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의 새로운 얼굴들] 유령의 마음으로

D-29
집에 가서 자야지_150쪽, [제가요, 사실은 한 달 전에 여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원래는 청소도 잘하는 편인데, 그날 이후로 청소는 커녕 꼼짝도 하기 싫더라고요. 종일 굶다가 새벽에 배달 음식 한번 시켜 먹고. 그러다 혼자 술 마시고. 아, 얼마전에 왓챠에 가입했거든요. 거기에서 일주일마다 제 취향에 맞는 영화 다섯 편을 추천해 줘서 다 챙겨 봤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추천 영화들이 제 취향이랑 멀어져요.] 추천 영화만 보게 된 이상한 현대사회. 어떤 플랫폼이든 자꾸만 내게 추천을 해줘서 점점 더 취향이 좁아질 수 밖에.
169쪽, [정우는 벌떡 일어나더니 잠시만요, 하고는 서랍을 뒤적거렸다. 저 중국집 도장 모아 둔 게 있거든요. 잘하면 탕수육 공짜로 시킬 수 있어요. 정우는 한참 만에 명함만 한 쿠폰을 찾아냈다. 자금성이라고 적힌 새빨간 종이 위로는 도장 칸이 열 개였는데, 도장은 다섯 개밖에 없었다. 많을 줄 알았는데 턱도 없네요. 그런데 조가 쿠폰을 보더니 자기 집에도 쿠폰이 있다며 갖고 오겠다고 했다. 잘하면 합칠 수도 있잖아. 정작 조가 들고 온 쿠폰에는 도장이 두 개밖에 안 찍혀 있었다. 우리는 포기하고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도장은 이제 여덟 개가 되었다.]
171쪽, [오늘은 퇴근하고 정우 자취방에 가기로 했다. 어젯밤에 정우는 단체 메시지 방에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보름 전 조가 “지금 당장 갈게.”라고 보낸 문자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던 메시지 방이었다. 사진에는 자금성 쿠폰 두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확대해 보니 정우의 쿠폰에는 도장 여덟 개, 조의 쿠폰에는 두 개 해서 총 열 개의 도장이 모여 있었다. 형들 없는 사이에 두 번 더 시켜 먹었어요. 정우가 이어서 문자를 보냈다. 나와 조도 기여한 바가 있으니 내일 저녁에 같이 탕수육을 먹자는 것이었다.] 탕수육을 먹기 위해서는 참 많은 사람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172쪽, [이상한데요. 정우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전화를 안 받아요. 우리는 스피커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계속 가다가 음성메시지로 넘어갔다. 여기 쿠폰에도 연중무휴라고 적혀 있잖아요. 정우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망한 거 아니야? 조가 말했다. 저 어제도 여기서 시켜 먹었어요. 정우가 대답했다. 10분 뒤에 다시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그냥 짜파게티 끓여 먹자.]
<동면하는 남자>를 읽으며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의 영화 <주식회사 스페셜액터스>가 떠올랐습니다. 혹시 이 댓글을 보고 계신분이 있다면 추천드립니다!
194쪽, [감독님, 하고 부르자 감독이 드디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봤다. 불러 놓고 왜 말을 안 해. 나는 가만있다가 물었다. 어머님 식당에 박하사탕은 먹으라고 둔 거 맞아요? 감독은 멋쩍게 웃더니 걔네 먹지 마라, 식당 창업 멤버들이야, 하고 대답했다.]
저도 이거 너무 웃겼는데 ㅎㅎ 밥 먹고 나올 때 식당 계산하는 카운터 위에 흰 색 마름모 모양의 박하사탕들이 투명한 유리 단지에 들어있고 집게로 그 중 하나를 들어 올렸을 때 떨어지지 않아 난감했던 기억 다들 있는 거 맞죠? 보통 힘을 주면 바로 떨어지는데 어떤 것들은 대체 이 사탕들은 언제부터 녹았다 붙었다 했던 걸까 잠시 상념에 빠지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저의 개인적 취향은 식당 후식은 개별 포장된 폴로 사탕을 주시는 것이 좋더란...
194쪽, [나는 세수하다가도 나와서 통장에 찍힌 숫자 0일곱 개를 들여다보았다. 천만 원으로는 내일이라도 당장 감독과 정수를 떠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머무르게 했다.]
200쪽, [오래전에 정수의 일기장을 훔쳐 읽은 적이 있었다. 함께 산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따. 주경이는 가끔 자면서 말을 한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일기는 거기서 멈춰 있었다. 나는 그 뒷말이 오랫동안 궁금했다. 때로는 좋은 문장들이 떠올랐다. 더 사랑하게 된다, 이불을 덮어 주게 된다,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때로는 나쁜 문장들이 떠올랐다. 미워하게 된다, 숨이 막힌다, 죽고 싶어진다. 한때는 그 생각만으로도 밤을 새울 수 있었다.]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_240쪽, [빠르구나, 빨라. 서울에서 내 죽임이 잊히는 속도는 한밤중의 배달 오토바이만큼이나 빠르다. 하기야 서울은 사람이 아쉽지 않은 도시, 사람 하나쯤은 티 나지 않는 도시이니까. 같은 이유로 나는 서울을 좋아하기도 했다.]
248쪽, [스크린 속 숫자가 0이 되자 무대 조명이 켜지고 콜드플레이가 등장했다. 함성과 함께 응원 불빛이 물결처럼 흔들렸고, 관객들의 머리 위로 종이 눈이 쏟아졌다. 흥분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가만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었지만 내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들뜨거나 흥분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눈앞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서도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온갖 색의 조명으로 물드는 무대와 관객들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팔을 천천히 앞으로 뻗어 보았다. 조명에서 나오는 붉은 빛은 내 팔에 닿는 순간 사라졌다. 다른 조명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색의 조명이 닿아도 내 팔은 변함없이 어둠, 새까만 어둠이었다. 나는 어두운 팔을 바라보다가, 화려한 빛으로 물든 무대와 관객들을 바라보다가, 첫 곡이 끝나기 전에 공연장에서 빠져나왔다.]
249쪽, [왜 그랬어? 그냥 기분이 이상했어. 거기서는 아무 생각도 말았어야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만 바라보았다. 청소기 말이 맞았다. 공연장에서는 아무 생각도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이, 그것도 지나치게 살아 있는 것이 무서웠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255쪽, [첫차를 보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으세요? 여자가 물었다. 용기가 필요해서요. 역무원이 대답했다. 그는 생전에도 마음이 무너질 때면 첫차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다. 조용하던 플랫폼에 약속처럼, 마법처럼, 때로는 기적처럼 첫차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없던 용기가 생겨났다고.]
262쪽,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다음과 같은 장면들로부터 흘러나왔음을 적어 둔다. 침대 발치에 놓인 거울, 방 안에서 내려다보던 새벽의 고속도로, 폐업한 가게 내부에서 죽어 가던 식물들, 흐르는 물, 더 세게 흐르는 물, 독립 영화관 스크린에 닿던 지하의 빛과 가로수에 닿던 지상의 빛, 나무라는 이름의 나무, 새벽 첫차와 자정의 택시, 신경증과 환영들, 낮 같았던 밤과 밤 같았던 무수한 낮들.]
삶을 조금이나마 조금 더 열심히 살고 싶어지게 만든 책이었다. 길을 걷다가 나무에게서도, 버려진 청소기에서도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오....'유령의 마음으로'를 읽고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과 생명력에 대해 생각하게 되셨군요. 임선우 작가님이 읽으시면 왠지 찡하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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