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쪽 이중섭이 신수동에 살며 개인전을 연 1955년 김수영 시인이 서울 성북구에서 구수동으로 이사를 왔다 시인 부부의 그 유명한 양계 생활이 시작된 곳도 이곳이다 부인 김현경 여사가 병아리 11마리를 사 왔는데 나중에 이게 750마리로 불었다 닭을 키우는 것은 취미가 아닌 생계 수단이었다 김 여사는 시인에게 "닭이 알만 낳게 되면 당신도 그 지긋지긋한 원고료 벌이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돼요"라고 말했다
: 예술가의 삶과 양계농장주인의 삶은 아주 다를텐데 김수영 시인이 양계생활을 했다니 놀랍습니다 그 중 김수영 시인 부인, 김현경 여사의 말이 너무 멋지고 예뻐서 와 닿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하는 마음과 어떻게 병아리 11마리를 750마리로 불릴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여러모로 여사님을 배우고 싶네요 ^^
[서강도서관 x 그믐] ①우리동네 초대석_장강명 <아무튼, 현수동>
D-29
거북별85
장맥주
김수영 시인과 이중섭 화가의 이야기는 『아무튼, 현수동』을 쓰면서 더 쓰고 싶은데 꾹 참고 자제한 부분입니다. 이 자리에서 풀어놓으면, 일단 김수영 시인이 닭을 최대 몇 마리까지 쳤는지 좀 궁금합니다. 산문 「양계변명」에는 천 마리라는 수치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사모님인 김현경 여사님의 기록이 함께 나오는 한겨레 기사가 보다 정확할 거 같아서 750마리로 적었어요. 「양계변명」에 나오는 수치는 꼼꼼히 읽으면 광흥창역 일대에서 부인과 함께 키운 닭의 수가 아니라 창동에서 김수영 시인 어머니가 키운 닭의 수를 말하는 것 같고요.
장맥주
이중섭 화가가 신수동으로 이사 온 것은 1954년 11월 1일이고, 대구로 간 것은 1955년 2월 24일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구수동으로 이사 온 것은 1955년 6월이니까 두 사람이 현수동에 산 시기는 겹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장소를 보면 참 아슬아슬하기는 해요. 이중섭 화가의 집은 노고산 자락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주소는 알려져 있지 않고, 김수영 시인의 집은 구수동 41-2번지입니다. 신수동이 큰 동네는 아니고, 구수동은 신수동 바로 옆이라서, 신수동 끝에서 구수동 끝까지 걸어서 20분이 안 됩니다.
장맥주
김수영 시 인이 이중섭 화가를 알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좋은 전람회가 열리고 있는데 뭘 하느냐”고 평화신문 기자였던 이활 시인을 다그쳤으니까요. 이중섭에 대한 기사가 하나도 나오기 전이었습니다. 문화부 기자보다도 더 미술계 소식에 밝았고 안목이 있었던 김수영... 그런데 이중섭 화가가 김수영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서로 구수동 주민, 현수동 주민인지 알았는지는 더 모르겠습니다.
거북별85
김수영 시인의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이중섭 화가를 챙기시는 걸 보면요~ 위대한 예술가는 뛰어난 예술가를 알아보는 능력도 있으신걸까요??
장강명 작가님의 더 많은 이야기들도 감사합니다^^
멋진동네에 멋진 사람들은 왠지 한몸 인거 같습니다~
사장님
서강도서관에서 작가님을 뵙고 싶었는데 벌써 마감이네요..ㅠㅠ 아쉽지만 오프라인에서라도 뵙겠습니다.^^!!
장맥주
아... 연초 첫 강연 행사라서 신청자가 많았나 봅니다. 다음에 또 인연이 닿겠지요? 아쉽지만 그믐에서라도 이야기 나누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sol
친구와 마포에서 보기로 하고, 조금 일찍 나와 일부러 광흥창역에 내려 잠깐 거닐어봤어요. 와우근린공원도 보고, 서강도서관도 지나치고요. 모르고 다녔을 때와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요ㅎㅎ
장맥주
감사합니다. 뿌듯~~~ 하네요! ^^
북마크
-_- 강연은 신청못했어요. 예상했지만 정말 빨리 마감되네요. ㅠㅠ 그대신 외출하기 싫은 토요일 오후 '아무튼, 현수동'을 두 번째 읽고 있어요. 골목골목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 무속(?) 등은 호기심이 들고 작가님이 그리는 현수동에 살고 싶어집니다. 현수동에서 현수동으로 출퇴근하고, 골목의 가게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밤섬에 갈 순 없지만 플로깅은 할 수 있는!! 정직하고 편안한 느슨한 연대가 있는 현수동이요.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님이 옆집에 산다해도 우편물을 훔쳐보지 않고 벨도 누르지 않을 매너있는 동네사람이 되고 싶네요. ㅎㅎ
거북별85
ㅎㅎ 저도 비슷한 마음입니다 예쁜 서강도서관과 멋진 현수동,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님. 저도 이곳에서 매너있는 동네사람으로 행복하게 지내는 상상을 해봅니다^^
오후
논어 <이인>을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시조가 있습니다.
살구꽃 핀 마을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본들 반겨 아니 맞으리.
<아무튼, 현수동>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났을 때 이 시조가, 보다 정확하게는 ‘살구꽃 핀 마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레닌은 어떤 동네에 살고 싶었던 걸까’ 챕터에서 이미 짐작했지만, 현수동은 장각가님이 그리는 마을의 ‘이상향’이네요. 그 이상향이 구체적이고 합리적이고 따뜻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꿈꾸는 삶과 닮아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현수동 같은 동네가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 동네의 모습을 함께 구상하는(p.132)’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옮겨 적고 싶은 좋은 구절이 무척 많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하나 골라보았어요.
p.88 그런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엄숙하고 경건하게 만드는 공간이 모든 동네에 한 곳씩 있기 바란다. 우리는 그런 마을에서 그 공간을 의식하며 살면서도 동시에 유쾌함를 잃지 않고, 농담을 즐기고, 미신과 유사과학을 배격하고, 체계적인 회의주의외 지적인 도전정신을 추구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장맥주
오후님, 시 선물 감사합니다. ‘현 수동 같은 동네가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 동네의 모습을 함께 구상하는’ 일에 동참해주셔서 그것도 감사하고요. (정작 이렇게 감사 드리는 저는 살구꽃이랑 매화꽃도 잘 구별 못하는 사람이라 약간 머쓱하긴 해요. ^^;;;) 제가 『논어』를 그리 감명 깊게 읽은 것은 아닌데, 이인편의 그 구절은 왠지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사실 밤섬 같은 곳이 모든 동네에 있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성황당을 지을 수도 없고, 현대의 교회나 사찰에 그런 역할을 맡기려니 그것도 어려울 거 같기는 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보라매공원에 아내와 함께 갔는데 거기서 산업재해희생자 위령탑을 보았어요. (그런 기념물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조형물 스타일이 굉장히 구식으로 보여서 오래 전에 세운 건가 싶었는데 그렇지도 않았고 2000년에 설립된 탑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주변에서 말없이 서성이다가 집에 왔습니다.
승환
조합 재건축이 관건인데 요즘봐서는 힘들지 않을가 봅니다 기다리다 아파트가 들어설지 끝남동같이 예전홍대골목처럼 빌라상가가 골목으로 먼저 파고들어와 선점할지 모르겠습니다
발전소가 지역 랜드마크할 만큼 지원을 받는지가 관건 같습니다
어차피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데도 홍대에서 너무 먼곳은 상징성이 없어지지않을가 싶습니다 홍대앞은 교통이나 인프라가 몰빵인 동네라
상수동 당인동 골목 골목에 청계천 헌책방거리같이 독립서점들이 우후죽순 들어섰음 하는 바램입니다
장맥주
아, 지금 상황이 그러하군요. 사실 그 일대가 아파트단지가 되는 모습보다는 헌책방거리가 되는 모습이 저도 상상하기에는 더 즐겁습니다만, 그곳에 사시는 분들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주민들이 이익을 거두면서 개성도 있고 홍대 주변이라는 문화 인프라도 잘 활용하는 동네가 되면 좋을 텐데, 참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 서울 명소로 밤섬을 안내한 적이 있어요. 서강대교를 같이 걸어서 밤섬 위까지 갔고 거기서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했습니다. 프랑스 취재진이 밤섬 이야기도 흥미롭게 들었지만 “이 섬을 폭파하고 거기서 얻은 골재로 저곳을 만들었다”며 여의도를 가리키니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요. 저 높은 빌딩숲이 그러면 불과 50년 전에는 없었던 거냐면서. 그래서 제가 지금 남쪽으로 보이는 건물들 전체가 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만들어진 거다, 그 전에는 허허벌판이었다, 라고 하니 뜻밖에도 경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나는 옛 골목과 건물을 간직한 파리가 부럽다”라고 하니 프랑스 기자가 몹시 냉소적으로 대꾸하더군요. “파리는 사람 사는 도시가 아니다, 박물관이다” 하고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sol
그 공간에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좋을지는 고민이 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저부터도 옛 건물보다 깔끔하게 리모델링 된 건물에서 사는 것이 좋거든요.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면- 그런 곳이 있기를 바라는 건 이기적인 생각인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동네의 특징을 살리면서 생활에 불편하지 않은 동네라면 참 좋겠습니다. 다 같이 고민하고, 노력하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ㅜ
장맥주
저도 지금 주변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축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직전에 살았던 집도 지은지 얼마 안 된 신도시(광교) 아파트였고요. @sol 님 고민과 바람, 아쉬움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 저도 어떤 게 정답인지, 하다못해 '나의 답'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
승환
저는 나름 이동네 현수동에 많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님이 정말 고생하시며 자료 수집을 많이 하셨네요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곳은 현수동의 옆동네입니다 요즘 역 주변으로 동네를 가르지만 그 섬같이 생긴 서강대교 앞에 복개천을 기준으로 동네가 나뉘었었져 아버지 어릴적엔 신수동과 상수동 (하중동 당인동 하수동)이 그 안산자락에서 신촌을 지나 내려오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석전을 명절마다 했다고 한 기억이 있네여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생겨도 그냥 팔자려니 하던 시절이었다고
밤섬과 와우산의 기억들 밤섬사람들 얘기도 간만에 추억에 젖게 하네요 와우산 자락에 판자촌에 살던친구들 공민왕사당과 지금 이랜드 리테일을 없애고 이랜드에서 만든 청년임대주택자리가 예전 홍익공전 자리였고
복작복작해지기전 홍대앞거리들과 학원들 고만고만했던 극동방송국 앞거리 여학생들이 자주가던 이층의 산토끼 떡복이집 우후죽순 늘어나던 90년대초 로바다야끼 락카페 등등
제가 살아왔던 공간들을 이야기해주는 글을 읽고 뭔가찡하고 술이라도 한잔 사야할거 같은 반가움이 넘치고 그러네요
그 구화학교가 엘마트자리 뒤에 있어 초등학교시절 나이많은 청각장애 동창들도 몇몆잏었던 기억이나네여 먹고살기도 힘든시절이었는데 청각장애가 있는 자식때문에 현수동 근처로 이사온 부모들의 마음이 이제서야 대단히 느껴집니다
밤은 늦고 하고픈 말들이 주절이 넘치는데 밤섬자이 아파트 앞 배만드는 할아버지 한강이 정비되기전에 밤섬앞 동작대교까지 목선에 야마하 모터 달고 다녀왔던 어린시절들 다 생각이나서 주체를 못하겠네요
연남동도 핫해졌지만 아마 상수동 당인동 합정동 절두산부근은 좀더 뜰거 같아요
홍대앞 땡땡거리 부근의 작은 골목의 술집들 핫하지 않은데 그시절의 홍대앞 주점과 바들의 분위기 아직 상수쪽에 조금 남아 있지만 저두 그립습니다
김새섬
써주신 글 너무 재미있어요.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저도 일부는 조금 알고 일부는 아예 모르는 이야기지만 이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지, 그 때 여기는 이렇게 생겼었지 하는 이야기들 너무 좋아요. 써 주신 글 읽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네요.
누군가의 고향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기분이 이상해져요. 제 고향이 아닌데도 왜 그럴까요. 심지어 외국인이 자기 고향 이야기 해도 들으면서 동화됨. 가본 적도 없는 곳인데 그리워집니다.
장맥주
헉... 저야말로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다가 들킨 기분입니다. 서강대교 옆에 개천이 있었다는 것이나 밤섬의 목선, 와우산의 판잣집, 구화학교 등등 다 저는 기록을 보며 상상만 할 수 있었고 사실 누군가의 증언을 들은 적도 없거든요. 어떤 모습인지 무척 궁금했는데... (그나마 홍대앞 땡땡거리와 작은 술집들은 기억합니다.)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말씀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수동-당인동-합정동이 어떻게 될지 저도 궁금합니다. 현재로서는 팬데믹으로 상권이 완전히 무너졌다가 천천히 회복하는 것 같은데 어떨지... 마포새빛문화숲은 아직은 주변 상권에 그리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은 느낌입니다. 몇 년 전에 지역문화운동 하시는 분과 말씀을 나누는데, 그 분은 이미 합정동 일대가 너무 비싸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없다고 주장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강 건너 문래가 뜨는 거다, 하고 덧붙이기도 하셨는데 그런가 싶기도 하고 합정에서 문래는 좀 멀지 않나 싶기도 했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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