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발트 읽기] 『현기증・감정들』 같이 읽어요

D-29
문득 생각이 나서 추가합니다. 『현기증・감정들』을 소설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해서 늘 약간의 찜찜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설'이라고 부를 때 얼른 떠오르는 몇 가지 통념과 제발트의 글들은 부합하지 않습니다. 제발트는 자신의 작품을 '소설(Roman)'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산문 픽션(Prose fiction)이라고 부르고자 했다고 합니다. 오늘 심심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이경진 평론가의 ⟨제발트의 다섯 가지 산문⟩이라는 작가론을 읽으면서 알게 된 내용입니다. 이는 한자어인 散文의 본의와 잘 들어맞습니다. '散'은 '흩다'(한데 모여 있던 것을 따로 떨어지게 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정말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흔히 글이라고 하면 하나의 주제를 향해서 소실점을 형성하는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제발트의 글은 그 정반대가 연상되니까요. 어떤 텅 빈 중심의 주변을 배회하기, 마구 흩어지기, 목적도 없이 정처도 없이 멤돌기. 이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산문 픽션'이라는 다소 복잡한 이 명명은 소설과 에세이를 각각 겨냥하고 있다. 즉 산문이면서 픽션인 것은 종래의 장르론에서 보면 '소설'밖에 없는데 제발트는 자신의 작품을 소설과 구분짓기 위해 '산문 픽션'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또한 제발트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 에세이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에세이는 논픽션 장르에 속하므로 제발트는 '산문'에 굳이 '픽션'이란 개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에세이와도 구분지으려 한 것이다."⏤⟨제밡트의 다섯 가지 산문⟩
화제로 지정된 대화
[#4차 시기 시작 ~⟨귀향⟩] 남은 9일 동안 4부를 읽겠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4부 시작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모임은 25일 자정에 종료됩니다.
그 일뿐만 아니라 때때로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광경을 마주하면 큰 감동의 물결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감정을 그토록 뒤흔드는 것인지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탄 버스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 산비탈에는 낙엽송들의 눈부신 색채가 불꽃처럼 현란했으며 산 정상에서 꽤 낮은 아래쪽 지역까지 눈이 내렸던 흔적이 있었다. 버스는 페른파스 협로를 가로질러 달렸다. 바윗돌로 이루어진 산비탈이 무너질 때마다 마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손가락처럼 아래쪽 숲속에 쑥쑥 떨어져 박히는 낙석들이 놀라웠으며, 물안개에 싸인 채 희미하고 느릿하게, 적어도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한에서는 전혀 형체의 변화 없이 절벽 위에서 낙하하고 있는 시냇물도 마찬가지였다. 급커브 길목에서 버스가 몸체를 돌릴 때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까마득한 협곡을 내려다보았는데, 계곡 아래에는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이 운전기사 괼이 모는 170 디젤 자동차를 타고 처음 티롤 지방으로 소풍을 왔던 날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의 완전한 결정체로 내게 각인되었던 페른슈타인의 호수와 사마랑거 호수가 암녹색 수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167-168쪽.
안녕하세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군요.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이 읽어간 장 중 가장 마음에 들었음에도 감상을 남기진 않았네요. 다음장을 읽어야겠단 마음에 별다른 생각을 두지 않아 적어두신 댓글만 읽어보았습니다.
귀향을 읽어가면서 왜 귀향일까 의문을 품으며 읽어갔습니다. 사실과 기억의 불일치와 모호함이 귀향의 과정을 통해 유년시절 기억을 더듬어 나가며 이를 극대화 하는 것일까 싶었습니다. 귀향을 통해 만나거나 떠올리는 여러 인물들이(특히 람보우세크 박사) 스탕달, 카프카, 제발트 자신을 겹쳐놓는 것과 다르지 않은 같은 궤에 놓인 사람들이(자신이 속한 공간 혹은 시대에 소외된) 아닌가 싶더군요. 그의 시선이 닿는 인물들은 ’구석구석 깔끔하게 치워지고 반듯하게 정돈된 땅 독일, 모든 것이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방식으로 평화로우면서도 마취된 듯이 무감각해보인‘ 을 느낄 수 있는, 즉 현기증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 겠죠.
읽어가며 교차하는 지점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채로 책을 다소 버겁게 읽어간 점이 아쉬웠습니다. 가령 책에 등장하는 여러 그림들과 기록들에 대해서도 무언가 계속 놓쳐버리고 읽고 있다는 생각을 멈추기 어렵더군요.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은 어느 책을 읽든 그렇지 않나 싶어요. 어떤 의미나 주제를 읽어내야겠다는 접근보다는 작가가 펼쳐보여주는 풍경을 느긋하게감상하듯이 읽으면 더 좋으리라고 봅니다.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4부 끝 ~⟨귀향⟩] 4부의 이야기 구조는 간단합니다. 1987년 이탈리아의 베로나에 머물던 '나'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중간 경유지로 고국의 고향땅 'W'를 잠시 들르기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말했듯 '나'의 유년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걸쳐 있었고, 뒤늦게 고향땅을 찾은 '나'는 유년이 모종의 역사적 비극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30년 전 고향 W를 떠날 당시에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던 위화감의 원인을 비로소 알게 되는 구조로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그것은 "지금 이 뒤늦은 귀향이라는 현실에서 눈앞에 펼쳐진 마을은 세상의 다른 어떤 장소보다 내게 낯설게 다가왔다"는 감상에서도 잘 읽힙니다. 이때 귀향 경험 전반에 깔린 모티프는 결국 카프카의 ⟨사냥꾼 그라쿠스⟩입니다. 4부에서 '나'는 카프카의 단편 속 사냥꾼과 비슷한 인물을 자신의 유년 속에서 다시 발견하고 소환해냅니다. 이때 '나'가 기억하는 유년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지 아닌지는 모호해집니다. 과거는 현재의 논리로 재편된 어떤 꿈과 같은 기억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의 과거는 지나간 시간, 고정불변한 지난 날이 아니라 미래만큼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거를 이미 지나간 것, 다 알지는 못해도 잘 아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어느 철학자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기도 하며, 그 말은 제발트의 역사적인 산문을 논할 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W를 다시 찾은 '나'에게 고향 지인인 루카스는 무슨 이유로 다시 고향을 찾았느냐고 묻는 장면에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과거에서 끌어올린 그림들을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것들이 과연 내가 기억한 대로 흘러갔던 것인지가 더욱 모호해질 뿐이라고, 왜냐하면 과거에 속한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또한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최소한 경악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쪽) 그렇다면 이제는 왜 하필 하고 많은 카프카의 단편 중 ⟨사냥꾼 그라쿠스⟩가 작품 전반에서 큰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그 대답은 ⟨사냥꾼 그라쿠스⟩의 한 대목으로 가능할 듯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장은 그라쿠스의 불행한 죽음에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물었고, 죽은 시체인 그라쿠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무도 제가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을 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저를 도우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저를 도우라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모든 집의 모든 문이 닫힌 채로 있을 것이며, 창문들도 모조리 닫혀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침대 속에 누워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쓸 것이고, 이 지구는 온통 캄캄한 한밤중의 숙소일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저에 관해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제가 체류하는 곳을 모를 것이고, 설령 체류하는 곳을 안다 하더라도, 저를 그곳에서 붙잡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어떻게 하면 저를 도와줄 수 있는지 그 방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은 일종의 병이니, 병상에서 치료받아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저는 알고 있으므로, 비록 예컨대 바로 지금처럼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주 강하게 소리 지르고 싶은 순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도움을 청하려고 소리를 지르지는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몰아내는 데는, 사방을 둘러보면서 제가 어디에 있으며, 이런 주장을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수 세기 전부터 거주해 온 곳이 어디인가를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카프카, ⟨사냥꾼 그라쿠스⟩(현대문학) 중.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로써 『현기증・감정들』이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모임은 30일부터 『캄포 산토』로 이어집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안그래도 카프카의 <사냥꾼 그라쿠스>가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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