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이스터섬의 수수께끼는 워낙 다양한 논쟁이 오래도록
있어왔던걸로 알고 있고,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선설을 지지하는터라.. 진짜 식인 행위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휴먼카인드에서 다뤄졌던 긍정적인 추론을
더 믿고 싶었어요.(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잘 안납니다.)
6-2
p293~294
태평양 섬들은 세계의 어느 지역들보다 늦게 인류가 정착
한 곳이다. CE 900년경 가장 동쪽에 있는 라파누이
(Rapa Nui)(이스터섬)로 사람들이 이주했다.(중략)
라파누이는 인구 과잉 때문에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CE 1500년경
이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고, 식인 행위
까지 했다.
[그믐북클럽] 1. <빅 히스토리> 읽고 답해요
D-29
바닿늘
바닿늘
6-1
전반적으로 문명이 출현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
저는 꽤나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진짜 그랬을 것 같았거든요. )
물론 여러 근거를 가지고 추론하는 것 뿐이겠지만..
특정 조건이 되었을 때 비슷한 발전패턴을 보였다는
점이 특히나 흥미로웠어요. 내용 전개 패턴이 점점
흥미롭게 흘러갑니다. 뒤로 갈수록 재미있어져요.
제가 현대인이라 그렇겠지요. ^^;;
바닿늘
7-1
근현대, 중세,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세계사에 대해
알게 된 다음에는 메소포타미아 관련된 책들을 읽으려고
생각중입니다. 시중에 많이 나와있는걸로 알고 있는데요.
괜찮은 책 있으면 미리 추천좀 받을 수 있을까요?
관련 영상도 환영입니다.
권력을 갖게 되면 뇌 구조가 변한다는 가설이 있던데..
역사에서 증명이 되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ㅎㅎ;;;
어쩔 때 역사에서 보면.. 국가끼리의 경쟁이 애들 싸움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스스로 '우주의 왕'이라니 ... ㅡ.ㅡ;;;;
지구 정복의 꿈을 실제로 가졌었겠죠?? ㅎㅎ;;
7-2
p311
아카드의 사르곤이 건설한 제국이 BCE 2150년에 무너
지자 혼란기가 찾아왔다. 그 뒤에 바빌론인 정복자 함무
라비 (재위 BCE 1792∼BCE 1770)가 바빌론을 수도로
제국을 건설하여 통제력을 회복했다. 함무라비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문 법전을 선포하고 자신을 '세계 네 지역
의 왕'으로 부르며 권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세계'의 부유
함은 팽창하려는 욕망을 지닌 외부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p312
아시리아의 마지막 대왕 아슈르바니팔(BCE 668~BCE
627)은 함무라비보다 훨씬 넓은 땅을 다스리는 자신을
'우주의 왕'으로 칭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그믐클럽지기
****8장 읽기****
지금까지 쌓인 우리들의 대화 숫자는 정확히 349개입니다. 책 한 권을 읽으며 나눠주신 생각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의견과 질문과 감상이 있습니다. 같은 챕터를 읽어도 멤버들마다 밑줄 그은 부분이 다르고 인상적인 부분이 다릅니다. 이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또 쏠쏠합니다.
미세먼지가 심한 요 며칠인데요, 바깥 활동이 아쉽긴 합니다만, 실내에서 차분하게 독서로 지루한 겨울을 이겨내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모두 건강 조심하세요.
12일과 13일, 이틀 동안은 여덟 번째 장을 읽겠습니다.
새벽서가
8-1. 인도양과 지중해, 실크로드등을 통해 넓어진 교환망이 인간사회의 집단 학습의 힘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각각의 사회/문명이 상호작용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아랍상인들이 로마의 숫자대신 인도의 숫자 시스템을 사용하게 된것처럼 말이죠. ‘0’에 대한 개념이 인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아랍권에서 나왔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릴때는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라고 배웠으니까요. 실크로드를 통해서 좋은 것만 퍼져나간건 아니었더라구요. 병균이 옮겨져서 많은 사상자를 내는 일도 있었어요. 실크로드의 기원은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에 이르기까지 수평으로 길게 뻗은 건조 지대가 활용이 되었고, 유목 생활방식덕분에 출현된것이네요. 작년 이맘때 Peter Frankopan 이 쓴 The Silk Roads: A New History of the World 를 구입해서 읽다가 끝맺음을 못했는데, 빅히스토리를 끝내고 나면 이 책도 꼭 마무리지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0-500 BCE 기간동 안 고대 문명지의 사회 트랜드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집트였어요. 이집트의 여성은 메소포타미안 지역의 여성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나은 대접을 받고 기회도 더 많았다는 점이요.
메롱이
8-1
- 농경 문화에 의한 계층 구조가 사회 시스템을 경직시키는 과정을 다루면서 인류 역사의 절반이었을 여성을 조명한 부분이 절묘하네요.
8-2
- 341/농경 문명은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영토 너머로 뻗어 나갈 때 외부와 결합하며 더 큰 연결망을 형성했다.
- 345/인도의 숫자, 특히 인도인들이 창안한 0이라는 개념은 복잡한 계산을 더 빨리 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전 세계로 퍼졌다.
- 351/그전까지는 부처를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한 예술품이 없었고, 모래에 찍힌 발자국이나 우산 등으로 상징했다. 부처의 모습을 최초로 묘사한 예술품은 지금의 파키스탄인 간다라에서 나왔다.
- 345/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는 천일야화라고 알려진 아랍의 이야기 모음집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들 중 상당수가 인도에서 기원하여 인도양을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페르시아로 퍼졌다고 주장한다. 원래의 이야기는 단순했지만 이슬람의 땅으로 전파되면서 페르시아와 아랍의 이야기들이 추가되어 세계문학사의 위대한 혼성 작품집 중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다.
- 355/BCE 2000년 이후 인구밀도가 증가한 인류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더 복잡한 방식을 고안해야 했다. 빅 히스토리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복잡성이 사회적 과정에도 나타났다. 농경 문화의 계층 구조는 부, 직업과 인종의 지위 인식 차이, 성별을 토대로 가파르게 경직되었다. 그 시대가 끝날 무렵 대부분의 사회가 경직된 계층구조와 가부장제로 편제되어 있었다.
- 360/인더스 다산의 여신이 후대 힌두 여신들의 원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미노스 어머니 여신이 고전기 그리스 종교의 여신 아테나, 데메테르, 아프로디테 등에 영감을 주었을 수 있다.
- 361/당시 인도에서 불교가 큰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의 비밀을 브라만만 아는 것이 아니고 모든 카스트 구성원이 해탈하여 구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포용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 개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상인들이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고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전파하는 데도 기여했다.
- 364/아테네는 여성의 혼인 연령이 14~15세인 반면, 스파르타는 18세였다. 아테네는 여성의 재산 소유를 금지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많은 여성이 재산을 소유했고, 대부분 가정을 관리했다.
- 372/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농경 문명 지배층은 상업과 농업 분야의 혁신에 반대했다. 생산성을 높이는 쪽으로 자원을 투입하면 성과가 불확실하거나 실패할 수 있고,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려면 오랜 세월 기다려야 하므로 정치적으로 보면 소용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거북별85
8-2
344쪽 당시 아프로, 유라시아 여러 지역의 교역망과 관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단길 이었다. 다양한 집단과 문화가 교환하는 정보와 생각은 변화를 촉진하는 주요 원동력이다. 농경 문명 시대 초기에는 규모가 작았던 교환이 커지면서 증진된 집단 학습은 물질적, 예술적, 사회적, 정신적 영역을 크게 바꾸었다. 아프로, 유라시아의 많은 지역과 연결된 비단길을 통한 문명 간 접촉도 중요한 집단 학습을 낳았다.
348쪽 한나라가 서쪽의 이웃 나라들과 교류하며 장거리 상업활동을 시작하자 소규모의 지역적 교역이 드넓은 범아프로, 유라시아 교역망으로 탈바꿈했다. 한나라 무제는 장건을 중앙아시아로 보내며 외교와 탐사 임무를 맡겼다. 장건은 무려 12년 동안 탐사하고 돌아와서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한나라의 물건을 갈망'하고 있으므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무제를 설득했다. ~한나라가 서쪽 이웃나라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지 반세기 뒤 로마에서는 약 100년간의 내전이 끝나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잡았다. 서아프로,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고 로마에서는 사치품, 특히 비단 같은 이국적 직물과 향신료 수요가 급증했다.
355쪽 함무라비왕이 커다란 돌에 새긴 282건의 판례법은 바빌로니아의 사회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다.~"눈에는 눈""골절에는 골절"을 요구하는 평등주의적 조항도 있지만 처벌은 당사자의 부와 지위에 따라 달라졌다. ~ 함무라비 법전은 두 권력 유형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통치자는 한편으로는 모든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받아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엘리트의 지원 덕분에 권력이 유지되므로 그들을 더 보호해야 한다는 현실을 잘 인식한다. 이 긴장은 계속 되풀이 되었다.
357쪽 인더스 문명의 사회적 계층구조는 BCE 제 3천년기 말에 자리 잡았다. 이 구조가 1500년 뒤 카스트제도가 출현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인더스 도시국가의 엘리트들은 하층 계급으로부터 공납을 받았고 장인들은 토기와 도구를 제작했으며 상인들은 국가 안팎의 교역을 맡았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주거지들을 보면 부자와 빈자의 생활 방식이 달랐다. 엘리트는 방이 12개까지 있고 안마당도 여러 개인 다층 대저택에서 살았다. 가난한 이는 비좁은 방 한 칸짜리 셋집에서 살았다. 모든 주거지에는 잘 설치된 지하 하수 처리 시설로 오수를 내보내는 샤워기를 갖춘 개인 욕실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363쪽 성별 관계에 관하여 한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교육 능력과 학식에 힘입어 많은 제약을 극복하고 유일한 여성사관으로 임명된 반소가 쓴 '여계'다~반소는 "예기"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여성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방법은 교육이라고 주장하고 남녀에게 동인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366쪽 성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가부장적 로마 가족을 비판적으로 해석한다. 교육 수준과 상관없이 여성이 사실상 가정에 갇혀 있었고 모든 지위가 남성만의 것이었으며 남성이 아내에게 지루한 집안일을 관리하도록 '허용'한 것은 공무에 바빠서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로마의 비엘리트 여성들은 다른 압력도 겪어야 했다. 당시 유아 사망률이 출생아 1000명에 약 300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인구를 계속 늘리려면 로마 여성이 평균 5.6명을 출산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엄연한 통계는 농경 문명 시대에 세계의 여성이 처한 상황의 핵심이다. 주된 역할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었고 사회에 새로운 일꾼, 병사, 시민을 꾸준히 공급해야 했기에 여성은 생애의 대부분을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370쪽 CE 8세기에 고대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까지 진출한 칼리프 치하의 무슬림은 그 지역의 많은 문화 풍습을 받아들였다.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성이 외출할 때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풍습이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 상류층 여성도 얼굴을 가리고 남성 보호자를 동반해야 외출할 수 있었고 평소에는 집에서 지내야 했다. 아이가 자기 자식이 맞다고 확신할 방법을 찾던 무슬림은 이 풍습을 금방 받아들였고 법에도 규정했다.
372쪽 농경 문명 시대의 성장과 혁신 속도는 현대의 기준으로 무척 느렸다. 왜 그랬을까?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들 때문이다. 중요한 장벽 중 하나는 혁신을 저해하는 느린 성장을 한한 지배적 경향 자체였다. 결실을 얻기까지 100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혁신에 투자할 이유가 있을까? 그 대신 정부는 군사적 팽창으로 공납을 받는 쪽으로 나아갔다. 두 번째로 중요한 장별은 주기적으로 도시와 소도시에서 창궐한 질병이다. ~ 가장 중요한 장벽은 국가들의 대다수 엘리트가 군사력을 동원하여 공납을 받는 쪽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농경 문명 지배층은 상업과 농업 분야의 혁신에 반대했다. 생산성을 높이는 쪽으로 자원을 투입하면 성과가 불확실하거나 실패할 수 있고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려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므로 정치적으로 보면 소용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거북별85
8-1
1. 한나라 무제와 장건이 연 1차 비단길 시대는 규모가 작은 교환을 물질적, 예술적, 사회적, 정신적 영역의 집단 학습으로 더 확대시킵니다. 중국은 이미 수천년 전 부터 인류에 참 여러 영향을 미친 나라라 대단하다는 생각과 이런 대단한 유산을 가진 나라가 오늘날 보이는 모습이 좀 낯설어 왜일까 궁금해지네요.
2.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이라는 평등주의적 조항이 보여 통치자는 모든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상적 가치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엘리트의 지원 덕분에 권력이 유지되므로 그들을 더 보호해야 한다는 현실을 더 잘 인식해서 처신해야 하는 통치자의 모습이 수천년이 흘러도 변함없다는 사실도 재미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이러한 정치적 속성을 좀더 현명하게 바라보고 자신들의 처지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국민들을 위한 교육은 없을까 고민되네요.
3. 성역사학자들의 여러 시대에 따른 여성에 관한 내용도 재미있습니다. 한나라 때 반소가 남녀에게 동일한 교육을 주장한 것을 보면 수천년 째 이어지는 성의 불평등 해소에 교육이 도움이 되는 중요한 방법이 아닐까 싶네요. 농경 문명 시대에 여성은 그 사회의 새로운 일꾼을 낳고 길러야 했기에 생애의 대부분을 집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남성의 자기 자식이 맞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남성 보호자와 동반해야만 외출을 할 수 있었구요. 농경 문명 시대에 사회에 필요한 시민을 공급한다는 역할이 없었다면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은 나아졌을까요?? 농경시대에 여성들의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들은 또 어떤 요인들이 있었을까요?
4. 농경 문명 시대 성장과 혁신의 속도가 느린이유도 아주 와닿네요. 농경문명 지배층은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결과가 불확실하거나 실패할 확률이 있는 혁신보다는 남의 자원을 빼앗는 공납의 형태를 더 선호해서라는 사실도 아주 흥미롭고 동감합니다. 통치자들의 DNA는 수천년 째 비슷한가봐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쉽게 남이 생산한 것을 약탈하는 공납의 형태보다 느리더라도 모두 성장할 방법을 찾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혜안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지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그믐클럽지기
8-1. 8장에서 흥미로웠던 점이나 새로 알게 된 사실 등 지금 함께 읽고 있는 다른 멤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알려주세요.
8-2. 8장에서 밑줄 그은 문장을 적어주세요.
호디에
8-1
넓어지는 교환망은 자연 세계 및 서로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인간의 능력을 강화하여 집단 학습의 힘을 증폭시켰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단위가 문명이라고 보았다면, 이후에는 세계체제론을 개척했는데 문명들의 상호작용과 연결에 초점을 맞췄다.
최근에는 '인간망'이라는 개념이 대두됐는데, 이 개념은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인류가 크거나 작거나 느슨하거나 꽉 짜인 망을 이루었으며, 역사학자는 역사를 현대성으로 내몬 상호작용과 교환, 협력, 경쟁을 이 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농경 문명 시대를 빅 히스토리 관점에서 분석하는 이 책도 세계체제론과 진화하는 하나의 인간망이라는 개념에 토대했다고 밝힌다.
비단길의 기원을 보면,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에 이르기까지 수평으로 길게 뻗은 건조 지대를 활용하는 유목 생활 방식이 수천 년에 걸쳐 출현했다. 유목민이 혹독하고 건조한 아프로.유라시아 내륙에서 번성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며 물품, 예술, 종교, 문화 등 다른 생활 방식과 공동체들을 연결했다. 궁극적으로 유목민은 비단길을 비롯한 연결망이 번성하도록 해준 교역과 교환의 촉진자이자 보호자 역할을 했다. 이 부분은 어느 책으로 읽든 인상적이다. 환경에 따른 삶의 방식에 불과했던 유목 생활이 인류에 끼친 변화를 따져보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발걸음에 책임을 느끼게 된다
육로 및 해상로 비단길은 농경 문명 시대의 문명 간 연결의 핵심 사례다. 교류의 결과, 아프로.유라시아의 역사는 공통의 기술, 미술 양식, 문화와 종교, 질병과 면역에 이르기까지 근본적 통일성을 띠기 시작했다.
성별 복잡성에 있어서는 이집트를 제외하면 대체로 여성과 남성의 지위가 동등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컸던 스파르타조차도 엘리트 남성의 통제를 받았다는 점에서 크게 차별되지는 않는 것으로 읽힌다.
농경 문명 시대의 성장과 혁신 속도는 현대의 기준으로 무척 느렸다. 이유는 성장을 원치 않는 지배적 경향과 질병, 무엇보다 대다수의 엘리트가 상업이나 농업 분야의 혁신보다는 군사력을 통한 공납을 받는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생산성이 인구 증가에 비례하지 못했고, 그와 더불어 인구 감소나 교역 및 인프라 건설 및 문명의 쇠퇴가 반복되면서 농경 문명 시대에는 멜서스 주기가 되풀이 되었다. 멜세스 주기는 고대에도 예외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ㅡ 눈에 띄는 점
1. 1차 비단길 시대의 쇠퇴가 로마제국과 관련있다.
2.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머리와 몸을 가려야 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등장한 이 문화 관습을 이슬람을 비롯한 다른 문화들이 채택했다.
▶ 기억에 남는 부분들입니다.
호디에
8-2
p344
당시 아프로.유라시아 여러 지역의 교역망과 관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단길이었다. 다양한 집단과 문화가 교환하는 정보와 생각은 변화를 촉진하는 주요 원동력이다. 농경 문명 시대 초기에는 규모가 작았던 교환이 커지면서 증진된 집단 학습은 물질적.예술적.사회적.정신적 영역을 크게 바꾸었다. 아프로.유라시아의 많은 지역과 연결된 비단길을 통한 문명 간 접촉도 중요한 집단 학습을 낳았다.
권열
8-1.
비단길로 중요한 문화적 교환이 이뤄졌던 과거사를 보면서, 현대의 연결망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 어떤 장벽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의 망 환경에서 각 국가별로 서로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걸까요. 물질적 교환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엄청나게 서로 주고 받고 있는데, 문화적 교환은 무제한의 공간임에도 그만큼의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 드네요. 종교만큼의 큰 범주의 영향은 모르겠으나 다양한 문화 컨텐츠들과 (논문 등 을 포함한)지적 교류들은 무작정 무시할 수 없겠죠. 자국을 언제나 타국과의 비교로 놓고 상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의 측면도 있을테고요.
또한 느리게 성장하는 이유가 국가가 군사적 팽창으로 공납을 얻어내는 방향으로만 해결한 채로,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결국 이는 자본가라는 개인에 의해 시작하게 된 점인데 ’미래를 위한 투자‘ 라는 이 흔한 인식이 과거에는 쉽지 않았나봅니다. 수렵채집인과 농경인을 비교해보면 당장의 사냥이 아니라 농사의 과정도 심어서 재배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미래를 위한 투자‘에 가까운 것인데, 아무래도 몇년, 몇십년이 소요되는 미래보다 상대적으로 꽤나 가까운 미래였기 때문에 농업을 주 생산으로 의존했음에도 미래투자 개념이 생겨나지 못했던 것일까요. 상업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야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을까요. 귀족층의 산업과 상업 투자의 시작은 유행처럼 번져나간 것이었을까요.
8-2
(372p) 공납을 받는 사회에서는 부를 쌓으려면 남의 자원을 빼앗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뭉네 지배층은 대부분 전쟁으로 성장의 문제에 대처했다. 성장은 자국 내의 생산성을 높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남이 생산한 것을 약탈하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이 인식은 그 시대의 특징인 정복을 통한 팽창과 지속적인 전쟁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혁신에 투자하려는 동기가 거의 없었던 이유도 설명해준다. 군사력에 대한 투자는 활발했지만 말이다. 그 결과 오랫동안 생산성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고, 번영은 인구 감소, 도시 탈출, 교역 쇠퇴, 건설 중단, 문명의 몰락으로 끝나곤 했다. 혁신의 속도가 느렸던 농경 문명 시대에는 맬서스 주기가 되풀이되었다.
느려터진달팽이
느리게 성장하는 이유로 약탈 ㅋ 만 신경썼지, 미래를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ㆍㆍ 이 대목이 저릿하게 아프네요. 눈앞의 것만 급급하며 긴 안목을 가지지 못했던 걸 회개?합니다 ㅠ
리브
8-1
8장에서는 다양한 공동체들이 어떻게 진화했고 어떻게 현대 세계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아프로ㆍ유라시아에서 일어난 3가지 추세( 아프로ㆍ유라시아 농경 문명들의 교환망, 사회적ㆍ성별 복잡성 진화, 느리게 변화하고 성장한 이유)를 다루었습니다.
* 비단길을 통해 물품만이 아니라 지적ㆍ영적ㆍ문화적ㆍ생물학적ㆍ기술적 사상들도 오고 갔네요. 특히 무형의 교환인 인도인들이 창안한 0이라는 개념, 대승불교 전파, 질병과 역병의 전파가 인류 역사의 형태와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군요.
* 혁신과 성장이 느린 이유로 혁신보다는 공납을 선택했다고 하네요. 자국 내의 생산성을 높이기 보다는 전쟁을 통한 약탈을 택한 것이죠. 또 다른 이유로는 질병 확산이었다고 하는데 지배층이 아닌 사람들은 이래저래 삶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 BCE 제2천년기 이집트 여성들이 많은 법적 권리를 누렸고 파라오가 되어 국가를 통치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아테네와 스파르타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8-2
p.347
유목민들이 성공하기 전에는 농경 문명 들이 격리되어 있었다. 궁극적으로 유목민은 비단길을 비롯한 연결망이 번성하도록 해준 교역과 교환의 촉진자이자 보호자 역할을 했다.
P.355
농경 문명의 계층구조는 부, 직업과 인종의 지위, 인식 차이, 성별을 토대로 가파르게 경직되었다. 그 시대가 끝날 무렵 대부분의 사회가 경직된 계층 구조와 가부장제로 편제되어 있었다. 도시와 인구가 계속 성장하면서 수메르에서 처음 나타난 사회적 성별 추세도 강화되었고, 이 현상은 3000년 동안 이어졌다.
p.363
반소는 이상적인 여성이라면 4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다운 미덕, 여성다운 말, 여성다운 태도, 여성다운 일'이다. 여성은 정숙하고 삼가며, 안 좋은 말을 하지 않고, 몸과 의복을 깨끗하게 하고, 험담을 피하고, 술과 음식을 차리고, 길쌈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소는 [예기]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여성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방법은 교육이라고 주장하고 남녀에게 동일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동광동
8장
작년에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를 읽었는데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위시한 여러 이론들이 세계가 본격적으로 상호연결된 시기를 1400년대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는 데 비해, 그 책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세계가 교역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렇게 통합적인 관점으로 세계사를 봐야 한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치더라구요. 『빅 히스토리』에서도 초기 농경 시대에도 상당한 수준의 연결망으로 인류가 상호작용하고 있었다는 논지를 펴고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이 책은 아프로·유라시아를 비롯해 여러 세계 지대에서 나타난 농경 문명들과 그들 간의 상호연결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어서 프랑크가 그토록 비판했던 '유럽중심주의'의 문제를 어느 정도는 비켜가는 것 같은데요. CE 1000년 이후의 히스토리는 어떻게 서술이 될지도 무척 궁금해지네요.
343 최근 존 맥닐과 윌리엄 맥닐은 인류 상호작용의 연결망이라는 개념을 재정립하여 '인간망'이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이들은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인류가 크거나 작거나 느슨하거나 꽉 짜인 망을 이루었으며, 역사학자는 역사를 현대성으로 내몬 상호작용과 교환, 협력, 경쟁을 이 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세계 체제 이론가들처럼 맥닐 부자는 세계사를 분석하려면 초기 농경시대의 '성기고 국지적인' 망에서부터 대규모 농경 문명의 '조밀하고 상호작용하는 대도시망'을 거쳐 현재의 '전자화한 세계적 망'에 이르기까지 커진 연결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경 문명 시대를 빅 히스토리 관점에서 분석하는 이 책도 세계체제론과 진화하는 하나의 인간망이라는 개념에 토대했다.
354 육로와 해상로 양쪽의 비단길은 농경 문명 시대의 문명 간 연결의 핵심 사례다. 지구에서 가장 혹독한 지역도 지나며 고난을 겪어야 할 때가 많았던 길을 따라 상인과 모험가, 외교관과 사절들이 상품과 사상을 전파했다. 중요했던 교역품들은 세계가 인류 역사의 다음번 위대한 혁명인 근대 혁명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데 기여했다. 많은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결과는 종교, 특히 불교 전파였다. 이 시기에 전파된 불교는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핵심 이념적·영적 신앙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아시아인 수억 명을 문화적으로 결속하고 있는 불교는 현대 세계가 비단길에 빚진 많은 유산 중 하나다. 교류의 결과, 아프로·유라시아의 역사는 공통의 기술, 미술 양식, 문화와 종교, 더 나아가 질병과 면역에 이르기까지 근본적 통일성을 띠기 시작했다.
370 BCE 2000~CE 1000년경 아프로·유라시아 농경 문명들의 사회적·성별 관계는 여러모로 복잡했다. 우루크에서 처음 나타난 전문화, 상호 의존, 사회적 계층구조는 당대의 대도시와 국가에서 더 뚜렷해졌다. 재산, 집단, 직업, 성별에 토대한 차별이 깊어지면서 엘리트가 권력과 성문법으로 하층 구성원들에게 강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경직된 사회구조가 정착했다. 이 상황은 평등주의와 페미니즘에 토대한 정치 이념들이 등장하여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정치적·사회적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지혜지
8-1. 오늘날의 사회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희생당했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오래 고착화된 문화는 변화하기 더욱 쉽지 않죠.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공부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8-2. “농경 문명과 그중 상당수의 중심부를 이룬 대도시는 교환과 집단 학습을 자극했다.”
“농경 문명 시대의 특징인 지속적인 전쟁은 떨어져 있는 농경 문명들을 연결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교역할 의향이 없는 나라들은 무력으로 굴복시켜 교역하거나 조공을 바치게 할 수 있었다.”
토끼풀b
8-1.
중고등학교때 공부했던 것들이 대부분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주관식 시험에 꼭 나왔던것만 같은 몇몇 단어들은 기억 나는데 그 중 하나가 '실크로드(비단길)' 이예요. 이렇게 다시 한번 공부했으니 앞으로는 단어뿐 아니라 내용들까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으면…
'세번째 추세:사회적.성별 복잡성 진화' 부분은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으려구요-_-
8-2.
P372~373 공납을 받는 사회에서는 부를 쌓으려면 남의 자원을 빼앗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지배층은 대부분 전쟁으로 성장의 문제에 대처했다. 성장은 자국 내의 생산성을 높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남이 생산한 것을 약탈하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이 인식은 그 시대의 특징인 정복을 통한 팽창과 지속적인 전쟁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혁신에 투자하려는 동기가 거의 없었던 이유도 설명해준다. 군사력에 대한 투자는 활발했지만 말 이다. 그 결과 오랫동안 생산성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고, 번영은 인구 감소, 도시 탈출, 교역 쇠퇴, 건설 중단, 문명의 몰락으로 끝나곤 했다. 혁신의 속도가 느렸던 농경 문명 시대에는 멜서스 주기가 되풀이되었다.
띠에리
8-1
도시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남녀 차별이 극심해지는 것이 드러나네요. 전족이 송나라 때 등장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청나라 시대의 풍습인줄 알았거든요)
366p에서 인구를 늘리려면 로마 여성이 평균 5,6명을 출산해야 했다는 의미다. 결국 주구장창 출산만 해야하는 바람에 사회 참여의 기회를 잃고 가부장의 소유로 집안에서만 지내야하는 처지가 공고히 이루어진 것 같아 씁쓸합니다.
다른 장에도 나왔고 365p에도 나온 부분인데요. 로마 파트에서 '마지막 에트루리아 왕을 몰아낸 후' 대목이 조금 어색합니다. 마치 에트루리아가 로마를 지배한 것 같은 뉘앙스로 쓰여서요. 에트루리아 출신 왕이라 구분해야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8-2
당시의 대도시를 별에 비유할 수 있다. 별과 비슷하게 주변 공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대도시는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실체였고, 그 중력은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주변의 소도시와 마을은 행성과 달처럼 대도시 주위를 맴돌았다. 대도시는 주변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생각, 물품, 혁신, 사람을 끊임없이 끌어들었다. 농경 문명과 그중 상당수의 중심부를 이룬 대도시는 교환과 집단 학습을 자극했다. (342p)
통치자는 한편으로 모든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받아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엘리트의 지원 덕분에 권력이 유지되므로 그들을 더 보호해야 한다슨 현실을 잘 인식한다. 이 긴장은 계속 되풀이되었다. (356p)
당시 인도에서 불교가 큰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의 비밀을 브라만밀 아는 것이 아니고 모든 카스트 구성원이 해탈하여 구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포용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 개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361p)
오후
8-1. 비단길이 당시 교역 뿐 아니라 문화와 종교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의미(농경 문명 시대의 문명 간 연결의 핵심 사례)를 지니는지 몰랐습니다. ‘비단길의 기원, 1차 비단길 시대, 1차 비단길 시대의 쇠퇴, 2차 비단길 시대’을 차례로 읽어나가는 동안 ‘비단길’이라는 단어가 생물인 것처럼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농경 문명 시대의 성장과 혁신 속도가 현대의 기준으로 무척 느렸던 세 가지 이유를 분석한 ‘세 가지 장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8-2. p.372 공납을 받는 사회에서는 부를 쌓으려면 남의 자원을 빼앗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지배층은 대부분 전쟁으로 성장의 문제에 대처했다. 성장은 자국 내의 생산성을 높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남이 생산한 것을 약탈하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이 인식은 그 시대의 특징인 정복을 통한 팽창과 지속적인 전쟁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혁신에 투자하려는 동기가 거의 없었던 이유도 설명해준다.
메이플레이
8-1
인구밀도가 증가한 인류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더 복잡한 방식을 고안해야 했는데 사회적 성별 추세도 강화되며 성인 남성 중심의 권력으로 편제됨으로 성별에 따른 이중 기준이 자리 잡음을 보여주네요. 이렇게 남여의 이중 기준에 차별받는 여성의 모습이 안타깝고 화가 나게 만드네요. 하지만 BCE195년 로마의 오피아법 반대하는 여성의 저항에 통쾌함이 느껴지네요. 이런 여성의 저항이 누적되어 또 다른 사회의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과 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과거의 여성의 저항이 오늘날의 변화를 이끌어 왔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8-2
농경 문명 시대 아프로, 유라시아의 노골적인 성차별에 한방 먹이는 사건이 BCE 195년 로마에서 터졌다. 오피아법(여성이 금, 은 장신구 착용이나 값비싼 옷 입는 것, 공개 장소엥서 전차, 가마 타는 것 금지하는 법)을 유지하려 하는 원로원에 엘리트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였다. ... 상류층 여성들은 이 법을 유지하려는 시도에 맞서 사살상 방역을 일으켰다. ... 여성들이 공공장소에 모였다는 사실에 분개한 대카토 등 보수적이 원로원 의원들은 이 문제는 남성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법은 폐지되었고 여성들은 승리를 축하했다!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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