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발트 읽기] 『현기증・감정들』 같이 읽어요

D-29
시집 『자연을 따라 기초시』에 이어서 소설 『현기증・감정들』을 읽습니다. ※ 책은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각 제목은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입니다. 일주일에 걸쳐서 한 부분씩 읽을 예정입니다. ※ 한 시기가 끝나면 [#소감] 말머리를 달고 제 짧은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 이전에 제가 열었던 모임을 열어보시면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테니 참고해주세요. (제가 혹시 난해하게 말하거나 오타쿠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는 걸까요···? 저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피드백을 주셔도 됩니다.) ※ 안 읽고 얘기하셔도 좋고 아는 척 하셔도 좋고 생판 딴 얘기하셔도 좋습니다. ⏤참여 인원과 무관하게 12/28에 시작하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1차 시기 시작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오늘부터 1월 2일까지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을 읽습니다. 오래간만에 제발트의 소설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앙리 벨이 스탕달의 본명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읽어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1차 시기 열겠습니다:)
벨은 주장하기를, 그 당시 자신은 오직 시민계급적 능력 계발에만 초점을 맞춘 완전히 잘못된 교육 탓으로 열네 살 소녀의 내면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 길가에 수도 없이 널브러져 죽은 말들과 군대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 그런 전쟁쓰레기들을 보면서 너무나 경악한 나머지,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노라고 쓰고 있다. 눈에 들어온 실제의 인상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추상적 이해력이 무너져내린 것 같다는 것이다. 아래의 스케치는 벨이 속해 있던 부대가 포화에 휩싸인 바르 요새와 마을 인근을 지나갈 당시를 생생하게 되살려 그린 것으로, 그는 이 그림으로 현실감각을 되찾고자 했던 것 같다. B가 가리키는 것은 바르 마을이다. 오른편 언덕 위 세 개의 C는 바르 요새의 대포로, 가파른 비탈 P 위로 뻗어 있는 길 L L L을 겨냥중이다. 깊은 계곡 아래 지점 X에 쓰러져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공포에 질려 손쓸 새 없이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쳐서 죽은 말들이며, H는 이 광경의 묘사자인 앙리 자신이 원래 있던 위치를 가리킨다. 물론 그 지저메 있었다면 벨은 이 장면을 실제로 관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실과 기억은 전혀 다르다. ⏤본문 11-12쪽.
소설에서 앙리 벨은 계속해서 모종의 불일치를 경험하고, 그 때문에 현기증을 앓습니다. 여기서 불일치란 자신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목도한 광경과, 후일 그 경험을 재현한 재현물(혹은 기억) 사이의 간극처럼 읽힙니다. 자신의 짤막한 스케치로도, 글로 포착한 묘사로도, 그림으로도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느낍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인사만 전하다 책을 읽지 못하는 상황이 올까봐 인사를 미뤄뒀네요. 잘부탁드립니다. [#1차 소감] 책 시작 전에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기존에 스탕달 책을 단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배경이 없이 그의 생애 일부를 구현? 허구? 로한 글을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읽어가면서도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에 담긴 벨의 이야기가 작가로써 출발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준 시기로 보이지만, 실제로 스탕달의 작품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제발트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벨의 생애가 의도적으로 편집되고 취사 선택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계속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이후에도 계속 저를 괴롭힐 것 같아 이 점을 바깥에 두고 읽어가기로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앙리 벨이 스탕달의 본명이라는 사실은 몰라도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벨이 작가라는 점, 나아가 자기 삶을 질료로써 삼은 사람이라는 점, 나아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글이 게오르그 제발트라는 구체적인 또 한 명의 작가의 시선에서 쓰여지고 있다는 점만 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 모든 것들을 잘 드러내는 멋진 문장이 26쪽에 나옵니다. "그녀는 이어서, 고작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페트라르카가 불행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렇게 벨에게 물었다고, 그는 썼다."
(20-21p) 그런데 지금 과거의 전장에 직접 서 있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여기저기에 삐죽이 솟아 있는 죽은 나무 몇 그루,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일만 육천 명의 군인과 사천 마리 말 백골이 밤이슬에 젖은 채 번들거리며 평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뒹구는 광경뿐이었다.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전장의 풍경과 실제 그 전투가 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눈으로 목격한 전장 풍경의 차이가 너무나 컸으므로, 예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모종의 현기증, 어떤 광적인 감정이 그를 엄습했다. 아마도 바로 이런 이유로, 전장에 서 있는 기념비가 극단적으로 조그맣게 보였을 것이라고 그는 썼다. 초라하고 흐릿한 기념비는 마렝고 전투를 상상할 때마다 그를 장악했던 요동치는 광폭함과도, 마치 멸망으로 침몰하고 있는 한 인간처럼 홀로 서 있는 이 끝없는 시체 들판의 광막함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마렝고 전투를 언급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후대 사람인 제가 당대의 사람들이 마렝고 전투를 어떻게 바라봤을지에 대한 것은 오로지 짐작 뿐이겠으나 프랑스 혁명이 처음으로 전쟁에 대해 신화와 전사자 숭배를 시작하고, 혁명적 이념을 전파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무장했기 때문에, 특히 군복무에 참여한 이들에겐 전장은 벨과 같이 ‘현기증’을 느끼는 장소는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자부심과 국뽕?의 상징으로만 느꼈을지도요. 그렇지만 벨은 이 곳에서 ‘현기증’을 느꼈고, 이 차이가 그를 작가로 만들어 준 건 아닐까 싶었네요. 앞서 언급해주신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이 차이는 벨이 매진한 사랑의 형태에서도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현기증‘을 느끼는 것은 모두가 가능하지 않음에도, 그는 차이를 좁히려 부단히 애쓰지만 매번 어긋나고 결국 이뤄내지 못했죠. 마담 게라르디는 리바 항구의 음산한 마주침을 쉽게 잊어버리고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이기에 벨과의 거리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사람이었겠지만요. p.s) 청년 벨이 그렇게도 감정적으로 동요한 오페라 <비밀결혼>이 어떤지 보고싶어지더군요. 찾아봐야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1차 시기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2일이 아니라 4일까지 읽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착오가 있었네요. 저는 『현기증・감정들』을 오래간만에 다시 읽었는데요, 다시 읽으면서 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꼈어요. 몇 번을 다시 봐도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1부는 크게 두 가지로 부분으로 나눠서 보았습니다. 하나는 현실과 허구를 가름하는 어떤 회색지대를 벨이 응시하면서부터 작가가 되기를 다짐한 부분이고, 나머지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마담 게라르디와 떠난 여행기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당연히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겠죠. 전반부에서 벨은 현실과 재현물, 사실과 기억,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일치를 느끼고, 그러한 불일치에서 현기증을 느낍니다. 처음에 앙리 벨은 혈기왕성한 젊은 장교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일치하지 않는 생소한 느낌, 불만족스러운 기분을 계속해서 느낍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벨은 위대한 작가가 되기를 다짐하고요. 이후에 마담 게라르디가 나오는 부분은 짧은 분량임에도 뜯어보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녀는 이어서, 고작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페트라르카가 불행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렇게 벨에게 물었다고, 그는 썼다." 복잡다단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보았어요. 벨의 여행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발트는 벨의 작품 속 주인공들과 현실의 벨을 구분하지 않고 서술합니다. 벨과 벨의 작품 속 화자를, 마담 게라르디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숱한 여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서 설명합니다. 저에게는 의도적으로 작가와 화자의 층위를 나누지 않고 서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읽다보면 마담 게라르디가 마치 실재하는 인물이 아닌가 싶은 착각감이 듭니다. 일단 1부는 이정도로 하고 바로 2부로 넘어가면서 차차 얘기해보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2차 시기 ~⟨외국에서⟩] 4일부터 11일까지 8일 동안 2부를 읽습니다. 곧바로 '나'로 들어가는 도입부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읽다보면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갑자기 어느 인물이 말하고 있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문장을 인용하면서 2부 시작하겠습니다.
약 한 시간 정도 수도 빈의 남서쪽 교외, 드문드문 흩어진 크고 작은 주거지들의 불빛이 스쳐가는 창밖의 광경을 내다보다가, 빈에서 정처도 없고 끝도 없이 걸어다니던 암울한 기억들이 빠르게 달리는 기차와 함께 멀어져간다는 사실이 진통제와도 같은 효력을 발휘하여 잠이 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잠이 든 사이 창밖은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고, 나는 잠이 든 채로 그날 이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어떤 풍경을 보았다. 풍경의 아랫부분은 다가오는 밤의 어둠에 거의 잠겨 있다. 들판 사이로 난 길에서 한 여인이 유모차를 밀며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곳을 향해간다. 그중 한 채는 다 허물어져가는 시골 식당 겸 여관인데, 삼각 지붕 아래에 커다란 활자로 요제프 옐리네크라고 적혀 있다. 지붕들 위로 숲이 우거진 둥그스름한 산봉우리 비슷한 것이 솟아 있다. 저녁빛을 등지고 오려낸 듯 날카로운 윤곽을 드러낸 사물들의 선명하고 검은 테두리들. 그와 반대로 저멀리 지상의 가장 높은 곳에는 불그스름하게 이글거리는, 투명하게 빛나는, 화염을 내뿜으면 불꽃을 타닥거리는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최후의 빛을 받으며 공중을 향해 솟구쳐 있었고, 하늘에는 형용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회색과 장밋빛이 섞인 구름 조각이 흘러다녔으며, 그 사이로 얼음행성들과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50-51쪽.
안녕하세요. 2차시기를 대화하고자 나타났습니다. 현실과 꿈, 환각이 모호한 만큼이나 <외국에서>를 읽고 느낀 저의 인상과 물음들을 펼쳐 보이기가 쉽지 않네요. 정리되지 못한 헛소리의 나열을 펼칠 것 같으니 이해부탁드립니다.
세상에는 참 여러가지 소설이 있고, 지금 읽고 있는 제발트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읽은 것, 감탄한 부분을 다 오롯이 글로써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느끼고 감탄한 바를 정직하게 표현할 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신 혼란 또한 이 책을 통해서 얻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편하지 않을까요? 약간 샛길로 빠지자면 저는 요즘 의류 산업에 관심을 두고 여러가지로 공부해보고 있는데요, 이따금 패션쇼를 보면 '왜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옷을 만들지?' 싶고 집중도 안 될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그 분야에 좋아하고 깊이 아는 사람의 눈에는 여러가지가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지금 이 소설도 마찬가지일거라고 봅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소설의 세계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되는 계기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해보면, 뭔가 조금씩 보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왜 이런 방식으로 산문을 전개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은 이러합니다. 제발트는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시기에, 그러니까 독일 전역에 패망의 기운이 드리워졌을 시기에 태어난 세대이며, 전범국으로서 전후 독일의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년을 보낸 작가입니다. 이후 모임에서 읽을 계획인 『캄포 산토』라는 산문집에 보면, "표현력을 모조리 마비시키는 경험들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적 형식을 찾아"내려고 한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아마 제발트가 이런 방식으로 산문을 쓴 데는 독일 바깥을 떠돌던 망명자이면서, 망명국의 언어가 아닌 독일어로 글을 썼던 제발트의 개인적 경험이 녹아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요약하자면, 제발트는 기존의 익숙하고도 관성적인 언어나 서사 구축 방식과 단호히 결별함으로써 저나름으로 외부인의 시선에서 독일을 반성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제 추측이고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셔도 좋아요.
2차 시기 시작에 앞서 적어주신 인상깊은 구절 역시 저도 인상적이었는데요. ‘나는 잠이 든 채로 그날 이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어떤 풍경을 보았다’ 라는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화자는 여행을 하며 수많은 풍경들을 관찰하고, 경험을 하지만 그가 그런 행위 속에서 표현한 최대치는 <xx이 ‘한동안’ (기억에)남아있었다.> 정도입니다. 그가 여행을 통해 평생 기억하게 되는 것이 여행에서 보고 겪는 일이 아닌 꿈이라는 점이 이 장에서 눈에 띄게 다가오더군요. 이 꿈 이외에 다른 꿈들 역시 마치 화자가 깨어있을 때 겪는 감각의 결과물처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아무 생각없이 읽다보면 꿈을 기술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헤메게 되더군요.
꿈 뿐만 아니라 종종 등장하는 환각은 실제와의 구분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종종 등장… 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사실 어떤 것이 환각인지 실제인지는 더 이상 저는 파악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화자가 ‘확실하게 붙잡고자 하는 장면들의 테두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머릿속에 피어나는 모종의 생각들은 내가 채 인식하기도 전해 와해되었다(37-38p)’,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에 있는 것인지 그 너머 다른 세계를 서성이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중략) 밀라노라는 어휘가 배어 있는 모든 장소는 내게 무기력 상태의 비통한 반영, 그 이상 어떤 것도 아니었다(p113).’ 처럼 저 역시도 읽어가면서 같은 상태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 거렸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확실히 떠난 이들이 스쳐지나가는 것과 카프카의 청소년기를 닮은 쌍둥이 형제들. 화자를 쫓는 두 남자.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어 좀 더 책을 읽어가고 싶습니다. 앞서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에서 마담 게라드니와 벨이 함께 본 은색 단추가 달린 검은 옷차림의 두 남자가 들것을 운반 중이고, 들것은 커다란 꽃무늬의 천으로 덮여 있던 그 모습을 화자 역시 보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화자가 여행을 하며 ’보았다‘고 표현하는 모든 일이 다시 말해 ‘현재’가 과거로부터 왜곡되고 편집되기도 했을 경험과, 어딘가로 부터 읽어내고 익힌 장면들의 재현은 아닐까 싶어지더군요.
무튼 저는 무언가를 제대로 읽어가고 있는건지? 의문 속에서 몽롱한 기분으로 읽어갔기 때문에 많은 말들을 적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서 저자가 벨과 벨의 작품 속 화자를 의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서술했다는 점과 <외국에서>에서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서술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역시도 저는 유념해서 읽어가지 못한 부분이라 더 이야기 해주셨으면 하고 바라 봅니다.
예컨대 소설에서 '나'라고 쓴다고 해서 그것을 '소설가'라고 단번에 지칭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영화에서 감정을 배설하듯이 말하는 주인공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시나리오 작가의 말이거나 감독의 감정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래서 모든 소설에서는 '화자'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그것을 소설가와 명확하게 구분하고, 소설가들은 이러한 층위를 무척 예민하게 인지하고 활용합니다. 그런데도 본문에서 제발트로 추측되는 화자는 (앞서 말한 '층위' 같은 건 전혀 모른다는 듯이) '앙리 벨'이라는 실존 인물이 쓴 소설 속 주인공을 '벨'이라고 부르고, 비슷하게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을 모두 '마담 게라르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섞이면 안 되는 작가-화자-인물 같은 층위가 뭉개지고 있는 것처럼 저는 읽었습니다. 하나 더, 더욱 재밌는 점은 후대 사람들의 추측에 따르면 앙리 벨은 작가 스탕달이라는 실존인물인 반면 '마담 게라르디'는 실존인물이 아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 구조를 보면, 현실의 청년 '앙리 벨'이 작가 '스탕달'이 되어서 '마담 게라르디'와 만나는 이야기가 되는 이상한 방식의 혼동이 일어납니다. 한발 멀리서 보면, 이상하고도 괴이한 에피소드처럼 읽힙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히도록 본문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구글에서 제발트에 대해 찾아봤더니 "제발트는 주로 폐허, 잔해, 황량, 망각, 쇠락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혹은 곧 사라질,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들에 대한 독백 같은 것들이다.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미래는 결국 소실이거나 망각의 대상이다." 이렇게 나오네요. 독일의 작가군요. 저한테는 좀 어려운 책 같이 느껴지지만 그믐 덕분에 알게 되어 흥미로움을 느끼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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