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사냥꾼, 목동, 비평가』를 혼자 읽는 1인 모임입니다. 제목도 멋있고, 부제인 ‘디지털 거대 기업에 맞서 인간적 삶을 지키는 법’에도 관심이 많아서 골랐습니다. 344쪽짜리 책이라 하루에 12쪽 가량 읽으면 한 달이 좀 안 걸릴 것 같습니다. 특별히 감상 적지 않고 그냥 밑줄만 치면서 읽을 거 같네요. 전자책으로 읽기 때문에 따로 페이지 수는 표시하지 않을게요.
『사냥꾼, 목동, 비평가』 혼자 읽기
D-29
장맥주모임지기의 말
장맥주
[이러한 모든 발전은 자연법칙이 아닌 사고와 경제 활동의 특정 방식, 즉 효율적 사고에 따른 결과이다. 인간이 모든 생산물에서 항상 돈을 불리는 것만 목표로 삼는 것은 결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인류는 르네 상스까지 전반적으로 본성에 어긋나게 산 셈이고, 지금도 세계 일부 부족들, 예를 들어 이투리족이나 마사이족, 필리핀 망얀족은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비용과 이윤의 산정은 14세기와 15세기의 이탈리아 상인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도 문화가 되었다. 중세만 해도 사람들은 길드의 정체적인 질서 체계와 고정 가격, 가격 흥정밖에 알지 못했고, 활력과 변화, 진보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품었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에 대한 변화는 배척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교회 권력자는 그러한 변화를 사악하고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으려고 많은 공을 들였다. 돈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탐욕은 죄악으로 여겨졌으며, 이자는 금지되었다. 물론 교황과 군주들은 그런 규칙을 번번이 어겼음에도 시대의 주도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진보가 아닌 〈현상 유지〉였다.]
장맥주
[오늘날 우리가 제4차 산업 혁명으로 경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15세기에 어음 발행 및 대부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시작된 논리를 따르는 셈이다. 물론 이 논리를 주도 문화로 만든 것은 산업 생산과 대량 생산의 발명이었다. 이후 효율성과 능률, 최적화는 우리 경제의 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석유와 석탄 같은 화석 연료를 사용하고, 순간을 위해 소진한다. 이 순간은 새로운 어제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최종 단계를 모르고, 항상 자신이 극복해야 할 새로운 한계만 안다. 그런데 물리적 세계의 물질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재료도 자본주의에는 자원이 된다. 적어도 제2차 산업 혁명 이후 우리는 시간을 돈으로 여긴다. 포드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명확하게 보여 준 것, 즉 생산 과정에서 시간의 가차 없는 통제는 오늘날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된다. 시간은 측정되고, 우리가 낭비해선 안 될 소중한 자산으로 부상한다. 효율적 사고, 또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W. 아도르노 같은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구적 이성〉은 가차 없는 사용 논리를 따르고, 이 논리는 갈수록 점점 무자비해지고 빠르게 나아간다.]
장맥주
[두 번째 분야는 인간이 미래에도 실제 인간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직업군이다. 유치원과 학교 교사를 로봇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는 것은 분명 언젠가 기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결국 불가능하다. 다정한 목소리로 서로 말을 주고받고, 타인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다. 이것은 사회 복지사, 보호 관찰관, 치료사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또한 호텔 프런트 직원, 휴가지의 엔터테이너, 매력적이고 수완 좋은 판매원, 조경사, 인테리어 디자이너, 미용사 같은 직업도 기계로 대체되기 어렵다. 우리의 건강과 관련된 영역도 다르지 않다. 대학 병원과 무선으로 연결된 스마트 손목 측정기는 분명 당뇨병 환자의 생명을 지키고 구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을 차고 있는 사람의 혈압을 매 순간 의사보다 더 믿을 만하게 측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육체적·심리적 상태에 대해 말하고 싶은 인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얼굴이 빨개지거나 당혹스럽게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않으면서 우리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외모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잘생기거나 예쁘지 않아도 우리를 받아 주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의사가 기계에 우위권을 내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책임감 측면에서는 여전히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의 〈가정의〉가 미래에는 정말 우리의 라이프 스카우트 Life Scout가 되어 줄지 모른다. 우리의 집으로 찾아오고, 우리의 생활권을 잘 알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우리를 보살펴 주는 사람 말이다. 여가, 휴양, 건강은 앞으로도 좋은 인력에 대한 수요가 높은 영역이다.]
중간에 참여할 수 없는 모임입니다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