 다녀오다'의 첫번째 문단이 그러한데요, '나'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논픽션이었다면 글을 여는 첫번째 문단이 없이 바로 두번째 문단으로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제발트는 적극적으로 또 적재적소에 '나'를 삽입해서 글 전체에 묘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나아가 '나'로써 일견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주제를 하나로 꿰기도 하고요. 나폴레옹의 출생지로도 유명한 코르시카섬을 중심으로 카프카와 스탕달과 파올리니 같은 작가들의 얘기들이 마구 뻗어나가는데, 그 각각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여행자로서 나'가 등장해서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사색에 잠기기도 합니다. 이전부터 느낀 것이긴 한데, 제발트의 글에서 '나'는 아주 겸손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씩 이 전체 이야기가 '나'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음을 상기시켜줄 때만, 마치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돋우는 소금처럼 적절한 순간에만 등장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번에도 혼자 떠들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작시오를 짧게 다녀오다⟩ ~22P] ⟨아작시오를 짧게 다녀오다⟩에서 화자인 '나'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탐구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아작시오라는 도시를 제외하면 '나폴레옹'을 말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어떤 의미로 철저한 관찰자로서 글과 현실이라는 양쪽 지면에 한발씩을 걸치고 있습니다. 글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향해서 소실점을 향한다는 인상도, 무언가를 전달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는 코르시카섬의 나폴레옹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내고 그 주변을 배회할 뿐입니다. (저는 그래서 더 좋았지만요.) 다만 제발트 특유의 역사적인 인식 같은 것은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서 ⟨아작시오를 짧게 다녀오다⟩를 마무리합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레티치아도 카를로도 새로운 정권에 적응해가던 1770년대와 1780년대에는 자신들과 매일같이 식탁에 둘러앉는 이 아이들이 언젠가는 왕과 왕비의 지위로 일약 상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동네 골목에서 매일 같이 주먹다짐을 벌였던 가장 성마른 사고뭉치가 거대한 제국을 세워 왕관을 쓰고 유럽 대부분의 영토로 뻗어갈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논리로도 해명되지 않는 임의의 법칙에 따라 전개되고 움직이며, 측정할 수도 없이 사소한 것들에 의해서, 느껴지지도 않는 한줄기 바람에 의해,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에 의해, 누군가의 눈에서 다른 누군가의 눈으로 인파를 뚫고 전해지는 시선에 의해 결정적인 순간 방향이 바뀌는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과거를 되돌아볼 때조차 우리는 실제로 과거가 어떠했는지, 어찌하여 이런저런 세계사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진리에는 과거에 대한 아무리 정확한 지식도 얼토당토않은 한마디 주장보다 더 가까이 가닿지 못한다. (···) 그에 따르면 프랑스 황제가 유럽의 여러 국가에 변혁을 끼친 것은 전부, 다름아니라 그가 적색과 녹색을 구분치 못하는 색맹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장에 더 많은 피가 흐를수록 그의 눈에는 전장의 풀이 더욱 파릇파릇하게 싹트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벨기에의 나폴레옹 연구자는 말했다. ⏤본문 20-21쪽.
전혀 모르는, 풍문으로라도 들어보지 못한 이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서 참여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발트라는 사람이 독일인이라는 것을 책의 첫 장을 펼치고 안 것이지요. 작가 약력을 보니, 냉철한 이성이 푸르게 빛나는 지식인 같은데, 저에게는 필살기를 숨기고 의뭉스럽게 웃는 무림의 고수 할아버지같이만 느껴졌습니다. ‘의무와 의미’에 묶이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는 무모한 욕망이 메모장과 연필을 들고 무언가의 의미를 찾으려는 행동에 바로 무너져버리는 모습(첫 문단, P10)에서 피식, 두 번째 문단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에는 ‘파란색 시외버스'를 타고 다다른 아작시오를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것, 들려오는 것, 떠오르는 것, 추측되는 것이 나른하게 펼쳐져 있어, 저 역시 따뜻한 봄날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을 한 바퀴 돌고 나온 것 같았습니다. 이 글에 나타난 나폴레옹은 쪼그리고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우스꽝스럽고 측은한 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배회 중에 만나는 이들과 “난쟁이 일족”(제발트가 상상한 나폴레옹 가문)을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더더욱 ’세계사를 뒤흔든 나폴레옹‘이란 있기는 있던 건 걸까? 하는 의문이 들 지경이지요. 결국 계획적으로 의미를 찾기 위해 연필과 메모장을 들고 나섰지만 “어떤 상상력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진리에는 과거에 대한 아무리 정확한 지식도 얼토당도 않은 한 마디 주장보다 더 가까이 닿지 못”했습니다. 메모장에 연필로 기록한 정보(지식)가 말해줄 수 있는 걸 뭘까요? 나른하고 평화로운 아작시오, 그런데 여기는 심심치 않게 폭탄이 터지는 곳이었습니다. 야밤에 사이렌과 구급차가 소리가 울리는 곳, 제발트가 있던 아작시오의 그날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남의 집 현관을 기웃거리며 “양철 우편함 위 낯선 주민들의 이름을 찬찬히 읽으면서” (p. 9) 그 사람을 상상해보는 것이 어쩌면 손톱 밑의 때만큼이라도 진리라는 것에 가까이 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나른하고 의뭉스러워서 재밌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따듯한 봄날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을 한 바퀴 돌고나온 기분 같다는 표현이 참 좋네요. 제발트의 산문에 나오는 산책자들의 포즈는 참 재밌는 것 같아요. 여행을 통해서 자아 따위를 찾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상에게 자신을 안겨준다는 인상을 받곤 합니다. 오늘날의 관광과는 좀 다른 태도죠.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고 여행 끝에서 찾아내야만 할 것 같은 '진정한 나'도 없으니까요. 쓰신 글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광이라는 개념이 참 흥미로워요. 누군가에게는 잠시 잠깐 일탈의 장소이자 돈을 클리넥스 뽑아 쓰듯 펑펑 쓰면서 사진을 찍어가는 공간이지만, 그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무척 평범한 일상의 영역이니까요. 관광은 일상과 일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이상한 개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발트의 여행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russist의 언급처럼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만 쏠려 있는 분위기가 불편하고 지겨웠는데, '아작시오를 짧게 다녀오다'는 시선을 (가급적) 밖으로 돌려, 포착된 풍경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매력적입니다. 포착된 풍경, 즉 들려오는 것, 보여지는 것, 느껴지는 것도 '나'의 스크리닝을 거친 것이지만, 안과 밖, 일상과 일탈, 영웅과 범인 사이의 길항 속에서 아직사오의 산책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나'의 절묘한 감춤과 드러냄을 통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전 한때 작가가 3인칭으로 인물의 내면에 스며들어가는 모든 글이 의아했습니다. 약간 오만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물론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지만요). 그래서 1인칭의 '나'로 끝끝내 집요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모든 주변 풍경을 거북스럽고 비대한 자아로 회수하지 않고도 담담하게, 마치 3인칭의 서술을 보는 듯 써내려가는 제발트의 글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나'는 후경으로 물러나고 사물과 풍경은 뚜렷하게 다가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제발트가 내세우는 '나'를 생각하면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간형이 떠오릅니다. 다 같이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없으면 바로 빈 자리가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요.
이 글과 상관없는 얘기지만, 작가들은 낯선 도시에서 낯선 문패나 우편함을 훔쳐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김소연 산문집 < 그 좋았던 시간에>에도 여행지에서 폐가에 나귕구는 우편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낯선 곳에서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것, 좀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ㅎㅎ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 같습니다.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캄포 산토] 산문 '캄포 산토'는 마찬가지로 코르시카섬의 한 해안 마을인 피아나를 배경으로 합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캄포 산토란 이탈리아어로 교회 묘지를 뜻합니다. '나'는 피아나를 돌아다니며 각종 묘지의 모습을 살뜰히 살핍니다. 우리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고 말들은 하지만 살아 생전에 누렸던 지위에 따라 묘지의 풍경과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은 잘 얘기하지 않죠. '나'가 '피아나의 묘지'에서 발견한 풍경도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생전의 누렸던 부와 지위와 명성이라는 삶의 욕망이 무덤 위에서 드글거리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 재밌는 점은 '나'가 스티븐 윌슨이라는 연구자를 인용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곡소리꾼'입니다. 한국에서도 문상집에서 대신 울음을 울어주는 곡소리꾼이 있었죠. 예전에 곡소리꾼이 나오는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제목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여기서 곡소리꾼의 역할은 죽음을 사회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역할입니다. 흔히 '울음'은 감정의 신체적 배설로 치부되지만 '곡소리꾼'에 이르러서는 어떤 미학적인 변조, 화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능청스러운 변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구도 기만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용인할 만한 문화적인 의례로 이해합니다. 망자를 불러들이고 또 매년 예를 갖춰 대우하고 또 기억하는 풍습은 만국 공통인 듯합니다. 망자를 두려워하면서도 문화 안에서 예를 갖춰서 포용하는 것이죠. 하지만 점점 도시화 되는 이즈음에는 그런 의례는 점점 하찮아 집니다. "영원한 추모나 조상숭배는 이제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는 '나'의 건조한 푸념에서도 드러납니다. 인구 과잉의 시대에서 망자에 대한 기억과 보관과 유지는 사치스러운 구습이 되어갑니다. 그래서인지 산문의 마지막은 멜랑콜리한 감상으로 끝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바닷속 알프스]는 코르시카섬에서 사라진, 그래서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된 교림에 대한 뒤늦은 소고입니다. 이전 산문에서 느꼈겠지만 '나'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단순히 묘사하고 감탄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시선은 언제나 몰락한 자리를 더듬고, 몰락의 자리를 본다함은 '지금 없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제발트의 글은 언제나 뒤를 돌아보는 사람, 역사적 맥락을 좇는 포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인데 인간의 역사는 우리 생각만큼 고결하고 숭고하지 않죠. 물론 그러한 비판적 인식이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왔다는 점에서 지적 고등동물로서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반성으로 무얼할 수 있을지 묻게 됩니다. 어쨌든 인류의 역사 자체가 피와 창과 칼로 타 종족과 생명을 배타적으로 밀어내고 점령하고 찢고 불태운 역사임은 어디 가지 않으니까요. 그 점에서 제발트의 글은 어떤 풍경을 글로써 취하고 적극적으로 반성적인 자세를 취하고 촉구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바라봅니다. 읽는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하지도 않고 나가서 거리로 싸우자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문장 몇 개를 공유합니다.
나는 섬 깊숙이 답사를 갈 때마다 이곳 남자들 전부가 목적을 잃은 지 오래인 파괴의 제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들은 대부분 작업복인 파란 사복 차림으로 산으로 가는 길목을 죄 막고 보초를 섰으며, 좀더 젊은 남자들은 군인 못지않은 무장을 한 채 지프나 산악용 차량을 타고 점령군이라도 되는 듯 아니면 적의 침공이 임박하기라도 한 듯 사방팔방을 그 지역을 헤집고 다녔다. 위협적인 몸짓에 중장비로 무장을 하고 면도도 안 한 그들의 모습은, 터무니없는 야욕이 넘친 나머지 자기 고향을 잿더미로 만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민병대처럼 보였다. (···) 그 사람들을 마주쳤을 때 그들이 아무개 행인하고는 자신들의 유혈 사업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섞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게 오해할 여지 없이 분명히 주지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 위험지역에서 당장 꺼지지 않으면 실수로 난사할 수도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몸짓으로 나를 길에서 쫒아냈다. ⏤50쪽. 지금 나는 그 옛날 서리가 내리던 초가을 아침 등굣길에 볼파르트라는 도축업자의 가게 마당을 지나던 때를 떠올려본다. 암사슴 여남은 마리를 막 수레에서 부려 보도블록으로 내동댕이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죽은 짐승들의 모습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내겐 이미 그때 사냥꾼들이 전나무 가지에 집착하는 면모며, 일요일이면 비어 있는 정육점 진열대의 흰 타일 위에 야자수가 놓여 있는 모습 또한 어쩐지 수상쩍게 느껴졌다. 빵집이라면 그런 장식은 필요할 턱이 없으니 말이다. 나중에 영국에서 소위 가족 푸줏간이라 불리는 곳의 쇼윈도에서, 진열된 고기 부위와 내장 장식용으로 줄세워 올려놓은 3센티미터 남짓한 녹색 플라스틱 꼬마 나무를 본 적이 있다. 우리가 흘리게 한 피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준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어디선가 공장에서 이러한 플라스틱 상록수 장식물을 대량생산한다는 엄연한 사실은, 바로 그 나무들의 극단적인 부조리성을 통해서 우리 안에 화해 욕구가 얼마나 강렬하며 우리가 그 화해를 예전부터 얼마나 값싸게 사들이고 있었는지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52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생각보다 읽을 거리도 많고 생각해볼 내용도 많아서 모임을 연장해서 2회에 걸쳐서 『캄포 산토』를 읽으려 합니다. 29일+15일로 일정이 변경될 듯합니다. 1회 모임은 2월 27일 자정에 끝이나며, 2부 ⟨스위스를 거쳐 유곽으로⟩까지입니다. 2회 모임은 ⟨꿈의 직물⟩부터 ⟨독일 학술원 입회 연설⟩까지를 읽으며, 총 보름간 진행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글 자체가 온전히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어떤 말들을 첨언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 해서 읽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었기도 하고요. 아마 내일부터 남은 챕터들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논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생소, 통합, 위기] 제발트는 해당 산문에서 페터 한트케의 연극 ⟨카스파르⟩를 다루며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연극 카스파르는 19세기 독일 뉘른베르크 거리에 등장한 정체불명의 괴소년 '카스파르 하우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우저가 발견될 당시 그는 제 6기병연대 4중대장 베스니히(Wessenig) 대위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의 제목은 "바이에른 왕국 국경에서/이름 없는 장소/1828년"(독일어: Von der Bäierischen Gränz / daß Orte ist unbenant / 1828)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익명으로 된 편지 작성자는 1812년 10월 7일에 이 소년이 신생아였을 때 자신이 양육권을 받아 키워왔으며 읽기, 쓰기 그리고 기독교를 가르쳤지만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보내지 않았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내용은 위키백과에도 실려 있는 카스파르 하우저라는 19세기 인물에 대한 대략적인 스케치입니다. 한국어로 번역히 돼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페터 한트케는 '카스파르'라는 연극에서, 사회화를 거치지 않은 한 소년이 언어를 배워가면서 사회 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제발트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언어가 어떤 박탈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호프만슈탈을 인용하며 외부에서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언어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즉, 언어는 단순히 표현수단인 것만이 아니라, 외부 질서의 말씀이나 명령, 나아가 지시문이 빼곡히 적힌 프롬프터처럼 주어지며, 그로 인해 박탈되는 영혼의 상태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박탈 이전의 상태를 '선실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제발트는 끊임없이 카프카를 호출하는데요, 본문에서 언급된 작품은 '유형지에서'이지만 저는 카프카의 '법앞에서'도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의사와는 무관하게 '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떠한 체계 안으로 굴러떨어지게 되는데요, 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습니다. 이른바 '법'은 한 인간의 탄생과 동시에 주어지는 처해지는 실존적인 상황이며, 뉘른베르크의 거리에서 발견된 10대 소년 카스파르에게는 세상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더 길게 얘기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혼자 메아리처럼 말하는 것이 좀 쑥스러워서 이 정도만 써도 될 듯합니다. 인상적으로 읽은 한 대목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카스파르를 항시 포위하고 있는 매체의 익명적 음성들은 그에게 "타인의 침투에 수동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의 소외"를 뜻한다. 카스파르의 내 부에서 무언가가 분열이 일어난다 주위의 영향이 침투하면서 배움이 시작된다. 일단 그는 어릿광대가 되어 자기 주위의 사물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가 인간으로서 얼마나 무능한지 몸소 체험한다. 소파의 쿠션 틈에 손이 끼이고, 책상 서랍이 그의 발등 위로 떨어지며, 흔들의자는 넘어진다. 그러면 카스파르는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는데, 매번 새로운 배움이 곧 새로운 공포인 까닭이다. 익살꾼에겐 "대상을 배운 대로 진지하게 다루는 것과 일부러 서투르게 다루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펼치는 세련된 연기에 불과한 일이, 백치 상태인 카스파르에겐 예측 불허의 사고일 뿐이다. 그 일은 사물을 지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다. ⏤69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역사와 자연사 사이] 이 산문은 이전에 읽었던 ⟪공중전과 문학⟫의 보론처럼 읽혔습니다. 같이 읽으면 좋은 대목이 많았습니다. 제발트의 글 중에서도 유례없을 정도로 비판적인 논조가 인상적인데요, 헤르만 헤세나 에른스트 윙거나 카사크 같은 전후 독일 문학의 작가들이 주장했던, '비극 앞에서 내적 망명으로서 문학'에 특히 각을 세웁니다. 제발트는 앞선 작가들이 문학으로써 내세우는 교육적인 새로운 교육적인 이상향이 또 다른 의미의 엘리트주의임을, 즉 "국가를 앞서고 초월해 활양하는 엘리트 학우회가 견지한 귀족적 이상의 왜상일 뿐인바, 그 학우회는 공인된 파시스트 엘리트들을 배출함으로써 부패의 극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완성"된다고 표한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사크와 같은 작가의 산문을 예외적으로 칭찬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로버트 버턴이 쓴 ⟪멜랑콜리의 해부⟫를 설명하며 후일 자신이 쓰게 될 작품을 예비하기도 합니다. 특히 제발트의 작품을 접근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한 '멜랑콜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대목도 나옵니다. 이에 대한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절대 암흑의 이상을 찾아나서는 여정은 화자가 정확히 알고 있듯이 물론 가망 없는 모험에 그칠 것이다. 망원경의 화각을 좁혀서 시야에 들어오는 천체들을 더 많이 제외할수록 그는 우주 공간을 더욱더 안쪽까지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며, 그러면 그 우주에서 거리가 멀어 어둡게만 보였던 천체들이 빛나며 나타날 것이다. 이 작업은 흔해빠진 의미에서의 허무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 작업은 죽음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검은 점으로 접근하는 것이며, 화자의 상상 속에서는 계속해서 "점점 더 검어지고 굵어지고 길어지기까지 하는" 저 검은 점으로 접근하는 것이자, "망각의 강변에서 편안히 뿌리내린 무성한 잡초"처럼 멩랑콜리가 들러붙는 검은 점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그것은 굴종과는 완전히 다른 도발의 몸짓이다. ⏤144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애도의 구축] 앞서 '역사와 자연사'에 이어서, 제발트는 1950년대 이후 독일 문학에서 제대로 된 애도가 구축되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흔히 착한 독일 남성과 유대계 여성의 연애담을 내세우며 과오를 감정적으로 청산하려 한 작품들이 그 주된 비판의 대상입니다. 다 양보해서 전후 많은 독일인이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일부' 악행을 저지른 독일인이 국가적 규모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대다수의 선량한 독일인'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완벽히 무능했다는 사실은 어디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미히처리의 온당한 불만처럼, 우리 독자들은 분명 생존자들이 겪었던 갈등을 있는 그대로 더 많이 듣고 싶었지만 조악하게 그려진 무고한 희망 인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희망 인물이란 아무런 의무에 매이지 않고 완전히 사적인 삶으로 퇴거해 달관한 고독한 은자들로, 기회주의적인 동족들 속에서 삶을 견뎌낼 수 있는 자들이다."⏤122쪽. 제발트는 비슷한 맥락에서 귄터 그라스의 작품 또한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귄터 그라스가 작품 안에서 작가를 집단적인 양심에 시달리는 존재이며 자기 애도의 철학을 수행했다는 점에서는 흐릿하나마 역사적 책무를 이행했다고 말합니다. 이와 비교해서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를 논의하는데요, 그는 어설픈 우회로를 따르지 않고 곧장 애도의 핵심에서 출발하며, 제발트에 따르면 "죄많은 동시대인의 양심을 관리하는 대표자격"인 인물을 창조해냅니다. 여기서도 제발트의 멜랑콜리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멜랑콜리는 단순한 비관이 아니며, "마치 소설 '성'의 서두에서 미지의 나라로 들어가는 다리를 자발적으로 건넌 여행자처럼 차라리 죽음의 본진에 쳐들어가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의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극복하려는 의지조차 포기했을 때 얻어지는 멜랑콜리한 구원처럼 읽힙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통회] '통회'란 고해성사의 다섯 단계 중 깊이 뉘우치는 단계를 일컫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발트는 페터 바이스라는 인물의 삶을 추적함으로써 독일이 전쟁 중 저지른 만행을 통회합니다. 페터 바이스는 1970년 '저항의 미학'이라는 작품을 쓰며, 전후 독일의 집단적인 망각에 저항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망각에 맞서 기억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면 추모하는 과정에서 추모자는 자기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기억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반복하자면, 고통스러운 기억은 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옥을 묘사하고 관람하는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안전한 자리이며 당사자가 작은 천국에 있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마치 단테가 1만 4233행의 시로 이뤄진 작품을 쓰면서 자신에게 내려진 처형 선고를 떠올렸던 것처럼 페터 바이스는 집필 활동을 계속하면서, 훗날 자신의 작품을 읽을 사람들을 천국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치열하게 지옥을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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