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는 독서클럽을 몇년째 운영하고 있다고 나는 책과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책 읽기가 어렵다. 조카 주원에게도 장작가님 책을 몇권 보냈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해변의 카프카 읽고 있는데, 재미있어요' 라는 답이 왔다.
하루키 책은 다 재미있지. 그런데 혹시 도스토옙스키 책은 읽고 있니? 지금이나, 늦어도 이십대 초반이 아니면 참 읽기 힘든 책이야.
주원이는 고3이고, 주원에게 책을 보내고 있는걸 주원이 엄마가 알면 '끌끌'하겠지만, 어쩌겠나. 열아홉살은 책 읽기 참 좋은 나이다. 나도 열아홉살엔 엄청 읽었다. 어떤 책은 책장을 넘기는게 아까웠다. 스물 아홉에도 그랬다. 좀 덜했지만 서른 아홉도 역시. 그러나 어느 틈에 독서 고자가 되어 가고 있는것 같다.(고 이 바쁜 아침 시간에 포스팅 했습니다)
(정우성독서클럽) 장강명을 읽다
D-29
구씨
브라운필드
고3에게 책을 보내시다니...
구씨
걔네 엄마가 절 싫어합니다.
삼겹살요정
안녕하세요! 저는 방금 '책 한번 써봅시다'를 구매했습니다. :)
구씨
삼겹살 요정님은 책 빨리 쓰셔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면옥
/옥수동 독서당 490년 전 모습은…귀한 산수화의 귀환/ '조선의 북클럽'을 다룬 기사에요. 왕이 총애하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 주고 독서당 가서 책 읽으라고 했더라는...정우성 북클럽이 생각났습니다^^
구씨
하나면옥님. 감사. ㅎㅎㅎ 저희는 책만 사는듯요 ㅎㅎㅎㅎ 이제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면옥
갑시다 독서당. 술동이 실은 배 띄우고ㅎㅎㅎㅎ
순간
책한번써봅시다-를 메인으로 해서 작가님의 다른 책 소설, 신혼일기(?)로 확장 중입니다….
구씨
저랑 같은 루트. 저도 두개를 같이 보고 있는중. 순간님은 책한번 써보실 생각이 좀 드세요?
구씨
저랑 같은 루트. 저도 두개를 같이 보고 있는중. 순간님은 책한번 써보실 생각이 좀 드세요?
순간
책내고 반응이 없다 의기소침해 하는 친구에게 ‘다음에 발표할 작품이 이전 작품에 대한 홍보도구도 된다’는 책의 문장을 보내줬어요 2쇄를 기원하며
구씨
앗. 그분이시구나. ㅎㅎㅎ
구씨
앗. 그분이시구나. ㅎㅎㅎ
구씨
5년만의 신 혼 여행에서는 '공대생의 흔적'이 좀 나오는 편. '나는 에치제이를 만나기전에도 잘 살아왔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쾌락과 행복의 정도를 수직선에 표시한다 치자. 그렇다면 나는 늘 그 표식을 수직선에서 0보다 오른쪽에, 양수쪽에 표시해 왔다...' 와 같은.
구씨
5년만의 신혼여행은 장강명작가의 신혼여행 기록인데, 누군가는 사진으로 인스타로 특별한 여행의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요즘 대다수는 그럴건데, 이 책은 소설가가 신혼여행을 기록하는 방식이랄까. 부럽다.
구씨
이 얼마나 모순인가? 마치 세상의 모든 작은 즐거움들이 상황에 따라 논리를 바꿔가며 나를 살리려 애쓰는 것 같다. 에치제이의 힘이 부칠때는 글 쓰기가, 글쓰기의 힘이 모자랄 때는 에치제이가, 그리고 치킨이라든가 맥주라든가 자전가라든가 재미있는 책이라든가 초여름의 산들바람이라든가 잘생긴 개 같은 것들이.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죽지 않고 사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도 못하면서. (조카에게 보내줘야겠다)
구씨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체념해야만 한다. 이 체념은 '세상 어느 누구도 그 거대한 불공정함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체념은 ' 그 거대한 불의도 내 한 몸의 탄수화물 부족을 이기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가히 우주적 규모의 불의와, '탄수화물 섭취량과 주관적 행복의 상관관계'라는 엄연한 진실 양쪽 모두를 본 인간에게는 넥 가지 길이 있다고 본다. 초월, 절망, 체념, 위선.
구씨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의 정체다.
생각은 현실을 넘어선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생각 덕분에 우리는 애국이니 박애니, 살을 비비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을 넘어선 거대한 사랑을 상상한다. 구원이니 해탈이니, 근육의 나른함과 위장의 포만감을 넘어선 거대한 행복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허구를 상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거대한 행복을 얻지 못했으며, 거대한 집단 속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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