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의 새로운 얼굴들] 유령의 마음으로

D-29
12쪽, [유령이 카운터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나는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확실히 젊은 감성이 (그게 뭔진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서도) 느껴지는 소설이네요. 대학교 여름 방학 느낌이랄까..짧고 잘 읽히는 문장들이 좋고, 뭔가 지저분한 더함 없이 깔끔하게 끝나는 느낌이 괜찮네요. 감자빵이 먹고 싶다는...
아니 벌써 구매하고 읽고계시다니!! 실행력이 굉장하신데요. 고쿠라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대학교 여름 방학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80쪽, [나는 나무가 되어 버린 남자를 바라보며 수진을 생각했다. 지속되고 축적되는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81쪽, [화장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느라 새로 산 티셔츠가 눅눅해졌다.] 집에서는 화장실(욕실) 밖에서 옷을 갈아입어서 늘 뽀송뽀송한 옷을 입기 마련인데, 어딘가 멀리 놀러가거나 집에 누군가 찾아오면 눅눅해진 티셔츠를 입을 수 밖에 없던 순간이 생각나네요.
맞아요. 티셔츠는 그래도 양반이에요. 속옷의 경우는 완전히 마르지 않은 몸에 입느라 추적추적하고 들러붙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82쪽,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람들을 비둘기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도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내 집에서 나무가 된 남자, 극장 창고에서 자라는 버섯들, 정확히 같은 모양으로 튀겨지는 팝콘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 그리고 수진. 수진. 수진. 수진을 생각하는 일은 슬프거나 아프지 않았다. 그것은 비둘기들이 때가 되면 날아들고 날아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문장을 읽어버려서 정확히 같은 모양으로 튀겨지는 팝콘이 존재할까에 대해서 궁금해져서 자기전에 오랫동안 상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92쪽, [그 순간 산이 저기, 하고 말을 걸었다. 저도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보려고요. 사은품으로 전기밥솥도 준대요. 그거 타면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수도 있잖아요. 밥솥이 생긴다고 밥을 해 먹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러면 좋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어떤 사연을 보내려고요? 나무가 된 거요. 산이 진지한 얼굴로 말해서 나도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산이 사연을 말하면 내가 휴대폰으로 받아 적어 라디오 사연 코너에 올리기로 했다. 산은 진심을 담아 자신이 나무가 된 사연을 말했다. 실연당하고 발에서 뿌리가 자란 이야기. 밤에는 꿈을 꾸는 대신에 생각이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는 이야기. 그중에는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었다. 마지막에 산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도 언니를 찾아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잠시 뒤에 산이 말했다. 그건 지워 주세요. 잠시 뒤에 또다시 말했다. 아니. 그냥 써주세요.] 나무는 밤에 정말 꿈을 꾸지 못할까. 나무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말했던걸 취소했다가, 취소한걸 다시 취소하는 그 과정에서 절박함이 보인다. 취소의 취소
94쪽, [사귀기 전에 선영이가 나한테 지어 줬던 별명이 오이였어요. 왜요? 선영이는 내가 싫었는데 어딜 가도 내가 끼어 있었다는 거예요. 과방에도, 동아리에도, 술자리에도. 짜장면이나 김밥처럼 좋아하는 음식에 자꾸만 오이가 들어있는 것처럼. 그래도 친해진 다음에는 오이라고 했던 걸 취소해 줬어요.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슬픈 별명은 처음 들어보았다. 선영 언니가 나에게 지어 준 별명은 간첩이었다. 수진의 MP3로만 노래를 듣던 때라 나는 언니가 들려주는 최근 노래들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혹시 간첩이야? 선영 언니는 몇 번이나 그렇게 물었다. 그 뒤로 선영 언니는 나를 간첩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 너머 내가 속한 다른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았다.]
낯선 밤에 우리는/ 113쪽, [인터넷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기계 속에서 액체는 막대가 꽂히고, 얼고, 돌아가고, 포장되었다. 금옥이 혼자가 되는 과정은 그처럼 매끄럽게 짆애되었다. 열여섯 살 금옥은 수군거림과 욕설, 배척의 순서를 착실하게 밟아 나갔다. 예쁜 포장지가 싸이는 것으로 끝나는 영상에서처럼, 졸업 이후 금옥과의 기억은 내게 오랫동안 밀봉되어 있었다.]
113쪽, [나 오늘 금옥이 만났어. 금옥이 기억나니.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나는 '만났어'를 '마주쳤어'로 고쳐 보냈다.]
129쪽, [녹색 철문 밑에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다가, 검정 사인펜으로 그려진 작은 낙서를 발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달팽이 그림이었다. 다음에 금옥에게도 보여 줘야지. 금옥은 분명 좋아할 것이다. 중학교 때 선생님 눈을 피해 전달된 금옥의 쪽지는 막상 펴 보면 의미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긴장하며 펼쳐 본 쪽지에 도토리 한 알이 달랑 그려져 있어 웃음이 터졌던 적도 있었다. 별일 아닐 거야. 금옥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언덕을 내려갔다.]
'빛이 나지 않아요' 를 다 읽었습니다. 읽다가 조금 울었어요. ㅎㅎ 지선씨는 처음부터 빛이 나고 있었는데... 저는 이 단편이 표제작 '유령의 마음으로' 보다 좋네요. 왠지 작가님이 코로나 시절에 썼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발표 시기를 살펴보니 악스트 21년 11/12호에 실린 글이네요. 뭐 훨씬 이전에 쓰고 발표만 그 때 하셨을 수도 있긴 한데 그냥 궁예로 코로나가 한참일 때 쓰신 거 아닐까 싶은...
근데 작품들이 참 잘 읽히네요. 29일짜리 모임인데 이 기세대로라면 거의 일주일 안에 다 읽을 거 같습니다.
세 번째로 실린 '여름은 물빛처럼' 도 다 읽었어요. 아직까지 저의 베스트는 두 번째 작품 '빛이 나지 않아요' 입니다. 여기쯤 읽으니 작가의 개성과 스타일을 알 것 같네요.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마주치는 환상 같은 사건들.... 그런데 세 번째 작품은 조카에게 읽어주었던 동화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옆 집에 기린이 이사왔어요. 라는 내용이었던 듯.
118쪽,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하고 조용했던 금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마침내 알게 된 거야. 나에게는 원죄가 있었다는 거. 희애야, 믿음이 오면 힘든 건 힘든 게 아니게 돼.]
이야기 뒷 부분에 시아버지가 달력에 친 동그라미가 뭔가요? 제가 이해를 못하고 있는 듯.
4번째 작품 '낯선 밤에 우리는' 도 잘 읽었습니다. 환상과 비현실의 세계로 초대하는 분이신가 했는데, 그냥 그런 것 없이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만으로도 잘 쓰시네요. 읽다 보니 김애란 작가님이 조금 생각나기도 합니다.
5번째 작품 '집에 가서 자야지' 도 다 읽었습니다. 하루에 한 편씩 곶감처럼 빼 먹으면서 읽는 맛이 있네요. 작품들이 다들 가독성이 좋아요. 일단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막히는 부분 없이 끝까지 술술 넘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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